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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8-02-15  

안녕하세요, 또 질문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진태원선생님께서 페이퍼에 쓰신 글 중에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관해 쓴 것을 읽어보았는데요, 제가 기존에 알고 있기로는, 정치는 계급투쟁이고 그때문에 책을 읽는 행위라든지 집회에 나간다든지 친구들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든지 그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반면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하고 우리가 투표권을 행사하며 선거를 하는, 고등학교 정치 시간에 배우는 정치(사회 속의 한 심급-국가-으로서의 정치)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알튀세르나 발리바르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아는데요,

선생님 글을 보니까 클로드 르포르나 샹탈 무페(정치적인 것의 귀환)는 두 용어를 거꾸로 사용한 것 같더라고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건지 궁금하고, 또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르포르와 반대로 그 용어를 사용하는건지 궁금합니다.

 
 
balmas 2008-02-15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르포르나 무페가 "politcs"와 "the politic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전자는 "제도적인 정치"를 후자는 "정치라는 장 자체를 설립하는 작용/행위", 또는 "제도적인 정치를 벗어나거나 비껴가는 것"을 뜻하죠. 발리바르의 경우 이러한 용법을 전위해서 쓰고 있는데, 반대로 쓴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좌파 정치학자들이 두 개의 용어쌍을 쓰는 이유는, 제도적인 정치와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하고 싶기 때문이겠죠. 다만 각자의 관점에 따라 두 개의 용어쌍을 연결하는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고 ...
 


비로그인 2008-02-11  

balmas님과 이 곳 서재를 방문하는 철학 전공자님들 공부하신다고 심신이 힘드실텐데 머리 좀 식히자는 뜻에서(과연 식을지는 장담 못하지만^^;;) 미술가의 눈으로 바라본 '철학'과 '철학자'의 모습을 올려볼게요. 작년에 제가 모아둔 이미지들을 올려볼까 하는데요, 아마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의 흉상 조각이나 그림(대표적으로 시스틴 성당 벽화 중 하나인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1510))은 많이 보셨을거에요. 이런 류의 작품은 대게 해당 분야의 독보적인 미술가(당시엔 '장인')가 교회나 아카데미의 하청(?)을 받아서 만든 것들인데요. 이와 달리 제가 지금 소개하는 작품들 대부분은 그러한 주문 제작 형식의 기념비적인 초상화의 성격과는 좀 차이가 있는 것들이랍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작품들은 당대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미술가들의 개인적인 '평가'가 보다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들이거든요. 그 평가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겠죠. (아주 나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안 올렸어요^^;)  * 퍼온 사진들과 직접 찍은 사진들이 섞여 있어서 보는데 불편하실 수 있어요 *

 Gerbrand van den Eeckhout, The Philosopher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네델란드의 화가 에크호트(Eeckhout)의 <철학자(The Philosopher)>(좌)와 <책을 보고 있는 학자(Scholar with his book)>(우)에요. 이 두 그림 모두 17세기 중반에 그려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에크호트는 네델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의 애제자였죠.

Luca Giordano, The Philosopher

이태리 출신의 루카 지오다노(Luca Giordano, 1634~1705))가 그린 <철학자>에요. 지오다노가 그린 다른 그림들(특히 스페인 궁정화가 시절 그림들)에 비하면 대상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보이네요. 전 이 그림 속 철학자의 얼굴을 보고 이탈리아의 철학자였던 브루노가 화형당했던 사건이 머릿속에 자꾸 떠올라서 난감했다는=_+;

Jean-Baptiste Oudry, The Philosophy Lesson <i>or</i> The Triumph of Goodness

프랑스의 화가이자 도안가인 오드리(Oudry)가 그린 <철학 레슨(The Philosophy lesson)>(1713)입니다.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오늘날 국립미술대학교 정도?) 회원답게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아주 고상하게 그려놓았네요.

Jean Louis Ernest Meissonier, The Philosopher

이 그림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메소니에(Jean-Louis-Ernest Meissonier)가 그린 <철학자>(1878)란 제목의 수채화에요. 그림 속 철학자 분 너무 의식하신 듯.ㅋㅋ 메소니에는 1848년 프랑스 이월 혁명 때의 혼란상을 그린 화가로 국내에서 더 유명하죠. 대표작으로 <바리케이드>가 있어요.

Edward Hopper, Excursion Into Philosophy (study)

역시 국내에서 인기 많은 미국 화가 중 한 명인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1959년에 그린 드로잉인 <철학으로의 여행(Excursion Into Philosophy)>입니다. 꼭 저렇게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색해야 하는 것일까요?

  

앤디 워홀의 판화들. 왼편이 마틴 부버, 오른편이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 판화들은 원래 "20세기 10명의 유태인 초상들"  시리즈 중 하나에요. 워홀의 비지니스 감각이 미치는 범위는 철학자라고 예외는 아니네요...체 게바라가 끝인 줄 알았는데-_-*

http://www.warholprints.com/portfolio/Jews.html 방문하시면 더 많은 판화를 보실 수 있어요.

 Wang Mai oil on canvas, 240 x 220 cm. Courtesy ALEXANDER OCHS GALLERIES BERLIN I BEIJING  Wang Mai acrylic oil on canvas, 260 x 150 cm. Courtesy ALEXANDER OCHS GALLERIES BERLIN I BEIJING

요즘 한국 미술품 중개상들과 큐레이터들한테 주목 받는 중국 작가 왕 마이의 <마르크스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좌)와 <자본주의의 광명(The Brilliance of Capitalism)>입니다.(마르크스는 왼편 그림 호랑이 얼굴 속에 있어요.)

Photo
이 그림은 마크 더쳐(Mark Dutcher)의 <철학자의 고뇌(The Martyrdome of Philosopher)>라는 작품이에요. 처음 보면 현란한 색상 때문에 마냥 화려한 채색화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계속 보면 모래시계, 맥주병, 유리잔, 초, 그리고 윗 부분에 둥둥 떠다니는 우주때문에 제목처럼 철학자의 고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1999년 암스테르담에서 전시했던 스피노자 조각상-_-;;(비닐 포장도 작품의 일부라고 하네요 ㅎ)

이건 2000년 아비뇽에 세워졌던 들뢰즈 조각상-_-;;

2004년 파리에서 열린 <24H 푸코>전 Thomas Hirschhorn, "24h Foucault"  를 클릭해주세요.

위의 스피노자와 들뢰즈, 그리고 <24H 푸코>전을 제작한 작가는 스위스 출신의 토마스 허쉬호른(Thomas Hirschhorn)이라고 제가 무척 관심있어 하는 작가인데요, 한국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았고, 또 소개된다하더라도 인기가 있을지 의문인 작가입니다. 허쉬호른이 왜 유독 스피노자, 바타유, 푸코,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자신의 작업에 끌어 오는지에 대해서는  http://www.papercoffin.com/writing/articles/hirschhorn.html 를 참고하시면 좋으실 듯 해요. 사실 이 세 작품은 허쉬호른의 작업 중 시각적으로 꽤 양호한 편-_-; 제작년 미국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허쉬혼의 전시에서는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서 희생당한 영혼들을 아래와 같이 다시 불러내더군요.

 허쉬호른은 작년부터 <스피노자 맵(Spinoza Map)>에 올인하고 있대요. http://artnews.info/texts.php?g_a=index&g_i=5219 가서 보시면 되요.

   

이 작품은 2007년에 뉴욕에서 전시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안젤로 필로메노(Angelo Filomeno)의 자수(embroidery) 작품이에요. 두 점 가운데 왼쪽 작품의 제목은 <철학자와 그의 여인>인데, 나중에 들은 얘기론 그건 부제이고 원래 제목은 <My Love Sings When the Flower is Near>라더군요. 오른쪽 작품 제목은 <응가하는 철학자(Shitting Philosopher)>에요. 확대해서 보면 저렇답니다. 사진상으로는 알아볼 수 없지만, 작가가 실크 위에 직접 수를 놓았는데요, 군데 군데 반짝반짝한 점들은 크리스탈이에요.  이런 작업은 실제로 봐야 그 맛이 나는데 정말 안타깝네요.

 
 
balmas 2008-02-11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대단합니다, 쫄바지님. 너무 멋진 선물이네요. 허쉬호른의 작업은 정말 흥미롭네요. +_+
 


[해이] 2008-02-05  

발마스님, 이제 설인데 어디 안내려 가시나요?> 설 잘 보내시길 바래요~

다름이 아니고, 저번에 이종영씨 [윤리학] 번역에 심각한 오역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국역본을 읽어봤는데 어느 부분이 잘못됐는지 잘 모르겠어서요. 영어판도 없고, 잘 안읽히는 부분은 오역때문인지 제가 이해를 못해서 인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어렵습니다. 설명해 주셨으면 감사하겠고, 진선생님께서는 바디우의 철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설 잘 보내세요~

 
 
balmas 2008-02-08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감사합니다. Hey님도 설 잘 쇠셨는지 모르겠네요.
제 기억으로는 바디우의 [윤리학] 번역에 심각한 오역이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아마 [존재의 함성] 번역이
[윤리학] 번역보다 낫다고 얘기했겠죠. ^^ 어쨌든 심각한 오역이 있든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든 간에,
나중에 시간이 나면 바디우의 [윤리학] 번역의 문제점을 몇 가지 좀더 상세히 논의해보기로 하죠.
바디우에 대해서는 뭐 잘 모르는 처지에 이렇다저렇다 말할 건 없고, 바디우가 중요한 철학자이기는 한데,
"정치철학적으로"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는 철학자인지는 좀 의문이다라고 한 마디만 해두겠습니다. :-)
 


루카스 2008-02-05  

안녕하세요. 저는 선생님이 번역하신 "스피노자와 정치"의 독자입니다.

뜬금없이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서 죄송한데;;;, 그 책 뒤에 참고문헌 리스트에 있는 발리바르의 글 중에 ["윤리학"에서 '의식/양심' 개념의 용법에 대한 노트]와 [스피노자: 개체성에서 관개체성으로]라는 글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혹시 파일로 가지고 계시다면 이메일로 받을 수 있을까요?
 
 
balmas 2008-02-05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루카스님. 첫번째 글은 Studia Spinozana라는 스피노자 전문 학술지에 실려 있는 글이고, 두번째 글은 Architectures de la raison, ENS Editions, 1996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데, 저는 두 권 다 책으로 갖고 있고 따로 파일은 없습니다. 첫번째 학술지는 국내 도서관에서는 좀 구하기 어려울 것 같고, 두번째 책은 서울대 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혹시 대학교에 재학중이라면, "한국 교육학술정보원"(http://www.riss4u.net/int_search/total_fm_new.jsp)에서 검색을 한 다음 해당 논문 복사를 신청하면 다니시는 학교의 도서관에서 받아볼 수 있을 듯합니다.
첫번째 글의 경우 제가 복사해서 우편으로 보내드릴 테니까, 비밀 댓글로 주소를 알려주세요. :-)

2008-02-11 0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08-02-04  

박사님, 에드워드 사이드에게는 텍스트 "바깥"은 있는 건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almas 2008-02-0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모님, 뜬금없는 건 좀 알아줘야 할 듯. ㅎㅎㅎ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니까, 그에게 텍스트 "바깥"이 있느냐는 물음은
저에게 묻지 말고 사이드 전공한 분들에게 가서 좀더 정확히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몇 번 이야기했지만, 그리모님은 질문을 좀더 정확히 하는 법을 익혔으면 좋겠어요.
그리모님도 새해 복많이 받고, 열심히 해서 좋은 의사가 되기를.

사량 2008-02-0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모 님 / 제가 나서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이드의 1983년작 [세계, 텍스트, 비평가The World, The Text and The Critic]의 서문인 <세속적 비평Secular Criticism>에서 일부를 옮겨 보겠습니다. 어느 정도 답변이 될 것 같아서요. (번역은 김성곤 편역, [소설의 죽음과 포스트모더니즘], 글, 1992에서 가져옵니다)

"텍스트성은 소위 역사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한 분명한 배제이며 앙띠 떼제이다. 즉 현대의 비평가들은 텍스트성이 어떤 특정 장소나 특정 시기에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느 특정 시대나 특정 인간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비록 '독서'와 '해석'이 '오독'과 '오해'의 형태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래도 텍스트는 읽혀지고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지만 결론은 언제나 같다. 즉, 오늘날 미국 문단에서 시행되고 있는 바대로, 현대 문학이론은 상황과 사건, 그리고 문학이론을 인간 작업의 결과로서 가능하게 해주고 예시적으로 만들어 주는 모든 외부적 요인들로부터 대부분 텍스트성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헤이든 화이트가 제시한 논쟁 - 즉 '진정한' 역사를 직접 구할 필요는 없다라는 - 을 받아들인다 해도(대체로 내가 그렇듯이), 그런 주장이 텍스트 자체에 표출되고 수반되는 상황과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꼭 제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사건들과 상황들도 역시 텍스트의 구성요소이고 ... 텍스트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사건과 상황을 암시해 주고 있으며, 또한 텍스트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내 입장을 말하자면, 텍스트는 세속적worldly이며 어느 의미에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텍스트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도 텍스트는 스스로가 위치하고 있고 해석되는 그 역사적 순간, 생활, 그리고 사회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 [내가 이 책에서] 쓰고 있는 글들도 모두 인생, 정치, 사회 및 사건들의 실존적 실제성과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들이다. 권력과 권위의 리얼리티 - 또한 반대로, 제도와 권위와 정통성에 대한 남자, 여자 및 사회운동들의 저항 - 가 바로 텍스트를 가능하게 해주는 리얼리티이며, 텍스트를 독자들에게 가져다 주는 리얼리티고, 또한 비평가들의 주의를 끄는 리얼리티인 것이다."

balmas 2008-02-1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량님이 좋은 답변을 주셨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