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모모 > [경향] ‘종교자유’ 시위 고교생 퇴학당했다

‘종교자유’ 시위 고교생 퇴학당했다
[경향신문 2004-07-08 19:08]
“고등학생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달라”며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던 서울 ㄷ고 3학년 강의석군(18·전 총학생회장)이 결국 학교에서 제적됐다.

강군은 8일 오전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학교에 등교했으나 시험 도중 불려나가 학교 징계위원회로부터 제적통보를 받은 후 퇴교조치당했다. 강군은 이에 반발, 오는 13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낼 예정이며 참교육학부모회, 인권운동사랑방 등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법적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다.

학교측은 “강군이 제적된 것은 사실이나, 제적 이유나 학교 입장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도 “각 학교의 학칙에 따른 행정처분에 교육청이 간섭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라며 사실상 학교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앞서 시교위 관계자는 지난달 28일 “수업시간외 예배 참여 강요는 문제가 있다”며 “이런 점을 감안할 때 ㄷ고의 사례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강군은 지난달 16일 학내방송을 통해 ‘종교자유 선언’을 한 이후 학교측으로부터 수차례 전학 압력을 받아왔다. 지난 7일에도 시험시작 10분 전에 교감으로부터 ‘13일까지 전학을 가겠다, 기말고사 기간 중 교내외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당했으나 서명을 하지 않아 기말고사 응시를 거부당했다.

강군은 제적통보를 받은 직후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글을 올려 “제적당할 경우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주위 말씀에도 학교측이 최종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내려줄 것이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학교라는 공간조차 부조리함으로 가득차 있고 믿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참교육학부모회 장은숙 상담실장은 “헌법에도 보장돼 있는 너무도 당연한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을 뿐인데 시민단체들이 강군의 제적을 막아내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청소년 공동체 ‘희망21’ 연미림 간사도 “제적은 학교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한 폭력적 처사”라고 강조했다.

이들 단체는 변호사를 선임해 행정법원에 학생부당징계 가처분 소송을 내는 한편, 헌법소원을 제기할 방침이다. 또 종교자유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 1인시위를 벌여나갈 계획이다. 현재 서울시내 289개 고교 가운데 종교재단 소속은 52개다.

〈정유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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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참, 결국 그렇게 됐군요 ...
아무런 도움도 돼주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뭔가 도와줄 방법을 찾아봐야겠군요.
 
 전출처 : 수수께끼 > 금동반가사유상.....백제것인가? 신라것인가?

금동반가사유상....그 힘없는 미소를 머금은 금동반가사유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반가사유상은 비슷한것이 우리 나라의 국립박물관에 2개, 그리고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일본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 등 현재까지 알려진것은 모두 3개 입니다. 그런데 3개의 반가사유상이 모두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유사한 형태이면서도 결코 같은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두번째는 3개 모두의 정확한 출처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양식적 특성으로도 유사한 형태의 불상이 나타나지 않는 관계로 다른 불상과 비견하여 결정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문헌이나 출처를 근거로 하여 어느시대의 조성물인가를 판단해야 하지만 그 마저도 일관성이 없어 지금은 그저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이라고 명기하여 이 불상의 출처로 인한 갑론을박을 애써 피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국보 제 78호(좌)와 국보 제 83호(우)로 지정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입니다. 좌측 불상의 높이는 83.2cm,우측 불상은 93.5cm로 우측 불상이 10cm가량 높이가 높습니다. 이 두개의 비슷한 반가사유상을 자세히 눈여겨 보신다면 똑같은것 같으면서도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이 두 불상의 미술사학적 고찰과 아울러 출처에 관한 문헌과 관계자의 증언, 그리고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반가사유상에 관하여 각각의 특성을 설명하므로써 어느 시대의 불상으로 판단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실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과연 백제의 불상인가? 또는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신라불상으로 봐야 하는가? 일본의 불상을 일본인들은 비조시대의 불상으로 바득바득 우기고 있는데 과연 그들이 주장하듯 정말 일본 불상일까?  아니라면 우리의 두 개의 불상과 매우 비슷한 양식이어서 우리것인데 일본으로 건너갔던가, 또는 적어도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나라 사람이 제작한 것인가? 에 대한 고찰을 해 보는것도 바람직할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와 일본 사이에 문화교류의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는 실정으로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각각의 불상이 갖는 미적 감상기준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웃옷을 입은 단정한 불상과 웃옷도 훌러덩 벗어버린 불상....과연 이 불상은 어느시대의 불상일까요?  앞으로 2차례에 걸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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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금동반가사유상.....백제것인가? 신라것인가? (2)

 금동반가사유상이 갖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우선은 반가사유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알아보는것이 중요하다 할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인 셈입니다. 그리고 '사유'란 고뇌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 반가사유상은 과연 어떤 고뇌에 빠져 있는것일까요? 사유상의 출현은 출가하기전의 태자의 신분이었던 '싯다르타'가 인간이 갖는 4가지 고뇌, 즉 生老病死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고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4가지 고뇌속에서 번민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무엇을 느꼈기에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턱을 괸것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가 얼굴과는 닿은듯 만듯 정말로 손가락 전체도 아닌 점으로써 뺨과 닿아있으며, 고개는 약간 숙인채 얼굴에 담고 있는 미소....한마디로 오묘하다고 표현되는 얼굴표현에는 나름대로의 중생 구제의 방법에 대해 수만가지의 말을 뱉어낼것만 같습니다. 즉, 오랜 고뇌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중생구제의 방편을 알아냈다는 미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왼 무릎위에는 한 쪽 발을 올려놓고 있는데 엄지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분명 잔뜩 힘을 주고 있읍니다만, 미사려구를 구사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모습이 달리 보이는지 발가락의 구부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합니다만, 자연스럽다는 말은 힘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그냥 힘을 주지 않고 오른 발을 왼 무릎에 올려놓으면 전혀 지금의 모습은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은 자세히 보면 입가의 살포시 웃는 모습과 어울리게 지그시 내려깔고 중생을 굽어보듯 하는데 바로 미소와 더불어 이런 눈매가 미륵보살로서의 위엄을 한껏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반가사유상의 미소에 대해 최순우 선생은  "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초월한 것이며.......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아(閑雅 :막을수 없는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을 내쉬게조차 한다....서양인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로 여겨 '영원한 미소'라고 예찬하는데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나란히 놓는다면 모나리자의 미소 정도는 당장 안색을 잃을것임에 틀림없다" 고 하였습니다. 아주 점잖게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치켜세웠지만 다른말로 이야기 하자면 모나리자도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보면 울고 간다는 말 정도로 해석을 하면 될것입니다. 이 반가상의 머리에는 도교사상에서 나온 삼산관이 얹혀있어 간단하게 "삼관미륵"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반가사유상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시기는 1912년 입니다. 당시 이왕가박물관(일본인이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에 대한제국의 황제칭호를 깔아뭉개기 위해 조선 임금의 가계를 <왕가(王家)>로 낮춰 부르게 되었습니다)이 이 반가사유상을 입수할때는 중계인이 '경주 근처의 폐사에서 가져왔다'고 하였기에 신라의 작품으로 알았었으나 한일합방 이전부터 우리 나라의 고적을 조사해온 일본인 학자 이네다(稻田)가 '1910년 충청도에서 올라왔다'고 하는 바람에 신라것이냐 백제것이냐를 놓고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미술사>의 저자인 세키노(關野貞)는 "조산 삼국시대의 조각"에서 두 구의 미륵반가사유상을 고신라의 유물로 단정하여 '후치가미 사다스케가 총독부에 기증한 것으로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나 경상도에서 발견한듯 하다'고 기록하여 경상도 출토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후 1915년 바로 이네다의 충청도 출토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때는 그체적인 높이(2자9치7푼)가 제시되어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인정하기에는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금동, 석불, 마애불 등 모두 32구의 반가사유상이 있지만 1945년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발굴된것 이외에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의 것인지 또는 신라나 백제의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애석하게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불상이 고가에 거래되었지만 그 출처에 대한 추궁이나 법적 책임이 두려워 대부분은 오랜 동안을 숨겨 두었다가 내다 바는 악덕 골동품상(거의 일본인)들로 인하여 유물이 갖고 있는 족보가 멸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네다의 주장대로 이 반가사유상은 충청도 지역에서 올라온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돌아가신 김원룡, 최순우 두분은 이 불상이 백제의 작품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있는 두 구의 불상이 어디것이냐 하는것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고 갑론을박 하는데 엉뚱하게도 일본에서 더 애써 원산지를 찾는 작업을 추진하는 일이 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금동반가사유상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국보 83호인 '삼관미륵'의 복제품이나 마찬가지로 쏙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일본의 고류지(광륭사)에 소장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불상의 원적이 어디냐에 따라 이 불상의 원적도 덩달아 원적 변경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일본에 있는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또는 "한반도 사람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었다(대부분의 일본학자 주장)"는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주로 우리 학자들은 위의 두 가지 학설을 추종하고 일본의 학자는 자존심 때문인지 자기네 조상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은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지에 있는 또 다른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1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보다 후대인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중반의 비조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똑 같이 일본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언뜻 보아도 똑같은 목제임에도 국보 1호보다 상당히 조형미가 떨어지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아마도 국보 1호를 본뜬 불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조각 기법이나 제작기법이 국보 1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것을 사진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불상은 당연히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거나 한반도의 불상을 모방한 불상이라는 말 조차 꺼내지 못하고 일본의 비조시대의 제작품으로 인정을 하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백제계의 불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한 학자가 동국대학교의 황수영 박사였습니다. 황수영 박사는 1959년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  원래 이 불상이 경상도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세키노의 발언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에 판매시 거래된 금액은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2900원이었는데 중간의 악덕 상인들이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 부터 구입을 했기에 원산지는 알 수 없는것 처럼 했기에 지금까지도 어디에서 출토가 되었는지 잘 모르게 되었지만, 최초에 이 불상에 대해 언급한 세키노의 말 처럼 "경상도"지방에서 출토되었다면 신라 땅 어디에선가 이 불상이 있던 자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경상도 신라땅을 수소문하여 이 불상이 정말로 신라의 옛 절터에서 나왔는지를 찾아보기로 한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박사(현 단국대 박물관장)와 더불어 경주지역에서 수소문한 결과 드디어 원래 이 불상이 있었던 절을 찾게 되었습니다.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옷칠이 된 위에 회분을 칠하였는데, 대부분의 목불이나 금동불은 칠을 하기전에 옷칠을 하는데 원 소유주는 옷칠 위에 다른 칠을 하지 않고 회분을 칠했던 것을 근거로 하여 수소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받게되자 경주 오릉 근처에 있던 불상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고 이소문을 접한 두 사람은 1964년 경주 남산의 산방谷에 있는 산방사라는 절의 할머니가 당시 4원(또는4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판매를 하였다는 사실과 원래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차례 방문하여 노보살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분명 신라의 불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직도 이 불상의 족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까요? 한동안은 <미술사학>에 이 문제에 관한 연구 논문이 게제되고 맞느니 틀리느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원래 그 장소에 있는것을 본적도 없을뿐만 아니라 단지 노보살(이 노보살은 그후 사망하였음)의 증언에 의존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성을 입증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입장이었고,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의 정확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계다 백제계다를 말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라계라는 확신을 가진 황수영 박사, 정영호 박사측은 신라의 불상으로 보고 있으며, 김원룡박사, 최순우 선생 등의 계열은 백제계의 불상으로 보는 것이며 두 학설간에 뚜렷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위대한 모나리자의 미소가 울고가게 할만한 이 위대한 공예품은 그저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출처가 애매모호한 반가사유상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하고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발표논문은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불상은 우리 나라에는 부지기수로 많아져서 미처 제대로된 연구가 나오기도 전에 온통 사찰에 범람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용화사상을 주로 하여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성종계열에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미륵반가사유상을 수입을 해 왔기 때문인데,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는 매우 흡사하지만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면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교한 불상이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우리 나라에 유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땅 속에 묻어두고 거름을 주거나 화학 성분을 부어 1~2년을 묻었다가 마치도 오래된 금동불에 녹이 슬은 모습으로 수입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중국인들은 이런 모조품을 만들어 우리 나라에 수출할 생각을 다 하게 되었는지 기가막힐 따름이지만 이런 문제는 제가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확인을 해볼 요량이며, 그 불상이 단순하게 비슷하게 만든것이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은 궁금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불상에 대한 에피소드를 겻들인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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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도서관여행자 > 어떤 권력 관계

어떤 권력 관계


이 글이 장애인을 타자화하고 희생자화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그렇게 읽히지는 않을까 매우 두렵다. 며칠 전 나는 휠체어에 누워서 이동해야 하는 뇌성마비에다가 지체 장애를 가진 중증 장애인이자 무학으로 한글을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3회에 걸쳐 여성학 강의를 했다. 미국인 중에서, 남성 중에서, 비장애인 중에서, 이성애자 중에서도 문맹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많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문자를 모른다는 것이 장애인이 겪어야 할 상식적인 현실이거나 운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대상이므로 그날 강의에서 나는 일단 칠판에 필기를 할 수 없었다. 시청각 교재가 나을 것 같아, 낙태 관련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이번에는 비디오 자막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기 전에 남성이거나 여성이어야 하는 한국 같은 철저한 성별 사회에서 장애인은 무성적 존재, 즉 젠더 이전의 비인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장애인의 현실에서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와 사회문화적 성별인 젠더 개념에 대한 나의 설명은 중증 장애인인 그들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성활동이 남성 성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강사로서 나는 비참했다. 남성 장애인은 남성이라기보다는 장애인이었고, 기본적으로 기존의 섹슈얼리티를 실천할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웅동체인 양성구유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양성으로 구분할 수 없다, 자웅동체는 하등동물, 자웅이체는 고등동물로 배웠던 고등학교 생물 수업은 자연과학에 남성중심주의가 반영된 왜곡된 지식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이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점점 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어려웠다.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점입가경의 절정은, “즐거운 금요일 주말 밤이죠”라는 수업 끝 인사였다. 집밖으로 이동이 정치적 투쟁인 그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주말인 것을 ….

나의 여성주의를 그들에게 전달하기 힘들었던 것은, 페미니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 자유주의든 이론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의 결과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물론 이 깨달음조차도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주체인 비장애인이 자기 성찰과 인식의 확장을 위해, 타자인 장애인의 삶을 활용, 동원하는 또다른 비장애인의 권력일지 모른다. 지배와 피지배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같은 언어를 공유할 때만 가능하다. 모든 권력의 작동과 지속은, 지배자의 언어와 논리를 피지배자에게 강요하고 피지배자는 이를 수용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 시설 ‘정립회관’은 정립(正立), ‘바로’ 서기는 비장애인 중심의 담론이다. 서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언어 배우기를 거부하면, 이때 당황하는 사람은 지배자이고 지배 논리의 관철은 불가능하게 된다. 다른 강의에서 수강생들은 5분마다 웃음을 터뜨리고 내게 열렬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나는 자신감 넘치는 강사였다. 그런 반응에 익숙해 있던 내게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들이 나의 말하기에 열정적으로 반응하는 뛰어난 청자이자 저항 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뇌성마비 상태인 그들의 몸이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그 언어를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소통되지 않는 상황의 답답함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정의하기 힘든 엄청난 힘의 분출을, 폭발하는 자의식을, 격렬한 지적 호기심을 느꼈고 몹시 당황했다. 문맹은 나였다. 그들은 비장애인의 언어와는 다른 방식의 언어로 나와 소통하고자 했지만, 나는 장애인의 언어를 읽을 수 없는 문맹이었다. 그들의 언어와 나의 언어 중 나의 언어가 소통의 기준이 되는 언어, 우월한 언어라는 인식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편승한 무임승차 행위일 뿐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 2004.02.04(수)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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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석학 자크 데리다 강연회 현장 중계
‘말’이 배반한 진실을 캔다

ⓒGAMMA
‘소유권 없는 텍스트의 저자’로 유명한 자크 데리다는 말과 글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독자에게 ‘전이’한다.
지난 6월9일, 프랑스 동북부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크 블로흐 대학의 한 강의실. 강의실에 10여 분 늦게 나타난 강연자는 우선 급한 대로 문가에 놓인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한 교수가 이 날 수업 내용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던 터였다. 책상에 쭈그리고 앉은 이는 다름아닌 자크 데리다.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에 자신의 권위를 각인한 해체주의의 거장이다. 이 날 강연의 주제는 ‘자크 데리다 주변에서’였다.

곧바로 한 여학생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이 날 초청 강연자가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철학계의 거두인 만큼 거창한 소개가 있을 법한데 생략. 문간에 앉아 있던 데리다는 얼른 가방을 뒤져 수첩을 꺼낸 뒤 학생의 말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드나들어 정신 없고 옹색한 자리인데도 데리다는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중간에 누군가 귓속말을 건넨 뒤에야 그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런데 하필 그가 앉을 자리는 여러 사람이 일어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계단 강의실의 긴 의자 한 구석. 그는 훌쩍 의자 등받이를 뛰어넘어 빈자리에 착지했다. 순간 좌중에서 웃음이 일었다.

‘해체’는 그의 텍스트에서만 아니라 이미 그의 몸짓에서, 그가 참석한 수업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거추장스런 의식과 절차를 해체한 것이다. 주최측도 마찬가지였다. 초대된 인사를 위해 굳이 따로 좋은 자리를 마련하거나 챙겨주지 않았다.

무신경은 자유로움이었다. 적어도 오늘날 프랑스 대학생이라면 데리다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의자 등받이를 뛰어넘었을 때, 1968년 이후 프랑스 사회에 스며든 ‘반권위’에 탄복해서 웃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젊은 날 한때 지네딘 지단 같은 축구 선수를 꿈꾸었던 73세 노인의 놀라운 운동 신경에 감탄하며 웃었을 것이다.

이 날 강연에는 학생과 선생이, 저자와 독자가 따로 없었다. 자크 데리다는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였다. 아니 듣기 위해 말하는 자였다. 오전 11시30분부터 시작해 저녁 7시30분까지 계속된 이 날 강연의 주요 발표자들은 그의 쟁쟁한 동료 철학자들이 아니라 데리다를 공부하고 데리다를 배우려는 학생들이었다.

석사 및 박사 과정 대학원생 4명이 높은 강단에 올라 서로 돌아가며 주제를 발표했고, 데리다는 이들의 발치 아래에서 그 어떤 학생보다 열심히 발표를 받아적었다. 그의 말마따나 ‘소유권 없는 텍스트’의 작가, ‘쓰되 내것이라고 굳이 서명하지 않는’ 작가 자크 데리다와 그의 철학이 있을 뿐이었다. ‘네가 데리다를 알아?’라고 누가 딴죽을 걸고 이죽거리겠는가.

“얼굴보다 글이 낫다”


ⓒ류재화
지난 6월 초순 자크 데리다를 초청해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대화’라는 강연회를 개최한 작은 서점 클레베(맨 위). 위는 서점에 쌓여 있는 자크 데리다의 저술들.
자크 데리다의 이 날 강연은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대화’라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다. 첫날은 고등학교 학생·교사 들과 함께 ‘가르치다’와 ‘전수하다’ 개념을 놓고 토론했다. 데리다가 개인적으로 갖는 두 가지 고유한 경험, 즉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책으로써 무엇인가를 ‘전수’하는 저자로서의 경험을 토로하며, 말과 글의 경계에 관한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일방적 전달 대신, 그는 ‘전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저자란 텍스트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개념이 도출되었다. 항상 무엇인가 벌려진 틈을 찾는 그의 철학적 변주는 ‘해체’의 가장 원천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자신이 하는 강연의 대부분을 미리 글로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가 행한 강연과 심포지엄은 현장에서 녹음되어 바로 출판된다. 그의 저서가 100 권이 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트라스부르 시와 클레베 서점이 함께 주관하는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대화’는 몇몇 테마를 가지고 매달 다양한 작가들이 독자들과 대화하는 프로그램이다. 클레베 서점은 시골의 한 작은 서점이지만 단순한 서점은 아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이 서점에는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방이 있다. 이 방을 르네 지라르·레지스 드브레·르 클레지오·아멜리 노통·줄리아 크리스테바·아시아 제바르·아민 말루프 등 프랑스 인문학을 대표하는 쟁쟁한 인사들이 다녀갔다.

자크 데리다는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의 책에도 사진을 거의 넣지 않는다. 사진거부증에 대해 하도 많은 질문을 받은 터여서, 데리다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얼굴보다 글이 낫다는 판단에서다”라고 농을 친다. 사진 자체를 싫어한다기보다 ‘저자’ 개념에 대한 각별한 철학이 있는 것이다.

독일과 국경을 맞댄 스트라스부르는 인구 30만이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지만 유럽의 심장부 구실을 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입법·사법 기관 및 유럽 인권위원회가 모두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자크 데리다가 결성한 작가국제회의와 철학자국제회의 사무실도 모두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스트라스부르 시가 내놓은 각종 안내 책자를 보면 네거리·교차로라는 뜻의 ‘스트라스부르’를 유난히 강조한다. 갖가지 이질적인 사고와 철학이 만나는 교차로 역할을 하고 있거나, 해야 한다는 뜻이다.

데리다는 스트라스부르가 ‘의회’의 도시라는 점을 부각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밑줄을 긋는 ‘의회(parlement)’란 의원들의 집무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이 서로 부딪치고 논박되는 ‘말하는(parler/parlementer)’ 공간이라는 의미다. 어떤 한 단어의 이면에서 철학적 주제를 곧잘 이끌어내곤 하는 자크 데리다는 일반 시민들과 가진 토론회에서도 스트라스부르를 은유해 자신이 최근 강조하는 ‘주도권(주권)’ 개념을 언급했다. 즉, 무엇인가 ‘교차’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도권이란 어느 누구의 일방적인 ‘주도권’이 아니라 상호의 적 혹은 상호 교섭자가 동시에 갖는 주도권을 뜻한다. 1인이 갖는 주도권이 아니라, 2인이 동시에 갖는 주도권이 현실 정치에서 가능할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유럽과 미국 문제, 세계화 문제 등을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견해도 이 ‘주도권’ 개념을 중심으로 선회한다.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이 뜸했던 자크 데리다가 최근 다시 바빠진 것은 9·11 테러 이후 세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독일의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와 나눈 대담집 <9·11이라는 개념>이 최근 프랑스어판으로 출간되었는데, 데리다는 9·11을 어떤 ‘사건’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정의한다. 9·11 테러라는 재앙적 사건은 그것이 과거가 되면서 트로마티즘(외상)을 유발한다. 그러나 9·11은 미래에서 오는 트로마티즘이다. 무엇인가 더 오리라는 것이다.

불가능의 가능성 역설하는 ‘마지막 검객’

알제리계 유태인인 데리다는 반유태주의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칼날을 들이댄다. “오늘날 가장 참아줄 수 없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은 이스라엘 샤론의 정책을 더 이상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유태주의만 문제 삼지 반유태주의가 왜 생기는지 자성하지 않는 미국과 시나고그의 지지를 받아 이스라엘 정치는 더 공고해지고 있다”라고 그는 일갈한다.

최근 데리다는 ‘문화와 독립’이라는 프랑스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심하게 말하면 냉전 시대가 오히려 나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늘날의 세계는 최악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트랑작시옹(교섭·transaction)’이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그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도권이란 단순화하면 교섭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다”라고까지 말했다. 그가 말하는 트랑작시옹은 깃발을 내리고 투항하는 식의 교섭이 아니다.

아카데미즘과 권위 체계에 정면 공격을 가했던 1960년대의 ‘검객들’(라캉·알튀세르·푸코·바르트·들뢰즈 등)이 모두 사라진 지금, 자크 데리다는 그 마지막 생존자로서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시대적 예언자도, 메가폰을 들고 외치는 ‘사르트르’도 아니다. 다만 그는 회의하고, 주저하고, 우회하며 끝없이 ‘진실’을 찾아 나서고 있을 뿐이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더듬거리면서라도 끝없이 파고들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우리가 파야 하는 우물은 ‘바닥 없는 우물’일 수 있다.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2004/07/08 767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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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7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의 근황을 전해주는 반가운 기사가 있어서 퍼왔습니다. 작년 말 데리다가 오늘내일한다고 해서(실제로 프랑스 신문들은 데리다 추모 특집호를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건강을 되찾았군요.
한 가지 더. [법의 힘]은 다음 주 월요일 쯤 출간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알라딘에까지 이 책이 언제 나오는지 문의를 하셨다고 하는데, 이처럼 늦어져서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마침내 출간된다는 소식이 와서, 저도 오랜 짐을 벗게 되어 후련하기 그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