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 “헌법개정” 목소리 번진다


△ 2004년은 헌법이 우리 정치·경제·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학계의 관심은 이제 현행 헌법이 ‘국민주권’의 원리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1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탄핵심판 사건 결정 선고를 내리는 모습(위)과 17대 총선 직후인 4월17일 서울 광화문 앞에 모여든 시민들이 탄핵무효를 외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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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탄핵발의·이라트파병 등 거치면서
    정치·사회학자들 문제제기 나서

    2004년을 대표하는 으뜸말은 헌법이다. 대통령 탄핵을 발의한 야당과 이들을 규탄하며 거리로 나온 국민들 모두 그 근거를 헌법에서 찾았다. 헌정문란·파괴 행위로부터 헌법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라크 파병, 행정수도 이전, 송두율 교수, 양심적 병역거부 등도 그 뿌리를 헌법에 두고 사회적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바야흐로 “모든 사회적 문제가 헌법적 문제로 귀결되는”(조국 서울대 법학과 교수) 시기가 온 것이다. 그것은 “헌법을 정략적·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던 과거에 비해서는 분명한 진전”(김종철 연세대 법학과 교수)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헌법을 헌법재판소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데 있다. 1987년 10월 개정 이후 16년 이상 외면당했던 헌법이 갑자기 만인의 화두로 떠오른 지금, “사회적 갈등이 깊을수록 더욱 의존해야 하는 헌법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라도 진지한 헌법 개정의 담론이 필요하다”(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제안이 조금씩 번지고 있는 것이다.

    헌법 개정을 말하는 학자들의 문제의식에는 “현행 헌법은 ‘이행기 헌법’일 뿐, 온전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헌법이 아니다”(박명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판단이 깔려 있다. 21세기적 상황은 물론 80~90년대조차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현행 헌법의 균열과 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조국 교수는 “다음 대선이 오기 전에 정치권이 권력구조와 관련한 개헌 문제를 제기할 것이 분명한데, 그 이전에 전반적인 헌법 개정의 틀을 학계와 시민사회가 함께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소수 정치집단의 협약으로 점철된 헌법 개정사에 마침표를 찍고 ‘국민주권적 합의’로서의 헌법을 마련해 “민주주의 발전에 조응하는 국가 정체와 국가 개조의 전망을 온전히 담아낸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헌법은 이행기 헌법일 뿐
    민주주의 보장하는 헌법 아니다”

    당연히 학계의 관심은 기본권의 확장에 집중된다. 정해구 교수(성공회대·사회과학부)는 “헌법 제·개정 과정에서 국민적 토론과 합의를 거친 적이 한번도 없었던 탓에 과거 헌법 개정은 권력구조 개편에만 치중했다”며 “이제는 헌법상 기본권 조항을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광범위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헌법 개정의 필요성에 원칙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당면 과제’로 현행 헌법의 실질적 구현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87년 헌법체제’가 드러낸 여러 정치·사회적 갈등은 “헌법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헌법 구현의 문제”(김종철 연세대 법학과 교수)라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행 헌법의 ‘급진적·민주적 해석’”(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이라는 지적도 비슷한 맥락이다.

    헌법을 둘러싼 이런 논의는 학술지나 심포지엄을 통한 공개적 발표나 논쟁보다 소규모 연구그룹 등을 통해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 논의가 품고 있는 파괴력을 감안하더라도, 아직 그 연구성과는 부족하고 관련 학계의 발언도 조심스럽다. “사회적 논란을 헌법적 고민으로 승화시킬 연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김종철 교수)한 학계의 상황도 여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87년 헌법체제’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헌법학의 영역을 넘어 확산되고 있고, 오히려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관련 논의를 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헌정체제의 ‘민주화’를 헌법에 더욱 또렷이 새겨넣으려는 인문사회과학계의 거대한 기획이 건국 헌법 제정 56년 만에 그 첫걸음을 떼고 있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현행 헌법  어디가 문제인데?

     

    “1987년 밀실협상‥국민참여 생략”주장에
    “나름대로 합리성‥선진국에 안뒤져”반론

    헌법을 둘러싼 학계 연구는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방대한 영역에 걸친 첨예한 논쟁 대부분이 잠복해 있는 가운데, 현단계 학계의 접점은 일단 ‘87년 헌법 체제’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장영수 교수(고려대 법학과)는 87년 헌법의 긍정성을 지적하며, “섣부른 개헌논의 대신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행 헌법은 “건국 이후 10개의 헌법 가운데 16년 이상 안정성을 유지해온 ‘최장수 헌법’”이고 “그만큼 국민적 합의의 기초가 높고 나름의 합리성을 갖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헌론자들이 비판하는 현행 기본권 조항의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37조 1항)고 규정하는 등 사회변화에 따라 새로운 기본권이 인정될 수 있는 근거를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및 사회국가 원리에 관련한 현행 조항도 선진국 헌법에 뒤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장 교수는 “현행 헌법 구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과제를 제쳐놓고 이것저것 다 집어넣고 보겠다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87년 헌법성립의 ‘역사적 과정’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그 과도적 성격으로부터 개헌의 필요성을 이끌어낸다. 김종엽 교수(한신대 사회학과)는 “87년 헌법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권력구조의 큰 틀은 수용했지만, 그밖의 구체적 내용들은 당시 여야의 밀실협상을 통해 이뤄졌다”며 “국민적 참여와 이에 따른 학습과정이 생략된 헌법에 대한 사회적 존중은 확고한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이는 헌법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기본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묘한 시각 차이의 이면에는 ‘대의민주제’와 ‘국민주권’의 원리를 어떻게 혼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다. 헌법 개정을 주장하는 박명림 교수(연세대 국제학대학원)는 “탄핵정국을 통해 드러난 대통령과 의회의 충돌, 의회와 시민사회의 충돌 등은 본질적으로 현행 헌법이 내포한 주권 충돌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며 “국민 주권의 원칙 아래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실질적인 노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공동체의 의지와 시대정신이 반영되는 헌법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행 헌법의 어떤 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흡한지는 분명치 않다”(김종철 연세대 법학과 교수)는 지적은 헌법 개정론자들에겐 뼈아프다. 개헌의 ‘당위’는 있는데 개정헌법의 ‘구체’에 이르는 길은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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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lmas 2004-07-18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 판결이 나오던 날, MBC 9시 뉴스의 앵커는 "당연한 결정"이라는 촌평을 하더군요. 내참 어이가 없어서 ... 대법원이 보수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도 존중하지 못하는 대법원의 존재이유는 도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결정입니다.
    헌법에 관한 학계의 관심이 얼마나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지 좀 회의적이지만, 일단 지켜볼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