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 경비병은 총을 바닥에 놓고, 난간에 나와 그가 다치질 않았기를 바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실제로 어둠 속에서 라차리는 쓰러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랬다. 라차리는 여전히 서 있었고, 말은 그와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사격 후의 정적 속에서 절망적으로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모레토, 네가 날 죽이는구니!"
그 말을 내뱉고 라차리는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트롱크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여전히 꼼짝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요새의 미로를통해 전쟁에 관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 P122

그날 아침 가시거리에 있는 사막의 삼각지대로 시선을 돌려 바라보던 그는, 이미 자신이 죽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꿈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꿈에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혼란스러운 뭔가가 있는 법이라, 모든 건 가짜고 때마침 깨이나게 되리라는 막연한 느낌이 결코 가시지 않는다. 꿈에서의 일들은 정말이지 명확하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아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 무리가 행진하는 황량한 평야 같은 건나타날 수가 없다.
- P133

필리모레 대령이 이미 지나치게 시간을 끌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있다. 어떤 나이에 이르면 희망하는 데 큰 수고가 따르고, 더는 스무 살시절의 믿음을 되찾지 못한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그는 헛되이 기다렸다. 그의 눈은 지나치게 많은 명령서들을 읽었고, 너무나 오랜 세월 아침마다 변함없이 황량한 그 저주받을 평야를 봐왔다.
그래서 외인들이 나타난 지금, 대령에게는 거기에 분명 (실수만 아니었다면 너무나 좋았을) 어떤 실수가 있다는 확신이 든다. 어딘가 끔찍한 실수가 도사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 P141

낡은 나무선반에 끈질긴 생명의 탄식이 다시 고개를 드는 시절이다.
아주 오래전 행복했던 한때, 그 나무는 파릇파릇한 열정과 힘으로 충만하고 가지에서는 새싹들이 움트곤 했으리라. 그러다 나무는 벌채되고말았고, 봄이 온 지금 갈라져나간 나무의 온갖 조각들에서 영원히 점점더 작아지는 생명의 고동이 다시 힌번 깨어나는 것이다. 예전에 품었던잎과 꽃들은 이제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균열 같은 소음을 만들어낸 뒤, 이듬해까지 잠잠할 것이다.
- P176

그러면 요새여 영원히 안녕, 더 머무는 건 위험할 테니. 너의 간단한수수께끼는 풀렸고, 북쪽의 사막평원은 계속해서 황량하게 남으리라.
결코 적들은 오지 않고, 너의 먼지투성이 성벽을 공격하러 오는 이는아무도 없으리라. 영원히 안녕, 오르티츠 소령이여. 더는 이 초막 같은요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울한 친구여. 당신처럼 다른 많은 이들이너무나 오래 희망을 고집해왔다. 시간은 당신들보다 훨씬 빨랐고, 당신들은 다시 시작할 수 없으리.
- P179

밤에는 유쾌하게 즐겨보려는 결심으로 늦게까지 집밖에 있었다. 매번 젊은이답게 사랑을 찾고 싶은 평범하고 막연한 기대를 품고 외출했지만, 매번 실망하여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혼자 집으로 향하는 길이싫어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집은 외롭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 P183

한때 간직했던 희망과 전쟁의 환상, 그리고 북쪽에서 내려올 적에대한 기대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났다. 도시의 문명사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지금, 그러한 꿈들은 유치한 광기처럼 보였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꿈을 믿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러한 과거를 웃어넘기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요새를 떠나는 것이었다.  - P206

"타타르인들… 타타르인들... 당연히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지. 그러다 그대로 믿게 된다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실제로 일어난 일이지."
- P211

었었다. 그 역시 사랑스럽고 순수했었다. 어쩌면 어느 늙고 병든 장교가 발걸음을 멈추고 쓸쓸한 놀라움으로 어린 그를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드로고." 그는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에 혼자이며,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누구도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 P275

그는 그 경계 끝에서 어두워져가는 동심원의 그림자가 자기에게 다.
가오는 걸 느꼈다. 시간문제이리라. 어쩌면 몇 주나 몇 달쯤, 하지만 몇주나 몇 달 역시 죽음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다. 그러니까 삶은 일종의 장난으로 전락한 것이다. 자부심을 내세운 내기를 위해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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