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꾼 게야. 틀림없어. 군인들 얘기를 믿게. 어떤 사람은 이 얘기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얘기를 하거든. 하얀 탑들을 보았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연기를 뿜어내는 화산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네. 거기서 안개가 나온다고 말이야. 심지어 오르티츠 대위님도 뭘 보았다고 확신하신다네. 벌써 오 년쯤 된 일이지, 그분 얘기로는, 검고 긴얼룩처럼 생긴 지대가 있는데 숲이 틀림없어 보인다더군."
- P39

어른거리는 석유램프 불빛에서 벗어나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조반니 드로고는, 자신의 삶을 곱씹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이날 밤 - 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삼 같은 건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 바로 이날 밤, 그에게서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가 시작되었다.
- P60

조반니 드로고는 지금 제3보루 내부에서 자고 있다. 그는 꿈을 꾸며웃고 있다.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행복한 세계의 달콤한 이미지들이 밤이면 그를 찾아온다. 그기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언젠가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납빛 바다가 잎에 있고 하늘은 온통 흐린 잿빛인 그 아래, 주변에는 집도 사람도 나무도, 심지어 풀 한 포기조차 없이, 태곳적부터 모든 것이 그러한 곳에서 멈춰서게 될 자신을,
- P63

그들의 행운과 모험, 그리고 적어도 각자가 한 번쯤은 경험할 기적같은 시간이, 저 북쪽 사막으로부터 올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더 불분명해지는 이 막막한 우연을 위해, 군인들은 인생의 전성기를 요새에서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 P71

이 모든 일상이 지금은 그의 것이 되었고, 그것들을 포기하는 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한데 이제 드로고는 요새를 떠나려면 얼마나 안간힘을 써야 하는지, 또 요새의 삶이 하루하루 별반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얼마나 어지러운 속도로 삼키게 될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어제는 그제와 똑같았고, 그는 그날들을 더는 구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사흘 전 일이든 열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든 똑같이 까마득하게 여겨질터였다. 그렇게 그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도피하고 있었다.
- P92

그러니까 경비병이 흥얼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추위나 처벌에, 사랑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적대적이고 거친 산의 소리였다. 얼마나서글픈 오해인가, 드로고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게 이런 식일지 모른다. 주위에 우리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얼음과 바위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인사를 하려 하지만 팔은 힘없이 떨어지고 미소는 사라져버린다. 우리가 철저히 혼자임을 깨닫게 되므로.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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