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우개 연습을 위해 그린 그림입니다.

머리카락과 옷의 털은 지우개를 이용한 표현입니다. ^^

출처 : http://cafe.naver.com/40084008.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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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만 봐도 장난이 아닙니다. 유머러스한 것이...  너무 재미있게 생겼네요.
  잘 읽겠습니다. 아마 모레부터 읽게 될 듯 싶네요 ^^ (독서 스케줄상) 
  

  싸인이 상당히 인상적이에요. 고구려 고분 벽화에 있는 말 같습니당. ㅋㅋㅋ


 

 

이제까지 싸인 받은 책이 딱 3권있었는데, 1권 추가요~

     이왕 하는김에 이 세권도 광고를 ㅎㅎㅎ

   좋은 책들이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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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8-0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말태웠소님이라구요? ^^ 새로운 분인줄 알았습니다..ㅋㅋ

마태우스 2005-08-1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말태웠소......... 내공만 높은 게 아니라 유머감각도.....&^
 

동물복제가 의미하는 것
2005년 08월 09일 | 글 | 신연수 동아일보 경제부 차장 ㆍysshin@donga.com |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그건 단순한 과학 이론이 아니었다. 수백 년간 서양인들을 지배했던 종교와 세계관을 뒤엎는 혁명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도 마찬가지다. ‘존재를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개념은 뉴턴 이후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오죽하면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처럼 과학은 본래 철학이자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열매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과학을 단지 생산력과 경제력을 높이는 도구로만 생각한다. 과학이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과학자들조차 인접 분야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과학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도 눈을 감는다.

근대 과학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선진국의 기술을 배워 경제 개발을 하기 바빴던 터라 과학의 다양한 함의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최근 생명과학의 발전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근본적인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생명을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인간과 다른 생명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애완견 복제에 성공했다. 한국의 생명공학이 이룬 성과에 감탄이 쏟아졌다. 황 교수는 이 기술을 질병 연구에만 사용하고 애완동물 복제에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애완견 복제 기술을 바이오 벤처 회사에 전수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예측이 벌써부터 나온다. 바이오산업으로 과학기술 강국을 앞당기자는 기대 섞인 의견도 많다. 이 민감한 기술을 ‘생산의 도구’로만 보는 시각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애완동물을 복제해 주는 회사가 생겼고 동물보호 단체들은 동물 복제 반대 모임을 결성하는 등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동물의 권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 자원 낭비가 초래할 재난을 우려해 채식주의자가 늘고, 가축을 키울 때도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며, 동물원에서도 철책을 없애는 추세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동물 복제의 의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토론이 없다. 동물이 대량 복제됐을 때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머지않아 인간 복제도 가능해지는 게 아닌지, 신은 인간에게 물리적 생물학적 변화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무조건 과학기술의 발전을 막는 것은 어리석다. 생명과학이 고도로 발전한 미래에는 생명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이 가져올 변화, 과학적 성과가 갖는 의미에 대한 논의는 좀 더 활발해져야 한다. 과학으로 달라지는 세상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철학이 있는 과학’을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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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8-0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을 무시하지 말란 말이얌... (쌩뚱맞게...)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이론과실천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말에 새겨진 의미는 언어를 뛰어넘어 현상을 반영하며, 문화로 형성되어, 역사에 새겨진다. 구조화된 의식으로 결정지어지는 것들은 이미 그 시작부터 운명적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들 속에도 자리잡고 있는데, 가령 여성에게 ‘도시적인 이미지가 풍기시네요’라고 하면 그것은 칭찬이 된다. 세련되고, 문화적 풍요로움을 달고 살며, 인텔리겐챠 또는 전문직 여성일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촌스럽네요’라고 하면 바로 짱돌이 날라 올 것이다. 촌스러움. 그것은 투박함, 인공미가 전혀 없는 비문명성이 흠뻑 젖어 있는 대표적인 단어 아닌가. 촌스러움에서 자연스러움의 의미를 철저히 떼어놓은 것은 도시인이고 문명인인 것을 보면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그들에게 분명히 존재한다. 시골과 도시, 야만과 문명의 관계는 언뜻 보아도 친밀함을 넘어서 태생적으로 같은 원류임을 느낄 수 있다. 배다른 형제, 그 둘의 출생의 비밀, 그리고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침 드라마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퇴폐적 진실의 가닥이 미궁에 빠질 것인가, 명명백백 밝혀져 낯부끄러움을 알게 해 줄 것인가. 흥미진진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역사의 투명한 거울이 되어 줄 것이다. 교과서로 삼아도 좋을 만큼 체계적이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훌륭하다.

이 책은 ‘시골과 도시’처럼 단항적이고 계급적 경계를 갖는 ‘야만과 문명(Savages and Civilization)’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어서, 한 눈에 문명 비평서임을 알아 볼 수가 있다. 너무나 일반적인 제목, 그렇다고 다른 책들과 비슷한 얘기를 반복할까?

문명비평서의 일반적인 주장들은 획일화 된 국제 사회의 브레이크 없는 전진과 확대를 경계한다. 공존의 가치를 지워버리고, 파괴적이고 무한한 욕망의 증가가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인데, 이 책도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촌스러움과 도시적 이미지의 상충은 갈등의 불평등 구조를 형성하고 파괴적인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화, 현대화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대중의 욕망을 부추기고 산업화의 동력으로 바꾸는 데에 일임을 한다. 이촌향도, 과밀화 된 도시는 끊임없이 확장하고 미개한 환경, ‘촌스러운’ 고장을 잠식하고 대증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결핍은 안정된 공급을 요구하고, 파괴는 새로운 파괴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Civilization 도시) 속의 야만(Savage 숲)에 대한 현대적인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부활을 의미한다. 모양만 바꾸면서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 세계에 걸쳐 문화는 왔다가 사라지지만 도시들은 거의 그 상태대로 지속된다. 정복자가 새로 나타날 때마다 외관을 바꾸고 때로는 이름까지도 바꾸지만…’ 198p.

그러나 이 책이 이와 같은 범주에 있다 하더라도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는 법.
버드아이 앵글로, 마치 창조주가 된 것처럼 인류의 역사를 유유히 훑는다. 마치 우유의 발효과정을 살피듯(치즈가 될 것이냐, 부패 할 것이냐), 시간의 흐름과 문화의 변형, 기술, 인간, 산업의 영향과 결과를 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미래’의 거울을 꺼내 놓는다. 그리고 야만이라고 불리던 인간, 문화가 얼마나 문명적이었는가, 그것이 현재의 인류에 끼친 영향력을 직접 곳곳을 다니면서 전해준다. 사하라, 남북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동남아 원주민, 중앙 유라시아 유목민 등 그들의 문화를 직접 느끼면서 역사의 진실을 찾는 과정은 시간의 여행자, 역사의 증언자로 나타나 책의 무게를 더한다.

지적 유희가 좋은 책이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것을 같이 보는 것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쿠르지가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이 고통스럽듯이, 나 또한 문명처럼 작용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은 점점 더 사전적 의미의 야만성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엔 문명이란 야만을 교묘하게 숨기기 위한 가면에 불과한 것이라고 자백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이미 문명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야만은 문명 내부에 자리잡았다. 문명은 야만을 만들고 북돋아 준다. 도시의 중심부는 새로운 변방지대가 되었다.’

문명은 한 가지 편의를 알려 줄 때마다 백 가지의 악을 감춘다. – 허먼 멜빌

커다란 변화는 커다란 희생을 동반한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는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다는 말이다.
농업은 야만이라는 것을 생산해 내었고, 기술은 자연을 오염시켰으며, 대서양의 항로가 열리면서 노예무역이 번창했고, 아시아로 가는 뱃길은 제국주의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핵에너지는 대량살상 무기가 되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지구의 구속력을 더욱 높여 가고 있다.
‘인간은 먹을거리를 놓고 개와 독수리들과 경쟁한다. 잘사는 곳에서만 그러한 맹금을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한 양의 음식을 내다 버릴 여유가 있는 것이다. 가난한 지역에서는 넝마주이들이 새들을 죽여버린다.’ 284p

요즘 갑자기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인기 없는 과학자들의 체세포, 유전자 복제, 조작에 대한 대중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다.
복제는 창조도 아니고, 번영도 아니다. 치명적인 자기 파괴로 이어질 것은 분명하다. 존엄성을 잃은 존재, 역동적인 생명을 잃은 가치에서는 영혼은 없다.
문명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잉카 문명의 유적은 우리가 앞으로 보여줄 문명의 잔해일 수도 있다. 그것은 과거이자 미래의 모습이다. 인류는 너무나 빠른 속도를 내었다. 사상누각!
쌓은 순간 만큼, 무너지는 것도 순간이다.
문명의 허기는 자일리톨을 먹으려는 충치의 끊임없는 흡수와 배설의 반복처럼 그칠 줄 모르는 탐욕만을 보여줄 뿐이다.
‘자연에서는 진정한 경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어마어마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경계를 만들고, 만들고 나면 더욱 커다란 노력을 들여 그 경계를 실체화하고 보호한다. 이러한 경계는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 민족, 인종, 민족성 등 거창한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뒷받침하고자 하는 것이다’ 4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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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8-2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리뷰 읽을때는 글쓰기가 조심스러워진다니까요.

라주미힌 2005-08-22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부족한 글에 대한 과찬을.. 책이 재미있습니다.
 

‘음란’ 과 폭력
[한겨레 2005-08-07 19:48]
[한겨레] ‘불륜’, ‘윤락’, ‘음란’이라는 말은 어감과 의미에서 모두 도덕적 판단, 즉, 명백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지만, 이 단어들처럼 탈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말도 드물 것이다. ‘윤락’은 성매매 구조에 대한 사회적 성찰은 없고, 성을 사는 남성에게는 면죄부를(‘윤락남’이라는 말은 없다), 파는/팔리는 여성에게는 도덕적 단죄를 주장한다. ‘불륜’이란 무엇일까? 인간관계 중 가장 치열한 권력 투쟁인 성과 사랑에서, 상대방을 착취하며 존중하지 않는 것이 윤리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형태의 사랑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가 윤리가 없는 것일까? 제도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랑은 무조건 ‘불륜’인가? 몇 년 전 ‘기러기 아빠’ 대학 교수가 ‘외도’로 인해 “교직원의 품위를 손상했다”며 파면당한 적이 있다. 숱한 성폭력 가해 교수가 여성들의 투쟁과 탄원에도 불구하고 거의 처벌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성폭력과 성매매 같은 범죄보다 ‘금지된 사랑’이 ‘품위를 손상하는 행동’인 것이다.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은 “프리섹스는 오케이, 성매매는 노”라는 말로, 성매매 반대의 정치학을 요약했다.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대개 포르노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를 정상화, 합리화하는 정치적 재현물이기 때문이다. 반대해야 할 것은, ‘음란물’이 아니라 폭력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폭력물은 무제한 허용하면서도, ‘음란물’, 특히, ‘성찰적 음란물’에 대해서는 낡은 칼날을 휘두른다. 지난 달 대법원은 미술교사 부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나체 사진에 대해 1심과 2심에서의 무죄 판결을 뒤엎고, ‘음란물’이라며 일부 유죄 판결을 내렸다. 시민사회와 여론은 “ ‘음란’ 여부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보다 중요한가”라며, 법원의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다. 나 역시 이번 판결이 ‘상식 이하’라고 생각하지만,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표현의 자유는 공동체의 민주주의와 창조성, 다양성에 기여하지만,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폭력의 자유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할 말은 하는’ 신문들처럼, (지배 세력의)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보장된 사회다.

나는 이번 판결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 문제라기보다는, 재판부의 ‘음란’의 정치학에 대한 무지와 그들의 획일화된 신체관이 더 염려스럽다. 미술교사의 작품은 외모가 계급이 되어버린 ‘몸짱’ 지배의 한국사회의 억압적인 몸 이미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인데, 재판부의 수준은 이를 ‘음란’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음란물’ 제작은 더욱 격려되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을 도배하고 있는 ‘쭉쭉 빵빵’한 젊은 여성의 누드는 ‘아름답고’, 배 나오고 처진(대부분 사람들의 몸) 벗은 몸은 ‘음란’한가? 여성 연예인의 누드 모바일 서비스 같은, 주로 여성이 대상이 되는 규격화된 몸 이미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여성들의 목숨을 건 다이어트와 몸매로 인한 열등감과 자기 비하를 생각해보라.

재판부가 ‘음란물’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몸에 대한 혐오에 기초한 성 보수주의 때문이다. 성 보수주의 사회일수록 성범죄 발생 비율이 높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나이든 사람 등 ‘성 소수자’들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는 ‘음란한’ 사회일수록 성숙한 사회다. 개개인의 몸의 해방이 민주주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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