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시간강사 푸대접은 大學모독”


 

그들에게 방학은 살벌한 기간이다. 실업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서둘러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알아봐야 할 때이다. 연구를 하려고 해도 강의가 없는 방학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도 빌릴 수 없다. 사회에서는 시간강사라고 부르는 비정규직 대학교수. 그들은 정규직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도 하고 논문도 발표한다. 그러나 교수로서의 법적 지위와 대우를 받지 못한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1962년 교육법을 개악(改惡)한 뒤 교원의 지위를 빼앗겼다. 말하자면 ‘무적자’가 됐다. 당연히 그들은 직장의료보험도 적용받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권사각지대에 놓인 처지다.

비정규직 대학교수 노동조합(위원장 변상출)의 진정을 받은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달 중순 ‘시간강사도 지위와 교육 활동 가치를 인정받고 전임교원에 비례하는 합리적 대우를 받아야 된다’고 결정, 교육인적자원부에 권고했다.

“교육부는 꿈쩍도 하지 않아요. 권고안이 나온 뒤 시간강사들이 더 홍역을 치르는 대학도 있습니다.”

비정규직 교수노조 심세광 부위원장(41·성균관대 분회장)은 “시간강사들이 대학교육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현실은 ‘파출부’에 불과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시간강사의 수는 정규 교수의 두배가 넘습니다. 사실상 대학교육은 시간강사들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법적으로는 교원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급여도 급여지만 학생들 논문지도도 못하고 학사운영에도 참여할 수 없어요.”

프랑스 파리10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성균관대에서 불문학 강의를 해 온 심 부위원장은 “시간강사들은 사실상 ‘학문적 권력’의 장벽에서 밀려난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전두환 정권 때 졸업정원제를 시행하며 대학의 정원을 대폭 늘려놨지만 대학은 학생만 늘리고 교수는 늘리지 않았다. 그 자리를 메워온 것이 시간강사들이다.

“악순환을 하는 겁니다. 그나마 많은 시간강사들이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대학교육을 이만큼이라도 떠받치고 있는 겁니다.”

시간강사의 강의료는 대학 마음대로다. 2만원대에서 4만원대로 천차만별이지만 평균 시간당 3만원꼴. 시간강사들은 대개 1주일에 3시간짜리 과목 하나를 맡아 강의한다. 얼핏 셈으로 한달 강의료는 36만원. 정부가 책정한 1인가구 최저생계비 36만8천원(최근 최저생계비 체험행사가 열렸는데 참가자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에도 못미친다. 그나마 방학 때는 강의가 없기 때문에 강의료도 없다.

시간강사들은 생계를 위해 우유배달, 주유소, 막노동 가릴 것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따라서 연구하고 학생들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을 그만큼 빼앗기게 된다. 쉽게 말해서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교육권의 박탈이다.

“시간강사들도 교원으로 인정해줘야 합니다. 군사정권이 개악한 교육법을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심부위원장은 대학입시가 교육의 전부인양 호들갑을 떠는 우리나라 교육계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했다. 자신이 평생 가야 할 길을 찾는 과정인 대학교육은 모두다 나몰라라 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니 한국 대학의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다. 이제 대학교육을 정상화하는 데 나라가 적극 나서야 하며 그 중 하나가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심부위원장과 인터뷰를 한 날 공교롭게도 한국과 중국, 일본의 이공계 대학생을 비교한 결과 한국의 과학 수준이 꼴찌라는 보도가 나왔다.

〈윤성노기자 ysn0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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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미술사학적으로 풀이한 사찰이 지니는 의미

  사찰은 우리 산하의 도처에 자리잡고 있으며 불교인은 물론이고 불교를 종교로 갖지 않은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광광코스에는 어느 사찰이건 꼭 끼어 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 주변에는 어디에고 사찰이 있다는 말이 될것이다. 한편으로 오랜동안 불교를 숭앙해온 한반도의 종교적 형태로 말미암아 불교 문화재는 우리 문화재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다녀 올 수 있는 사찰에 담긴 의미를 차분하게 되새겨보고자 하였다. 사실, 불교를 종교로 택한 불교인들 조차도 사찰에 다니지만 사찰의 각종 조형물이 갖는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찰을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인 숙명여대 정병삼 교수는 일주문에 들어서면서 부터 접하게 되는 사찰 권역의 조형물에 대하여 미술사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사찰에 있어서의 미술사학적 접근이란 각각의 조형물이 갖는 의미를 풀어내는 일이 될것이며, 여기에는 종교라는 범주속에서 표현되는 교리가 담겨 있고, 그 교리는 도상이라는 또 다른 형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한다. 사찰내의 수많은 건물들의 용도가 무엇이며 왜 그곳에는 그런 불화와 법구가 있어야 하는지...그리고 각각의 조형물은 어떤 으미를 담고 사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다룬 도서는 여러 종류가 출간 되었었다. 그 대표적인 책이 신영훈이 쓴 <절로 가는 마음>과 허균의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위의 두 책중 허균의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와 가깝다고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 나라의 대표적 사찰에 조형된 여러가지 불교 미술품에 대하여 왜 그곳에 잇어야 하며 이름이 그렇게 불려지는 이유와 다양한 모양을 보이는 구조물들이 왜 그런 모양을 하여야만 되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잇다.

 저자는 오랜동안 화엄사상을 연구하였기에 불교의 교리에 비교적 밝은 편이다. 저자의 이러한 지식은 이 책이 나오기전에 <그림으로 보는 불교이야기>를 통하여 이 책과 유사한 설명을 담은적이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그의 오랜동안의 사찰 연구에서 습득한 사찰이 갖는 의미의 해석이며 사찰 자체를 살아있는 문화유산의 현장으로 확언할 수 있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내용을  사찰 초입에 다라라서부터와 부처가 안주하는 공간, 그리고 보살의 길과 부처의 가르침을 받은 부처의 제자, 또 불교의 교리를 수행하기 위한 스님들의 공간, 절을 처음 세운 조사와 짧은 세상을 살고 떠난 스님들의 자취를 담은 승탑과 비림의 순으로 담고 있다.

  이런 내용을 저자는 모두 10개의 꼭지로 나누고 있는데 제 1장은 절의 형태와 변천과정을 소개하고 있고 제 2장에서는 사찰에 들어서면서 만나게 되는 당간과 일주문, 천왕문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제 3장~6장은 사찰의 중심이 되는 부처 관련 조형물에 대한 설명으로 탑과 등, 그리고 법당과 그 안에 안치된 불상에 관한 설명, 불상 뒷편과 좌우를 장식하고 있는 탱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며 부처가 모셔진 대웅전을 비롯한 비로전, 극락전,관음전, 지장전 등의 전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그 절집에 모셔진 불상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이해를 돕고 있다. 제 7장과 8장에서는 주가 되는 법당과는 다른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산신각, 동성각, 칠성각 등 민간 신앙에서 습합한 토속신앙의 기도처를 설명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부처의 가르침과 관련이 있는 제자상,나한상 등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고 있다. 제 9장에서는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스님들의 공간을 강원과 선원, 요사채, 암자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마지막 10장에서는 그 사찰을 처음 세운 조사를 모신 조사당과 사찰에서 세상의 목숨을 다하고 먼저 떠난 스님들을 기리는 승탑과 비석에 대하여 친절한 설명을 하고 있다.

 뒷부분에는 권말 부록의 형태로 인도와 중국의 사원의 형태와 기원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절을 되돌아 나서며"라는 부제로 절에 들어서면서 부터 느끼게 되는 수행자의 고행과 숨결속에서 자신의 청정심을 되돌아 볼 수 있으며  한결 여유있는 마음으로 사찰을 떠날 수 있는 저자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맛은 책속에 담긴 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사찰을 담은 사진은 설명을 곁들인 참고 사진으로 훌륭하게 이해를 돕고 있다. 내용이 어려운것은 일단 그림으로 접하게 되면 그 어려움도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인데 저자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 다양한 사진을 참고로 활용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오늘 나는 사찰에 간다>는 책 제목과는 달리 당장 오늘은 아니더라도 내일, 모레....또는 그 언젠가 사찰을 찾을 때 이 책은 훌륭한 안내서이며 길잡이의 역할을 톡톡히 할것으로 본다.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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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라크 파병 반대 새노래 '헌법 제 5조' 눈길

송앤라이프, 13일 오후 홈페이지 통해 네티즌들에게 공개

 

석희열 기자

 

"대한민국은 국제평화 유지에 노력하고/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전쟁을 부인한다/ ... / 왜 우린 이유도 없이/ 이라크 친구들과 적이 돼야 하는가/ ... "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국내 여론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군의 추가 파병 방침을 풍자한 노래가 나와 화제다. 민중노래 사이트 송앤라이프(www.songnlife.com)는 13일 새노래 '헌법 제5조'를 발표했다.

한국 정부의 이라크 파병 방침을 비판하고 있는 이 노래는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모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우리 헌법 제5조 1항의 내용을 노랫말로 따와 만들었다.

4분의 4박자의 빠른 리듬에 실어 단숨에 절정으로 치닫는 이 노래의 노랫말과 가락은 민중노래꾼 윤민석 송앤라이프 대표가 지었다. 노래는 이번에도 송앤라이프의 객원작가이기도 한 민중가수 오지총씨가 불렀다.

특히 이 노래는 오지총씨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되풀이해서 내지르는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전쟁을 부인한다"는 타령이 네티즌들 사이에 강하게 파고들면서 파병 반대 여론에 불을 지를 것으로 보인다.

이 노래가 공개된 13일 오후 송앤라이프 홈페이지에 감상평을 올린 한 네티즌은 "제발 국회에 있는 사람들이 이 노래를 들었으면 좋겠다"면서 "특히 '대한민국은 국제평화 유지에 노력하고 모든 침략전쟁을 부인한다'는 구절을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헌법 제5조> 노래 듣기

2004/07/14 오전 6:02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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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1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놈의 한미동맹이 대체 무엇이길래 헌법 위에 있는가
그 놈의 한미동맹이 대체 무엇이길래 국민의 생명보다 중한가"
수많은 국민들의 가슴 속에 피맺혀 있는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인 2004-07-14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희는 아니야'의 후속곡이 결국 '헌법 제5조'가 됐다는 게 정말 서글픕니다.

balmas 2004-07-1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계속 올바른 것을 요구하고 지켜내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윤민석 씨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헌법이 반대하는 그 전쟁에

 

나의 작은 취미 중 하나는 새로 나온 책들을 소개한 신문기사를 보고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만들어서 갖고 다니는 거다. 단골 서점이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은 후론 책을 자주 사지도 못하는데다 바쁘단 핑계로 그중 반도 소화 못해낸 채 볼 책들을 쌓아놓는 곳엔 ‘대기 중’인 것들이 항상 열 권이 넘는다. 그런데 요샌 네 살짜리 딸아이까지 책맛을 알기 시작해서 아이 책까지 살피느라 신간서적 소개하는 날이 더 기다려진다. 그러던 어느날, 어린이들에게 헌법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놨다는 어떤 새 책에 대한 소개 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책을 소개한 기자는 2004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는 거리에 아이들이 몰려나온 일이라면서 탄핵 반대와 이라크 파병 반대 촛불시위에 나선 뜻있는 엄마 아빠라면 어른들에게도 힘든 법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은 이 책을 아이들에게 꼭 보여줘야 할 거라는 얘기였다. 귀가 솔깃해지는 책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책이기에 우리 아이에겐 맞지 않지만 우선 법에 무지한 나부터 일단 읽어보고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조카 녀석에게 선물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 기자는 법치국가인 나라에서 헌법을 다룬 어린이 책이 없었다는 건 난센스라며 책 내용을 소개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의 뜻으로 대한민국을 다스린다.’ 헌법 1조 1항이란다. 가슴이 뻐근했다. ‘남북의 통일과 평화를 지향한다.’(헌법 4조) 우리의 아이들이 읽을 생각을 하니 기특한 책이지 싶다. ‘사람은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헌법 10조) 그 딱딱한 책에 이렇게 낭만적인 얘기도 실려 있나 싶다. 풀어서 쓴 것이겠지만 지나치게 이상적인 얘기라 나중에 상처받기 십상인 구절 같다. ‘양심은 내 마음 속의 진정한 재판관이다.’(헌법 19조) 음 …, 정말 멋진 조항이다. 이런 책을 읽고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면 비전향 장기수나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건드린 대목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을 반대한다’(5조 1항)는 조항이었다. 눈물이 났다. 정말 헌법 책에 그렇게 나와 있다면 이라크 파병을 막아내지 못한 우리 국민 모두는 심각한 범법자가 된 꼴이 아닌가. 우리 어른들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에, 그것도 남의 나라 전쟁에 비굴하게 동참하면서 아이들보고는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하다니….

글 쓰는 사람은 글로, 가슴이 더 뜨거운 사람들은 거리로 나가 파병 반대 뜻을 알렸다. 우리 ‘국민’들이 말이다. 심지어는 ‘국익’ 같은 말을 정말 좋아하던 한나라당의 일부 의원들마저 ‘잘못된 전쟁’이라더라, 우리도 그만두자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주인’인 국민이 목 터져라 반대하는데 … 국민의 뜻으로 나라를 다스리라고 헌법에 나와 있거늘 … 침략적 전쟁엔 동참하지 않겠다 해놓고 … 그렇게 얘기하는 ‘국익’을 입을 당사자인 우리들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지난 대선 때 타는 가슴으로 텔레비전을 지켜보다가 이른바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으로서 대통령이라는 ‘처지’를 이해하려고 무던히도 애써 봤다. 하지만 김선일씨의 울부짖음 앞에 작은 ‘액션’ 하나 없이 ‘고!’를 외친 그를 보고는 정이 뚝 떨어진 게 솔직한 심정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어느 문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ROH’가 아닌 ‘NO’로 표기를 해서 작은 말썽이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실수가 아닌가 싶다. 옛정()을 생각해서 그가 ‘ROH’무현이 아닌 ‘NO’무현이 되는 것만은 막아보고 싶으므로 내가 오늘 신간서적 목록에 올린 이 어린이 서적을 그에게 선물하고 싶다. 가만 있자, 청와대 주소가 어떻게 되더라 참! 그의 전직이 변호사였다지 이런! 이렇게 민망할 데가 ….

오지혜/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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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국가의 품격을 찾을 때다

송두율 교수 사건을 재판하는 서울 고등법원 항소심 판사 제위 귀하,
송두율 교수 기소 업무를 최종 주관하는 강금실 법무장관 및 송광수 검찰총장 귀하,
송두율 교수 사건을 지켜보는 대한민국 시민사회 시민 여러분,

우리 한국 철학인들은 재독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뮌스터 대학 송두율 교수가 작년 2003년 9월, 37년의 망명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국한 이래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말없이 주시해 왔습니다.

사실 이런 긴 방관은 그가 당한 불행하고도 부당한 고난에 비추어보면 참으로 무책임하고도 부적절한 처신입니다. 무엇보다 송 교수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한국 철학계 전체를 망라하는 한민족 철학자 연합대회의 공식 초청이었음을 감안하면 한국 철학계가 무관심 속에서 그의 고통을 방관했다고 지탄받아 마땅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국 초기 관계 당국의 조사 과정에서, 그의 지인들조차 몰랐던 과거 행적이 알려지면서 한국 지식인들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 도덕적 실망감과 책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 때 우리 철학계는 송두율 교수와 더불어 사회적 견책을 같이 받는 심정으로 그 광적인 비방과 중상을 감내했습니다. 한 인간의 도덕적 실책에 편승하여 실정법의 이름으로 권력의 폭압을 가하라는 수구 언론의 비열한 선동주의를 통해서나마 도덕적 실망이 달래지길 바랬던 것입니다. 그것은 송두율 교수 개인이 감내해야 했던 윤리적 몫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민주화되고 있는 우리 국가의 법 기구가 나서서 냉철한 이성으로 송두율 교수의 삶과 그의 인간적 성과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민주화된 우리 국가의 품에 포용하는 조치를 취해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인권 기구, 국제연합 그리고 무엇보다 전세계에 산재한 우리 철학계의 외국 지성인 동료들이 한국 관계 당국에 간곡한 구원 요청을 제출하고 우리 철학계의 침묵을 질책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인내성을 갖고 대한민국 시민과 법기구의 민주적 양식(良識)을 우선적으로 존중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4년 3월 30일, 송 교수를 겨울 냉기가 몰아치는 독방에 5개월 넘게 감금하고 난 뒤 나온 1심 판결은 단지 송 교수의 신체와 그의 정체성을 위협에 빠트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그렇게 단죄하는 것을 허용한 이 국가의 품격을 심각하게 실추시켰습니다. 우리의 철학적 양식으로 보기에 대한민국 국가는 송두율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낙인찍음으로써 자기 손으로 제 품격을 망가트리는 오류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어느 면에서 송두율 교수 개인보다 이 대한민국 국가의 품격과 우리 자신의 인격이 위기에 빠지는 것을 구하기 위해 다시 한번 궐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1심 재판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에 강력한 의문과 규탄을 제기합니다.

1. 우선 우리는 1심 재판부가 송두율 교수의 제반 활동과 관련하여 양심과 사상의 문제에 관한 법적 판단에서 가장 중시해야 하는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을 입증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고 마치 송두율 교수의 행적이나 사상’때문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북한으로부터 우리 국가에 위협이 오는 것처럼 단정한 그 무분별한 판단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습니다.

   한 개인의 정신적 활동의 자유 및 그 제한의 조건과 관련하여 여러 판례를 통해 입증된 가장 적절한 규정을 담았다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요하네스버그 원칙> 제6조는 한 국가의 체제를 가장 극렬하게 비판하고 부정하는 사상을 표명하고 실천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경우가 아니면 절대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즉 그런 사상이 1)‘급박한’imminent 폭력의 사용을 선동하려고 의도한 경우, 2)그로 인해 ‘실제로’practical 폭력이 유발되리라고 판단되는 경우, 3) 이런 사상이 그와 같은 폭력이 발생했거나 발생할 조짐이 있다는 사실과 ‘직접적인’immediate 관련이 있는 경우에 한해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두율 교수의 사상이나 학문, 또는 기타 북한을 드나든 행적이 급박한 폭력의 사용을 의도한 것이거나, 그런 폭력을 실제로 유발하였거나 유발할 조짐이 있던가, 아니면 북한에서 유발했다고 믿어지는 폭력 사태와 즉각적인 관계가 있다고 입증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송 교수의 행적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 체제 또는 그와 관련된 국가 활동이 명백하게 저해받을 정도로 위협받았던 경우가 현존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현행 <국가보안법>은 그 제1조 제1항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 규제 대상으로 삼으며, 특정 활동을 이런 반국가활동으로 해석함에 있어서 엄격한 해석을 의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에서 있는 대로 추적해 드러낸 송두율 교수의 37년 망명 생활을 샅샅이 훑어보더라도, 그가 노동당에 가입한 것까지 포함한 그 어떤 활동도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유신과 제5공화국에 걸쳐, 그의 귀국으로 인해 새로 드러난 북한과의 과거 접촉 활동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북한의 사회주의나 주체사상체제보다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복원시키는 데 유익하게 작용했던 활동을 더 많이 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2. 무엇보다 우리는 학문을 전업으로 하는 철학자들로서 1심 재판부가 학문적 활동의 비판적 전문성 및 학문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진리 확정의 합리적 과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송두율 교수의 학술적 집필활동을 놓고 “순수한 학문활동의 일환으로 이러한 저술을 하였다고 볼 수 없고, 북한과의 의사 연락 하에 북한의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김일성, 김정일 체제를 선전할 목적으로 이와 같은 저술활동을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단정한 점에 관해 경악을 넘어 허탈함을 느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판결은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이 “북한 사회의 결과물을 경험적으로 치우침이 없이 올바르게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북한사회, 김일성, 김정일을 미화, 찬양”하려는 의도에서 “분석, 평가대상에 대한 심한 편파성의 결과”로 나왔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재적 방법론은 남한의 ‘북한바로알기운동’을 겨냥하여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유포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채택된 선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정은 일단 학문적 논증 및 비판의 공동체 안에서 방법론이라고 고지되고 나면 그 방법론이 어떤 검증 절차를 거치는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나온 그야말로 음모론적으로 굴곡된 피상적 추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1심 재판부의 피상적 이해와는 달리 학문세계에서 ‘방법론’은 연구 대상 전체를 샅샅이 보려는 관점에서 제시되지 않습니다. 방법론은 항상 그 방법을 통해 보고자 하는 대상의 특정 측면, 즉 특정한 학문적 문제 의식에 답을 줄 수 있는 부분을 보고자 해서 고안됩니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은 외재적이거나 선험적 방법으로 볼 수 없었던 북한 사회의 부분, 그것도 중요한 부분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지, 북한 사회 전체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학문적 방법론의 숙명입니다. 따라서 어떤 연구 대상이든 한 방법론으로는 그 대상의 모든 측면을 볼 수 없습니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은 북한 사회를 이해할 때 결여되어 있었던 그 사회 내의 행위 주체들의 동기연관, 그것도 그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동기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북한 지도층을 근접 관찰하고 그들과 비교적 솔직히 대담했던 결과적 정보들을 국내의 언론매체들을 통해 아주 정직하게, 그야말로 친북적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학문적 성과의 공개 원칙에 충실하게, 국내 독자들에게 공개했고, 이것은 당연히 한국의 학계에 찬반 양론의 담론장을 형성했습니다. 다시 말해 송두율 교수는 민주 사회에서 보장되는 학문적 검증 절차를 합리적으로 밟아나가고 있었고, 당연히 그 과정을 통해 내재적 방법론의 적용상의 문제점에서 내재적 방법론 그 자체의 문제점까지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지는 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송두율 교수가 북한에 관해 공개한 정보들은 상당한 정확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면서도, 다른 그 어떤 방법론도 그렇지만, 완벽한 것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불완전성을 법적 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그것도 7년이나 징역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3. 우리는 송두율 교수의 저작물이 국내 주사파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때문에 한국 사회가 상당히 위기에 빠진 듯한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재판부의 판결을 보면서 한국 사법부의 일선 판사분들이 얼마나 한국 사회의 흐름과 두려울 정도로 차단되어 사회적 무감각 상태에 매몰되어 있는지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학생운동 및 그가 변혁 운동에서 주사파는 80년대 초 5공 군부독재체제의 폭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북한에 눈을 돌렸던 비뚤어진 기대 속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주사파 발생의 가장 결정적 계기는 폭력적 억압을 일상화시킨 결과 멀리 있는 북한 정권을 오히려 온정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전두환 정권의 공포정치였습니다.

4. 우리는 송두율 교수가 처음 자성적 성찰문을 발표한 작년 10월 2일부터 그 엄혹한 추위를 지낸 현재까지 일관되게 대한민국 헌법과 자유민주주의에의 충실성에 입각하여 모든 담론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재판부가 전혀 주목하지 않는 그 일방적 무신경에 분노합니다. 자존심을 가진 지식인이 공중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도 파괴되지 않은 자기 모습을 보여 주려고 분투하는 정경은 이 순간 우리 사회가 누리기에는 과분한, 인간 정신력의 또 다른 성과라는 점을, 바로 이런 점에 항상 유의하는 우리 철학인들이 주목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송두율 교수의 범죄구성행위라고 하는 것들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분단체제 아래서 남한의 독재정권들이 북한보다는 남한의 국민들을 억압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며 통상적인 교류생활을 한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일상적 활동 범주들이 국가보안법에 반국가단체구성(3조), 잠입·탈출(6조), 회합·통신(8조) 등의 거창한 법률개념으로 채색되어 범죄구성요건으로 적시되어 있는 한 재판부는 그런 활동이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도 그런 활동을 범죄행위로 분류하는 거창한 재판 절차를 소모적으로 진행시켜야 할 것입니다.

현행 국가보안법의 취지를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더라도 송두율 교수의 범죄라고 되어 있는 모든 활동을 범법행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이런 우매한 법이 계속 존속되는 한 우리 국가의 시민의식은 계속 위축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 행위가 언제든지 범죄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국가의 언행이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국가의 품격을 찾을 때입니다. 이에 우리 철학인들은 항소심 재판부, 법무장관, 검찰총장, 그리고 시민사회의 시민분들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탄원합니다.

첫째, 재판부는 현행 국가보안법으로라도 송두율 교수를 무죄 석방하라.

둘째, 송두율 교수를 무죄 석방할 용기가 없으면 국가보안법의 유효성에 대한 국회의 토론 과정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불구속 재판하라.

셋째, 한국 사법기구로 하여금 계속 무의미하고 우매한 판결을 하도록 강요하는 국가보안법을 전면 폐지하라.


2004. 7. 15.

송두율 교수의 무죄석방과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전국 철학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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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13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말씀드린 성명서 초안입니다.
저는 한두 개 문구의 내용에 동의하기가 어려워 아직 서명에 동참하지는 않았습니다(초안을 작성한 분들에게 수정을 요구했습니다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