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투쟁 - 조선의 왕, 그 고독한 정치투쟁의 권력자
함규진 지음 / 페이퍼로드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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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절대권력의 상징인 ‘왕’에게 투쟁이라는 단어가 달려있으니까 재벌 2세가 사글세방을 면치 못하는 것처럼 왠지 어색하다. 뭐가 아쉬워서 투쟁을 해! 배부른 아이의 밥투정이야? 그런 거야?
세종 대왕은 14명의 아내와 18남 7녀를 두고서 ‘행복’하게 살았지, 연산군은 3백 흥청, 7백 운평, 1천 광희와 폭탄주 돌리며 쾌락주의를 몸으로 보여줬고, 광해군은 창덕궁, 경복궁 확장공사와 더불어 다주택 소유도 할 수 있었고, 정조는 ‘구조조정의 대가’답게 인사권의 칼을 마구 휘두르며 조정의 관리들을 수시로 갈아치우지 않았나.

하지만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기에, 무엇이든지 할 수 없었던 왕들의 애환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바로 신권의 견제에 왕권은 끊임없이 사수해야만 했던 영역에 불과했다. 입만 열면 성군이 되라하고, 때로는 한심하다고 혀를 차며 간섭이나 하고, 어떤 때는 위협하며 집단으로 사직서나 내던지는 관료들을 달래느라 왕은 성격까지 버리는 경우까지 생기곤 했다. 이 책은 ‘왕’이란 결코 ‘만고 땡 직종’이 아님을 말한다. 사료에 근거한 치밀한 분석으로 조선의 대표적인 4명의 왕(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을 ‘전격 비교 해부’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이상적인 ‘대표 권력 모델’을 그려낸다. 한반도 최고의 성군 세종, 폭군 연산군, 무기력 광해군, 카리스마 정조의 정치적 행보와 개인사와 그들이 겪었던 정치적 갈등을 되짚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들의 리더쉽과 비전이었다. 터무니 없이 높았던 유교적 이상을 이 땅에 실현 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권력과 이익의 정쟁이 난무하는 틈바구니에서 왕의 선택은 피바람을 몰고 오기도 했다. 왕족, 친형제를 귀양 보내거나 죽여야만 했고, 방심하면 왕권을 찬탈 당하기까지 했다.
이 책은 이러한 ‘갈등적 파트너’인 관료집단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 정치 권력의 분배와 갈등 해소를 위한 노력들의 한계와 가능성을 점검한다. 1부에서 왕의 생애와 정치적 행보를 다룬다면 2부는 그들을 비교 해부 분석한다. 2부가 매우 인상적인데, 극명하게 다른 4명의 왕들에게서 무엇이 필요했고, 무엇이 과했는지 정리가 아주 잘 되어있다.

특히 저자의 친절한 설명은 쉽고 재미있다. 그리고 간간히 현실 정치에 관한 뼈 있는 비판은 통쾌했다.
“임금 못 해먹겠다”는 심정이 들더라도, 왕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나도 모르겠다고 돌아설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설득하고 구슬러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끔 노력했어야 한다. 그것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의 책임인 것이다. 104p

어느 시대나 지도자의 역량은 중요시 되어 왔으며, 그 권력에 대한 비판 견제 세력은 있어왔다. 그러나 중국의 황제 강희재의 유언대로 만민의 생활과 행복이 중심이 되야 하지 않을까?

“멀리서 사람에게 자애를 베풀고 유능한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을 살찌우라. 만인의 이익이야말로 진정한 이익이며 만인의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마음이라 생각하라. 위험이 닥치기 전에 천하를 지키고 재앙이 나기 전에 선정을 베풀며 항상 근면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행보를 보라.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이상으로 보는 그에게서 철학의 빈곤이 넘치고 넘쳐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음을. 그가 가진 ‘토목의 정신’과 ‘건설의 피’로 훼손되는 민주주의, 인본주의, 생태주의 질서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겨줄 지 심히 우려스럽다.

진 왕조의 몰락을 두고 한대의 정치가는 이렇게 말했다.
“천자의 지위에 오르고 천하의 부를 가졌으면서도 살육을 면치 못한 것은 권력의 유지수단과 재앙의 원인을 구별하지 못함에 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했다.
“존경의 대상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라. 허나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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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2-02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콱! 박힙니다. 이 책 스리슬쩍 넘겨버린 제목인데, 다시금 궁금증이 솟아나요!

라주미힌 2008-02-0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는 책이었어요.

로드무비 2008-03-08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고 추천 한 방.^^
 
조선 블로그 - 역사와의 새로운 접속 21세기에 조선을 블로깅하다
문명식 외 지음, 노대환 감수 / 생각과느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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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제가 수치와 통계에 의해 반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심리에 의해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역사 또한 인간 감수성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권력과 욕망, 질서와 억압, 분열과 전제, 이상과 타협. 역사는 큰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각 개인들의 역사가 그 안에서 커다란 생명력으로 작용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체제, 이데올로기로서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거시사에 치중된 우리의 교과서는 균형을 잃었다. 역사 속의 개인들이 지워지게 되면 남는 것은 ‘대표성을 띤 치적과 인물’ 뿐이지 않은가. ‘실적주의’, 그것은 곧 역사의 현장 속에서 움직였던 주체들을 심각하게 훼손시킨다. 그래서 ‘기억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복권은 중요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적 대표성과 무관한) 우리들에 대한 자기 존중이 기반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체였으면서도 객체로 밀려나게 된 것은 단지 그들을 위해 기록되어진 것이 역사라고 믿어왔기 때문이지 않은가. 이끌다, 끌려가다. 이 엄청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역사인식의 재인식은 시점의 변화만으로도 많은 가능성을 가지지 않을까.

주변에서 맴돌지만 말고, 역사 안으로 뛰어들어가 보자. 그들이 설명해왔다면, 이젠 우리가 설명할 차례다.

이 책은 그런 면에 있어 신선한 시도를 하고 있다.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소통하려는 데에 역점을 두려 한다. 불로구(不怒口)와 갑회(甲會).
블로그와 카페는 대중의 감수성과 가치를 녹여내고 세상과 호흡하는 창으로 자리를 잡았다. 공감과 이질감이 뒤섞인 문화의 대장간, 여론과 의식의 용광로, 권력의 시발역으로 작용한지도 불과 몇 년 만의 일이다. 물론 ‘잡음’이 많다는 부작용도 있지만, 그것 또한 정보와 지식의 독점 해소라는 기능에 비하면 그리 큰 일도 아니다. 이것을 역사에 대입시킨다면 소통을 가로막던 벽을 부수는데 꽤나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양반, 농민, 왕, 관료, 실학 카페, 속화 카페 등 역사가의 시점을 안으로 투입 시킨 점은 지적 흥미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 각 계층과 특정인들이 보았을 당대의 망탈리테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양반의 일기에 기반한 ‘양반 블로그’와 요즘의 댓글문화를 가장 완성도 있게 패러디 한 속화 카페의 ‘본좌논쟁’이 가장 재미있게 본 부분이다. 그러나, ‘위인’과 ‘사건’ 중심의 역사관은 피할 수 없었나 보다. 블로그의 형식은 빌었으나 ‘기능’까지는 무리였다. 사료가 부족했을 수도 있겠고, 마켓팅 포인트가 청소년에 맞춰져서 교육자료의 성격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나 조선 역사책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왕들, 의병, 이순신 등의 재등장은 뇌에 딱지가 생길 지경이다.

그럼에도 책 전반에 스며든 재치가 책의 의도를 보완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점을 들자면 ‘먹기 좋은 책’임은 자명하다. 특히 펌, 만화, 댓글에서 풍기는 해학과 패러디의 솜씨는 유쾌했다.(좀 유행이 지난 것들이었지만) 뿐만 아니라 논쟁적 화두를 던지는 솜씨는 많은 고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독자에게 편안한 모습으로 나타난 ‘역사책의 프로포즈’… 이 정도면 받아 들일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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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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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사전을 읽는 이유와 같았다. 올바른 정의를 알고, 그것을 현실감 있게 적용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사전적 정의와 실제적 의미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오해와 무지 때문이거나 의도적으로 변형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원인과 과정을 짚어 본다면 우리에게 관용의 의미는 더욱 명확해 질 것이며, 다원주의 사회, 공존의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어의 의미는 용법이다"라고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관용과 우리가 현실속에서 접하게 되는 관용의 차이는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와 직결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용’은 ‘처세술’에 가깝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 또는 국가 사이에서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나타난다. 이 책의 논의가 후자의 방향이라면 사전적 정의 보다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실제적 모형에 역점을 두는 것이 훨씬 와 닿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사용법을 착각하여 특정 영역에만 타당한 어법을 마구 다른 영역에 옮겨놓음으로써 발생하는 요술이라고 했지만, 우리의 현실은 철학적 문제가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관용은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관용하는 사람과 관용되는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관용은 자유를 확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자유 없이는 또한 관용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로움’과 ‘평등한 관계’를 충분히 보장해 주는 사회여야 가능한 행위이며, 그래야만 ‘사전적 관용’의 모습을 띨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한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의 관용은 있을 수 없다. 다시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서 그러한 질문을 우리에게 한다면 지금 관용을 말할 수 있는 단계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철저히 서열화 된 ‘민주 공화국’이다. 학벌, 자본, 계급, 젠더 등 이 땅의 모든 국민에게는 번호표가 붙여져 있다. 언어조차도 계급성이 내포되어 있어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나이부터 물어보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수평적일 수 없으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적, 사회적 토양 위에서 관용은 ‘베푸는 것’이 되었지, ‘하는 것’이 아닌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은 ‘그건 관용이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관용이다. 그것은 관용의 여러 ‘용법’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용법이라 하면, 저자는 제대로 된 용법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줘야 한다. 그러한 원인을 규명하고 바로 잡을 수 있게 실천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열린 사회는 나중의 문제다.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못한 사회에서 온갖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지역적, 경제적 갈등의 문제를 가볍게 언급만 하고 지나갈 수 있을까? 마르쿠제가 관용은 지배 담론의 당위성만을 보장해 줄 뿐이다 라고 비판했던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던가? 그 부분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있어야 된다고 보여진다.

또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고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 정작 완전한 인간의 모형을 가지고 제안하고 있어 ‘관용’의 필요성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현실적 방안으로는 부적합하다. 이상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고민의 부재가 문제가 된다.

가령 이데올로기의 극복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면서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극복을 말하는 모순은 저자의 뜬구름 잡기식 설명의 허약함을 드러낸다. 불명확한 포지션을 유지하면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기만이다. 정의는 명확해야 하고, 방법은 실천적이어야 한다. 머리속에서만이 생존할 수 있는 논리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하찮은 것이다.

교육을 통한 관용의 배양도 의심스럽다.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관용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 이건 염치의 문제다. 스스로가 하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요구할 수 없다. 이것은 마르쿠제의 비판과 맞닿는 부분이 된다. 지배담론의 학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질 뿐이다. 이것이 도덕교육의 파시즘이 아니고 무엇인가.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거의 아무 가르침도 주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든 습관적으로 반드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된다. …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나 성찰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당위규범만을 타율적으로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김상봉, <도덕교육의 파시즘>

전형적인 도뎍 교과서라고 판단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가 열린 사회로 가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관용의 과잉’, ‘불관용의 과잉’에 있다. 이것이 계급에 의해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배 계급’에는 관용의 남용을 선사하고, ‘그 이하의 계급’은 불관용의 오용에 치를 떨어야 한다. 저자는 심리적인 공포와 광신주의, 배타성 등을 말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절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타자에 대한 치열한 경쟁과 분노, 무너져 버린 정의에 대한 배신감으로 어떻게 ‘반대에 대한 자발적 중지’를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판단을 하지 못하는(안하는) 것은 기만적인 타협이고 기회주의적 태도다. 불관용의 오용과 관용의 과잉에 ‘관용’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관용일 것이다.

내부 모순적인 개념에 불확정적인 문체로 일관하는 이 책에 따르면, 변질, 왜곡된 관용이 넘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즉, 이것은 불관용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관용의 정의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관용과 불관용의 경계가 불명확 할 뿐만 아니라, 그 효용에 대해서도 회의를 들게 한다. 그리고 해법을 교육에서 찾다니…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개인에게서 찾는가?

이 책을 읽다 보면 관용이란, 무능함 또는 무책임함, '실제적 의미’가 유명무실하거나 축소된,
판이 깨지지 않을 정도의 ‘처세술’에 머무는 느낌을 준다.

칼 포퍼는 반증 가능성, 오류 가능성을 전제해야 과학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이비 과학으로 분류한다. 비판을 받을 때는 '전제조건'을 들어 의미를 축소시키지만, 자신의 정의를 적용 시킬 때는 무시하는 식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논리적 방어에만 힘 썼다. 긴장 좀 풀었으면 더 읽기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지배담론의 합리화에 빠질 수 있는 함정을 피해가려면 현재의 상황부터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손상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똘레랑스와 엥똘레랑스는 평형우주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명료한 똘레랑스는 엥똘레랑스 또한 명료하게 한다. 결국엔 명료할수록 실천에 자신을 던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대상과 범위의 절대적 기준은 없겠지만, 상식과 정의에 따른 끊임없는 성찰을 곁들인다면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이 관용이 아닐 수도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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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2-2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는 추천을~ ㅋㅋ

2007-12-23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 오후 4시의 천사들
조병준 지음 / 그린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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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점점 더 인간답게 살게 하지 않으려 한다. 행복은 가진 자의 특권 같고, 가난한 자에게는 기회조차도 너무나 빈곤하다. 진보하는 문명이 인간의 삶까지도 진보 시키고 있다는 증거도 찾기 힘들어 졌다. 자본주의적 사고는 신앙처럼 삶 깊숙이 파고든다. 관심사는 나 자신이며, 외부의 문제는 외부로 돌린다. 그렇게 타자와의 분리, 무한 경쟁의 구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고립은 인류가 선택한 미래가 되었다. 수 많은 인간들 틈 속에서 자신의 영역표시를 위한 전투를 처절하게 치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패배는 언제나 약자의 몫인가. 가난과 질병, 배고픔… 누구는 비만을 걱정하지만 누구는 기아를 걱정한다. 지구 곳곳에서 불공평한 삶이 짓누르는 돗한 신음이 난다. 그렇지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은 흔치 않으며, 그곳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자들은 더더욱 흔치 않다. 이 책은 그 흔치 않은 사람들의 얼굴과 마음을 담은 책이다. 천사는 아니지만, 인간의 얼굴을 하고서 사랑을 실천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1997년 9월 5일 마더 테레사는 생을 마쳤지만 그녀가 남긴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전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손을 내어 주는 사람들, 행복해지기를 도우면서 행복해지는 사람들, 인도 캘커타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감동이란 말은 너무 작은 의미의 단어가 된다. 현실은 더욱 절실하며 실존적 문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의 다름을 이해하고, 인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노력과 실천의 가능성,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현실적 고민과 대안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미래는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다.

“신은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침묵과 공허가 너무 큽니다. 나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기도할 동안) 혀를 움직이려고 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원합니다.” 마더 테레사의 편지

마더 테레사가 겪었던 번민과 고통을 우리도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

만남과 이별, 사랑과 우정, 배려와 위로…
꼬깃꼬깃하게 접힌 주소와 연락처를 펼친 듯한 기억의 편린들에서 체온이 느껴진다. 그 기억을 나눔으로써 마음의 전이는 저절로 일어난다.
친구들의 앨범같은 이 책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소비 문명사회에서 소외된 인간, 상업 자본주의로 자리를 잃은 인간의 가치와 교감을 둘러볼 계기를 이 책에서 가져갔으면 한다.

니르말 흐리다이(Nirmal Hriday 순결한 마음)
그것(그곳)에 세상의 평화가 있음을 믿고 싶다.


사람은 가끔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합니다. 가끔씩은 눈물을 가로막는 둑을 터뜨려 주어야 합니다.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캘커타에서 누구나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 눈물을 아무 말 없이 받아 주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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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족주의의 신화 - 인종.신체.젠더로 본 중국의 근대
사카모토 히로코 지음, 양일모.조경란 옮김 / 지식의풍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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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경쟁의 학설이 생기고 나서 인종의 흥망성쇠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진화론은 실로 민족주의의 원천이다.” 107p

생존경쟁이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지도 까마득한 일이다. 생존경쟁은 지극히 ‘자연적’인 성격을 의미하였고, 그와 반대로 인간다움이란 자연적 원리에 역행한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릇 인간이 금수에 비유되는 것을 ‘품위’를 잃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면서도. 이제는 인간다움을 생존경쟁에서 우위를 점했을 경우에만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승자가 아니면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구도 속에서 인류에게 선택의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렇게 인종, 계급, 젠더, 민족, 국가간의 우승열패의 논리를 두루 적용하면서부터 나타나게 된 것은 인종 퇴화와 열패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공포감이다.

인류가 공포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 바로 그것이 민족주의였다.
이 책은 중국의 민족주의 형성 과정 속에 스며든 사회 진화론적 인식을 해부하고, 그것의 사상적 연쇄성을 분석하여 당대의 지식인들 풍경과 민족주의 성격의 변천 모습과 영향을 살핀다. 특히 탄스퉁, 피시웨이, 옌푸, 량치차오, 헉슬리 등이 논한 사회 진화론의 형성과 발전 과정, 전파, 확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중의 하나다.
18세기 청나라 말, 제국주의의 씨앗이 전 세계로 퍼지던 시기에 다른 인종(특히 백인종)과의 힘겨루기에 직면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저항을 위한 통합을 이끌었다. 통합은 흑,홍,갈색 인종적 서열의 공유를 전제로 하였고, 황인종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강화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인종을 구별하고, 인종의 서열을 나누는 작업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차별적 성향을 가지게 된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통합으로써의 민족성이 태생적으로 차별과 배타성을 내포하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족이 필요했으나, 그 내부를 보면 결코 동질의 대상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종적으로 소수민족이 그러했고,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해당 되었다. 게다가 황인종-백인종의 대결구도 속에서도 황인종끼리의 차별성은 여전히 유효했다. 일본에서 개최한 만국 박람회에서 일본인의 인종 차별적 시선을 중국인들이 그대로 받은 것이다. 박람회와 제국주의의 결합이 빚어낸 해프닝이다. ‘인간 전시’를 통해 인종적 우열을 발견해 가도록 한 인종주의의 이식과 반복, 확산 되었던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하였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량치차오,
“역사란 인종의 발달과 그 경쟁을 서술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종을 뺀 역사란 없다” (<신사학> 역사와 이종의 관계 1902) 71p

서로 괄시를 주고받고, 난리 부르스를 떨면서도 민족의 개량과 진보를 이끌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었다. 사회 진화론자인 량치차오는 역사의 원동력으로 영웅을 주목하였고, 그러한 영웅을 만들기 위한 국민의 창출을 염원하였다. 5.4혁명그룹은 화이 의식, 황인종, 백인종의 대결구도, 다수에의 소수의 통합, 이러한 구도를 강화하는데 황제의 상징성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황제의 자손으로의 통합을 이끌기 위한 존재론적 의미가 없는 정치적 도구로 발굴하였던 것이다.

류스페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중국을 지배한 것은 모두 황제의 자손이었고, 중국의 황제는 마치 일본의 신무 천황과 같은 존재이므로,” “일본을 모델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86p

일본의 천황을 베낀 것이다. 일본에서 사회 진화론도 들여왔으니 쫓아가는 방식도 같았다.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의 특징은 뿌리와 혈통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단군은?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침략의 논리도 저항의 논리도 지배 담론을 채택함으로써 비이성적 측면에 의한 착취와 핍박의 계급문제는 가려졌다. 바로 이 책의 중반부터 다루는 것은 젠더의 문제, 여성의 신체의 억압을 이야기한다. 세계를 인종의 경쟁으로 인식하고, 강한 인종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면서 보국과 보종을 위한 인종적 변이를 인위적으로 제어하기까지 이른다. 사회 진화론이 팽배하여 우승열패의 신화가 사상의 연쇄성을 불러오고, 여성은 생물학적 억압의 희생물이 되어 민족적 전통과 인습에 신체를 저당 잡힌다. 유교적 담론에서 국민 국가 담론의 변화가 성과 생식에 관한 통제로 이어졌다.

“단순히 인구를 제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종론과 병행하여 불량한 자에게는 강제로 제한을 가하고 우수한 자에게는 인구증식 장려법을 적용해야 한다. 우종론은 유능하고 선량한 자만을 증가 시키고 빈곤한 자, 병자, 타락한 자는 증가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신맬서스주의는 부유한 지식인 계급에서 밖에 유행되지 않았다. 천듀슈는 종을 선택하여 우량한 종을 남기는 방법을 장려하고 실행할 것을 호소하고 조혼만이 아니라 열등한 자의 결혼까지도 금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135p


민족의 개량을 위해서는 건강한 여성,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국민을 필요로 했다.

“우량한 자는 증가시키고 열등한 자를 억제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140p

수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로 인간의 급을 논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다산 다복의 유교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자유연애를 통한 생식(연애는 진화론적인 우생의 원리), 교육 받을 권리, 경제적 독립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페미니즘의 사상적 토양이 주목 받기 시작한다. 우생학이 페미니즘의 역사적인 사상의 자원이 되기도 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4 윤리 혁명은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가부장제를 대신한 국민 ‘어머니’를 구축하였다. 144p

앨리스 “연애만이 인종 개량을 위한 최선의 실험이 될 수 있다” 148p

사회주의와 우생학의 결합 또한 당대의 풍경이었다.

노동 의무와 기회 보장의 부여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에 동조하지만 인구 제한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다르다. 사회는 반사회적인 사람의 무익한 생식에 대해 간섭할 필요가 있다. 155p

중국의 전통적 가치가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여성의 정조와 패티시즘 문화의 꽃이었으며, 젠더, 계층성, 도시적 세련성, 섹슈얼리티의 상징 등의 엘리트적 미의 기준이었던 전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족이 여성미의 상징에서 기형 폐질의 전형으로, 국수(전통적 가치)에서 국치(미개 문명)로 급격하게 변한다. 전족이 신체를 수고롭게 하지 않는 유교적 이상과 부의 상징이었다면, 우생학의 대두로 강한 인종, 건강한 신체에 반하는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전족의 원인을 남성의 지배력에 기인했다고 봄으로써 여성의 독립의 기점으로 전족 해방의 외침이기도 했다. 전족이 종족을 약화 시키는 불구의 상징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비친 중국의 야만성, 후진성, 오리엔탈리즘과 과학화, 위생, 생식, 우생, 여성해방, 패션 등 복합적으로 작용한 부분도 있다. 결국 신여성이 등장하였으나, 코르셋을 집어 던지고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 모더니티는 어떠한 방식이 되어도 식민성을 내포한다. 식민을 받던 하던 상호적인 것이다.

“북유럽 등에서도 1970년대까지 장애자 등에 대해 동일한 처치가 이루어져 왔다는 문제가 최근에 보도되고 있다. 사회민주노동당 정권 하의 스웨덴에서 1935년부터 1976년까지 처음에는 정신 장애자를 대상으로, 뒤에는 혼혈, 방랑벽, 시력 장애자, 성적 사회적 일탈자, 등까지도 일소할 목적으로 단종법이 실시되었고, 주로 복지 경비의 절감을 위해 6만명이나 되는 남녀에게 강제 불임 수술이 실행되었다고 한다. 북유럽과 같은 고도의 복지 국가일수록 우생 사상이 강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실제로 노르웨이와 덴마크, 스위스 등에서도 실시되었다고 한다. 경제 효율과 복지행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생을 찬미하는 뿌리는 깊다.” 259p

유전자공학의 발달로 더욱더 우생학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은폐된 인종차별, 경제력에 의한 ‘적자의 권리’를 강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과연 부적응자에 대한 폄훼와 제거는 세게화와 함께 더욱 성장할 것인가?
진보한 다수가 낙후된 암흑의 소수를 해방 한다는 논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개화의 대상으로 타자를 미개화 시키고 제국의 침략을 정당화 시키는 근대적 현상은 현대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국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논리도 그러했고, 개발도상국에 대한 지원과 문화적 교류의 형태도 그러했다.

이 책은 말한다. 거시담론의 횡포는 근대의 공통된 흐름이었지 특정 국가의 특수성에 머물지 않는다. 근대 따라잡기의 내재화가 지속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자각해야 한다. 너의 역사도 그러했고, 나의 역사도 그러했다. 마치 프렉탈처럼 이어지는 '사상의 연쇄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시대의 공시성이 현재에도 '유효한 논리'가 되어 우리에게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자각 없는 제국주의자’는 세상을 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배타성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고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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