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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츠바이크의 책을 읽으면 언제나 숨이 꽉꽉 차오른다.
책을 읽는게 아니라 멱살잡혀 끌려가며 100m 달리기를 하는듯하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묘사가 워낙에 치밀하고 역동적이어서 독자는 순식간에 몰입과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소설 내용에 대한 공감정도에 따라 두 가지의 상반된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열광과 당혹스러움이 그것이다..
두 개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나는 이 두 가지의 감정 모두를 맛보았다.
체스 이야기에 열광을, 그리고 낯선 여인의 편지에 당혹스러움을.......
1. 체스 이야기
코로나 상황을 맞아 '나가지 않는 것'과 나갈 수 없는 것'은 같은 상황을 연출하지만 그것이 인간심리에 끼치는 영향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다르다는 것을 절절히 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예전에는 갇힌다는 말을 추상적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흔한 말로 "그 느낌 아니까.... " 되시겠다.
여기 B박사라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게슈타포에 체포당한 적이 있다.
그의 정보가 필요했던 게슈타포는 그를 호텔방에 감금하고 "절대 고립"이라는 상황을 연출해낸다.
아무도 없고, 변하는거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읽을것도 들을 것도 진짜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혼자 지내게 된 B박사
이런 상황이면 사람들이 미쳐갈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츠바이크의 뛰어난 점은 이런 상황에서 인간정신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너무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를 기다렸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또다시 기다렸지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46쪽)
"..... 그 대기실에는 달력이 걸려 있었어요..... 벽에 걸린 7월 27일이라는 몇 안되는 그 숫자를.....마치 저의 뇌속에 집어넣듯 삼켰지요." (52쪽)
"책!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책을 훔쳐라! 아마 성공할거야,.....마침내 다시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이런 생각이 제 안에 솟구치면서 강한 독처럼 퍼져나갔습니다. 귀가 윙윙거리고 심장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하더군요. 두 손이 얼음처럼 차가워져서 더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54쪽)
이렇게 아무 것도 없음을 견뎌야 하던 사람이 손에 넣게 된 책은 그것의 내용이 무엇이든 생명줄과 마찬가지일듯....
저 장면에서는 독자인 나조차도 손에 땀을 쥐며
"그래 빨리 저 책을 손에 넣어. 그래야 넌 살아남을 수 있어. 절대 실패하면 안돼, 제발 제발!!!! "
그렇게 손에 넣은 생명줄, 그 책은 체스 책! 역대 체스경기 해설서 같은 책이었다.
읽을 책이 없으면 광고지라도 읽고 있고, 길거리 걸을 때는 온갖 간판을 읽고 다니고, 화장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무언가를 봐야만 하는 활자중독증 환자들이라면 이 심정을 무조건 공감하리라.
체스책이면 어떤가? 책이잖은가....
이제 역대 명인 게임의 대국들을 기록한 이 체스 책을 B박사는 읽고 읽고 또 읽고, 머리속으로 끊임없이 체스판을 재현하고, 끝내는 자신의 인격을 둘로 분리하여 대국을 진행하는 경지까지 이르는데, 사실상 이 과정은 B박사의 정신이 분열되고 파괴되기 직전까지 간 순간이다.
결국 츠바이크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 인간의 존엄성과 정신이 어떻게 파괴되어가는지, 그것이 한 인간을 어떤 극단까지 몰아세우고 트라우마를 새기는지의 과정에 대한 면밀한 추적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전형성을 벗어난 인물들과 그들의 마음속 소리들, 그리고 그 심리들이 서로의 상호작용과정에서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좀 더 하느냐에 따라 확실하게 다른 느낌으로 소설로 읽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B박사였지만, 누군가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화자, 또는 체스 세계 챔피언으로 참 독특한 인물인 첸토비치의 입장에서 읽어면 또 다른 해석,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 성급하지만 먼저 떠난다는 유서를 남기고, <체스 이야기>를 쓴 1년후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츠바이크 자신의 트라우마, 강박, 자아분열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덧붙임 - 다만 꼭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마지막 역자 해설에서 <첸토비치의 심리적 전략과 B박사가 호텔 감방에서 당한 고문방식이 유사하다는 해석>을 근거로 첸토비치를 히틀러의 비유로 볼 수 있다고 제시하는데 이건 동의하기가 힘들다.
고전이 고전으로 남는 것은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끌어낼 수 있어서라고 하지만 과도한 해석 역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단지 저 한 장면으로 첸토비치를 히틀러에 대비시키는건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츠바이크가 실제로 그런 의도로 썼다면 솔직히 실망이다. 이렇게 얄팍할데가......... 나는 츠바이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2. 낯선 여인의 편지
글을 잘 쓰고 실감나게 썼다고 해서 모든 글이 훌륭한 글이 되지는 않는다.
역시 츠바이크니까 이 소설 역시 병적인 짝사랑에 빠진 여인의 마음 밑바닥까지 파고 내려가 그녀의 마음을 헤집고 헤집어 그 마음의 깊이와 모양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에 공감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피식거리며 코웃음을 치는 불경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이봐요 츠바이크 선생님!
이것은 당신들 남자들의 로망인가요?
어떤 여성이 이렇게 헌신적으로 나만 바라봐줬으면, 하지만 나의 삶의 어떤 부분도 변화시키려 하거나 간섭하지는 않는 그런 사랑을 내게 보내줬으면, 일종의 스페어 타이어같이 내가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하지만 필요없다면 끝내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여인? 그런 사랑?
두말할 것 없이 츠바이크가 남성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잠시 기억을 되돌려 내가 읽은 츠바이크의 책 - 이 책을 포함하여 달랑 3권인데 - 그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남자였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나오는 10명쯤 되는 인물도 모두 남자였고....
여성을 화자로 전면에 내세운건 <낯선 여인의 편지>가 유일했구나.....
편지속 여인은 열 세살 사춘기에 처음 소설가 어른 남자 R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이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 소녀의 이후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녀는 지금 남자 R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춘기의 사랑이 그러하다. .
소녀의 사랑의 방식은 전형적인 자기애로서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에 그야말로 홀릭한 모습이다.
대부분은 어른이 되면서 제대로 된 사랑을 하고, 이런 집착적인 자기애에서는 벗어나게 되는데, 소설 속 여성은 그걸 벗어나지 못한다.
영원히 사춘기에 머무르는 여성이라니.....
이 여성의 짝사랑 상대인 남자 주인공 R은 아예 어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이다.
어른의 관계가 요구하는 책임을 감당할 생각도, 능력도, 심지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츠바이크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심리적 유아기에 머문 사람들이 어떤 심리상태에 빠져 자기를 파괴하는지를 쓰고자 한 것일까?
프로이드를 굉장히 좋아하고 열심히 연구했고 심지어 평전까지 쓴 츠바이크는 이 소설로 프로이드 이론을 소설로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 츠바이크가 쓴 <정신의 탐험가들>에서 프로이드에 대한 글을 읽어보고 좀 더 생각해보자.
그럼에도 똑같이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남녀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그 자기중심성을 왠지 여성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덧칠하고싶어하는 남자의 치기어린 허위의식을 본 것 같아 소설을 보는 기분이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