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측면, 사실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측면이 남았는데,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 책에 나오는 단어들을 세심하게 따져가면서 읽는다는 걸 뜻하지. 여기에서 나는 개념이나 범주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단어라고 말했는데, 그건 개념이나 범주로 환원될 수 없는 단어에 고유한 물질성(따라서 비순수한 역사성) 같은 게 있기 때문이지. 


우리 수업과 관련된 예를 하나 들자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에서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représent.”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마지막 단어 “représent” 또는 그것의 동사원형인 “représenter”를 “표상한다”라든가 “표상하다”로 번역해서 사용하지. 그런데, 수업 시간에도 말했듯이, 이 단어를 이렇게 “표상한다”나 “표상하다”로 번역하게 되면, 이 단어가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정의에 사용된 이유, 또 이 단어가 이데올로기 개념의 정의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지. “représent”을 “표상한다”로 번역하게 되면, 이데올로기는 기껏해야 인식론적 측면에 따라 이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이데올로기가 “상상적 관계를 표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지. 사람들은 여기에서 엉뚱하게 비약해서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인식론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과학의 대립물이기 때문에, 알튀세르는 과학주의자다라는 멋진(?)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내곤 하지. 이런 생각은 실제로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데,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알라딘 서평 중 하나에서도 이런 생각을 볼 수 있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논문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유명한 호명 테제를 들 수 있지.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지. “Idéologie interpelle les individus en sujets.” 이 문장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끝에서 두 번째 단어인 “en”이지. 이 단어는 다른 나라 말, 가령 영어에는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불어에 고유한 어휘지. 그래서 영어 번역자나 주석가/비판가들이 이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지. 하나는 “as”로 번역하는 것이고([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의 영역본에는 바로 이렇게 번역되어 있지), 다른 하나는 “into”로 번역하는 거야(몇몇 주석가들이 이 번역을 택하지). 전자의 경우라면 이 테제는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번역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라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번역될 수 있지.


그런데 이 두 가지 번역 각각의 경우에 원래의 테제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달라지게 되지. 전자처럼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번역하게 되면, 이것은 이미 이데올로기 이전에 주체를 주체로 구성하는 어떤 담론 또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왜냐하면 이 경우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기능은 이미 구성되어 있는 주체 내지는 주체의 기능을 개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되므로, 이 때의 주체로서의 주체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영역, 다른 담론 또는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 벌써 구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반대로 후자처럼 “into”로 번역하는 경우에는, 바로 이데올로기 자신이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 두 번째 번역이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기능을 해명하는 데 좀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런 번역이 과연 전적으로 충실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  


어쨌든 “en”의 사례는 얼핏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단어가 개념의 이해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지. 물론 (지젝을 포함한) 대부분의 알튀세르 주석가/비판가들(특히 국내의 ‘논평자들’)은 이런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지. 가령 우리가 이런저런 철학책들, 특히 유럽철학 관련 책들을 읽다보면 흔히 접하게 되는 것이 “주관성의 형이상학”이나 “자기의식의 철학”이라는 표현이지. 전자는 하이데거에서 유래하고 후자는 헤겔에서 유래하는 표현인데, 지금은 거의 관용적인 용법이 되었지. 그런데 헤겔과 하이데거는 이처럼 “자기의식의 철학”이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근대철학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간주하고 있고, 또 이러한 근대철학의 특성을 창시한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라고 말하지.


그런데 우리가 데카르트의 저작을 실제로 읽어보면(사실 데카르트의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지. 읽더라도 (가벼운) 소설책 읽듯이 하거나), 위와 같은 표현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저작에는 그런 표현에 부응할 수 있는 개념 또는 단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다시 말해 데카르트의 저작에는 “콘스키엔치아conscientia”, 곧 우리가 흔히 쓰는 “의식”이라는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고(한 차례를 제외하면), 또 “수브옉툼subjectum”이라는 단어, 곧 우리가 쓰는 “주체/주관”이라는 단어도 별로 사용되고 있지 않고, 그 의미도 근대적인 “주체/주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고대와 중세철학의 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지.


그러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지. 데카르트는 실제로는 “의식”이나 “자기의식”, 또는 “주체”라는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왜 데카르트가 “자기의식의 철학자”고 “주관성의 형이상학자”지? 이 질문은 얼핏 보기에 매우 유치하고 사소한 질문 같지만, 어떻게 다루어나가느냐에 따라 지금까지 근대철학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매우 상이한 관점을 낳을 수 있는 질문이지. 실제로 발리바르 같은 사람은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이런 질문을 탐구해서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관점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해오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의식” 개념은 데카르트가 아니라 (랄프 커드워스와) 로크가 발명한 개념이고, 근대의 “주체” 개념은 칸트의 창안물이라는 점을 엄밀한 문헌학적 고증과 철학적 논증을 통해 밝혀내지. 아직도 탐구가 진행 중에 있지만, 이건 참 근대철학 전반을 새롭게 고찰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결론이지.

 

이제 그만 이 글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됐군. 어쨌든 나는 독자들이 이런 의문을 독자적으로 제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독자적인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고, 적절한 훈련을 거친다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또 독자들이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철학책이 좋은 책이고, 또 학생들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는 선생이 좋은 선생이지.


그런데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으려면, (1)과 (2) 같은 측면을 잘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3)과 같이 텍스트에 나오는 단어들에 주목하는 것도 꼭 필요하지. 철학책, 철학 텍스트는 의미론적으로 잘 정의되고 규정된 개념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이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숱한 단어들로도 이루어져 있는데, 이 단어들은 앞의 “en”이라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개념들의 차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철학자의 논변의 숨은 차원(푸코라면 “비사고”라고 하겠고, 정신분석가들이라면 “무의식”이라고 하겠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지.


더 나아가 우리가 개념에서 단어들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면, 철학 텍스트가 지닌 또다른 탐구의 층위를 발견하게 되지. 곧 개념들이나 논변의 의미론적 질서에 가려서 드러나지 않는 통사론적이거나 화용론적 차원, 또는 수사학적 차원이 바로 그것이지. 가령 우리가 스피노자의 󰡔윤리학󰡕 같은 책을 읽을 때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논변들을 분석하고, 개념들의 의미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가 별 의미없이 사용하는 듯이 보이는 단어들의 빈도와 용법(가령 1부 속성에 대한 정의에 나오는 “구성하다constituo”라는 단어가 󰡔윤리학󰡕 전체에, 또 각각의 부에서 몇 번이나 사용되고 있고, 그 용법들은 어떤 것인지)을 살펴보면,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비롯한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문제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헉,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좀 어려운 문제에까지 도달했는데, 어쨌든 결론은 다음과 같은 거야.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으려면 논변에 주의해야 하고 맥락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꼼꼼하고 창의적으로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단어들의 차원, 기록/글쓰기의 차원에까지 내려가서 책을 읽어야 한다. 너무 어렵다고?? 이 모든 걸 한꺼번에 다하려고 하니까 어렵겠지. 또 철학책에 있는 ‘모든 논변, 모든 맥락, 모든 단어들을 일일이 까발려야 하는 건가?’하고 생각하니까 어렵게 느껴지겠지. 그러지 말고 이 책에 나와 있는 하나의 논변이라도 한번 재구성해서 검토해보자, 이 개념, 이 논변의 맥락이라도 한번 살펴볼까? 또 이 단어가 궁금한데, 한번 검토해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어보라구. 실제로 이런 식으로 책을 한번 읽어본다면, 지금까지 읽었던 것과 새로운 차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나는 이 세 번째 항목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좀 했다구. 중요하긴 중요하지만, 이건 사실 번역본(국역본이든 외국어 번역본이든)을 읽는 독자들로서는 실행하기가 좀 힘든 것이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뭐 내가 이런 걸 잘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다만 이런 측면이 중요하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정도지. 어쨌든 나중에라도 더 공부를 하게 되면, 이런 점들에 유념하면서 책을 읽으면 책을 좀더 꼼꼼히 읽을 수 있을 거야.


매버릭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걸로 대신할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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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4-06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지식수입국 한국, 특히 그 속에서도 타인의 번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저같은 지식소비자에게는 참 우울한 말씀입니다(-.-;).

클리오 2005-04-0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이 글을 읽고 비슷한 생각을 하셨나보죠.. 저도 이 글을 읽고 처음에는 진짜 철학책(글) 같다.. 라는 생각을 했고. 두번째는 학문을 하려면 먼저 그 나라의 언어부터 죽도록 공부해야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야 되나, 어쩌나 고민을 해봤습니다. 영어는 몇 년을 열심히 해도 오역이 난무하고, 그나마 다른 언어는 접근할 엄두조차 못내니.. 휴휴...

로쟈 2005-04-0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는 알튀세르를 한국어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숭고한 알튀세르!..

aporia 2005-04-0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른 분들과 비슷한 심정이군요. TT. 열심히 공부하는 수 밖에 없겠네요. 참, 그런 의미에서, '인권의 정치란 무엇인가' 마지막 각주 '비폭력'에 관한 언급은 무엇이었는지요? 새삼 궁금해지는군요...

루루 2005-04-0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ㅜ.ㅜ 번역서를 읽으면서 오역이 의심되도 그냥 "외국어를 못하는 내 죄네;" 하고 넘어간 적이 많았는데- 역시 그게 쌓이고 쌓이다보면;; 문제가 되더군요.
이제 서툴더라도 사전 뒤져가면서 원서 읽는 법을 익혀야 겠네요.
암튼 답변은 무지무지 감사드려요^^ 제 미니홈피에 가져다 놔야겠습니다. ㅎㅎ

아. 그리고 제가 이름을 바꿨지요;; 식목일날 하늘이 너무 이뻐서- 가장 이쁜 하늘은 뭘까 하다가요^^ 근데 오늘은 날이 영 흐려서리- 우중충이네요.

balmas 2005-04-07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닐라스카이, 깜찍한 이름이군. ㅋㅋ

아포리아님, 찾아보니까 해당 구절의 원문은 "une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ne

peut être <non-violente> par principe"이더군요. 그러니까 한글 번역본처럼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 없다"로 번역해야죠.

그리고 다음 문장의 첫번째 단어인 "이 때문에" 역시 원문이 "cependant"이니까,

"하지만"으로 고치는 게 옳습니다.


aporia 2005-04-0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정말 결정적 오역이군요! 처음 읽었을 때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좀 충격을 받았었죠(그때는 영역본이라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어요...). 다음 대목으로 서둘러 넘어가면서 이 문구를 '억압'해 버리긴 했지만 폭력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이 대목이 항상 다시 돌아왔었는데. (무슨 '전술'도 아니고 강조표시한 '원칙'이라고 말하니까요!) 오랜 체증을 푼 것 같아 무척 기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NA 2005-04-07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선배, 아포리아님 안녕하십니까? '인권의 정치는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라는 그 구절이 정반대의 오역이었었군요. 문제가 훨씬 알기 쉽게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 그건 그렇고, 진선배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représent 를 '표상한다'로 번역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신 다음에, 대신 사용할 말을 말씀하지 않으셨더군요. 대표한다? 재현한다? 전자는 좀 곤란한 것 같고, 후자는 표상한다와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군요. 좀 더 부연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