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짝사랑
박노자칼럼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이번에도 노벨 문학상이 한국 작가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국내에서 큰 아쉬움을 자아냈다. 마치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멀리서 번쩍이는 듯한 노벨상에 대한 ‘짝사랑’을 지켜보면서 이해되는 구석도 있다. 한국학을 국외에서 가르치는 필자의 처지에서도 노벨상을 한국 작가가 탄다면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노벨 광풍’의 분위기는 괜한 집단적인 기력 낭비로 보인다. 폭약 장사로 번 돈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사르트르처럼 거부하는 것이 더 작가다운 자세가 아닌가 하는 도덕적 문제는 제쳐두고, 한국 문학의 세계화 차원에서만 이야기해보자. 한국적 배경과 정서를 가지고 한국어로 창작을 하는 우수한 작가에게 이 상이 주어지기는 어렵고 그 어떤 국내 작가에게 주어진다 해도 이것을 한국 문학의 진정한 세계화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수상 결정을 좌우하는 서구의 ‘고급’ 지식인들이 비서구 문화를 감상하는 법은 무엇일까? 그 비서구 작품이 그들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접근이 쉬워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매혹적 이질성’을 보여야 한다. 예를 들어 서구의 신비주의 전통에 잘 연결되는데다 ‘깨침’ ‘공안’ 등 ‘동양의 지혜’라는 오리엔탈리즘적 관념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이질적인 용어를 구사한 스즈키 다이세쓰(1870~1966)의 선불교 관련 저서들은 한때 구미를 풍미했으며, 지금은 그 비슷한 역할을 달라이라마가 맡은 듯하다. 물론 포교의 측면에서는 비록 ‘원형’과 많이 다르다 해도 머나먼 지역의 주민들이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면에서 좋지만, 과연 서구인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저서에서 계급사회의 모든 차별과 폭력에 맞서고 재물의 축적을 비판한 붓다의 혁명정신은 살아 숨쉬는가? 한국문화가 꼭 이러한 방식으로 ‘가공·포장’돼서 서구 소비자들에게 팔려야만 하는가?

귀하신 몸(?)인 서구 소비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국 전통 등을 그들이 좋아할 만한 소비품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참된 보배들은 아무리 번역을 해도 저들이 쉽게 이해하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예컨대 현대 시인 김수영(1921~1968)의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라는 시구를 우리 세상의 쓴맛을 모르는 독자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풀이 민초들이고, 동풍이 억압자들이고, 울고 눕는 것이 총구·밥그릇 앞에서의 굴복이다”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두발 제한에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복종한 경험이나 불심검문을 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이 시를 소화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생각으로 시인 김수영이 20세기의 시성(詩聖)이지만,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서구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실존적 경험이나, 적어도 이에 상응하는 깊은 고민을 요구한다.

가난뱅이의 체취가 묻은 작품을 부자가 좋아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몸을 굽혀가면서 저들의 기호를 의식하고 거기에 맞출 필요가 있는가? 만약 김수영이나 김남주, 신동엽, 수많은 다른 민중·재야 시인들의 시를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중국이나 동남아·중남미 지식인들이 읽고 감동을 느낀다면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노벨상보다도 귀중한 것이 아닌가?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을 서구인들이 읽어도 나쁠 게 없지만 서술의 대상인 베트남이나 미 제국의 새로운 침략의 무대인 아랍 세계에서 읽혀진다면 훨씬 자연스럽고 나은 일이 아닐까?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약이 될 수 있다면 그 약은 아픈 사람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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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10-25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추천^^

수퍼겜보이 2005-10-25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추천~~

라주미힌 2005-10-2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역사와 감성을 저 정도로 깊숙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사람'들 중에서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