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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 초에 무슨 일이었던지 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던진적이 있었다.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좌파도 우파도 없고 오로지 보수꼴통들밖에 없는 것 같다고...
그에 대한 남편의 대답은 그걸 이제 알았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였다. 그리고 "야 미쳤다고 남자들이 페미니스트를 하냐? 그거 모르면 지 몸이 얼마나 편한데.... 기득권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거 아니다. 특히나 이렇게 날때부터 골수 깊숙히 박혀있는 기득권은..."
아 그런거였구나? 단순히 아직 몰라서 이해를 못해서 그런게 아니였구나... 나도 한때는 박노해시인의 이불을 꿰매며를 읽으면서 적어도 운동권이라는 남자들은 가사일이든 여성에 대한 시각이든 뭔가 다를거라는 환상을 가진적이 있었다. 물론 그 환상은 오래지 않아 깨졌지만....
오랫만에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들었다. 저자의 페미니즘에 대한 진단은 명쾌하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이 책을 관철하는 기본적인 철학은 소통의 철학이며 소통의 정치이다. 페미니즘의 정치는 단순히 성적 구분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의 소통의 벽을 허물자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같은 여성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다른 삶의 존재 조건들이 있는가? 계급의 차이, 장애인/비장애인, 동성애자/이성애자, 서구세계/비서구세계 이런 다원적이고 복잡한 인간의 존재조건에서는 누구나가 피해자인 동시에 다른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운동의 내부에서도 얼마나 달라질 수있는지...그렇기 때문에 서로간의 소통이 얼마나 절실한지....
그럼 무엇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인간은 모두 자신의 계급적 존재기반에 의해 사고한다. 이 세상이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본가와 가진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 약자가 배려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분노한다. 하지만 그 분노는 어디까지일까? 딱 나의 계급적 존재기반까지였다. 나름대로 내가 약간은 진보적이라 생각했던 내게 찬물을 끼얹고 나를 다시 한번 정신차리게 해준다.
저자인 정희진씨가 예로든 2004년 성매매 방지법 이후 성판매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생존권 투쟁'을 벌인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때 나는 이 사건을 보고 한편으로 당황스러웠다.(아마도 당황스러웠던건 정치적인 또는 노동자의 집회에만 익숙하던 내가 감히 이 사회의 악이라 할 수 있는 성매매의 자유를 부르짖는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소위 부끄러운줄도 모르고라는 심정...) 이건 그들 개인의 처지나 상황에 대해서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도 자기 목소리가 있고 할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나의 우월주의에 기반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건 분명히 소통 불가의 상황이다. 나같은 사람은 그들을 내가 생각하는 좋은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결코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입장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성매매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사유방식하에서는 누구도 이 여성들과 소통할 수 없다. 소통이 없는데 어떻게 대책이 만들어질 것인가? 그래서 정희진씨는 성매매 찬반 논쟁을 넘는 다른 방식의 사유와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건 아직 우리 여성운동이 갖지 못한 것이다.
나의 한계를 자각함과 동시에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유의 한계를 같이 사고하며 극복해나감으로써 소통의 장을 만들어가는 일상의 정치학 이 페미니즘 정치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