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불꽃 보고, 누구는 인생에 불통 튀고...

일단은 멋지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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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10-26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져요----- *ㅂ*

이매지 2005-10-26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순간에 유람선에 타고 있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ㅋ

비로그인 2005-10-27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불꽃놀이! 분명 저번주 일요일이었을 거에요. 한강을 가로지르는 열차 안에서 술에 취해 괴로워하다, 잠깐 눈을 떴는데, 한강불빛이 모두 강물 속으로 쏟아지는 환상..나중에 알아보니 환상이 아니라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더라구요..흐흐..
 

 

구텐베르크와 조류독감

[편집장의 편지]

 

이윤삼 편집국장 yslee@sisapress.com

 

   
   
인쇄술 발명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책에는 출생 연도를 ‘1400년?’으로 기록한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그는 1394년에서 1404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구텐베르크가 1400년 6월24일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2000년 6월24일 독일에서는 ‘탄생 6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구텐베르크가 죽은 뒤 인쇄산업은 크게 발전했다. 당시 독일인들은 인쇄술이 독일적 기상과 창조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여겼다. 1890년 구텐베르크 출생지인 마인츠 시장이 나섰다. 탄생일을 기념하는 국제 행사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문제는 정확한 생년월일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학자가 동원되었다. 결론은 ‘탄생 연도를 알 수 없으므로 1400년으로 잡아도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날짜가 문제였다. 구텐베르크의 이름이 요하네스였으므로 세례자 요한의 축제일인 6월24일이 선택되었다. 1896년 마인츠 시장은 1400년 6월24일을 구텐베르크 탄생일로 삼아 국제적 축제를 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언론은 보도를 통해 이 계획을 지지했다. 마인츠 시장과 학자와 언론과 인쇄산업의 이해관계가 결합해서 새로운 탄생일이 결정된 것이다. 이때부터 마인츠와 구텐베르크 박물관은 구텐베르크 연구와 관광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구텐베르크 사후에 그에 대한 평가도 세상의 이해관계에 따라 많이 바뀌었다. 그는 이재 감각이 탁월한 ‘사업가’였다. ‘면죄부’를 인쇄해 돈을 벌었고, 전 유럽 시장을 겨냥해 표준 성서를 인쇄했다. 일생 내내 보수파로 교황을 지원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인쇄술은 종교개혁에 불을 붙였다. 결국 로마는 그를 ‘악마의 화신’이라고, 신교도들은 ‘신의 은총’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를 ‘뉴미디어의 선각자’라고 부른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모차르트 음악이 동식물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모차르트 효과’는 공교육에 불안을 느끼는 학부모와 언론, 음반사업자의 합작품이라는 연구가 최근에 나왔다. <헬스의 거짓말>이라는 신간은 헬스운동의 효과가 헬스 산업과 언론의 이해관계와 결합하면서 부풀려졌다고 주장한다. 세계적으로 포도주의 새 효능을 강조하는 연구들은 상당수가 포도주 산업계에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류독감에 대한 불안감이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위험성에 대한 대비와 치료제 비축량이 부족한 우리로서는 사전 예방을 위해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를 통해 위험을 과장한 부분은 없는지, 외신의 대대적인 보도가 치료약을 생산하는 제약회사와 관계는 없는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오리 닭 따위를 기르고 있는 농가와 가공공장과 식당들의 타격을 보면서 드는 절실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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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10-26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충알이 나온 김치에도 음모가? ㅎㅎㅎ

돌바람 2005-10-26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랑 같은 생각을... ㅎㅎㅎ

라주미힌 2005-10-26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레니엄 버그도 한참 시끄러웠었죠.. 다 그런거같아요...
짜고치는 고스톱... 돈 놓고 돈 먹기... 자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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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식 검색엔진 등장
대화를 통해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차세대 인터넷 검색엔진이 등장했다.

중국계 호주인으로 컴퓨터 언어학자인 차오훙량은 인공지능을 구비한 3세대 검색엔진 `렉스(www.lexxe.com)'를 개발, 시장에 선보였다고 홍콩 문회보가 25일 보도했다.

영어를 기반으로 한 렉스는 10개 안팎의 단어로 구성된 질문을 입력하면 곧바로 답이 나오게 된다.

렉스는 현재 이용자가 폭증, 잠시 폐쇄됐다.

차오훙량은 지난 2001년부터 언어계산학 기술을 바탕으로 컴퓨터 언어 연산 방식을 연구, 3년여만에 자체적으로 의미 식별과 문장체계 분석이 가능한 렉스를 개발해냈다.

기호계산법을 검색방식으로 채택한 구글식 2세대 검색엔진에 비해 렉스는 자연어 연산법을 적용해 검색 정확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차오훙량은 "언어 통계학을 이용해 동의어를 분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며 "현재로선 영어에 한정돼 있지만 곧 중국어 등 다른 언어에도 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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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짝사랑
박노자칼럼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이번에도 노벨 문학상이 한국 작가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국내에서 큰 아쉬움을 자아냈다. 마치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멀리서 번쩍이는 듯한 노벨상에 대한 ‘짝사랑’을 지켜보면서 이해되는 구석도 있다. 한국학을 국외에서 가르치는 필자의 처지에서도 노벨상을 한국 작가가 탄다면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노벨 광풍’의 분위기는 괜한 집단적인 기력 낭비로 보인다. 폭약 장사로 번 돈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사르트르처럼 거부하는 것이 더 작가다운 자세가 아닌가 하는 도덕적 문제는 제쳐두고, 한국 문학의 세계화 차원에서만 이야기해보자. 한국적 배경과 정서를 가지고 한국어로 창작을 하는 우수한 작가에게 이 상이 주어지기는 어렵고 그 어떤 국내 작가에게 주어진다 해도 이것을 한국 문학의 진정한 세계화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수상 결정을 좌우하는 서구의 ‘고급’ 지식인들이 비서구 문화를 감상하는 법은 무엇일까? 그 비서구 작품이 그들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접근이 쉬워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매혹적 이질성’을 보여야 한다. 예를 들어 서구의 신비주의 전통에 잘 연결되는데다 ‘깨침’ ‘공안’ 등 ‘동양의 지혜’라는 오리엔탈리즘적 관념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이질적인 용어를 구사한 스즈키 다이세쓰(1870~1966)의 선불교 관련 저서들은 한때 구미를 풍미했으며, 지금은 그 비슷한 역할을 달라이라마가 맡은 듯하다. 물론 포교의 측면에서는 비록 ‘원형’과 많이 다르다 해도 머나먼 지역의 주민들이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면에서 좋지만, 과연 서구인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저서에서 계급사회의 모든 차별과 폭력에 맞서고 재물의 축적을 비판한 붓다의 혁명정신은 살아 숨쉬는가? 한국문화가 꼭 이러한 방식으로 ‘가공·포장’돼서 서구 소비자들에게 팔려야만 하는가?

귀하신 몸(?)인 서구 소비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국 전통 등을 그들이 좋아할 만한 소비품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참된 보배들은 아무리 번역을 해도 저들이 쉽게 이해하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예컨대 현대 시인 김수영(1921~1968)의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라는 시구를 우리 세상의 쓴맛을 모르는 독자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풀이 민초들이고, 동풍이 억압자들이고, 울고 눕는 것이 총구·밥그릇 앞에서의 굴복이다”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두발 제한에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복종한 경험이나 불심검문을 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이 시를 소화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생각으로 시인 김수영이 20세기의 시성(詩聖)이지만,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서구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실존적 경험이나, 적어도 이에 상응하는 깊은 고민을 요구한다.

가난뱅이의 체취가 묻은 작품을 부자가 좋아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몸을 굽혀가면서 저들의 기호를 의식하고 거기에 맞출 필요가 있는가? 만약 김수영이나 김남주, 신동엽, 수많은 다른 민중·재야 시인들의 시를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중국이나 동남아·중남미 지식인들이 읽고 감동을 느낀다면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노벨상보다도 귀중한 것이 아닌가?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을 서구인들이 읽어도 나쁠 게 없지만 서술의 대상인 베트남이나 미 제국의 새로운 침략의 무대인 아랍 세계에서 읽혀진다면 훨씬 자연스럽고 나은 일이 아닐까?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약이 될 수 있다면 그 약은 아픈 사람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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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10-25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추천^^

수퍼겜보이 2005-10-25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추천~~

라주미힌 2005-10-2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역사와 감성을 저 정도로 깊숙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사람'들 중에서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