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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사전을 읽는 이유와 같았다. 올바른 정의를 알고, 그것을 현실감 있게 적용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사전적 정의와 실제적 의미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오해와 무지 때문이거나 의도적으로 변형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원인과 과정을 짚어 본다면 우리에게 관용의 의미는 더욱 명확해 질 것이며, 다원주의 사회, 공존의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어의 의미는 용법이다"라고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관용과 우리가 현실속에서 접하게 되는 관용의 차이는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와 직결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용’은 ‘처세술’에 가깝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 또는 국가 사이에서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나타난다. 이 책의 논의가 후자의 방향이라면 사전적 정의 보다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실제적 모형에 역점을 두는 것이 훨씬 와 닿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사용법을 착각하여 특정 영역에만 타당한 어법을 마구 다른 영역에 옮겨놓음으로써 발생하는 요술이라고 했지만, 우리의 현실은 철학적 문제가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관용은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관용하는 사람과 관용되는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관용은 자유를 확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자유 없이는 또한 관용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로움’과 ‘평등한 관계’를 충분히 보장해 주는 사회여야 가능한 행위이며, 그래야만 ‘사전적 관용’의 모습을 띨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한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의 관용은 있을 수 없다. 다시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서 그러한 질문을 우리에게 한다면 지금 관용을 말할 수 있는 단계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철저히 서열화 된 ‘민주 공화국’이다. 학벌, 자본, 계급, 젠더 등 이 땅의 모든 국민에게는 번호표가 붙여져 있다. 언어조차도 계급성이 내포되어 있어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나이부터 물어보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수평적일 수 없으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적, 사회적 토양 위에서 관용은 ‘베푸는 것’이 되었지, ‘하는 것’이 아닌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은 ‘그건 관용이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관용이다. 그것은 관용의 여러 ‘용법’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용법이라 하면, 저자는 제대로 된 용법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줘야 한다. 그러한 원인을 규명하고 바로 잡을 수 있게 실천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열린 사회는 나중의 문제다.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못한 사회에서 온갖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지역적, 경제적 갈등의 문제를 가볍게 언급만 하고 지나갈 수 있을까? 마르쿠제가 관용은 지배 담론의 당위성만을 보장해 줄 뿐이다 라고 비판했던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던가? 그 부분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있어야 된다고 보여진다.
또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고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 정작 완전한 인간의 모형을 가지고 제안하고 있어 ‘관용’의 필요성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현실적 방안으로는 부적합하다. 이상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고민의 부재가 문제가 된다.
가령 이데올로기의 극복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면서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극복을 말하는 모순은 저자의 뜬구름 잡기식 설명의 허약함을 드러낸다. 불명확한 포지션을 유지하면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기만이다. 정의는 명확해야 하고, 방법은 실천적이어야 한다. 머리속에서만이 생존할 수 있는 논리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하찮은 것이다.
교육을 통한 관용의 배양도 의심스럽다.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관용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 이건 염치의 문제다. 스스로가 하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요구할 수 없다. 이것은 마르쿠제의 비판과 맞닿는 부분이 된다. 지배담론의 학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질 뿐이다. 이것이 도덕교육의 파시즘이 아니고 무엇인가.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거의 아무 가르침도 주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든 습관적으로 반드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된다. …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나 성찰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당위규범만을 타율적으로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김상봉, <도덕교육의 파시즘>
전형적인 도뎍 교과서라고 판단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가 열린 사회로 가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관용의 과잉’, ‘불관용의 과잉’에 있다. 이것이 계급에 의해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배 계급’에는 관용의 남용을 선사하고, ‘그 이하의 계급’은 불관용의 오용에 치를 떨어야 한다. 저자는 심리적인 공포와 광신주의, 배타성 등을 말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절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타자에 대한 치열한 경쟁과 분노, 무너져 버린 정의에 대한 배신감으로 어떻게 ‘반대에 대한 자발적 중지’를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판단을 하지 못하는(안하는) 것은 기만적인 타협이고 기회주의적 태도다. 불관용의 오용과 관용의 과잉에 ‘관용’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관용일 것이다.
내부 모순적인 개념에 불확정적인 문체로 일관하는 이 책에 따르면, 변질, 왜곡된 관용이 넘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즉, 이것은 불관용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관용의 정의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관용과 불관용의 경계가 불명확 할 뿐만 아니라, 그 효용에 대해서도 회의를 들게 한다. 그리고 해법을 교육에서 찾다니…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개인에게서 찾는가?
이 책을 읽다 보면 관용이란, 무능함 또는 무책임함, '실제적 의미’가 유명무실하거나 축소된,
판이 깨지지 않을 정도의 ‘처세술’에 머무는 느낌을 준다.
칼 포퍼는 반증 가능성, 오류 가능성을 전제해야 과학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이비 과학으로 분류한다. 비판을 받을 때는 '전제조건'을 들어 의미를 축소시키지만, 자신의 정의를 적용 시킬 때는 무시하는 식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논리적 방어에만 힘 썼다. 긴장 좀 풀었으면 더 읽기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지배담론의 합리화에 빠질 수 있는 함정을 피해가려면 현재의 상황부터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손상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똘레랑스와 엥똘레랑스는 평형우주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명료한 똘레랑스는 엥똘레랑스 또한 명료하게 한다. 결국엔 명료할수록 실천에 자신을 던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대상과 범위의 절대적 기준은 없겠지만, 상식과 정의에 따른 끊임없는 성찰을 곁들인다면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이 관용이 아닐 수도 있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