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 경비병은 총을 바닥에 놓고, 난간에 나와 그가 다치질 않았기를 바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실제로 어둠 속에서 라차리는 쓰러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랬다. 라차리는 여전히 서 있었고, 말은 그와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사격 후의 정적 속에서 절망적으로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모레토, 네가 날 죽이는구니!"
그 말을 내뱉고 라차리는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트롱크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여전히 꼼짝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요새의 미로를통해 전쟁에 관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 P122

그날 아침 가시거리에 있는 사막의 삼각지대로 시선을 돌려 바라보던 그는, 이미 자신이 죽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꿈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꿈에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혼란스러운 뭔가가 있는 법이라, 모든 건 가짜고 때마침 깨이나게 되리라는 막연한 느낌이 결코 가시지 않는다. 꿈에서의 일들은 정말이지 명확하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아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 무리가 행진하는 황량한 평야 같은 건나타날 수가 없다.
- P133

필리모레 대령이 이미 지나치게 시간을 끌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있다. 어떤 나이에 이르면 희망하는 데 큰 수고가 따르고, 더는 스무 살시절의 믿음을 되찾지 못한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그는 헛되이 기다렸다. 그의 눈은 지나치게 많은 명령서들을 읽었고, 너무나 오랜 세월 아침마다 변함없이 황량한 그 저주받을 평야를 봐왔다.
그래서 외인들이 나타난 지금, 대령에게는 거기에 분명 (실수만 아니었다면 너무나 좋았을) 어떤 실수가 있다는 확신이 든다. 어딘가 끔찍한 실수가 도사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 P141

낡은 나무선반에 끈질긴 생명의 탄식이 다시 고개를 드는 시절이다.
아주 오래전 행복했던 한때, 그 나무는 파릇파릇한 열정과 힘으로 충만하고 가지에서는 새싹들이 움트곤 했으리라. 그러다 나무는 벌채되고말았고, 봄이 온 지금 갈라져나간 나무의 온갖 조각들에서 영원히 점점더 작아지는 생명의 고동이 다시 힌번 깨어나는 것이다. 예전에 품었던잎과 꽃들은 이제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균열 같은 소음을 만들어낸 뒤, 이듬해까지 잠잠할 것이다.
- P176

그러면 요새여 영원히 안녕, 더 머무는 건 위험할 테니. 너의 간단한수수께끼는 풀렸고, 북쪽의 사막평원은 계속해서 황량하게 남으리라.
결코 적들은 오지 않고, 너의 먼지투성이 성벽을 공격하러 오는 이는아무도 없으리라. 영원히 안녕, 오르티츠 소령이여. 더는 이 초막 같은요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울한 친구여. 당신처럼 다른 많은 이들이너무나 오래 희망을 고집해왔다. 시간은 당신들보다 훨씬 빨랐고, 당신들은 다시 시작할 수 없으리.
- P179

밤에는 유쾌하게 즐겨보려는 결심으로 늦게까지 집밖에 있었다. 매번 젊은이답게 사랑을 찾고 싶은 평범하고 막연한 기대를 품고 외출했지만, 매번 실망하여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혼자 집으로 향하는 길이싫어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집은 외롭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 P183

한때 간직했던 희망과 전쟁의 환상, 그리고 북쪽에서 내려올 적에대한 기대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났다. 도시의 문명사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지금, 그러한 꿈들은 유치한 광기처럼 보였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꿈을 믿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러한 과거를 웃어넘기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요새를 떠나는 것이었다.  - P206

"타타르인들… 타타르인들... 당연히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지. 그러다 그대로 믿게 된다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실제로 일어난 일이지."
- P211

었었다. 그 역시 사랑스럽고 순수했었다. 어쩌면 어느 늙고 병든 장교가 발걸음을 멈추고 쓸쓸한 놀라움으로 어린 그를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드로고." 그는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에 혼자이며,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누구도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 P275

그는 그 경계 끝에서 어두워져가는 동심원의 그림자가 자기에게 다.
가오는 걸 느꼈다. 시간문제이리라. 어쩌면 몇 주나 몇 달쯤, 하지만 몇주나 몇 달 역시 죽음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다. 그러니까 삶은 일종의 장난으로 전락한 것이다. 자부심을 내세운 내기를 위해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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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 게야. 틀림없어. 군인들 얘기를 믿게. 어떤 사람은 이 얘기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얘기를 하거든. 하얀 탑들을 보았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연기를 뿜어내는 화산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네. 거기서 안개가 나온다고 말이야. 심지어 오르티츠 대위님도 뭘 보았다고 확신하신다네. 벌써 오 년쯤 된 일이지, 그분 얘기로는, 검고 긴얼룩처럼 생긴 지대가 있는데 숲이 틀림없어 보인다더군."
- P39

어른거리는 석유램프 불빛에서 벗어나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조반니 드로고는, 자신의 삶을 곱씹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이날 밤 - 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삼 같은 건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 바로 이날 밤, 그에게서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가 시작되었다.
- P60

조반니 드로고는 지금 제3보루 내부에서 자고 있다. 그는 꿈을 꾸며웃고 있다.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행복한 세계의 달콤한 이미지들이 밤이면 그를 찾아온다. 그기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언젠가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납빛 바다가 잎에 있고 하늘은 온통 흐린 잿빛인 그 아래, 주변에는 집도 사람도 나무도, 심지어 풀 한 포기조차 없이, 태곳적부터 모든 것이 그러한 곳에서 멈춰서게 될 자신을,
- P63

그들의 행운과 모험, 그리고 적어도 각자가 한 번쯤은 경험할 기적같은 시간이, 저 북쪽 사막으로부터 올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더 불분명해지는 이 막막한 우연을 위해, 군인들은 인생의 전성기를 요새에서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 P71

이 모든 일상이 지금은 그의 것이 되었고, 그것들을 포기하는 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한데 이제 드로고는 요새를 떠나려면 얼마나 안간힘을 써야 하는지, 또 요새의 삶이 하루하루 별반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얼마나 어지러운 속도로 삼키게 될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어제는 그제와 똑같았고, 그는 그날들을 더는 구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사흘 전 일이든 열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든 똑같이 까마득하게 여겨질터였다. 그렇게 그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도피하고 있었다.
- P92

그러니까 경비병이 흥얼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추위나 처벌에, 사랑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적대적이고 거친 산의 소리였다. 얼마나서글픈 오해인가, 드로고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게 이런 식일지 모른다. 주위에 우리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얼음과 바위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인사를 하려 하지만 팔은 힘없이 떨어지고 미소는 사라져버린다. 우리가 철저히 혼자임을 깨닫게 되므로.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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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맛이 있다.

톡쏘는 맛, 오랫동안 우려낸 깊은 맛, 칼칼한 맛, 청량한 맛, 구수한 맛, 조미료범벅에서 느낄 수 있는 오묘한 맛 등등....

이 맛으로 책을 분류해봐도 재밌을 듯하지만 지금 그걸 다 꺼내보려니 잘 시간이고....

굳이 맛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 때문이다.

이 책의 맛은?

딱 심심한 맛이라고 하겠다.

뭔가 우와 하는 대목이 없다.

진짜 심심 심심.... 뭔가 소금을 더 쳐야 하나? 아니면 후추라도 뿌려야 하나?

그런데 그 심심한 맛이란게 또 은근히 끌릴 때가 있다.

이 책이 바로 그 맛, 은근히 끌리는 심심한 맛이다.

책은 순식간에 읽어지고, 아 심심해 하면서 덮게 되지만 은근히 끌리는 대목들이 있는 것.

사실 그 대목들도 책의 부제처럼 책덕후가 책을 사랑하는 법때문에 발생한다.

책 덕후가 아니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뻘짓들을 모아봤다.

당연히 서재 지인들이라면 이 모두에 해당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나 역시 그렇다. ^^

 

 

 

 

 

 

 

 

 

그게 무엇이든 덕후의 삶은 꽤 풍요롭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기고, 누리고 소장까지 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같은 덕후끼리의 팬덤을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책 덕후는 행복해지기 정말 좋은 덕후다.

다른 덕후에 비해 가장 싸게 누릴 수 있으므로 원하는 것을 왠만하면 소장할 수 있고, 책 덕후를 위한 도서관 문화는 우리 나라도 꽤 좋은 환경을 자랑하므로....

내가 피규어나 자동차나 비행기 덕후가 아닌게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그런의미에서 오늘 감사하게도 알라딘에서 오늘 내게 준 적립금을 몽땅 털었다.

오늘의 주문!

새 책들과 새로 나온 커피를 같이 맛보며 흐뭇할 다음 주의 나는 행복할 것이다.

덕후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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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05 02:5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심심해도 끌리는 게 있지요 다른 것보다는 책이 돈이 덜 들까요 저는 제 책이 아니어도 책이 많은 거 보면 기분 좋기도 합니다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 빌릴 때도... 요새는 책을 오래 못 봐서 별로 못 보지만... 다시 책 보는 데 시간을 더 들여야 할 텐데, 이런 생각한 지 좀 됐군요

바람돌이 님 사신 책 즐겁게 만나시고 커피도 맛있게 드세요


희선

바람돌이 2021-06-06 01:00   좋아요 3 | URL
그럼요. 제가 주변에 온갖 취미를 가진 사람을 봐도 책만큼 적은 돈으로 효과가 큰 취미가 없어요. 축구하면 축구공만 있으면 될 것 같죠? 아뇨 아뇨 신발이랑 축구복은 얼마나 비싸며 부대비용들이 얼마나 드는데요. 계속 계속요. ㅎㅎ 책이 제일 싸요. 저도 책이 많은 곳을 보면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누구네 집 서재든 다 좋더라구요. ^^

책은 화요일 배송이라니 천천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희선님 남은 일요일 편안한 주말 되세요. ^^

청아 2021-06-05 06: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다른 덕후들 보면 안타까울 때도 있어요~ 책이 훨 재밌는데 그걸 모르고 저러고 있구나 하고...😳😆 도서관 마구마구 더 늘어났음 좋겠습니다~♡

바람돌이 2021-06-06 01:03   좋아요 2 | URL
우리의 안타까움을 우리끼리만 나눌 수 있다는게 또 안타깝죠. ㅎㅎ
심지어 직장에서 제 옆에 있는 사람은 제가 책 보는걸 너무 너무 부러워하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보면 될텐데 말입니다. 아니 제가 무슨 재벌만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닌데 말이죠. ㅎㅎ
마구마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은 조금 작은 도서관들이 여기 저기 생기더라구요. 접근성을 높이는 이런 정책은 좋은 것 같아요. ^^

새파랑 2021-06-05 08: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책 많이 가지고 다니는거 완전 공감되요. 대부분 안읽고 그냥 가져오지만 ㅋ 바람돌이님 구매책 5권 다 저한테 있는책이네요. 완전 기쁨^^ 읽은 건 1권밖에 안되지만 ㅎㅎ 역시 돈도 별로 안드는 책 덕후가 제일인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1-06-05 08:33   좋아요 4 | URL
저두요
같은 질문 많이 받아요
왜이렇게 가방이 무겁냐?
책을 왜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니느냐...ㅎㅎ

바람돌이 2021-06-06 01:05   좋아요 3 | URL
책 많이 가지고 다니는건 전 포기한지 좀 됐어요. 예전엔 그랬지만 이젠 조금만 무거우면 어깨가 너무 아파서요. ㅠ.ㅠ 이번에 구매한 책들은 전부 서재지인들이 극찬하신 책들만 모았다가 산거라서 아마 대부분의 분들이 다 있을거 같아요. ^^

scott 2021-06-05 12:01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 덕후의 삶은 꽤 풍요롭다.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기고, 누리고 소장까지 할 수 있다면 더더욱!!]
이거슨 우리들의 모습 !! ㅎㅎ
책을 구입하고 소유 하는 이들의 삶은 화려함보다 소박함!
여전히 활자의 힘을 믿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

주말! 개미지옥 알라딘에 장바구니 탈탈 터는 재미로 !

바람돌이님도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에 탐승 하셨군요

웰컴~웰컴~

바람돌이 2021-06-06 01:11   좋아요 4 | URL
나는 고백한다는 도대체가 탑승을 안할 수가 없는.....
이 책 뽐뿌가 어찌나 많은지 말이죠. 사실 도서과에서 빌려 읽을까 어쩔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많은 분들이 소장용이라고 하시는지, 빌려보면 아마 보고 다 본책을 다시 사는 일이 또 벌어질 것 같아서 그냥 구입하는걸로요. ^^

han22598 2021-06-05 12:50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냄새 맡는 거 참 좋아했는데 ㅋㅋ 요즘은 대부분 이북을 사서,,그냥 이북 리더기를 두드리거나, 쓰다듬곤 해요 ㅎㅎ
먼가 아쉬운 마음이 좀 있긴 한데, 리더기가 반들반들해져가는 모습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바람돌이 2021-06-06 01:15   좋아요 2 | URL
한님은 외국에 사시니까 한국어 책은 아무래도 전자책이 편하시겠죠? 그래도 진짜 글로벌 세상이라 전자책으로라도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저라면 고마울 거 같아요. ^^ 리더기가 반질반질해지는 경지라니 그 모습도 보고싶네요. ^^

mini74 2021-06-05 16:55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펠리시아의 여정 구입 *^^* 적립금으로 책을 사면 뭔가 뿌듯한 느낌입니다 ~

바람돌이 2021-06-06 01:16   좋아요 3 | URL
ㅎㅎ 맞아요. 제 돈으로 사도 뿌듯하긴 한데 적립금으로 사면 살짝 뿌듯함이 올라가는 기분이랄까요? ^^

붕붕툐툐 2021-06-06 00: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심심한데 끌리는 맛, 평양냉면?? 저는 책덕후 아닌걸로 판명 났어요;;;;;;
올려주신 것 중 해당하는게 하나도 없네용~ 마음으로만 깊은 공감을~ㅋ 새책 받을 때의 기쁨 만끽하세용!

바람돌이 2021-06-06 01:19   좋아요 4 | URL
아 툐툐님 진짜 평양냉면은 심심하다던데 제가 사는 남쪽의 평양식 냉면은 하나도 안 심심해요. 꽤 자극적인 맛이라죠. 이 동네 음식이 심심하면 망합니다. ^^
그나저나 툐툐님이 해당사항이 하나도 없다는건 약간 의외, 하지만 툐툐님만의 덕후력이 있잖아요. 매일 명상에 대한 글을 올리고 생각을 알려주시는 건 제가 절대 못하는 대단한 덕후력이라고 생각해요. ^^

들꽃 2021-06-15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데비텅님책 두권과 펠리시아의 여정 주문했어요. 주문하고 당일배송받아 데비텅작가책은 바로 다 읽었어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고 최세희작가님번역이라 믿고 주문하기도 했어요. 전 소설은 잘 안 읽지만 바람돌이님 후기 읽고 역시 모르는 작가지만 주문했어요. 기대되네요~
 

현실 속에서 버마 노동자들은 타이 노동시장의 최하부 공동화를 땜질해왔다. 타이 경제를놓고 보면 버마 노동자들이 빼앗은 일자리가 아니라 떠받친 일자리였다. 허울뿐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같은 거창한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그저 버마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박해의 뿌리가 타이 노동자란 사실에 치를 떨었을 뿐.
닭장차에 실려 온 버마 노동자 수백 명이 경찰 몽둥이에 휘둘리며 모에이강 둑에 무릎 꿇고 추방을 기다리던 그 새벽녘 쓰라린 풍경은 여태 내 심장에 박혀 있다.
- P284

샨해방투쟁이 60년째다. 뒤집어 말하면 버마 정부가 정규군 40만에다 온갖 화력을 투입하고도 지난 60년 동안 산을 무릎 꿇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앞으로 60년 뒤에도 버마 정부가 무력으론 결코 산을 지배할 수 없다. 그 증거가 이 로이따이이다." 못석 말은 우스개가 아니다. 버마 정부군이 총을 내리고 평화를 향해 가야 하는 까닭이다. 그게 소수민족 자결권과 자치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버마연방이다. 그게 버마 정부가 죽어라고 외쳐온 연방제다. 버마 정부는 1948년 독립 뒤부터 30여 개 웃도는 크고 작은 소수민족 무장세력을 단 한 번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결과는 이렇게 뻔히 나와 있다. 선택은 오롯이 버마 정부 몫이다. 소수민족해방조직들은 언제든 총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버마 정부가 총을 거둔다면,
- P306

고백건대, 이게 ‘동무‘가 돼버린 버마전선 취재 30년이 내게 안긴 고민이기도 하여 기사를 쓸 때만큼은 그 얼굴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온 까닭이다. 그렇다고 내 고민이란 게 사실을 꾸미거나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감추는 따위가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내 고민은 적과 동지를 또렷이 구분하는 일일 뿐이다. 기자로서 내게 ‘중립‘ 이란 건 없다. 나는 객관성‘으로 위장해 자본과 권력을 좇는 상업 언론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오직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심장이 내린 명령을 좇을 뿐이다. 하여 내게 진실은 오직내 발에 채인 현장일 수밖에 없다.
기자로서 내 직업적 한계는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산 사람들 판단과 샨 역사에 맡길 수밖에.
- P313

그 시절 영국은 까렌, 까레니, 까친, 친 같은 소수민족을 무장시켜 이른바 분할통치로 다수 버마족을 지배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립을 미끼로 그 소수민족들한테 도움받았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약속도 책임도 저버린 채 사라졌다. 여기가 바로 상호 불신감과 적개심을 걷어내지 못한 채 오늘까지 이어지는 버마 민족분쟁의 출발지였다. 영국 식민주의가 낳은 저주의 유산이었다.
- P321

"다시 태어나도 버마가 안 변하면 또 총 들 수밖에. 까레니로 태어난 내 운명이고 내 자존심이고 내 명예야." 까레니 해방투쟁을 이끌어온 비투는 "어제는 오늘이고, 오늘은 내일이다. 1948년 독립 뒤부터소수민족 무력으로 짓밟아온 버마 정부 안 믿는다."고 딱 잘라 말한다.
"지금껏 맺었던 숱한 휴전협정 누가 깼어? 그게 내 답이야."
믿음 없는 버마 현대사, 평화는 아직 멀기만 하다.
- P332

까렌이 바깥세상에 알려진 건 비극의 현대사를 통해서다. 가렌과까친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앞세워 다수 버마족을 지배한 영국 식민주의자의 이른바 분할통치가 그 비극의 씨앗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립 보장을 미끼로 소수민족들을 총알받이로 써먹고는사라져버린 영국 식민주의자의 배신이 그 비극의 싹이었다. 1948년독립한 버마가 소수민족의 자치와 자결 약속을 깨트리면서 줄기를뻗은 그 비극은 이어진 군인독재정부의 탄압 아래 무럭무럭 자라 결국 버마 전역을 뒤덮은 분쟁이라는 나무가 되었다.
- P335

눈여겨보면 그 국경 충돌이 달아오른 2009년은 타이와 캄보디아 두 정치판이 모두 뒤틀리던 때였다. 방콕에서는 군사정부에 이어군부 도움받아 집권한 민주당이 합법성 시비에 휘말렸고, 프놈펜에서는 장기집권해온 훈 센이 총선 들머리에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게 두 정부가 민족주의를 앞세워 쁘라삿쁘레아위히어를 정치적재물로 삼았던 배경이다. 걸핏하면 국경 긴장을 정치적 연장으로 써먹는 타이와 캄보디아 정치판의 해묵은 수법이었다.
- P409

이 지뢰밭이 외진 국경이 아니라 방콕이라면 어땠을까? 방콕 사람들이 지뢰 밟아 죽어나가도 못 본 척했을까? 방콕에 박힌 지뢰라면 전쟁 끝나고 33년이 지나도록 내버려뒀을까?
이게 국경 현실이다. 이게 국경 사람들 삶이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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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니 받거니 기분 좋은 담배질 끝에 화제를 바꾼다. "그나저나이 마을 내력은?" "여기도 몽족 마을이야. 무장투쟁 접은 1983년, 반롬화파몬Ban Rom Fa Pha Mon 이라고, 라오스 국경과 걸친 도이파DoiPhamon 산기슭에서 여기로 옮겨왔지." "그럼 라오스 사람이구먼?"
"우린 대대로 산속에 살았고, 더구나 그 시절엔 국경선이란 것도 또렷잖았으니, 어디가 타이고 어디가 라오스인지도 몰랐지. 알 필요도 없었고."
- P168

되돌아보자. 지도부나 엘리트 출신 당원들은 먹을거리도 없는 가난한 옛 동지들 심장에 대고 "영혼을 팔아먹었다."며 욕질할 자격이없다. 조직 해체 명령이 없어 총을 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차 헷갈린 전사들만 덩그러니 산악에 남겨둔 채, 앞다퉈 제 살길 찾아 떠난 이들이 지도부였고 엘리트였다. 그렇게 떠난 이들은 머잖아 정치인으로, 학자로, 예술가로, 사업가로 이름 날렸다. 잘난 것 없는 타이공산당 경력을 적당히 흘려가며 떵떵거리고 살아왔다. 그이들이 못배우고 가난한 옛 동지들 사회복귀나 보상 위해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 P201

그놈의 나라‘가 불러 나라‘ 위해 목숨 걸고 15년 동안 반공전선 달린 마 와릿한테 떨어진 건 꼴난 버스비와 병원비 반값이다.
버스도 없고 병원도 없는 이 깊은 두메산골에서.
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이 산골에서는 전직 자경단도 전직 공산당도 시민 대접 못 받긴 다 마찬가지다. 파묻어버린 타이 현대사의 그 밖들일 뿐.
- P215

한참 만에 사하이 사완이 말문을 연다. 1970년대 무장투쟁 시절 이 산악을 타고 다녔지. 다 지난 이야기지만, 세상은 아무도 몰라.
짓누르면 또 일어날 수도 있고, 좋은 세상 못 만든 우리 세대 탓이지만.." 그이 얼굴에 깊은 회한이 묻어난다.
- P251

"당신처럼 라오스에서 태어나 타이에서 살아온 국경 사람들은 두 나라 다툼에 심사가 복잡할 텐데?" "우린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면 돼. 우리 같은 국경 사람들한테 국적이니 국제법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 도시 사람들한테나 필요한 건진 몰라도, 어차피 우리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의무만 있지 권리란 게 없으니까." "두 나라가 여기 땅을 놓고 서로 내 것이라 우겨왔는데, 본디 어느 쪽 영토인지?" "여기 국가란 게 어디 있었어. 서로 전쟁하기 전까진 타이도 라오스도 눈길 한 번 준 적 없었는데, 우리를 봐. 나만 해도 저쪽 라오스에서 여기 타이 쪽을 마음대로 건너다니며 살았잖아. 지금이야 막혔지만."
- P252

그렇다면 롬끌라오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국가 중심의 비무장지대를 시민 중심의 평화지대로 바꾸는 길 밖에 없다. 기술적으로 영토분쟁지역을 공유할 뿐, 두 나라가 영토주권을 포기할 일도 없다.
현실적으로 두 나라는 서로 잃을 것도 달라질 것도 없다. 그동안 두정부의 전략이란 것도 사실은 현상유지정책이었고, 특히 아세안에묶인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 가능성도 사라진 상태다.
. 더구나 교통마저 없는 첩첩산중 이 비무장지대에 경제적 이권을다툴 만한 건더기도 없다. 평화지대로 바꾼들 서로 손해 볼 일이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세계 최초‘로 영토분쟁지역에 평화지대를 창설함으로써 명분도 얻고 이문도 낼 수 있다. 무엇보다 타이와 라오스 정부가 죽기 살기로 매달려온 관광산업에도 그만이다. 그 평화지대는 고유한 전통문화를 지녀온 국경 사람들 중심으로 꾸리면 된다.
이 멋들어진 산악에다 그만 한 관광상품이 어디 있겠는가?
- P253

"전선에서 같이 싸워보니 어땠어요?" "본디 우린 학생이나 지식인 안 믿었어. 그이들은 잠깐 왔다 가는 거니까. 1965년부터 목숨 바쳐 싸운 우리하곤 달랐지.
근데, 나중에 보니 그이들이 타이공산당 상징처럼 되어 있더군, 무슨 지도자나 된 것처럼," "1970년대 학생운동 이끈 지도자로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섹산 쁘라서꾼(탐마삿대학)과 티라분미Thirayut Boonmee(쭐랄롱꼰대학) 말하는 건가요?" "그 둘뿐 아니라숱하잖아. 난 그런 이들 관심 없어. 땅에 발 디딘 공산주의자 아니니까. 많이 배운 그이들은 머리와 입으로 혁명 외쳤지만, 우린 심장과발로 혁명전선을 달려왔어."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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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6-04 14: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공부가 많이 될 것 같네요.
마지막의 글을 읽으니 역사 왜곡, 이 떠오르네요. 많은 역사가 왜곡되었을 걸로 추측합니다.
싸움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 것처럼 보이듯이, 역사 또한 진술하는 측이 유리하게 작용할 듯합니다.

바람돌이 2021-06-04 15:17   좋아요 2 | URL
저기 인터뷰하는 분들 모두 정부가 너무 빼앗아가서 굶어죽을 수가 없어 저항을 시작했던 분들이에요. 이런 분들의 역사가 타이에서는 전부 다 묻혔다고 합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죠. 독립운동사조차도 묻힌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동남아시아의 현대사를 보면서 우리나라보다 더 가혹하고 복잡한 역사에 마음이 많이 착잡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