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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다른 곳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평점 :

고갱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화가인데 왜 그의 외할머니인 플로라 트리스탄은 이토록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 책은 플로라 트리스탄과 그의 외손자 고갱의 두 인생을 오가면서 서술된다.
그러나 독자를 압도하는건 고갱이 아니라 그의 외할머니인 플로라 트리스탄이다.
1803년에 태어나서 1844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여성이 살았던 시대를 짐작하려면 영화 <레미제라블>을 떠올리면 될듯하다.
1830년 7월혁명으로 빈체제로 성립된 왕정을 무너뜨리고 루이 필립을 왕으로 세우며 입헌군주정을 시작했지만 당시 모든 민중이 같이 싸웠음에도 모든 이익은 오로지 부르조아들에게 돌아갔다.
이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가 7월 혁명이에도 프랑스에서 선거권을 가진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0.6%에 불과했던 것.
이 시기 노동자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통계가 하나 있다.
1842년 영국 노동계급의 위생상태에 대한 보고는 당시 영국의 공업도시이던 리버풀의 노동자계급의 평균수명 15세, 맨체스터 17세라는 충격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플로라가 살던 시대는 바로 이런 시대이다.
<레미제라블>에서 혁명가들은 공화정을 위해, 노동자들의 투표권을 위해 목숨을 던져 싸운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직 노동자들 스스로가 주인이 아니다.
공화정이 되면 투표권이 주어지면 세상이 달라질 것인가?
1848년 2월혁명으로 프랑스는 공화정을 쟁취했고, 투표권도 얻었지만 노동자들의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 플로라가 말한다.
모든 억압받는 여성과 노동자들이 연대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그 노동조합을 통해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노동자 여성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고.....
이때까지는 사상적으로는 공상적 사회주의가 태동한 시기였고, 마르크스는 아직 젊은이다.(책 속에 마르크스와 플로라가 잠시 스쳐가는 장면이 있는데 자기 책 출판외에는 안하무인인 무례한 젊은이로 잠시 등장한다.)
페루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의 결혼이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바람에 태어날 때부터 사생아가 되어버린 그녀는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공장에 취직을 했다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남편이란 놈은 술주정뱅이에 폭력적이기까지 했으므로 플로라는 도망을 결심하고 실행하지만, 여성이 이혼을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의 추적에 시달리다가 남편으로부터 총까지 맞고 몸에 총알을 박은 채로 살던 플로라는 자신의 삶과 여성의 삶,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외가가 있는 페루까지 갔다오는 그녀의 일생은 플로라라는 한 여성이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가고 삶의 태도를 정립하는지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녀의 삶은 늘 길 위에 있다.
그 길은 현실의 길이기도 하고, 자신의 삶과 생각을 만들어가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엮어가며 새로운 인간상, 새로운 인간관계의 틀을 만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당대 여성의 몸으로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며 노동자들을 만나,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조합을 만들과 여성과 노동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상을 제시하는 그녀의 노력은 놀랍다는 말 외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삶 - 심지어 그 삶을 바꿔 안락한 부르조아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팽개쳐버리는 결단과 용기를 갖춘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녀가 만들고자 한 것은 여성과 노동자의 천국이었지만, 우리는 그 천국이 그녀 당대에 또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제목 그대로 천국은 다른 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 되어가고, 그 너머 어딘가에서 우리는 다들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가고 있는걸거다.
온 세계가 그녀에게 빚을 졋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야 그녀를 만나다니 미안할 따름이다.
플로라의 삶에 압도당한 나머지 그녀의 외손자 빌어먹을 고갱의 삶은 관심이 하나도 안 생긴다.
책의 반이 고갱의 삶인데 그의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제국주의자 백인의 오리엔탈리즘 가득한 천국은 당연히 없다.
아마도 고갱의 천국은 그의 머릿속 관념에서만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