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님의 "호정무진님, 따우님, 로쟈님 그리고 그밖의 다른 분들에게-철학사전 한 권 소개"

가을산님, 스텔라님, 죄송하옵니다. (__)

좋은 사전이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번역하기는 어려움이 많을 듯하옵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다 손도 많이 가고 출판사들의 경제적 고려도 있을 것이고 ...

lidgate님,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라틴어가 제일 보편적인 언어라는 점이 큰 이유 중

하나였겠죠. 교통이나 통신, 기록 여건이 오늘날 같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 방언들로

글을 쓴다는 건 거의 의미가 없었겠죠.  

호정무진님, 예, 그래서 번역 문제가 더 중요하겠죠. 며칠 전에 일본의 고등학교 교사가

쓴 [과학의 탄생]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고 하더군요. 1000페이지 가량 되는 방대한

책인데,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책소개를 보니까 고대

그리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자연철학-물리학의 역사에 관한 책인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목차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학자들이나 내용이 상당히 광범위

하더군요. 섣부른 단정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광범위한 문헌들을 저자가 원문으로 직접

읽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겠더라구요. 그럼 이 책을 쓴 저자는 그 문헌들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그건 십중팔구는 일본어로 번역된 책들로 읽었을 겁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저런 종류의 책을 집필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우리나라에는 저 책에서

 다루는 문헌들의 번역본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로저 베이컨의 저작, 쿠자누스의 책들, 르네상스

사상가들의 책, 이런 건 모두 그림의 떡이죠(적어도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그렇죠). 이런 게 바로 학문의 격차를 낳는 주요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ㅎㅎ 로쟈님, 제 관심이 '문학' 쪽으로 정향되어 있다는 말씀은 칭찬으로 들립니다.

représentation 같은 단어야 영어로 번역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죠. 알튀세르가

그 용어에 어떤 개념을 부여해서 사용하든, 불어와 영어에는 어원이 같은 동일한 단어가

있으니까, 저 단어를 옮기는 건 사실 전혀 문제될 게 없죠. 오히려  représentation을 다른

단어로 옮긴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아주 독창적이거나 터무니없거나)이 되겠죠. 

제가 영어로 옮기기 어렵다고 한 건 사실은 저 단어가 아니라 "en"이라는 단어죠. 이

단어는 영어에 상응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불어에 고유한 어휘니까요. 그리고 또

내용상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함의들을 지니고 있구요. 어쨌든 이런 단어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에는 심각한 어려움이 존재하지요. 사실은 번역하기 매우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한 단계 진전된 인식과 논의를 위한 조건이 되는 셈이겠지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어떤 단어(철학 용어든 아니든 간에)를 번역

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글이나 책이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다, 심지어 불가능한 것 같다,

이런 게 반드시 부정적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오히려 이런 어려움을 낳는 용어,

글, 책이야말로 우리 언어, 우리의 개념, 우리의 인식을 좀더 풍부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기회, 도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개념의 발명이라는거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말 철학개념을 '발명'할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라는 로쟈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의 발명은 불필요하게 신조어를 남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라는 말씀에도 동감하구요. 사실 번역자가 이론가가 외국 문헌을

공부하면서 자기가 이전까지 접해 보지 못한 용어라고 해서 그것을 신조어로 표현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손쉽게 일본식 번역어를 빌려서 표기하려고 하는 건, 개념의 발명이 아니라

지적 게으름과 안이함에 불과하죠.  예를 들자면, 스피노자의 <포텐샤potentia> 같은 걸

국어사전에도 없는 "역능"이라는 신조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든지, 둔스 스코투스에서

유래하고 들뢰즈가 사용하기도 한 <헤케이타스hecceitas> 같은 용어를 "특개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든지, 또는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용어이고 프로이트도 자주 쓰는 <affect>

라는 용어를 "정동"으로 옮기는 것 등은 사실은 개념적인 인식을 더 어렵게 할 뿐입니다.     

개념의 발명이라는 건, 그 이전까지는 상식적인 의미, 평범한 의미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던 어떤 단어, 말에 새로운 의미, 고유한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겠죠. 가령

독일어에 "진Sinn"과 "베도이퉁Bedeutung"이라는 서로 구분되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프레게가 이 단어들에 고유한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두 단어의 개념적

차이를 엄밀하게 하기 전까지 두 단어는 모두 "뜻"이나 "의미"를 지시하는 상이한 두

방식에 불과했죠. 마찬가지로 알튀세르가 "호명interpellation"이라는 단어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 이 단어는 군사/경찰의 용어(우리말로 표현하면 "불심검문"

이나 "수하" 정도에 해당할 텐데요)로나 사용되던 말에 불과했죠. 이런 게 고유한 의미

에서 개념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식인들까지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쓸 데 없는 신조어들을 남발하는 게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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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1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헤케이타스hecceitas>가 둔스 스코투스의 용어였군요. 둔스 스코투스하면 존재 일의성만 앵무새처럼 읖조리며 건성건성 지나친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질문 좀 드릴게요. 위 용어는 hic과 연관된 것이겠지요? 들뢰즈의 용법에서는 singularite와 비슷한 의미로 읽으면 된다고, 누군가 그러던데, 맞나요? 들뢰즈가 굳이 singularite를 두고 저 용어를 사용한 것은 singularite라는 단어의 어떤 한계들 때문인가요? 애들처럼 가벼운 질문만 남발하네요^^ 그래도 너무 궁금합니다.

balmas 2005-04-10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렇죠. hecceitas는 haec를 명사화한 개념이고, 원래는 haecceitas로 썼죠.

들뢰즈에서 이 개념은 분명히 singularite와(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독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들뢰즈가 singularite 개념의 어떤 한계로 인해 

haecceitas 개념을 썼다고 보기는 좀 어려울 것 같군요. 그보다는 아마도 둔스 스코투스가

이 개념을 개체화의 맥락에서 발전시켰다는 점에 착안해서 들뢰즈도 개체화의 문제를

새롭게 사고하는 과정에서 이 용어를 재발굴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사실 들뢰즈에게 많은 영향을 준 질베르 시몽동이라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가 이미

자신의 개체화 이론에서 이 개념을  빌려다 쓰고 있죠.

그런데 사실 들뢰즈가 이 개념을 사용한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죠. 1977년에

초판이 나온 [대화Dialogue]에서부터 1980년의 [천 개의 고원] 무렵까지 이 개념을 집중적

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 개념을 계속 사용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려운데,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haecceitas는 말 그대로 하면 "이것임"을 가리키는데, 들뢰즈는 이 용어를 개체화의

새로운 양식을 사고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용법을 위해 사용하기에는

이 말은 너무 일회적이고 고립적이라는 느낌이 강하죠. 그래서 개체화가 함축하는 과정

의미라든가 들뢰즈 철학의 중심 주제인 다양성을 표현하기에는 좀 적절치 못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푸코] 이후에 들뢰즈는 개체화의 문제를 사고하는 데서

"주름"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또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죠.


aporia 2005-04-1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철학사전이랑 번역 말씀하신 것 잘 읽었습니다. 엄청난 유혹이나, 10만원이라... ㅎㅎ 실은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제 친구가 볼 일이 있어 잠깐 들어오기로 했어요. 올 때 구하기 어려운 책 있으면 몇권 구해다 주겠다고 했는데 눈 딱 감고 저 책을 부탁해 버릴까요... 하루만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원래 여쭤보려고 했던 건, 알튀세르나 발리바르 또는 다른 이론가들의 책 중, 국내에서 구하긴 어려운데 소장가치가 확실한 책 있으면 몇 권만 소개해 주십사 하구요. 좀 뜬금없는 질문이긴 한데... 저도 그동안 이런 생각 별로 못 하고 있다가 이번에 갑자기 얘기를 들어서요. 쉽게 오진 않을 기회 같아서. 예를 들어 영어로 번역이 되지 않았거나 당분간 그럴 가능성이 없달지, 번역이 됐더라도 오역이 많거나 본래의 문체를 살리지 못했달지 한 책들이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5-04-13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역시 선생님은 철학의 하늘에서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독특한 별빛'이십니다. 감사합니다.~~
 

 

[Maverick 22-철학책읽기에 관해 2]에 대해 댓글들을 달아주신 걸 보니까 문득 생각이 나서 철학사전 한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바로 요놈입니다요.

 

 

 

 

  작년 10월 초에 프랑스에서 아주 뜻깊은 철학사전이 한 권 출간되었습니다. [Vocabulaire europeen des philosophies](쇠이유Seuil 출판사/로베르Robert 출판사 공동 출간)라는 제목이 달린 사전인데,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유럽철학어휘사전] 정도가 되겠고, 좀더 정확히 원문 그대로 번역한다면  [철학들에 대한 유럽어휘사전]이 되겠죠. 이 뒤의 번역은 아주 어색하지만, 이 사전의 기획 의도를 생각한다면 사실은 이런 번역이 훨씬 정확할 듯합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제목은 바로 다음과 같은 부제(이는 책 겉표지에는 없고 속표지에만 나와 있습니다)입니다. [Dictionnaire des intraduisibles],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번역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사전]입니다! 매우 데리다적인 발상을 담고 있는 이 부제(하지만 사전의 항목 집필자들이 꼭 데리다와 친분이 있거나 데리다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는 이 사전이 시도하고 있는 지적 모험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게 뭐나구요? 우선 이 사전의 편집담당자인 바바라 카생(Barbara Cassin, 고전철학 및 문헌학)의 말을 한번 직접 들어보죠.


유럽이 제기하는 가장 긴급한 문제 중 하나는 언어들의 문제다. 이 문제에 관해 두 가지 유형의 해결책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앞으로 그 언어를 통해 교류가 이루어질 지배적인 한 언어, 곧 세계화된 영미어를 선택하는 길이 있다. 또는 언어의 다원성을 유지하면서 매 경우마다 언어들 간의 차이의 의미와 잇점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길이 있는데, 이는 언어들 및 문화들 사이의 교통을 실제로 촉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유럽철학어휘사전: 번역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사전]은 두번째 시각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전은 과거보다는 장래에 시선을 두고 있다. 곧 이 사전은 회고적이고 화석화된 어떤 유럽―그러나 이는 어떤 유럽인가?―, 필경 [각 나라의] 특수성들만 더 부각시키게 될, 병렬적인 유산들의 누적에 따라 정의된 어떤 유럽보다는, 진행 중에 있고 활동 중에 있는, 곧 활동의 결과ergon라기보다는 활동energeia으로서의 유럽과 연계되어 있다. 이 유럽은 자기 자신을 더 훌륭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간격들, 긴장들, 전이들, 전유/고유화들appropriations, 오해들을 회피하지 않고 작업해나갈 것이다.  (...)


이 사전은 1500쪽 가량에 400여 항목을 담고 있고 150여명의 필자들이 참가하고 있는데, 규모만으로 보자면 이 사전은 그리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닙니다. 이미 10여년 전에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이보다 훨씬 방대한 규모의 철학사전(총 5권)을 펴낸 적이 있고, 독일이나 영미권에서도 훨씬 더 규모가 큰 철학사전들이 여러 권 나온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분량으로 따지자면,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윤리학과 도덕철학 사전]이 이 사전보다 오히려 더 크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외형만 놓고 본다면, 그저 “또 사전이야?”하고 지나칠 수도 있는 그런 사전입니다. 


하지만 이 사전의 의의는 일차적으로 번역이라는 문제, 철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늘 부딪치게 되는 번역이라는 문제를 유럽철학(사)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Âme”라는 항목을 보면 이렇습니다. 보통의 철학사전은 이 항목에 관해, 그리스어의 “프쉬케psykhē”(또는 “누스nous”)에서 유래하고 라틴어의 “아니마anima”나 “멘스mens”를 거쳐 오늘날의 “암므âme”나 “가이스트Geist”, “마인드mind”에 이르게 된 경로를, 대표적인 철학자들(가령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로크, 흄,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등)의 몇몇 저작들의 발췌문들을 검토하면서 제시해줍니다.


그런데 이 사전 같은 경우는 이처럼 우리가 “정신” 또는 “âme”나 “Geist”, "mind"라는 상이한 단어들로 이해하는 어떤 것(그런데 이게 뭘까요?)이 각각의 상이한 시기에 각각의 상이한 언어로 변화되는 것 자체를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하고, 이러한 변화가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탐구합니다.


데카르트를 예로 들면,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두 개의 언어로 철학을 한 사람으로, [방법서설](1637)이나 [정념론](1649) 같은 책은 불어로 썼고, [성찰](1641)이나 [철학원리](1644) 같은 책은 라틴어로 썼습니다. 더욱이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책들은 불어번역을 데카르트 자신이 감수했고, 내용을 일부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라틴어와 불어, 또는 불어와 라틴어 사이에 통상적인 의미의 원본과 번역본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몇몇 핵심 개념들의 차원에서 잘 드러나는데, “mens”나 “anima”라는 라틴어 단어와 불어의 “âme”나 “esprit”라는 단어가 그 한 가지 사례입니다. 곧 “âme”가 꼭 mens에 딱 들어맞는 번역어가 아니듯이, esprit 역시 “anima”에 딱 들어맞는 번역어가 아니라는 점이죠.   


예컨대 데카르트가 사용하는 라틴어 “mens”는 중세철학의 전통과 관련해 볼 때 매우 혁신적인 어휘죠. 이 개념은 신체,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물질적인 연장의 질서와는 전혀 무관한 정신, 또는 사유의 질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위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라는 것을 어휘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이 “멘스”라는 개념이죠. 그런데 문제는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데카르트의 주요 철학 저작의 불어 번역본(곧 데카르트 자신이 직접 감수해서 출간된 데카르트 당대의 번역본)에는 이 단어가 “âme”라는 불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게 문제냐구요??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별 문제가 될 게 없죠. 문제는 데카르트가 말년에 쓴 [정념론](이 책은 데카르트가 직접 불어로 썼습니다)에서도 “âme”라는 불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정념론]의 불어 원제가 “Passions de l'âme”입니다), 이 때 데카르트가 “âme”라는 단어로 지시하고 있는 어떤 것은, 데카르트가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책에서 지시하고 있는 것, 곧 “mens”, 순수한 사유실체로서의 “정신”과는 상이한 어떤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때의 “âme”는 신체나 물질과 구분되는 순수한 사유실체라기보다는, 신체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놀람과 기쁨, 슬픔, 사랑과 미움 등의 정념들에 따라 변양되는, 이를 테면 정념론적 차원에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의 불어 단어 “âme”가 한편으로는 순수한 사유실체로서 “mens”를 가리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념적인 실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사태가 벌어진 거죠.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단어 차원, 어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곧 이러한 용어상의 혼란은 데카르트 철학의 혼란, 난점을 드러내주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순수한 사유실체로서의 “mens”와 정념들의 차원에서 파악된 “âme”,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데카르트 자신도 명쾌한 답변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거지요. 더 나아가 이러한 애매성은 근대철학 내내 지속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mens”와  “âme”, 또는 “esprit”라는 용어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번역의 차원을 넘어서, 중세철학에서 근대철학으로 넘어오면서 일어난 개념적인 혁신과 그것이 담고 있는 이론적 난점들 및 긴장, 애매성을 표현해주는 한 사례가 되는 셈입니다. 


 “Âme”라는 항목에 관해 잠깐 살펴봤는데, 이 사전에 수록된 여러 항목들의 내용이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저런 용어에 대해 간편하고 도식화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용어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또 어떤 난점과 긴장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후대의 철학자들에 의해 어떻게 전위되는지, 이런 번역과 발명, 소통과 변형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죠. 따라서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지루한 내용이 될 수도 있는데, 기고자들의 뛰어난 역량 때문인지, 매우 집약적이면서도 명쾌한 설명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 사전이 기획된 계기는 1990년에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있었던 한 학술회의였습니다. “철학자들을 번역하기Traduire les philosophes”라는 제목이 붙은 이 학술회의는, 특히 근대철학에서 한 나라의 철학이 다른 나라로 수입,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번역을 비롯한 여러 언어적인 문제를 다루는 회의였죠. 다수의 중견 철학자들이 참여한 회의였고, 상당히 재미있는 논의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 회의를 계기로 이 문제를 좀더 체계적으로 다뤄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되고, 오랜 기간의 작업과 진통을 거쳐(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러 차례의 무산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출간된 게 바로 이 책입니다.


몇 년 전부터 나온다나온다 예고만 되길래 긴가민가했는데, 마침내 지난 해 10월에 출간이 되어서, 곧바로 주문해서 구입했습니다. 흑, 그런데 정가가 95유로, 할인을 해도 90유로 가까운 가격,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12만원이 넘는 가격이어서, 사고나서는 솔직히 좀 후회도 되더군요.(도서관에 신청해서 복사를 하면 ... 하고 말이죠. -_-v) 하지만 좋은 사전을 구입했다는 뿌듯한 감정이 더 크다(이 놈의 뿌듯함 때문에 내가 못살아요 ... ㅠ.ㅠ)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제가 이렇게 이 사전을 소개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여러 서재 주인장들께서 번역본만 읽는다고 우울해하시길래, 위로의 차원에서(헉, 진정 위로인가, 아니면 또다른 염장인가??) 소개해드린 겁니다. 번역의 어려움이나, 번역하면서 번역 불가능한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되는 일은 비단 우리에만 고유한 일은 아니라는 거죠. 이 사전이 증언해주고 있다시피 서양철학사는 어쩌면 번역 불가능한 것과의 대결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랍철학에서 헬레니즘철학으로, 다시 헬레니즘철학에서 중세철학으로, 그리고 다시 근대철학에서 현대철학으로 넘어오면서 계속해서 사람들은 번역 불가능한 어떤 것과 직면하게 되고, 이것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해가면서, 또는 번역 불가능한 것에 맞서 새로운 단어, 새로운 개념, 새로운 문제를 발명해가면서 철학의 새로운 길을 열어놓았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번역 불가능한 어떤 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하나의 문제로,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로 생각하는 것은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의 새로운 기회, 새로운 사유의 발명의 조건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은가 합니다. 번역의 불가능성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출구를 모색하기 위한 사고와 시도를 자극하기 마련이고, 이런 자극은 번역 불가능한 것을 만들어내었던 이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 유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사유의 필수 조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좀 먼 시기의 예이긴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이는 희랍어를 전혀 모르는 가운데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관한 기념비적인 주석들을 남겼죠. 스피노자 같은 이도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라틴어 능력으로 훌륭한 저작들을 남겼구요.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죠. 한글만 할 줄 알았음에도 뛰어난 철학 저작, 이론 저작을 남기는 사람이 ...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책들이 좀더 많이 출간되고 번역되고 교육되어야겠죠. 개인이 어느 정도의 어학 능력을 갖고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이 후자의 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우울해하지 마시고 열심히 읽으시길 ... (위안이 좀 되셨나요? ^^;;;) 


둘째는,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다. 지난 해부터 한국철학회에서는 용어정비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듣기로는 좀더 광범위한 학술용어정비사업의 일환이라고 하던데, 확실한 건 잘 모르겠군요). 사업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학술진흥재단을 정점으로 해서 그 아래의 한국철학회로, 그리고 다시 그 아래의 각 분과철학회(예컨대 한국칸트학회, 한국헤겔학회, 한국현상학회, 한국니체학회, 한국근대철학회 등)로, 위에서부터 진행되고 있는 작업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철학과 관련된 거의 모든 용어들을 통일하려는 사업입니다. 서양철학의 경우 이는 서양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를 확정하는 일이죠. 예컨대 “concept”는 “개념”으로, “intuition”은 “직관”으로, “Vernunft”는 “이성”으로, “Genealogie”는 “계보” 등으로 확정하는 거죠.


그런데 쉽게 합의가 되는 용어들 같은 경우는 별 문제가 없지만, 용어 번역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들마다 각기 자기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의 경우는 문제가 좀더 복잡하고 심각합니다. 예컨대 “transzendental”(이 용어는 주로 “선험적”이라는 번역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10여년 전부터 “초월적”이라는 번역어가, 그리고 좀더 최근에는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 마지막 세 번째 번역어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이라든가 “Dasein”, 또는 “Gestell” 같은 번역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더 나아가 아직 용어에 대한 이해나 용법 등이 제대로 정립되지도 않은 용어들, 예컨대 “notio”라든가 “transcendentia”, “res” 같은 중세철학(및 근대초기철학)의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또 대개가 일상어에서 유래한 희랍어 철학용어들은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최근에 번역된 아리스텔레스의 {범주론/명제론}의 국역본에서 역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범주들에 관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학용어 대신(가령 실체, 수동, 능동 같은) 우리말 표현들을 다수 제안하고 있죠. 역자에 따르면 이것이 원래의 희랍어 표현에 좀더 잘 부합한다고 하고, 또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습니다)에 관한 의문들이 제기되기 때문이죠. 이제 수입되는 중에 있고 용어 번역에 관한 논의도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프랑스 철학의 용어들에 대한 번역 문제는 말할 것도 없구요.   


따라서 무질서하게 개인의 선호에 따라 이런저런 방식으로 번역되는 용어들을 정비하자는 원칙에는 기꺼이 동의하지만, 특정한 시한을 정해서 일률적으로 용어들을 통일하고(물론 특히 논란이 많은 용어들의 경우에는 복수 용어도 허용하기로 하긴 했지만) 이를 공식 용어로 지정한 다음에는, 모든 공식 학회에서 이 용어 사용을 의무화하고 따라서 공인 학술지에서도 모두 이 용어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은 좀 동의하기 어렵더군요. 법이 철학을 지배하는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 [유럽철학어휘사전]은 특히 교훈적인 것 같습니다. 이 사전은 용어를 통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이 사전에서 사용된 모든 철학용어(희랍어나 라틴어에서부터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심지어 아랍어 등에 이르는)를 하나의 불어로 번역하는 대신, 이 용어들, 예를 들면 “res”라는 라틴어나 “Geist”라는 독일어가 왜 하나의 불어 단어로 환원될 수 없는지, 곧 번역 불가능한지 설명하는 것을 사전의 존재 이유 자체로 삼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혼란이 생겼을까요? 철학의 위신이 더 깎였을까요? 오히려 이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철학 용어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이 더 증폭되고, 더 나아가 철학의 특성을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열린 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기한 내에 그렇게 서둘러서 용어를 정비하고 통일하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서양철학 용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문적 검토와 이 용어들의 국내 수용과정에 대한 총괄적인 고찰을 해보는 게 더 유익하고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생각한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인문학도 뭔가를 한다’는 걸 정부 관료들이나 국회의원들에게 보여줘서 인문학 특별기금을 계속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절박한 속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좀 부럽다는 거죠. 우리나라와 인구수나 국토 면적, 또는 외형적인 경제적 능력에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나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전들을 찍어내는 데, 우리나라는 아직 변변한 철학사전 하나 만들어본 경험이 없으니, 사실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죠. 더 나아가, 바바라 카생의 서문이 웅변하듯이, 이 사람들이 이러한 철학용어의 번역 문제를 유럽의 구성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러움은 더 커질 수밖에요. 우리도 동아시아 철학의 용어들과 역사를 공동으로 검토해보려는 기획쯤은 해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너무 꿈이 큰가?? 



어쨌든 제가 사전 하나를 이렇게 길게 소개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  

ㅎㅎㅎ, 관심 있는 분들은 한 권 구해보심이 ... (초강력 지름충동질이라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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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5-04-0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와 염장이 동시에 섞인 페이퍼였습니다. ^^ 근데 저 사전은 번역안되나요? --;;;

MANN 2005-04-09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탐나네요 +_+
(하지만... 지르기엔.... -_-a;;;)

하이드 2005-04-0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읽은 책과 바람난 여자가 '쇠이유 출판사'에서 30년동안 교정본 여자였어요. 에피소드 중에 사전들에 관한것도 있었는데. 음. 페이퍼를 읽자니 머리가 아프고, 딱 쇠이유 출판사까지만 읽고 답글 남김을 고백합니다. -_-a

balmas 2005-04-09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클리오님, 번역되겠습니까? 1500페이지짜리 사전인데요 ...
MANN, 그렇지, 지르기는 ...
하이드님, 오오 30년씩이나 교정일을 ... 정말 대단하군요.
ㅋㅋ 잘하셨어요. 거기까지라도 읽어주셔서 고마울 따름!!

가을산 2005-04-09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장이다~~! 불어를 한개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

stella.K 2005-04-09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뭘해요, 불어에 대해선 까막눈인데...정말 번역 안 되나? ㅜ.ㅜ

Chopin 2005-04-09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가 되는 말이 있어 좋았어요.
근데 왜 그 시절에는 라틴어로 책을 출간 했는지 궁금하네요. 요새 과학 논문을 영어로 작성하지 않으면 그 성과를 인정 받지 못하는 그런 것과 같은 이유인가요? 아니면 과거 라틴어 성경 같이 성직자들만의 배타적인 뭐 그런 건가요?

瑚璉 2005-04-0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까막눈인 관계로... (-.-;). 저는 '번역어성립사정'이나 볼랍니다.

그리고 올려주신 글이 절대로 위로가 안되는 이유는 외국어를 못해도 사유를 잘 할 수 있다고 하셨지만 사유의 기반이 되는 기본개념 자체를 잘못된 번역으로 접한 상태에서 무슨 사유가 되겠습니까(-.-;)?

로쟈 2005-04-09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원론적으로) 이 철학사전의 번역 역시 불가능한 것 아닌가요? 번역의 (불)가능성의 문제는 철학의 '보편성' 대신에 개별언어에의 구속성/제한성을 도드라지게 하다는 점에서 (일반화된 시로서의) 문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문학에서라면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발마스님의 관심이 보다 '문학적인' 쪽으로 정향돼 있는 듯합니다.^^ 알튀세르에게서 represent(ation)의 번역 불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사실 영어 단어 represent도 언급하신 표상, 표현, 재현, 상연, 대표, 의미(하다) 등의 뜻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해서,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는다는 건 조금 과민한 주장이신 것 같고(독특한 '뉘앙스'까지 문제삼는다면, 번역이나 '읽기'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죠), 우리말 '표상하다'가 문제가 있다면, '나타내다' 정도로 얼버무릴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말 철학사전>이 나오고 있지만, (들뢰즈를 빌자면) 우리는 우리말 철학개념을 '발명'할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굳이 신조어를 만들지는 않더라도(물론 김진석의 '포월'이나 '소내' 같은 건 우리의 개념장을 확장시킨 사례로 보입니다만)... 참고로, 저는 대조용이 아닌 독해용의 불어 강독을 할 만한 능력이 없기도 하고, 처치불능의 재정난 때문에 추천하신 책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고작 지난달에 복사한 <데리다 사전>(영어)이나 지지난달에 얻은 <정신분석사전>(열린책들) 정도에 만족할 따름입니다...

릴케 현상 2005-04-09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열심히 읽었습니다...그러니 칭찬해주시길-_-

chika 2005-04-0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엔 학문에 있어 공용어가 라틴어여서 그런거 아녔을까요...? (저도 잘 몰라요. ㅡㅡ;)
자명한 산책님, 경의를 표하옵니다. ^^

하이드 2005-04-0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칭찬받고 싶다. 더 읽어봐야지. 근데요, 오늘 롯데가 이겼다면서요? (소근)
근데, 왜 lg는 6위고 롯데는 여전히 8위인걸까요?!

balmas 2005-04-0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스텔라님, 죄송하옵니다. (__)

좋은 사전이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번역하기는 어려움이 많을 듯하옵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다 손도 많이 가고 출판사들의 경제적 고려도 있을 것이고 ...

lidgate님,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라틴어가 제일 보편적인 언어라는 점이 큰 이유 중

하나였겠죠. 교통이나 통신, 기록 여건이 오늘날 같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 방언들로

글을 쓴다는 건 거의 의미가 없었겠죠.  

호정무진님, 예, 그래서 번역 문제가 더 중요하겠죠. 며칠 전에 일본의 고등학교 교사가

쓴 [과학의 탄생]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고 하더군요. 1000페이지 가량 되는 방대한

책인데,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책소개를 보니까 고대

그리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자연철학-물리학의 역사에 관한 책인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목차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학자들이나 내용이 상당히 광범위

하더군요. 섣부른 단정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광범위한 문헌들을 저자가 원문으로 직접

읽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겠더라구요. 그럼 이 책을 쓴 저자는 그 문헌들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그건 십중팔구는 일본어로 번역된 책들로 읽었을 겁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저런 종류의 책을 집필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우리나라에는 저 책에서

 다루는 문헌들의 번역본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로저 베이컨의 저작, 쿠자누스의 책들, 르네상스

사상가들의 책, 이런 건 모두 그림의 떡이죠(적어도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그렇죠). 이런 게 바로 학문의 격차를 낳는 주요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ㅎㅎ 로쟈님, 제 관심이 '문학' 쪽으로 정향되어 있다는 말씀은 칭찬으로 들립니다.

représentation 같은 단어야 영어로 번역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죠. 알튀세르가

그 용어에 어떤 개념을 부여해서 사용하든, 불어와 영어에는 어원이 같은 동일한 단어가

있으니까, 저 단어를 옮기는 건 사실 전혀 문제될 게 없죠. 오히려  représentation을 다른

단어로 옮긴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아주 독창적이거나 터무니없거나)이 되겠죠. 

제가 영어로 옮기기 어렵다고 한 건 사실은 저 단어가 아니라 "en"이라는 단어죠. 이

단어는 영어에 상응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불어에 고유한 어휘니까요. 그리고 또

내용상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함의들을 지니고 있구요. 어쨌든 이런 단어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에는 심각한 어려움이 존재하지요. 사실은 번역하기 매우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한 단계 진전된 인식과 논의를 위한 조건이 되는 셈이겠지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어떤 단어(철학 용어든 아니든 간에)를 번역

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글이나 책이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다, 심지어 불가능한 것 같다,

이런 게 반드시 부정적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오히려 이런 어려움을 낳는 용어,

글, 책이야말로 우리 언어, 우리의 개념, 우리의 인식을 좀더 풍부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기회, 도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개념의 발명이라는거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말 철학개념을 '발명'할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라는 로쟈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의 발명은 불필요하게 신조어를 남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라는 말씀에도 동감하구요. 사실 번역자가 이론가가 외국 문헌을

공부하면서 자기가 이전까지 접해 보지 못한 용어라고 해서 그것을 신조어로 표현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손쉽게 일본식 번역어를 빌려서 표기하려고 하는 건, 개념의 발명이 아니라

지적 게으름과 안이함에 불과하죠.  예를 들자면, 스피노자의 <포텐샤potentia> 같은 걸

국어사전에도 없는 "역능"이라는 신조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든지, 둔스 스코투스에서

유래하고 들뢰즈가 사용하기도 한 <헤케이타스hecceitas> 같은 용어를 "특개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든지, 또는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용어이고 프로이트도 자주 쓰는 <affect>

라는 용어를 "정동"으로 옮기는 것 등은 사실은 개념적인 인식을 더 어렵게 할 뿐입니다.     

개념의 발명이라는 건, 그 이전까지는 상식적인 의미, 평범한 의미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던 어떤 단어, 말에 새로운 의미, 고유한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겠죠. 가령

독일어에 "진Sinn"과 "베도이퉁Bedeutung"이라는 서로 구분되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프레게가 이 단어들에 고유한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두 단어의 개념적

차이를 엄밀하게 하기 전까지 두 단어는 모두 "뜻"이나 "의미"를 지시하는 상이한 두

방식에 불과했죠. 마찬가지로 알튀세르가 "호명interpellation"이라는 단어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 이 단어는 군사/경찰의 용어(우리말로 표현하면 "불심검문"

이나 "수하" 정도에 해당할 텐데요)로나 사용되던 말에 불과했죠. 이런 게 고유한 의미

에서 개념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식인들까지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쓸 데 없는 신조어들을 남발하는 게 아니라 ... 

 


balmas 2005-04-09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산책님, 흑흑, 역시 산책님밖에 없습니다. 추천도 하나 해주셨군요, 엉엉.
치카님, ㅎㅎ, 맞습니다. 경의를 표하옵소서.
하이드님, 쇠이유 출판사 다음부터 읽으시면 되옵니다. ㅋㅋ
흑흑, 그런데 오늘 롯데가 이겼군요 ... ㅠ.ㅠ
어떻게 매번 이기겠습니까? 두번 이기고 한번은 져주는 게 좀더 인간적인
것 아닐까요?? 곰탱이 놈들은 그런 걸 모르는 것 같더라구요.

balmas 2005-04-1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이 안써도 다른 분이 쓰면???

balmas 2005-04-12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럴까요 ...
 

représentation  또는  représenter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질문하셨죠?

그런데, 이 문제는 사실 représentation  또는  représenter가 지닌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만이

아니라 정신분석에 대한 이해, 또는 (탈)구조주의 언어론 등과 긴밀하게 관련된 문제여서

여기서 이 문제를 좀더 상세히 검토해봤으면 좋겠지만, 앞으로 다른 기회에 좀더 정교한 논의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냥 간단히 몇 자 적어봤습니다.

 

다시 한번 환기하자면 문제가 되는 표현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에서 이데올로기를 정의하고 있는 다음 문장이죠.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représent .

 

또는 다음과 같은 표현도 이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죠.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se représentent”하는 것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représenté

[표상/재현/상연된]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된 représentation 또는  représenter가 지닌 의미를 모두 표현해줄 수 있는

우리말을 찾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시다시피 représentation은 매우

다의적인 개념이죠. 인식론적/심리학적 의미의 "표상"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또한 "재-현", 곧  "re-présentation"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죠. 그런데 이 때의 "재-현"

이라는 말은 원래 존재하던, 또는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사물이나 실재 x를 사후에,

또는 모방해서 나타낸다는 의미도 갖고 있겠지만, 이 경우에는 사실 "표상"이라는

말과 크게 다른 의미를 갖기는 어렵겠죠. 재현되는 대상과 재현 사이에 원본-모방의 관계

또는 유사성의 관계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재-현",   "re-présentation"이라는

말에서 중심적인 것은 "현", 곧 "현시(顯示)"라는 데 있다기보다는 "재"라는 말,

곧 "되풀이", "반복",  또는 더 나아가 "대체"라는 의미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re-"의 작용은 원초적으로, 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 x의

존재를 미리 전제하고, 사후에 이를 모방하거나 표상하는 작용이라기보다는 실재-사물

또는 실재적 관계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해 있는 세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작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죠.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re-présentation"을 원본-모방의

관계로 보는 것은 사실 "재-현"의 작용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표상/오인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죠.  

 

더 나아가 알튀세르가 사용하는 représentation 개념 속에는 "상연"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곧 어떤 주체 또는 배우/행위자들이 허구적인

역할들을 실행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죠. 이들이 허구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은 물론 상상적으로 부여받은 "정체성identity"이 되겠죠.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범주 중 하나가 "reconnaissance", 곧 상상적인 동일성/정체성을

부여받은 주체-행위자/배우들이 서로에 대해 서로의 동일성/정체성을 "인정"해주고,

또 그를 통해 자신의 동일성/정체성을 인지-재인지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reconnaissance"라는 범주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알튀세르가 사용하는 représentation 개념은 독일어의 Vorstellung

개념보다는 Darstellung 개념에 좀더 가까운 게 아닌가 합니다.  Darstellung 개념에는

Vorstellung, 곧 "표상"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현시"나 "표현"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고,

더 나아가 "상연"이라는 의미와 "서술-제시"라는 의미도 담겨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représentation을 하나의 우리말 단어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어로야, 불어 원어가 지닌 다양한 의미야 어찌 됐든  

어원이 같은 단어인 "representation"으로 표기하면 되니까 별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말로

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죠. 이는 영어사용자들에 비해

그만큼 우리에게 불리한  점이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그만큼 유리한 기회이기도

하겠죠. 영어사용자들이 별 문제 없이 넘어가는 사실을 우리는 하나의 문제로, 심각한 문제로

절감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너무 아전인수격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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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 2005-04-08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침 제가 represent와 관련해서 질문하나 드리려고 했는데^^;;
며칠 전에 책을 보다가- represent/representative관련한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저자가 represent의 "대표한다"라는 뜻을 새기면서 근대 대의정치를 비판했거든요. 그러다가 갑자기 표상/재현의 철학을 비판하는 것과 근대 대의정치를 비판하는 맥락을 섞어버리는 바람에;; 이와 관련된 논의가 있나 싶더라구요.

"대의정치도 재현의 사유, 표상의 사유와 나란히 가는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 원리인 대의정치는 근본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이것이 문제의^^ 원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예전부터 있었나요? 혹시 논의되는 책을 아시면 알려주세요.
재미있는 주제 같아서요^^


balmas 2005-04-08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지. 대의/대표라는 것하고, 표상/재현이라는 것하고 서로 연결이 돼있지.
그런데, 딱히 그걸 주제로 삼는 책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부분적으로 다루는 것들은 있지만 말이야. 가령 데리다의 [법의 힘]이나 특히 [독립선언]에도 대표/대의와 표상의 관계가 중요한 쟁점 중 하나지.
데리다 연구자들이나 데리다의 작업에 영향받은 사람들이라면 이런 주제를 다뤄볼 만하겠지.

NA 2005-04-0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말씀을 듣다보니 '재-현' 관련해서는 주로 데리다에 의해 발전되었던 논의가 생각이 나는군요. [목소리와 현상]이라든지 '서명, 사건, 맥락'에서의 iterability 에 관한 논의라든지. 저로서는 '상연'이라는 의미가 결정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 번역하고 있는 [대중들의 공포]의 '정치의 세 개념' 관련해서 사실은 저도 이 문제에 주목을 했었는데, 그것을 '상연'이라는 의미에까지 연결시킬 생각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représenter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탓이겠지요.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하게 되는군요. 씨빌리테가 해방 및 변혁의 정치가 설치되는 '정치의 또 다른 장면'이라고 말할 때, 특히 이 "상연" 개념이 들어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NA 2005-04-08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이렇게 써 놓고 나서 좀 더 생각을 해보니, [자본을 읽자]에서 알튀세르가 논한 Darstellung 개념이 기억 나는데, 처음에 저는 알튀세르가 Darstellung을 '상연'으로, Vorstellung을 '재현'으로 구별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영어로는 전자를 presentation으로 후자를 representation으로 연결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알튀세르의 책으로 가서 뒤적여 보니, 알튀세르 자신은 Darstellung 만을 논했을 뿐, Vorstellung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군요. 또 Darstellung을 논할 때도 계속 독어로 표기를 했고, presentation이나 representation이라고 번역을 시도하지 않았군요. 과거에 저 자신이 쓴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이라는 글에서 이 상연개념을 논하면서 제가 했던 정리가 정밀하질 못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군요. 아마도 라이프니쯔-헤겔의 표현적 인과율을 현상이 본질을 re-present(재현)한다는 식으로 보면서, 그것을 Vorstellung으로 연결시켰기 때문에 그렇게 사고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니, 결국 re-presentation의 re-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이야기가 회전하는 느낌이군요. re를 주어진 것의 복사라고 생각하기 보다 반복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 반복은 이미 원본이나 기원적인 것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Darstellung을 're-presentation'이라고 옮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군요.

balmas 2005-04-0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자본을 읽자]에서는 Darstellung을 원어 그대로 쓰고 있죠.
그리고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에는 알튀세르가 "representation"을 "상연"이라는 의미(또는 Darstellung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구절이 나온답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점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다른 이유도 있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기능주의로 보거나 지젝처럼 알튀세르가 라캉을 불완전하게 모방했다고 보는 어이없는 비판들이 나오고, 그것을 옳은 것으로 수용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NA 2005-04-08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젝의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은 지젝 자신의 오해(사실은 라캉에 대한 그의 오해가 알튀세르에 대한 오해보다도 더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에 기반한 엉뚱한 비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연과 재현 관련해서, 영어에서는 represent 라는 말은 사전을 찾아보면 '상연하다'라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여기서 직접 느낀 바로는 사실 represent라는 말을 상연하다는 의미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사전에도 보니, represent라는 말이 상연의 의미로 쓰인 경우는 매우 문어적인 표현에서 쓰인다는 말을 하더군요. 불어에서는 어떤지 좀 궁금해지는군요. 불어에서는 상연이라는 뜻으로 representer (악상은 생략합니다)를 많이 사용하는지....

balmas 2005-04-0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프랑스에서 오래 살아보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일상에서도 이 단어를 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령 연극 공연 같은 걸 광고할 때 어떤 극장에서 어떤 작품이 상연된다는 말을
표현하기 위해 "representer"나 "representa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거든요.

NA 2005-04-09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이런 게 참 어려운 것들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같은 어원을 가질 때조차도 말들이 다르게 변해나가기 때문에 자칫 놓치기가 쉽고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저 위에 사전 소개해주신 것 저도 몰랐는데, 한 권 꼭 구입해야겠군요. 많이 얻어 갑니다. 감사합니다.^^
 

 

3) 자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측면, 사실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측면이 남았는데,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 책에 나오는 단어들을 세심하게 따져가면서 읽는다는 걸 뜻하지. 여기에서 나는 개념이나 범주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단어라고 말했는데, 그건 개념이나 범주로 환원될 수 없는 단어에 고유한 물질성(따라서 비순수한 역사성) 같은 게 있기 때문이지. 


우리 수업과 관련된 예를 하나 들자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에서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représent.”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마지막 단어 “représent” 또는 그것의 동사원형인 “représenter”를 “표상한다”라든가 “표상하다”로 번역해서 사용하지. 그런데, 수업 시간에도 말했듯이, 이 단어를 이렇게 “표상한다”나 “표상하다”로 번역하게 되면, 이 단어가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정의에 사용된 이유, 또 이 단어가 이데올로기 개념의 정의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지. “représent”을 “표상한다”로 번역하게 되면, 이데올로기는 기껏해야 인식론적 측면에 따라 이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이데올로기가 “상상적 관계를 표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지. 사람들은 여기에서 엉뚱하게 비약해서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인식론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과학의 대립물이기 때문에, 알튀세르는 과학주의자다라는 멋진(?)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내곤 하지. 이런 생각은 실제로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데,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알라딘 서평 중 하나에서도 이런 생각을 볼 수 있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논문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유명한 호명 테제를 들 수 있지.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지. “Idéologie interpelle les individus en sujets.” 이 문장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끝에서 두 번째 단어인 “en”이지. 이 단어는 다른 나라 말, 가령 영어에는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불어에 고유한 어휘지. 그래서 영어 번역자나 주석가/비판가들이 이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지. 하나는 “as”로 번역하는 것이고([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의 영역본에는 바로 이렇게 번역되어 있지), 다른 하나는 “into”로 번역하는 거야(몇몇 주석가들이 이 번역을 택하지). 전자의 경우라면 이 테제는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번역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라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번역될 수 있지.


그런데 이 두 가지 번역 각각의 경우에 원래의 테제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달라지게 되지. 전자처럼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번역하게 되면, 이것은 이미 이데올로기 이전에 주체를 주체로 구성하는 어떤 담론 또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왜냐하면 이 경우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기능은 이미 구성되어 있는 주체 내지는 주체의 기능을 개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되므로, 이 때의 주체로서의 주체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영역, 다른 담론 또는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 벌써 구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반대로 후자처럼 “into”로 번역하는 경우에는, 바로 이데올로기 자신이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 두 번째 번역이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기능을 해명하는 데 좀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런 번역이 과연 전적으로 충실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  


어쨌든 “en”의 사례는 얼핏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단어가 개념의 이해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지. 물론 (지젝을 포함한) 대부분의 알튀세르 주석가/비판가들(특히 국내의 ‘논평자들’)은 이런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지. 가령 우리가 이런저런 철학책들, 특히 유럽철학 관련 책들을 읽다보면 흔히 접하게 되는 것이 “주관성의 형이상학”이나 “자기의식의 철학”이라는 표현이지. 전자는 하이데거에서 유래하고 후자는 헤겔에서 유래하는 표현인데, 지금은 거의 관용적인 용법이 되었지. 그런데 헤겔과 하이데거는 이처럼 “자기의식의 철학”이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근대철학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간주하고 있고, 또 이러한 근대철학의 특성을 창시한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라고 말하지.


그런데 우리가 데카르트의 저작을 실제로 읽어보면(사실 데카르트의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지. 읽더라도 (가벼운) 소설책 읽듯이 하거나), 위와 같은 표현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저작에는 그런 표현에 부응할 수 있는 개념 또는 단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다시 말해 데카르트의 저작에는 “콘스키엔치아conscientia”, 곧 우리가 흔히 쓰는 “의식”이라는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고(한 차례를 제외하면), 또 “수브옉툼subjectum”이라는 단어, 곧 우리가 쓰는 “주체/주관”이라는 단어도 별로 사용되고 있지 않고, 그 의미도 근대적인 “주체/주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고대와 중세철학의 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지.


그러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지. 데카르트는 실제로는 “의식”이나 “자기의식”, 또는 “주체”라는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왜 데카르트가 “자기의식의 철학자”고 “주관성의 형이상학자”지? 이 질문은 얼핏 보기에 매우 유치하고 사소한 질문 같지만, 어떻게 다루어나가느냐에 따라 지금까지 근대철학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매우 상이한 관점을 낳을 수 있는 질문이지. 실제로 발리바르 같은 사람은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이런 질문을 탐구해서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관점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해오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의식” 개념은 데카르트가 아니라 (랄프 커드워스와) 로크가 발명한 개념이고, 근대의 “주체” 개념은 칸트의 창안물이라는 점을 엄밀한 문헌학적 고증과 철학적 논증을 통해 밝혀내지. 아직도 탐구가 진행 중에 있지만, 이건 참 근대철학 전반을 새롭게 고찰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결론이지.

 

이제 그만 이 글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됐군. 어쨌든 나는 독자들이 이런 의문을 독자적으로 제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독자적인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고, 적절한 훈련을 거친다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또 독자들이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철학책이 좋은 책이고, 또 학생들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는 선생이 좋은 선생이지.


그런데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으려면, (1)과 (2) 같은 측면을 잘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3)과 같이 텍스트에 나오는 단어들에 주목하는 것도 꼭 필요하지. 철학책, 철학 텍스트는 의미론적으로 잘 정의되고 규정된 개념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이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숱한 단어들로도 이루어져 있는데, 이 단어들은 앞의 “en”이라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개념들의 차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철학자의 논변의 숨은 차원(푸코라면 “비사고”라고 하겠고, 정신분석가들이라면 “무의식”이라고 하겠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지.


더 나아가 우리가 개념에서 단어들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면, 철학 텍스트가 지닌 또다른 탐구의 층위를 발견하게 되지. 곧 개념들이나 논변의 의미론적 질서에 가려서 드러나지 않는 통사론적이거나 화용론적 차원, 또는 수사학적 차원이 바로 그것이지. 가령 우리가 스피노자의 󰡔윤리학󰡕 같은 책을 읽을 때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논변들을 분석하고, 개념들의 의미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가 별 의미없이 사용하는 듯이 보이는 단어들의 빈도와 용법(가령 1부 속성에 대한 정의에 나오는 “구성하다constituo”라는 단어가 󰡔윤리학󰡕 전체에, 또 각각의 부에서 몇 번이나 사용되고 있고, 그 용법들은 어떤 것인지)을 살펴보면,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비롯한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문제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헉,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좀 어려운 문제에까지 도달했는데, 어쨌든 결론은 다음과 같은 거야.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으려면 논변에 주의해야 하고 맥락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꼼꼼하고 창의적으로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단어들의 차원, 기록/글쓰기의 차원에까지 내려가서 책을 읽어야 한다. 너무 어렵다고?? 이 모든 걸 한꺼번에 다하려고 하니까 어렵겠지. 또 철학책에 있는 ‘모든 논변, 모든 맥락, 모든 단어들을 일일이 까발려야 하는 건가?’하고 생각하니까 어렵게 느껴지겠지. 그러지 말고 이 책에 나와 있는 하나의 논변이라도 한번 재구성해서 검토해보자, 이 개념, 이 논변의 맥락이라도 한번 살펴볼까? 또 이 단어가 궁금한데, 한번 검토해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어보라구. 실제로 이런 식으로 책을 한번 읽어본다면, 지금까지 읽었던 것과 새로운 차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나는 이 세 번째 항목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좀 했다구. 중요하긴 중요하지만, 이건 사실 번역본(국역본이든 외국어 번역본이든)을 읽는 독자들로서는 실행하기가 좀 힘든 것이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뭐 내가 이런 걸 잘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다만 이런 측면이 중요하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정도지. 어쨌든 나중에라도 더 공부를 하게 되면, 이런 점들에 유념하면서 책을 읽으면 책을 좀더 꼼꼼히 읽을 수 있을 거야.


매버릭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걸로 대신할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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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4-06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지식수입국 한국, 특히 그 속에서도 타인의 번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저같은 지식소비자에게는 참 우울한 말씀입니다(-.-;).

클리오 2005-04-0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이 글을 읽고 비슷한 생각을 하셨나보죠.. 저도 이 글을 읽고 처음에는 진짜 철학책(글) 같다.. 라는 생각을 했고. 두번째는 학문을 하려면 먼저 그 나라의 언어부터 죽도록 공부해야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야 되나, 어쩌나 고민을 해봤습니다. 영어는 몇 년을 열심히 해도 오역이 난무하고, 그나마 다른 언어는 접근할 엄두조차 못내니.. 휴휴...

로쟈 2005-04-0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는 알튀세르를 한국어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숭고한 알튀세르!..

aporia 2005-04-0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른 분들과 비슷한 심정이군요. TT. 열심히 공부하는 수 밖에 없겠네요. 참, 그런 의미에서, '인권의 정치란 무엇인가' 마지막 각주 '비폭력'에 관한 언급은 무엇이었는지요? 새삼 궁금해지는군요...

루루 2005-04-0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ㅜ.ㅜ 번역서를 읽으면서 오역이 의심되도 그냥 "외국어를 못하는 내 죄네;" 하고 넘어간 적이 많았는데- 역시 그게 쌓이고 쌓이다보면;; 문제가 되더군요.
이제 서툴더라도 사전 뒤져가면서 원서 읽는 법을 익혀야 겠네요.
암튼 답변은 무지무지 감사드려요^^ 제 미니홈피에 가져다 놔야겠습니다. ㅎㅎ

아. 그리고 제가 이름을 바꿨지요;; 식목일날 하늘이 너무 이뻐서- 가장 이쁜 하늘은 뭘까 하다가요^^ 근데 오늘은 날이 영 흐려서리- 우중충이네요.

balmas 2005-04-07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닐라스카이, 깜찍한 이름이군. ㅋㅋ

아포리아님, 찾아보니까 해당 구절의 원문은 "une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ne

peut être <non-violente> par principe"이더군요. 그러니까 한글 번역본처럼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 없다"로 번역해야죠.

그리고 다음 문장의 첫번째 단어인 "이 때문에" 역시 원문이 "cependant"이니까,

"하지만"으로 고치는 게 옳습니다.


aporia 2005-04-0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정말 결정적 오역이군요! 처음 읽었을 때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좀 충격을 받았었죠(그때는 영역본이라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어요...). 다음 대목으로 서둘러 넘어가면서 이 문구를 '억압'해 버리긴 했지만 폭력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이 대목이 항상 다시 돌아왔었는데. (무슨 '전술'도 아니고 강조표시한 '원칙'이라고 말하니까요!) 오랜 체증을 푼 것 같아 무척 기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NA 2005-04-07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선배, 아포리아님 안녕하십니까? '인권의 정치는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라는 그 구절이 정반대의 오역이었었군요. 문제가 훨씬 알기 쉽게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 그건 그렇고, 진선배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représent 를 '표상한다'로 번역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신 다음에, 대신 사용할 말을 말씀하지 않으셨더군요. 대표한다? 재현한다? 전자는 좀 곤란한 것 같고, 후자는 표상한다와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군요. 좀 더 부연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Maverick 22의 질문


<선생님, 철학책을 꼼꼼히 읽는다는 것이 어떻게 읽는 것인지 궁금해요;;

저는 자꾸 읽다가보면 앞에 내용까먹고, 행간도 잘 못 읽고 해서 걱정인데ㅜ.ㅜ>

 


balmas의 답변


앗, 어려운 질문이네 ... (삐질삐질)


그냥 지나가다 한 마디 던졌을 뿐인데 ... (무슨 TV 광고 문구 같다 ... -_-;;;)


ㅎㅎㅎ 철학책을 이렇게저렇게 읽어라라고 말하는 건 좀 주제넘은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한두 마디 조언을 해주자면,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철학책을 꼼꼼히 읽는다는 건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지.



1)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기란 일차적으로 그 책에서 전개되는 논변을 꼼꼼하게 따져 본다는 걸 뜻할 수 있지. 다른 책들과 구분되는 철학책의 고유한 특성은 아무래도 논변 중심의 책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거야. 사실 철학이야 사실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 아니고 무언가를 예측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는 학문도 아니고, 타당한 논리적 형식을 갖추어서 자신의 주장의 타당성, 정합성 또는 객관성을 보여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학문이니까, 이렇게 논변을 중심으로 하는 건 당연하지. 그래서 객관적인 타당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주장은 계급적 이해관계나 권력관계 등을 포함하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론조차도 그런 주장을 위해서는 이런 형식의 논변을 포기할 수 없지(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버마스 같은 사람들에 동조할 수밖에는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 그의 주장을 넘어서는, 또는 적어도 그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제시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거든).

  

  따라서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는다는 건 그 책에서 제시되는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들, 예증들, 또 이를 위해 다른 이론들, 주장들에 대해 제기하는 반론들을 꼼꼼하게 따져본다는 걸 뜻하지. 그리고 좋은 철학책, 좋은 철학논문, 좋은 철학적 글일수록 이런 것들이 밀도 있고 참신하게 제시되기 마련이지.


우리 수업과 관련해서 본다면, 알튀세르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주장하는 테제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거들이 무엇인지, 또 다른 이론들에 대해 제기하는 반론이 무엇인지 따져보면서 책이나 글을 읽으면, 그의 주장, 그의 논의를 좀더 꼼꼼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또 지젝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지젝은 좀 독특한 논변 방식을 구사하긴 하지만, 그의 책이나 글에도 역시 나름대로의 주장과 논변, 예증, 반론들이 담겨 있으니까, 그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책을 읽어보면,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알튀세르에 대해 지젝이 어떤 반론들을 제시하고 있고, 또 그의 반론들에 대해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제시할 수 있는 재반론은 어떤 게 있을까? ㅎㅎㅎ 그런 걸 생각해보라구. ^o^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사실 철학책이 논변 중심으로 되어 있지만, 그 방식은 철학자들마다, 또는 철학책들마다 상당히 다르지. 그리고 좋은 철학자들일수록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신의 논변 방식을 갖고 있지. 예컨대 플라톤의 대화편들이나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인 사유 흐름의 탐구,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관통하는 ‘기하학적’ 논변 방식, 또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 같은 책에서 볼 수 있는 담담하고 건조한 분류와 서술 등등. 철학자들의 문체, 스타일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의미에서지. 지나친 비유들의 남발이나 멋부리는 수식어들을 나열하는 것, 또는 주관적인 감정의 토로들로 점철된 글을 훌륭한 문체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적어도 철학자의 문체, 스타일은 그런 것과는 다르지.


이렇게 좋은 철학자들일수록 논변의 내용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논변 스타일도 빼어나기 마련인데, 때로는 그 철학자의 논변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변의 스타일을 이해하는 게 본질적인 조건이 되는 경우가 있지. 데카르트의 󰡔성찰󰡕이나 스피노자의 󰡔윤리학󰡕 같은 고전은 물론 그렇거니와, 우리의 수업과 관련된 예를 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이 그렇지. 이 논문, 특히 “이데올로기에 대하여”라는 절에 나오는 고유한 논변 방식을 감안하지 못할 경우 알튀세르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지. 그 때문에 지젝을 포함한 많은 주석가들/비판가들이 엉뚱한 오해에 빠지기도 하지.


그래서 때로는 철학자의 주장이나 논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의 논변 내용만이 아니라 논변 방식, 논변 스타일을 잘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지.  

   

2) 그 다음 꼼꼼하게 읽기의 두 번째 의미는, 맥락 속에서 읽기를 의미하지. 이건 다른 학문에 비해 철학책 읽기에 더 많이 요구되는 사항이기도 해. 왜냐하면 다른 학문들과 구분되는 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반복, 되풀이에 있거든. 다시 말해 철학에서 이전의 철학들과 절대적으로 단절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지. 철학사에서 볼 때 항상 시대마다 새로운 이론, 새로운 문제설정, 또는 (푸코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에피스테메가 끊임없이 출현하지만, 이러한 새로움은 항상 철학사 전통의 되풀이를 전제하는 새로움이지.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좋다면, 철학에서 무언가 새로운 주장을 제시한다는 것은, 철학사의 전통과 새로운 관계맺음의 방식들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이 때문에 철학, 철학적 사고는 다른 학문들에 비해 자신의 역사, 곧 철학의 경우는 철학사에 대한 연구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지.


가령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는 철학일수록[이런 새로움에 대한 주장은 어떻게 보면 근대철학, 특히 헤겔 이후의 철학에 고유한 특징이지. 헤겔이 자신의 철학에 이르러 철학이 완결되었다고 주장한 만큼, 정말 새로운(그만큼 종말론적인) 주장을 제시한 만큼, 그의 후배 철학자들은 더욱 더 새로운(따라서 더욱 더 종말론적인) 주장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겠지? 이런 새로움에 대한 주장에 담겨 있는 고유한 이데올로기는 한번 연구해 볼 만한 주제지] 과거의 철학에 대해 격렬하고 단호하게 단절의 선을 긋기 마련이지. 또는 좀더 교묘한 경우라면 과거의 철학을 자신의 철학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경우든지 간에 새로운 철학은 과거의 철학과 관련을 맺게 되고, 자신의 새로움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철학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한계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게 되지. 더욱이 철학이 언어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데리다의 의미에서) 기록écriture을 전제하고 그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철학이 주장하는 새로움은 실은 항상 이미 되풀이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 


그래서 철학책을 꼼꼼히 읽기 위해서는 이 철학자의, 이 주장이 어떤 맥락 속에서 제시된 것인지, 어떤 흐름과 결부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이건 다시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지.


첫째, 맥락 속에서 읽는다는 건 그 철학자의 저술의 맥락을 검토한다는 걸 뜻하지. 대개의 철학자들이 여러 편의 저작들과 논문들, 또는 글들을 남기고 있고, 또 대개의 경우 처음에 저술된 글이나 책과 나중에 저술된 것들 사이에는 연속성만큼이나 불연속성도 존재하기 마련이지. 그래서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청년 마르크스와 장년 마르크스의 단절과 연속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소위 사상의 전회(Kehre)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많이 논의되곤 하지. 알튀세르나 라캉 또는 지젝의 경우도 그렇고.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나 논변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런 전후 맥락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지. 그의 주장이나 논변이 공백 상태에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이론적 소여(所與)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차이, 다름에 대한 이해는 그 주장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많은 것을 밝혀주기 때문이야. 따라서 지금 읽고 있는 이 철학자의 이 책의 논의가 어떻게 해서 제시된 것인지, 이 논의의 배경이나 전제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것은 단순히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논의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둘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읽는 어떤 철학자의 책은 좀더 큰 맥락 속에 들어 있게 마련이지. 또 철학의 논의가 철학사의 반복과 분리될 수 없다면, 이 철학자의 책은 그것이 몸담고 있는 좀더 광범한 철학사의 맥락을 어떤 식으로든 되풀이하게 마련이지. 따라서 우리가 그 맥락을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구분하든,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구분하든, 현상학과 분석철학으로 구분하든,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로 구분하든 간에, 어떤 철학자의 책을 좀더 정확하게, 꼼꼼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철학자의 책을 철학사의 맥락에 포함시켜서 이해하는 게 필요하지.


그리고 사실 대개의 철학적 논변에는 다른 철학자, 특히 철학사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논의가 들어 있기 마련이야. 가령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논의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물론이거니와 프로이트나 라캉, 파스칼, 스피노자 같은 사람의 논의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준거하고 있지. 마찬가지로 지젝 역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기 위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라캉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카프카,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들에 준거하고 있지. 그래서 알튀세르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튀세르가 준거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논의되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특징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고, 이를 쇄신하기 위해 알튀세르가 활용하고 있는, 프로이트에서 라캉에 이르는 정신분석의 흐름, 더 나아가 그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당대의 프랑스 철학과 정치의 맥락(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대립 등)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겠지.


또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파스칼 철학의 특징 같은 것도 이해해둔다면 도움이 되겠지. 사실 이 점은 알튀세르와 지젝의 이론적 차이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쟁점 중 하나지. 두 사람 모두 파스칼의 논의에 준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파스칼을 이해하고, 또 활용하는 방식에는 재미있는 차이점이 있거든. ^_^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져버렸는데, 어쨌든 중요한 건, 어떤 철학자의 책이나 글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그 책이나 글에서 전개되는 논변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항상 맥락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이해는 그 철학책이나 글을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 이 점을 이해하면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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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4-02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추천 감사. :-)
그런데 오타가 좀 있어서 수정했어요.^^;;;

루루 2005-04-0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잘 답해주시다니 감사요~ 저도 추천클릭^^
2편도 기대할께요 ㅎㅎ
이제 열심히 읽는 일을 해야하는데;; 이놈의 게으름이ㅜ.ㅜ

nemuko 2005-04-0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선배한테 끌려가서 철학 강의를 한동안 들었거든요. 근데 공부하면 점점 더 모르는 부분이 많아지길래 결국 헉겁하면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군요. 저의 문제점은 우선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것과,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거군요... 추천^^ 좀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