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가 미군 PX에서 근무하던 시절, 가난한 무명의 화가 박수근을 만난 경험을 소재로 한 <나목>으로 마흔에 등단한 일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박완서 작가는 박수근 화가의 사후 사람들이 그와 그의 작품을 두고 벌이는 과열된 소동을 보고 생전 그가 받았던 대우, 겪었던 가난을 떠올리며 그를 제대로 증언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꼈다. 그 조용하고  성실하고 거창한 예술이 아닌 검박하고 처절한 생 그 자체에 복무했던 한 남자에 대하여 박완서 작가보다 더 생생하게 잘 그려낼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을 성싶다. 처음에는 논픽션으로 쓰려던 시도가 점차 소설로 확장되었고 이는 세상에 박완서라는 거장을 등장시키는 발판이 되어준다. 아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박수근 작가의 생전의 초상은 그렇게 세상에 공개된다. 스무 살 초입의 여대생과 중년의 화가의 만남은 그 둘이 이윽고 세상을 흔드는 소설가와 위대한 화가로 남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기에 더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후 극심한 가난과 자국 정부가 아닌 미군에 기대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그 위치를 공유해야 하는 처지에서 박수근은 화로 가득 차 있는 어린 여대생에게 소중한 것을 일깨워준다. 




















그럴 때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자애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사는 일의 악착같음 때문에 거의 잊고 지낸 자애라는 게 따뜻한 물에 언 몸을 담갔을 때처럼 쾌적하게 스미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기다렸다가 같이 퇴근을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린 그냥 을지로 입구까지 같이 걸었다. 둘이 다 전차를 탔지만 방향이 달라서 거기서 헤어졌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죽은 오빠를 대신하여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었던 박완서 작가와 줄줄이 식구가 딸린 가난한 간판장이였던 박수근 화가가 서로 이렇다할 말도 나누지 않고 조용히 을지로 입구까지 퇴근길에 걷는 그 풍경을 상상해 본다. 가난했고 때로 그 가난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둘은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애'를 공유했다. 훗날 이 시대의 거장으로 우뚝 서게 될 그 둘의 퇴근길의 동행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뭉클하다. 이 풍경이 사라지지 않고 박완서 작가의 섬세하고 절묘한 언어로 다시 길어 올려져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기억 속에만 묻어두었더라면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시대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비로소 부활한다. 


박수근 작가의 그림은 이제 평범한 사람들은 전시회를 통해서 가까스로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가치가 천문학적으로 불어났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전집이 간행될 정도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끝내 재회하지 못한 그 둘에 남은 것은 그러나 여전히 그 시절의 풍경들일 것이다. 가난했고 무명이었고 그럼에도 꾸는 꿈들이 있었던. 무명의 화가는 항상 화가 나 있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화가들에게 잔소리와 조언을 남발하는 여대생에게 말없이 자신의 화집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여태껏의 익명성으로부터 돌출되어 자신을 박수근으로 봐주길 요구하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동류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모두를 싸잡아 집단화해서 보던 편견에서 그 여대생은 비로소 사람 하나하나를 개별화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녀는 시대에 남을 작가로서의 소양을 키우게 된다. 


사진, 영상, SNS로 남을 이 시대의 부스러기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증언이 될 수 있을까. 이제 아무도 무언가를 제대로 기억하려거나 기록하려는 의지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동영상으로 채집하고 짧은 문구들로 갈음해 버리는 이 시대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남을지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발언은 누군가에게 큰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억으로 복원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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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12 14: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미 잘 알려져 있다˝고 쓰셨는데, 저는 감사히도 blanca님 페이퍼 통해서 [나목] 탄생 이면의 이야기를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대화하지 않고, 많은 대화 없이 함께 걸었던 을지로 도보...blanca 님께서 세세히 묘사하지 않으셔도 느낌이 풍성풍성~ 그 시절, 그 거리, 가난한 두 예술가의 모습 그림이 그려지네요. 역시 blanca님! 이달의 당선,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02-12 18:35   좋아요 3 | URL
알라알라님, 저는 그 풍경 그리니까 막 뭉클하고 울컥하고...온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여대생과 화가가 별 말 없이 조용히 을지로 입구까지 함께 걸어가는 풍경이요. 훗날 이 둘이 이렇게나 위대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로 남으리라고 그 당시 상상이나 했을까요? 막 날이 서 있는 어린 박완서에게 토닥토닥 박수근 화백이 줬던 위로와 그 자애로움이 막 전해져 오는 것 같아요. 결국 박수근 화가가 박완서 작가가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너무 놀라워요.

2022-02-14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4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2-02-15 11: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목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
작가가 마흔 살에 등단해서 예전 우리 문학 지망생들에게 많은 용기와 힘을 주었었지요. 우리도 늦지 않았어, 하면서...ㅋㅋ
요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흡인력 있어요.
소설도 산문에서도 참 훌륭한 작가입니다.

blanca 2022-02-16 09:03   좋아요 2 | URL
페크님, 저도 요새 간간이 박완서 작가님 에세이, 소설을 다시 읽기 하고 있는데 정말 명문이에요. 위대한 작가란 이런 거구나, 끊임없이 다시 읽어도 새롭게 읽히는...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scott 2022-02-17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작가님이 남기신 모든 작품은 잊혀진 지난 시절의 한국의 풍경, 전쟁, 피난, 가난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의 모습이 담긴 귀한 사료집 처럼 읽혀집니다

이번에 출판사에서 특별판을 출간 해도 이전과 똑같은 가격이여서
박작가님 자손들이 엄마가 남기신 작품에 큰 욕심을 부리시지 않은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훈훈 ^ㅅ^

blanca 2022-02-18 09:08   좋아요 2 | URL
증언의 욕구로 소설을 쓰셨다는데 그게 그저 증언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시대의 정리과 성찰로 나아갔다는 게 박완서 작가의 위대한 점인 것 같아요. 돌아가시기 몇 년 전 간 대학교 강연에서 몸이 안 좋으셨는데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던 학생들 사인공세와 사진 촬영에 다 응해주셨다는 에피소드가 참 뭉클하더라고요.

mini74 2022-03-08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와 박수근 ~ ㅠㅠㅠ정말 박수근 그림은 넘사벽 가격이지요. 당선 축하드립니다 ~

blanca 2022-03-08 21:15   좋아요 1 | URL
미니님 덕분에 알았네요. 감사해요.

그레이스 2022-03-08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blanca 2022-03-08 21:16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해요.^^

새파랑 2022-03-08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blanca 2022-03-08 21:16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잊지 않고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서니데이 2022-03-08 18: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blanca 2022-03-08 21:16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03-08 21:17   좋아요 3 | URL
이하라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