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 과 폭력
[한겨레 2005-08-07 19:48]
[한겨레] ‘불륜’, ‘윤락’, ‘음란’이라는 말은 어감과 의미에서 모두 도덕적 판단, 즉, 명백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지만, 이 단어들처럼 탈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말도 드물 것이다. ‘윤락’은 성매매 구조에 대한 사회적 성찰은 없고, 성을 사는 남성에게는 면죄부를(‘윤락남’이라는 말은 없다), 파는/팔리는 여성에게는 도덕적 단죄를 주장한다. ‘불륜’이란 무엇일까? 인간관계 중 가장 치열한 권력 투쟁인 성과 사랑에서, 상대방을 착취하며 존중하지 않는 것이 윤리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형태의 사랑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가 윤리가 없는 것일까? 제도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랑은 무조건 ‘불륜’인가? 몇 년 전 ‘기러기 아빠’ 대학 교수가 ‘외도’로 인해 “교직원의 품위를 손상했다”며 파면당한 적이 있다. 숱한 성폭력 가해 교수가 여성들의 투쟁과 탄원에도 불구하고 거의 처벌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성폭력과 성매매 같은 범죄보다 ‘금지된 사랑’이 ‘품위를 손상하는 행동’인 것이다.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은 “프리섹스는 오케이, 성매매는 노”라는 말로, 성매매 반대의 정치학을 요약했다.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대개 포르노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를 정상화, 합리화하는 정치적 재현물이기 때문이다. 반대해야 할 것은, ‘음란물’이 아니라 폭력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폭력물은 무제한 허용하면서도, ‘음란물’, 특히, ‘성찰적 음란물’에 대해서는 낡은 칼날을 휘두른다. 지난 달 대법원은 미술교사 부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나체 사진에 대해 1심과 2심에서의 무죄 판결을 뒤엎고, ‘음란물’이라며 일부 유죄 판결을 내렸다. 시민사회와 여론은 “ ‘음란’ 여부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보다 중요한가”라며, 법원의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다. 나 역시 이번 판결이 ‘상식 이하’라고 생각하지만,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표현의 자유는 공동체의 민주주의와 창조성, 다양성에 기여하지만,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폭력의 자유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할 말은 하는’ 신문들처럼, (지배 세력의)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보장된 사회다.

나는 이번 판결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 문제라기보다는, 재판부의 ‘음란’의 정치학에 대한 무지와 그들의 획일화된 신체관이 더 염려스럽다. 미술교사의 작품은 외모가 계급이 되어버린 ‘몸짱’ 지배의 한국사회의 억압적인 몸 이미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인데, 재판부의 수준은 이를 ‘음란’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음란물’ 제작은 더욱 격려되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을 도배하고 있는 ‘쭉쭉 빵빵’한 젊은 여성의 누드는 ‘아름답고’, 배 나오고 처진(대부분 사람들의 몸) 벗은 몸은 ‘음란’한가? 여성 연예인의 누드 모바일 서비스 같은, 주로 여성이 대상이 되는 규격화된 몸 이미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여성들의 목숨을 건 다이어트와 몸매로 인한 열등감과 자기 비하를 생각해보라.

재판부가 ‘음란물’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몸에 대한 혐오에 기초한 성 보수주의 때문이다. 성 보수주의 사회일수록 성범죄 발생 비율이 높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나이든 사람 등 ‘성 소수자’들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는 ‘음란한’ 사회일수록 성숙한 사회다. 개개인의 몸의 해방이 민주주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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