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rim > [요리스 이벤스 회고전] 필립스 라디오

필립스 라디오
1931년 / 36분

네덜란드 최초의 유성영화.
필립스 라디오 공장에서 라디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우선 그 옛날 진공관 라디오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굉장히 신기했다;;;
라디오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부품들을 보여주는 화면, 음악과 딱딱 맞아떨어지는 편집등 영화적 재미도 풍부한 영화. 모던 타임즈의 다큐멘터리 판이라고나 할까...
놀라운 생산공장이나 기계설비가 아니라, 그 노동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얼굴과 움직임을 담아낸 것도 인상적이었다.

자료집에 해설이 잘 되어 있어서 조금 옮겨 본다.

네덜란드 최초의 유성 영화이자 아방가르드 계열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본래 이 작품은 아인트호벤의 필립스 공장의 라디오 개발과 생산을 홍보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벤스는 필립스사가 규정한 조건들을 거부하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그의 미적이고 시적인 스타일로 표현하였다.

루 리히트벨트의 음악과 공장의 소음을 조합한 이 영화는 네덜란드 최초의 유성 영화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사운드 트랙은 음악과 공장의 소음을 결합한 초창기 실험 영화의 선구적인 예로 꼽힌다. 영화의 이미지들은 기본적으로 리듬과 음의 고저, 그리고 음악의 분위기에 맞춰 편집되었다. 이러한 사운드 트랙 효과에 관해 이벤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반복적인 사운드는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자, 이러한 노동의 무자비한 면을 관객들에게 알리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작품은 이벤스의 다큐멘터리 스타일과 노동과 산업의 진보에 초점을 맞춘 아방가르드 스타일이 혼합된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영화를 제작하기 바로 전에 다녀 온 러시아 여행은 영화 제작 방식이나 내용 면에 있어 이벤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필립스 라디오>는 이벤스가 러시아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깨달은 인간과 노동에 대한 문제와 그의 독특한 미적 형식이 결합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벤스는 노동자의 얼굴에 나타난 육체적인 고통을 클로즈업 기법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현대적인 조립라인의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그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포현하였다.

20년대 제작된 <다리>같은 작품은 하나의 대상을 표현주의 형식으로 탐구한 반면, <필립스 라디오>는 인간의 노동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이런 입장에 관해 그는 "기계가 아닌 노동하는 인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생산력을 지닌 노동자들의 기술에 집중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라디오 진공관을 만들기 위해 유리를 입으로 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유명한 시퀀스는 유리 부는 사라의 양 볼에 묻은 하얀 가루들 때문에 우습고 재미있게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는 단 한순간도 쉴 수 없는 현대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벤스의 의도가 담긴 이미지이다.

촬영과 편집이 완성되는 데 총 넉 달의 시간이 걸렸다. 이 영화는 이벤스가 처음으로 제작한 사운드 필름이며 헬렌 반 동겐과 처음으로 함게 편집한 작품이기도 하다. 회사 홍보용 영화로 제작되었지만, 몇몇 필립스 지점들은 영화에 담긴 사회적 내용 때문에 상영을 거부하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수수께끼 > 한 번쯤 말해야 하는 뱀다리(蛇足)

 미술사학이란 학문이 참으로 재미는 있지만 쉬운 학문은 아닌것 같습니다. 우선은 워낙 방대한 분량의 문헌이 남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 대한 완전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문헌자료를 인용함에 있어서도 우선은 많이 읽고 찾아본 사람이 유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문헌 자료에서 인용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용된 부분이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문헌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재고를 해 보아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실증자료와 문헌자료의 일치여부가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에는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정사라고 하는 <삼국사기>와 야사에 속하는 <삼국유사>가 대표적인 문헌자료에 속하는데 이 마저도 사실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자료가 모두 고려시대에 편찬이 되었기에 고려 이전의 사실에 대한 역사적 내용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맞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후대에 문화재와 미술사학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백제의 무왕이 세웠다고 하는 미륵사지의 발굴시에 신라 관직명이 음각된 작은 항아리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그렇다면 이 작은 조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백제 건축물로 알고 있는데 신라의 유물이 나왔다면 일차적으로는 "여기서 왜 신라의 유물이 나오지? 이 탑이 그럼 신라와 연관이 있나?"라는 의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조에는 무왕이 세운 탑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정도 <삼국유사>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당대에 작성한 것도 아니요...직접 보고 작성한 것도 아니기에 사실은 이야기를 적은 내용이라고 할것인데, 다만 '어디어디에 의하면...'이라는 출처가 있어 일반적인 이야기 책과는 달리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어디 어디에...'라는 것에 대한 검증은 문헌이 남아있지 않은지라 할 수 없는 형편이고 그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백제가 세웠다고 알고 있는 미륵사지 탑의 바닥에서 신라의 유물이 발견 되었으니 생각을 고쳐 신라가 쌓은 탑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무척 많이 있습니다. 익산 왕궁리에 있는 5층탑은 분명 백제의 양식을 간직한 탑인데 탑 아래 고려시대의 기와가 나왔다 해서 제작연대를 고려로 보게 되었는데 이 또한 탑에 문제가 있어서 탑을 고쳤다던가 하는 사실은 전혀 무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궁리 5층탑은 해체수리를 하면서 사리장엄구가 발견이 되었고, 다른 것으로 대신 채워 넣었으며, 그 유명한 신라의 감은사지 석탑도 해체 수리를 하면서 새로운 사리장치를 납입하였는데 후대...우리의 후손들이 탑을 다시 고쳐야 할 경우 지금 넣은 물품을 보고 신라의 탑이 아니라 2000년대의 탑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이 경우는 단순 매납이겠지만 사실은 언제 언제 누가 고쳐서 다시 세웠다는 내용도 함께 매납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런 친절한 내용을 적은 경우는 극히 드문 형편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혼돈을 갖고 조사나 연구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발굴 결과에 대한 연구의 부족으로 학자간에 공감대 형성이 부족하여 상호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보이는 것은 정확한 문헌 자료의 부재에서 오는 결과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황룡사탑의 높이가 80여미터라느니...또는 100미터가 넘었다느니....당시 인구가 얼마였다느니, 또는 거북선의 모습과 내부 구조가 이렇다 저렇다니...등등 너무도 많은 분야에 달랑거리는 기록 한 장 제대로 남기지 않은 조상덕에 후손들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볼성 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기록을 하는 민족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고 <역사의 연구>에 적어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자의 중요성은 태양의 아들이라고 자처했던 잉카의 인디오 문명이 기록의 부재로 인하여 무성한 추측만 남은것을 봐도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것 같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저는 타임머쉰이라도 있다면 카메라를 달랑 메고 당시로 돌아가서 당시 상황이나 모습을 사진에 가득 담아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소!!"라고도 하고픈 마음입니다만 그런 일은 단지 꿈에 불과한 공상일 따름이라 앞으로도 많은 부분에 대하여 "왜?"라는 의문으로 다양한 검토와 연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우려하는 마음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단지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주십사는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아하~ 그게 그랬구나" 라고 단정을 하신다면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학설을 접하면서 나름대로 스스로가 판단하는 가장 근접한 학설에 고개를 끄덕여 주시면 된다고 하겠습니다.

  얄미운 우리 조상님네는 거북선의 그림 하나 제대로 남긴것이 없어 후손들이 무척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조상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이에 대한 끊임없는 반론, 그리고 반론에 대한 반론을 위한 연구, 이러한 반복과정이 다소는 지루하고 볼성사납다 할지라도 사실에 점차 근접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초기 1세대 학자들은 제대로 조사를 하거나 연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답니다. 그 분들을 결코 폄하하는것은 아니나 당시의 현실은 모든 여건이 제대로 연구를 할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며, 미술사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때인지라 많은 부분 잘못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한 교정 작업이 현재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잘못이 바른 답인줄 알고 넘어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순우가 쓴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보고서 1,2>가 나온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맞다 틀리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제깐놈이 뭘 안다고 그래?"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되고 있다고 보시면 될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후손을 위해서라도 잘못 조사된 부분이나 연구된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인정을 하고 재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바로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는 과거에 조사되고는 두 번 다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우리의 문화재 중에서 의문이 간다거나 재론을 필요로 하는 유물을 한 번 짚고 가자는 의미에서 마련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 알고 계시는 분야에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 란을 통해서 논의되는 유물은 한 번쯤 되새김질을 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꼭 정답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 如        村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마이뉴스

'독일놈 잡종' 저주받은 아이들, 입 열다: [프랑스 화제 신간] 피카페가 담은 전쟁 기록 <저주받은 아이들>

박영신 기자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이 지난 6월 6일 오후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서 거행됐다. 이날 기념식은 자끄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필두로 제 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참했던 연합국은 물론, 패전국인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등 16 개국 지도자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시라크 대통령은 여기서 '화해의 시대'를 역설했지만 그러나 끝내 침묵했던 이야기가 있다. 지금까지 애써 덮어왔던 전쟁으로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 그 사이 다가온 불-독의 화해 분위기마저 이들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했다.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정치인들은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저주받은 아이들> 입을 열다

▲ 피카페의 저서 <저주받은 아이들>, 독일과 영국에서도 곧 출판 예정
ⓒ2004 Syrtes
나치 독일이 전쟁에 패하고 물러난 1944년의 여름, 해방된 파리에서는 해괴한 장면이 연출됐다. 머리를 박박 깎인 여성들이 거리로 내몰려 이른바 '조리돌림'을 당했던 것.

거리에 모여든 시민들은 민머리를 한 이 여성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거나 침을 뱉었다. 심지어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점령 프랑스에서 독일인 병사를 사랑한 이 여성들은 해방 조국에서 '국가의 수치'로 내몰렸으며 그래서 간단히 '더러운 창녀'로 치부됐다.

해방과 동시에 꼴라보(collabo, 대독협력자)들조차 너나 없이 레지스탕스(resistance)로 둔갑하는 마당에 어디서도,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여인들은 매를 맞아야 했다. 해방의 기쁨과 '배신자' 처벌로 들뜬 분위기에 휩싸인 군중은 이렇게 가장 나약한 자부터 응징했던 것이다. 프랑스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끄러운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던 그 때, 독일인이 '독일놈'이었던 바로 그 시절, 프랑스인 어머니와 독일군 병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른바 '독일놈의 잡종(bâtards de boche)', '기생충(parasites)'으로 불리며 어머니의 업보를 고스란히 이어받아야 했다.

독일 점령 시기, 젊은 프랑스인 여성과 독일군 병사의 금지된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20만에 이른다. 이제는 58세에서 63세의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들'로 불리는 이들이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일간지 르피가로의 베를린 특파원으로 일했고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 장-폴 피카페(Jean-Paul Picaper)가 이들의 증언을 담아, 저서 <저주받은 아이들(Enfants maudits)> 을 펴냈다.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하는데 이 '저주받은 아이들'은 금기"라고 진단한 피카페는 저서에서 60년 동안 이들이 '두터운 침묵 속에 버려져 있었다'라고 말한다.

전후 정체불명의 아버지를 두고 태어난 그 자체가 죄가 됐던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벌을 받아야 했던 것. 어머니에게 내린 징벌만으로 아이들까지 용서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아버지 자리를 메우기 위해 결혼을 하기도 했으므로 아이들은 자신의 진짜 혈통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들 모두가 오랜 기간, 수치와 죄의식의 나날을 보냈으며 딸의 잘못을 속죄하는 가족들도 학대를 견뎌야 했다. 또 몇몇 아이들은 어머니가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동안 남의 가정에 맡겨지기도 했다.

피카페의 붓끝으로 쓰여진 충격적이고 한편 비극적인 이들의 삶을 소개한다.

'독일놈 잡종' 손자, 닭장에 가두고 자물쇠 채우기도

1950년대 초,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마을 메그리에서는 매주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나면 시청 서기관이 마을 광장에 주민들을 모으곤 했다. 어느날 서기관은 10살난 소년을 불러 제 옆에 세우고는 주민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독일놈과 제비의 차이를 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서기관은 다시 말을 잇는다.
'제비는 프랑스에서 자기 새끼를 치면 떠날 때도 데려가지만, 독일놈은 새끼를 버려두고 가지요.'


이것은 당시, 이유도 모르면서 눈물만 흘리며,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던 10살난 소년 다니엘 룩셀의 회상이다. 다니엘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구경거리였다. 할머니는 내가 밖으로 나도는 것을 금지시켰고 밤새 나를 닭장에 가두고는 자물쇠로 잠궈버렸다. 나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에 떨어야 했다.'

독일군 병사와 프랑스 여성의 딸로 추정된 미셸은 1941년 출생과 동시에 버려졌다. 1945년, 연필조차 제대로 쥘 줄 모르는 나이에 유모로 부터 '나는 독일놈의 딸이다'라고 공책에 쓰도록 강요받았다고 미셸은 회고한다.

현재 62세의 스페인어 교사가 된 미셸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애시당초 영원한 고통에 저당잡힌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독일놈의 잡종' 앙리에뜨의 기억도 여기서 멀지 않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과 오락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앙리에뜨의 어머니는 학교를 찾아와 "선생님이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독일인과 잔 것은 앙리에뜨가 아니라 바로 나예요, 누군가를 욕하고 싶다면 순진한 아이가 아니라 제게 하셨어야죠"라는 해명까지 했다고 한다.

"내가 죽어야 '독일놈 잡종'이라는 오명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독일인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용서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앙리에뜨 어머니의 말은 그간의 고통을 잘 말해 준다.

앙리에뜨의 어머니는 독일군 병사를 사랑했던 까닭에 해방 후 뭇매를 맞고 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녀가 독일인 연인을 돕고, 숨겨줬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은 다름아닌 친오빠였다.

이 책에는 13세가 돼서야 자신이 독일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쟈닌의 이야기도 있다. 느닷없이 나타난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던 쟈닌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자신이 그저 '독일인'이 아니라 '살인자의 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두 달 동안 벙어리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할아버지에 의해 수녀원에 맡겨진 쟈닌은 10살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몸무게는 18kg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리고 아무도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이 책은 전하고 있다.

유럽판 '이산가족', 이름만으로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

1945년 1월, 독일군은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 땅에서 대부분 쫓겨났다.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2차 대전 당시인 1943~1946년 즈음 프랑스에서 프랑스인 여자와 독일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가 적군이라는 이유로, 혹은 프랑스 역사의 수치라는 이유로 버려지거나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며 숨겨졌다.

이 '저주받은 아이들'은 정체불명인 아버지의 이름만이라도 알고자 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베를린에 있는 WASt라는 관청을 찾았다. WASt는 독일군 참전 및 전몰 용사 친족 전문 기관으로서 2차 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병사와 민간인의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 때문에 WASt에는 독일이 점령했던 유럽 국가를로부터 혈육을 찾고자 하는 편지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기관을 통해 가족을 찾은 몇몇은 서신을 교환하기도 하고, 또 몇몇은 관청이 주선한 단체 방문이 성사돼 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스웨덴 그룹 아바(Abba)의 애니 프리드 링스태드도 그녀의 나이 32세때 WASt를 통해 아버지를 찾은 경우다. 링스태드는 자신의 이야기로 'Knowing me, knowing you, that's the best we can do'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름만으로 독일에 있는 가족을 찾고 있는 이들도 많으나, 만난다 하더라도 오랜 이별 기간의 공백을 단번에 메꾸기란 역부족. 간혹 의붓 형제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80이 넘은 아버지들은 잊고 싶은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혹은 유산을 노리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다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찾아온 자녀들을 부정하는 일도 있다고.

<저주받은 아이들>, 전쟁의 고통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위한 본격 첫 보고서

피카페에게 이들의 절절한 사연을 알린 사람은 바로 WASt의 자료 담당 직원 루드비히 노즈였다. 노즈와 함께 써내려간 피카페의 저서는 이런 이야기를 담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출판됐다.

1993년 마르탱 브로사는 여성의 삭발식을 가리켜 '야비한 카니발'이라는 책을 써서 항의한 바 있고, 2000년 파브리스 비르질리는 '씩씩한 프랑스, 해방으로 삭발된 여성들'이라는 책에서 역설적으로 못난 프랑스를 조롱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마침내 프랑스의 민영 TV < TF1 >이 다니엘 룩셀의 일기를 담은 '아이들'이라는 첫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후, 2003년 3월에 프랑스3 TV가 '독일놈 잡종'이라는 프로그램을 특별 편성 방송한 일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며 집단 따돌림과 비극의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본격 보고서는 피카페의 <저주받은 아이들>이 처음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듯 독일인 병사들이 젊은 프랑스 여성들을 강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차 대전 동안 수백만의 독일군이 유럽을 장악했지만 1942~1943년까지 독일군 병사들과 점령국 민간인들의 관계는 차라리 친숙하기까지 했는데, 군복을 입은 독일군 병사들은 종종 징병된 군인이었으며 나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강간이나 약탈 등은 독일 국방군에 의해 엄격히 처벌됐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하여 점령군과 그 아래에 있는 국가의 젊은 여성들의 위험한 관계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프랑스인 연인의 가정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은 테러와 포로 숙청 등으로 악화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에 의한 프랑스 거주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 집단수용소에서의 죽음 등으로 표면화됐다.

이런 가운데, 당시에는 피임이라는 것이 부재했고 아이가 생기면 출산을 해야 했지만 당시의 도덕으로 볼 때 사생아는 '악'이었으므로, 그리고 치욕적이었으므로 그들의 많은 수가 버려졌다.

이 아이들은 이른바 '매국'의 열매인 '저주받은 출생 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1945년 5~6월, 러시아군의 베를린 여성 집단 강간으로 태어난 '러시아군 아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상황이었다 하니 '러시아군 아이들'의 경우는 상상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오늘의 독일은 전쟁의 포화 뒤에 죽음과 끔찍한 기억만을 남겨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고 쓰고 있는 피카페의 이 저서는 머지않아 독일과 영국에서도 출판될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수수께끼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에 관한 몇 가지 의문...(2)

 (1)편에 이어 (2)편에서는 의문점을 제시하고 왜 그러한 것이 의문점으로 대두되는가를 하나하나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을 살펴보면 그 시대에 나타난 탑의 조성양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선 탑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가 일반적인 탑의 석재와는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며 특히 일반형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왜 다른 탑과는 다를까? 라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문 몇 가지를 정리하여 보면

 1. 석탑을 구성하는 석재는 왜 다른 탑과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을까?

 2. 탑의 몸돌은 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층마다 받침이 모각(돌에 새겨진 형태)되어 있으나 유독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 상층 갑석에는 탑의 몸돌을 받치는 받침이 없을까?

 3. 탑의 기단석에는 용의 문양이 있는데 발톱이 다섯개로 이는 당시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사용할 수 있는데 어떻게 발톱이 다섯개인 용을 문양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4.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찰이 전소되었을 때 이 석탑도 그 피해를 보았는데 탑신석은 불길이 닿은 흔적을 보이나 유독 용문양이 새겨진 기단석에서는 불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까?

 5. 기단의 귀퉁이에는 죽절형(竹節形)의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음에도 탑신에는 단순하고 간략하게 날카로운 칼로 판 것 같이  선으로 우주의 형태만을 나타내고 있을까?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신륵사 다층석탑을 고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왜? 대리석을 이용하여 탑을 조성하였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신륵사 경내에는 또 다른 탑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물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는 다층 전탑이 바로 그 탑입니다. 전탑은 주로 안동지방과 칠곡의 송림사 5층 전탑, 제천의 장락동에 있는 전탑과 같이 경상북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에 건립되었었는데 경기도 땅인 여주에 조성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남한강의 지류를 타고 전래된 것이 아닐까 판단됩니다.  신륵사가 위치한 지형은 鳳尾山입니다. 뜻풀이를 하자면 봉황의 꼬리처럼 형성된 산입니다.그리고 이 산에는 바위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신륵사 주변에서는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석재를 구하기가 어려워 돌을 벽돌처럼 다듬은 전탑을 조성하게 된것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전탑의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는 화강암은 그 입자가 굵고 풍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아서는 신륵사 인근에서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여 탑을 만드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리석이라는 석재를 그 재료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리석은 우리나라 황해도 해주 인근에서 양질의 대리석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산량이 적은것은 물론이고 대리석의 크기 또한 대형이 아니어서 대리석을 이용하여 큰 탑을 조성하기는 불가능 하였고, 이에 따라 탑은 크기가 크지 않는 3m 내외로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매 탑신이 옥개석을 포함하여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탑신 받침석이 모각되어 있으나 유독 상층 기단의 갑석 위에는초층 탑신을 받치는 받침석이 없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신륵사가 중창된 시기는 기록에 의하면 1467년입니다. 중창 당시 이 절은 세종 영릉의 資福寺로 중창된 절입니다.  만일 당시 왕실의 명령에 의하여 조성된 사찰의 탑이라면 과연 이렇게 부분이 결구된 형식의 탑으로 조성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탑은 일반적인 조형물과는 달리 부처님을 대신하는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탑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功力을 필요로함은 물론이고, 탑을 조성함에 있어서도 온 정성을 다함은 당연하다 할것인즉 탑의 기단석위에 있는 1층 몸돌 받침석을 빼먹고 조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세번째의 의문은 문양에 관한 의문입니다. 조선은 明과 淸이라는 거대한 중국의 두 황제국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었습니다. 매년 조공을 바쳐야하는 형제의 나라로서 중국 황실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용의 발톱이 5~7개인 것은 바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두 황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륵사가 당시 아무리 임금의 원찰이었다 해도 황제를 상징하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문양으로 넣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발톱 5개를 가진 용의 문양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종대를 전후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라 칭한 이후에나 도자기 등에 발톱이 5개인 용의 문양을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륵사 다층석탑에는  제가 (1)편에 올린 사진에서 보는것 처럼 용의 문양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용의 문양에서 발톱이 5개로 표현된 경우는 드문 예로 이에 관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 의문은 탑신석에서는 화재에 의한 그을음의 흔적을 볼 수 있으나 유독 아랫쪽인 기단석에서는 왜 그 흔적을 찾기 힘든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신륵사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석재로 만들어진 탑은 그 와중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석재라서 다른 목조건물 처럼 화재에 견딜 수 있었지만 화재의 피해를 입었으며 사찰을 복구할 때 이 탑도 손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탑을 닦아 내었을것인데 유독 용문양이 조각된 기단석 부분만 닦았을까요?  물론, 그럴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부처님을 대신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불탑을 관리함에 있어 어느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닦고 다른 부분은 방치한다는 것은 불가의 속성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화재로 인한 석재의 그을음은 아무리 닦는다고 해도 열에 의한 피해로 석재의 재질이 변함으로 인하여 화재의 잔재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현대의 신기술로도 불가능한 일임을 비추어 볼 때, 화재 당시에 이 탑의 기단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혀 피해가 없었거나 또는 화재후 다른 대리석재로 바꾸었다는 등의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 섯번째의 의문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 문양과 탑신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이 너무 극단의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아래 사진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인데 영락형(목걸이형)의 장식으로 조성되어 있음에 비해 탑의 몸돌 모퉁이 기둥은 아무런 조각도 없이 단순하게 얕은 선으로 모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단과 탑의 몸돌이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단석에는 매우 섬세하고 공을 들여 용의 문양과 더불어 귀기둥에도 세심한 조각을 했음에 비해 탑의 몸돌에는 겨우 흔적만 알 수 있도록 모각을 한것에는 분명히 어떤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단지 조각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였다는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다른 여타의 탑도 신륵사 탑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탑은 선대의 탑을 모방하여 제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신륵사 탑에서는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석탑의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탑을 조성하고 있는 석재는 대리석으로 일반 화강암과 같이 입자가 굵지 않아 조각하기에는 비교적 수월한 편임에도 일부에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또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제작 공정이라 궁금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신륵사 다층석탑은 몇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점은 문헌기록이 있다면 자세히 풀어갈 수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이 의문점을 풀수 있는 단서가 없어 아쉬움을 남김니다. 조선시대의 이형석탑의 하나로, 대리석으로 조성된 이 탑은 그 제작 시기부터 재고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초기의 조사 결과에 따라 중창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만, 나옹선사가 입적한 절로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탑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절의 조성과 동시에 조성됨을 비추어 본다면 조선시대 이전의 이 절의 탄생과 관련지어 볼 필요가 있다 할것입니다.

 <에필로그>

  제 스승께서는 제가 제기한 다 섯 가지의 의문에 대하여 일단의 제자를 대동하고 신륵사 탑의 간략한 재조사에 임하셨었습니다.  주로 5가지의 의문 사항을 확인하는 조사였는데 대부분 제가 제시한 의문점에 동조를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30여년전 다리가 없어 강나루에서 신륵사로 건너가서 조사를 하였으며 당시 그런 깊이 있는 조사를 하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제가 제기한 5가지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시면서도 편년(제작년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노 학자의 조사결과를 번복한다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기에 그러셨던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신륵사탑의 기단석은 처음부터 같은 탑의 부속 석재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외부(혹은 외국)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유입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문양으로 보아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에서 도입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신륵사에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기단부가 심각한 손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왕실의 원찰로서 기단부를 새롭게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탑의 정확한 편년을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엇을 것으로 판단되는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던 대리석과 원래의 탑의 석재였던 몸돌 대리석에 대한 재질 분석을 통하여 원산지를 확인하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할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조급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탑의 건립연대를 밝히기 위한 작업으로 지속적인 연구속에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如         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수수께끼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에 관한 몇 가지 의문들....(1).

  여주의 남한강을 끼고 신륵사라는 고찰이 있습니다.  이 절을 처음 건립한 시기는 신라의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을 뒷받침 할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물론이고 문헌자료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 우왕(禑王)2년인 1376년에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서 입적하면서 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조선조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지금 남한산성의 송파쪽)에 있던 世宗의 묘를 여주로 이장하면서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절 이름도 報恩寺로 바꾸고, 전각이나 건물을 새로 꾸몄습니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고려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된 많은 유물이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입적한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선사의 부도를 비롯한 유물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이 있으며, 강변에는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세운 전탑등 다수의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신륵사의 유물중 다층석탑의 건립연대에 대한 의문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학문에서 형성되는 학파라는 개념은 한 스승 밑에서 배우는 입장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탑은 30여년전에 필자의 스승이 조사를 하여 그 조사 결과가 오늘날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탑을 조사하면서 제 스승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탑의 조성연대를 조선시대로 보고 있지만 저는 건립 시기가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말, 또는 그 이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탑은 우리 나라에 있는 1300여기의 탑중 20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는 조선은 억불정책으로 이와 관련이 있거나 또는 기왕에 절간이 세워지면서 탑이 세워져 있었기에 새로운 탑의 건립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륵사 석탑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제가 보는 조형수법과 탑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 그리고 탑에 장식된 문양에 나타나는 조각 형식등에 대한 의문점으로 이 탑에 대한 재 조사를 했던 것입니다.  스승의 조사 결과를 제자가 번복하는 일은 학파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하는 일이지만 몇 가지 이 탑이 갖는 의문점을 기준으로 그 의문에 대한 하나 하나의 조사로 이 탑에 접근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탑으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여러 층의 탑신(탑 몸통돌)을 얹은 사각형의 석탑인데 세부 조형을 살펴보면 신라나 고려의 조형수법과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기단석에 비룡(飛龍)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운 드문 경우로 이것은 신륵사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의 내용을 담았는지 모르겠지만 조각 수법이 무척 세련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자칫 무겁게만 보일 수도 있는 탑의 무게를 조각이 덜어주고 있습니다.

 이 탑의 재료는 대리석인데 이 석재는 당시에는 구하기도 힘든 석재인데 왜 대리석으로 조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과연 이 탑이 보여주고 있는 양식으로 판단할 때 이미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의 탑인지..아니라면 언제 조성된 탑인지를 정확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탑은 3m에 불과한 비교적 작은 석탑이지만 기단부 부터 탑의 몸돌인 탑신부에 이르기 까지 각 층의 돌은 모두 1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석탑의 각 부재를 1개의 돌로 만들게 된것은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탑을 크게 만들 수 없는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전형을 그대로 따랐지만 각 부재에 있어서는 그 세부 감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재료가 대리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단부는 지대석 윗면에 단엽으로 복련문양을 조각하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기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랫층 기단 갑석의 윗면과 윗층 기단 갑석 아랫면에도 연화문(蓮花紋)을 장식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에 나타난 용의 문양이나 우측 사진인 기단에 나타난 문양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며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                                                          <신륵사 다층석탑의 상하층 기단>

탑의 몸돌인 탑신부는 현재는 8층 탑신부 까지 남아 있지만, 몇 군데 옥개석의 체감율이 맞지 않아 원래의 정확한 탑이 몇 층이었는지를 추정하기는 쉽지가 않으며 탑의 맨 윗부분인 상륜부는 현재는 철제로 된 찰주(刹柱)만 남아 있고 다른 부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점을 살펴보면 신륵사 다층석탑은 지대석 윗면에 연꽃문양을 조각하여 화사한 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기단부에 연화문을 장식한 예는 많지만 이 탑 처럼 지대석에 연화문을 장식한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기단부에 있어서는 면석의 각 우주(귀퉁이 돌)에 화문(花紋)을 모각한 것이라든가, 기단 상층 깁석을 기단 하층 갑석의 하반부형(下半部形)으로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무거운 느낌을 줄이고자 하는 점은 이 탑에서 주목할만한 형식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지대석에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한 수법은 주로 스님의 무덤인 부도(浮屠)에 조각되는 수법인데 특이하게도 이 탑에서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없던 문양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 (2)편에서는 이 탑이 같는 5가지의 의문점을 제시하고 그 의문점을 하나 하나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