<산너머 남촌에는> 드라마를 꼭 챙겨 본다. <전원일기> 후속격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농촌 드라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류의 드라마를 좋아해서 사람들이 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인 적도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보고 있으면 마음 한켠부터 데워지는 느낌이 좋다. 사실 쇠락하는 농촌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다루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대가족과 지척의 이웃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지속적으로 소재화하는데 농촌이라는 지역적 배경이 주는 이점덕분에 이런 드라마들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는 것같다.

 

지난 주 바지락을 넣은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장염도 아닌 것이 식중독도 아닌 것이 그 묘한 경계에서 무척 고생했다. 계속 오한이 나서 일단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드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친정 신세를 좀 졌다. 일요일 아침 모처럼 아침 준비를 좀 뒤로 하고 이 드라마를 봤다. 종갓집 종손은 이혼하고 두 번째 연애에서도 상대 여자에게 실연을 당한다.  직장 회식 자리에서 겉옷도 나둔 채 무작정 택시를 타고 연인이 일했던 유치원의 닫힌 문을 두드리며 절규하는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의 다독임이 감동적이었다. 이 한심한 자식아, 여자 하나 때문에 이게 뭐냐? 라고 면박을 주는 대신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안는다. 자신은 왜 매번 사랑에 실패하냐는 아들의 자학에 아버지는 "너는 인연을 실패라고 하냐."고 반문하는 아버지.

 

인연에 실패라는 말을 감히 갖다 붙이지 말라는 듯 책망하는 눈빛의 아버지의 모습. 갑자기 대학교 2학년 그 시간들이 떠.올. 랐. 다.

 

나는 과도한 수강 시청에 과도한 통학 거리로 매일 여섯 시에 기상해서 집에 오면 오후 일곱 시 가량이 되어 그 때부터 밤을 새우며 레포트를 작성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분량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과(무식하지만) 한번 레포트가 날아갈 뻔한 악몽 덕택에 플로피 디스켓에 이중 저장을 수시로 해가며 그러니까 종일 자판 두드리고 좀 자고 시간 쪼개어 지독하게 귀여운 초등학생에게 과외 교습을 하는 것이 대학생활의 태반이었다. 그 와중에 했던 소개팅에서 몇 번 만난 남자애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그 남자애는(물론 사귄 것은 아니었다) 몇 번 만나더니 슬쩍 예정되어 있던 어학연수 얘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뭔가를 해보려 했더니 뜬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몇 년을 만난 남자와 이별을 하는 것같은 절망을 느꼈다. 각박한 현실에 단비와 같았던 그 남자애에게 느꼈던 감정은 이제 정처 없었다. 그 남자애가 떠난다는 날, 나는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마냥 마음껏 슬퍼하고 대단한 사랑을 한 것처럼 과장되게 절망하고 싶었지만 쓰던 레포트를 마저 끝내야 했다. 마음의 결이 있다면 한 결, 한 결마다 피가 스미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슬퍼하고 힘들어할 상황도 아니었건만 그때는 미성숙한 식견과 요동치는 감정으로 세상 전부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오열하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방문을 닫았건만 아버지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보셨나 보다. 다음 날 아침 부은 눈으로 엄마 앞에 서니 엄마는 아버지가 출근하기 전에 잠깐 내려오라고 해서 내가 왜 이리 우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묻지 않고 엄마와 집에 있을 때 나의 상황을 알아 내려하지도 않고 조용히 밖에서 엄마를 일부러 불러내 나의 눈물을 걱정했다. 그런 은근한 관심과 지지가 고마웠다. 아마 아버지는 내가 왜 우는지 어렴풋이 아셨을 것같다. 무슨 청승이냐고 왜 우느냐고 닥달하지 않고 그렇게 넘어가 준 아버지.

 

자식의 사랑, 이성친구와의 결별, 혹은 짝사랑의 좌절. 이런 것이 자라고 나이 든 부모의 눈앞에서 폄하되지 않는 풍경이 눈물겹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의 실연은 사실 과소평가하기 쉽다. 게다가 그것이 나의 몸에서 나온 자식의 것이라면 그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아 더더욱 질끈 눈감아 버리거나 바라던 자식의 배우자상에 대한 훈계나 교시의 계기로 삼게 되기도 한다. 꼬맹이가 자라서 어떤 사랑을 하든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지지해 줄 수 있을까? 사실 인연의 어긋남은 그것이 다음 인연을 예쁘게 가꾸는데 자양분이 된다고 해도 겪지 않거나 조금만 아프고 지나갔으면 좋겠다. 이별은 언제나 너무 아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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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2-01-1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별'이 아니라 '이 별은'이라고 읽었어요.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별' 가끔은 미치도록 슬프거든요.

blanca 2012-01-13 22:06   좋아요 0 | URL
L.shin님 댓글이 더 멋지네요. 갑자기 강경옥의 <별빛속에> 만화가 생각나요.

cyrus 2012-01-1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복통이 많이 나으셨는지요? 겨울에도 음식 관리 잘 해야될거 같아요.
연애를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별은 슬프면서 아픈 것은 확실한 거 같아요.
누군가에게 고백을 해봐서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거든요 ^^;;

blanca 2012-01-13 22:08   좋아요 0 | URL
cyrus님 졸업하시기 전에 연애는 꼬옥 해보셔야지요. 아픈 추억도 지나고 나면 좋았던 기억만 남는답니다. 복통은 다 낫자마자 또 커피를 마시니 다시 재발의 조짐이... 내일부터 다시 위를 다스려야 할 것 같아요.

블루데이지 2012-01-1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 편찮으신건 좀 괜찮으세요?
저도 <산너머 남촌에는> 친정가서 봤어요. 아빠 생신이셨거든요..
그날 참 가슴찡한 내용이었어요^^아버지의 모습이 더 가슴 아프더라구요~
근데 페이퍼 계속 읽다보니 그 드라마보다 blanca님의 그때 그이야기가 더 찡하네요~~

blanca 2012-01-13 22:09   좋아요 0 | URL
아, 블루데이지님도 친정 가서 보셨어요? 찌찌뿡^^;; 그죠! 저는 혼자 막 눈물까정 흘렸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 눈물 그렁그렁한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참 가슴 뭉클하더라고요.

stella.K 2012-01-13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블랑카님 같은 미인과 사귀기 쉽지 않을텐데
그 남학생 누군지 참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능.ㅋㅋ
그게 참 그래요. 사람 만나고 이별하는 것도 큰 시간안에서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뭐 과소평가라기 보다 그 시간을 건너면 별 것 아닌 것인데
너무 현재의 슬픔에 집착하는 게 안쓰러워서 그런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블랑카님도 그 시간을 거쳐서 이만큼 살아오신 거잖아요.
<산너머 남촌에는> 이 드라마가 아직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해요.ㅎㅎ

blanca 2012-01-13 22:1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ㅋㅋ 그런 건가요? 아, 그런 면도 있지요. 젊고 어릴 때는 딱 여기, 이것 위주로 보고 느끼다 보니 크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신의 상황을 해석하기 힘드니까요. 그래도 저도 지나오고 느낀 것들을 그만큼 아이의 그것도 크고 소중하게 공감해 주고 싶은 소망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흑, 절대 종영하면 안 되는데 결방이 너무 잦네요.

moonnight 2012-01-13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집니다. 남자가 이게 무슨 꼴이냐. 하지 않고 인연을 실패라 하느냐고. 반문할 줄 아는 어른. 블랑카님의 아버님처럼,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는 어른이고 싶어요. 저도요.

blanca 2012-01-13 22:13   좋아요 0 | URL
이 드라마 작가에게는 놀라운 면이 있어요. 자주 메모하고 싶은 대사들이 있는데 정말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느껴본 사람 같아요.

비로그인 2012-01-1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요, 블랑카님.
왜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 사람이 물리적으로 먼 거리로 떠난다고 하면
그것을 정신적인 관계의 종결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이 그대로 상생할 수 있다고, 한의학 종사자와도 같이 생각하는 저는
늘 의문이었어요.

blanca 2012-01-13 22:1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그 땐 몰랐어요. 저도 바로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혹시 기다림과 마음고생을 지레 피하고 싶은 자기보호본능 때문은 아닐까요?

카스피 2012-01-13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농촌 드라마가 남아 있었나요? 이름도 못들어봐서 좀 신기하네요.
그나저나 플로피 디스켓 안쓴지가 꽤 오래되었네요.제 컴이 2006년을 얻어온 것인데(나름 최신형이죠.램 126메가^^)
이 컴에는 플로피 드라이브가 달려있어요.근데 요즘 나오는 최신형 맥미니같은 것은 dvd도 안달린다고 하는군요^^

blanca 2012-01-13 22:16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저의 연식을 들켰군요^^;; 맞아요. 이제 플로피 디스켓은 과거의 유물처럼 되어 버렸지요.

프레이야 2012-01-1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속 그 아버지의 대사가 참 찡하네요.
인연에는 악연은 없는 거라는 말로 해석해도 될까요.

블랑카님의 아버지, 그 큰 사랑을 읽으니까 저의 아버지도 생각이 나요.
내내 침묵하고 기다리며 지켜보다 한마디 묵직한 말로 구름이 싹 걷히게 해주시는..
영화 '정사'의 이미숙이 병실에 누워있는 친정아버지를 찾아가 웃으며 눈물짓던(마음속으로) 그 얼굴도 떠올라요.

blanca 2012-01-13 22:18   좋아요 0 | URL
구름이 싹 걷히게 해주시는 아버지. 그냥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프레이야님과 아버님의 단단한 끈이 느껴집니다. '정사'에 그런 씬이 있었군요... 요새는 자식한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나,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하게 되어요. 하여튼 생각이 많아지는 연초예요, 프레이야님.

꿈꾸는섬 2012-01-1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던 것 같아요. 직접 묻고 싶으셨을 때가 많으셨을텐데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주셨죠. 그땐 그게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인 줄 몰랐는데 돌아보니 그러네요.

blanca 2012-01-15 21:52   좋아요 0 | URL
재작년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작년부터는 부모님이 그런 묵묵한 사랑을 주셨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나이 드는 게 안 보인 것들을 하나하나 일깨우기도 하니 나쁘기만 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oren 2012-01-1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었을 때의 사랑과 이별의 고통은 정말 '그 무엇에도 바할 데 없는' 것이었음을 blanca님의 글을 읽으며 새삼 떠올려보게 되는군요. 그런데 blanca님께서는 (비록 눈이 퉁퉁 부어오를 만큼 오열하셨다고 하더라도) 밤새도록 태연히 레포트를 쓰셨다고 하시니 정말로 '성실한' 대학생이었다는 걸 미루어 짐작해볼 수도 있겠다 싶군요. ㅎㅎ
* * *

연애란 엄숙하고도 뼈아픈 것으로, 큰 환락과 고뇌가 따르는 까닭은 종족에 관한 커다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몇천 년 전부터 수많은 예를 들어 그것을 묘사했다. 이 주제는 종족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그밖의 어떤 주제도 더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 즉 개인과 종족의 관계는 물체의 표면과 물체와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사랑은 옛날부터 다루어온 진부한 것임에도 언제까지나 고갈되는 일이 없다.

(중략)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을 단념하는 일이 어떤 희생보다 크게 여겨지는 것도 납득이 된다. 영웅은 일상적인 일로 비탄에 빠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사랑의 비애에 대해서는 비탄을 억누르지 못한다. 이 경우 비탄에 빠지는 것은 본인 자신이 아니라 종족 자체이기 때문이다. 칼데론의 훌륭한 희곡 《위대한 제노비아》제2막에 제노비와 데시우스가 등장하여 데시우스가 말한다.
"아, 하늘이여, 당신이 날 사랑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백 번이라도 승리를 포기하겠소. 적진에서 도망쳐버리겠소."
여기서는 여러모로 이해타산적인 명예가 무시되고 그 대신 사랑, 즉 종족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명예와 의무, 그리고 충성은 지금까지 유혹이나 심지어 죽음의 협박에도 저항해 왔으나, 종족의 이해 앞에서는 고분고분 양보하고 굴복해 버린다.
- 쇼펜하우어, 『인생을 생각한다』중 '사랑의 형이상학' 中에서

blanca 2012-01-15 21:56   좋아요 0 | URL
지나고 보니 그렇네요. 성실하려고 항상 노력은 했던 것 같아요. 쇼펜하우어는 개인적인 사랑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국 다 종족번식의 사회적 책무가 프로그래밍화되어있는데 자기들이 개인 의지와 정념으로 사랑에 빠진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쇼펜하우어가 사랑의 비탄에 대하여는 절절하게 이해하고 공감한 줄을 몰랐어요. oren님 댓글은 언제나 지적이십니다.^^

마녀고양이 2012-01-16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그 남자분, 참 나쁘네요!
어학 연수 갈 계획이면서 소개팅을 하다니! 쳇.
그런데 말이죠, 저도 주드님이랑 같은 생각을 했어요... 어학 연수란게 기간이 긴 것도 아닌데
꼬옥 거리 때문에 이별해야 했을까? 머 이런..... 우린 어쩌면 이별을 사랑하는게 아닐까요?

흐흐, 엘신님의 말씀처럼, 이 별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구요!

blanca 2012-01-16 22:1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운 거예요--;; 이 별이란 말이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