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님의 "호정무진님, 따우님, 로쟈님 그리고 그밖의 다른 분들에게-철학사전 한 권 소개"
가을산님, 스텔라님, 죄송하옵니다. (__)
좋은 사전이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번역하기는 어려움이 많을 듯하옵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다 손도 많이 가고 출판사들의 경제적 고려도 있을 것이고 ...
lidgate님,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라틴어가 제일 보편적인 언어라는 점이 큰 이유 중
하나였겠죠. 교통이나 통신, 기록 여건이 오늘날 같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 방언들로
글을 쓴다는 건 거의 의미가 없었겠죠.
호정무진님, 예, 그래서 번역 문제가 더 중요하겠죠. 며칠 전에 일본의 고등학교 교사가
쓴 [과학의 탄생]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고 하더군요. 1000페이지 가량 되는 방대한
책인데,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책소개를 보니까 고대
그리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자연철학-물리학의 역사에 관한 책인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목차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학자들이나 내용이 상당히 광범위
하더군요. 섣부른 단정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광범위한 문헌들을 저자가 원문으로 직접
읽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겠더라구요. 그럼 이 책을 쓴 저자는 그 문헌들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그건 십중팔구는 일본어로 번역된 책들로 읽었을 겁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저런 종류의 책을 집필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우리나라에는 저 책에서
다루는 문헌들의 번역본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로저 베이컨의 저작, 쿠자누스의 책들, 르네상스
사상가들의 책, 이런 건 모두 그림의 떡이죠(적어도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그렇죠). 이런 게 바로 학문의 격차를 낳는 주요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ㅎㅎ 로쟈님, 제 관심이 '문학' 쪽으로 정향되어 있다는 말씀은 칭찬으로 들립니다.
représentation 같은 단어야 영어로 번역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죠. 알튀세르가
그 용어에 어떤 개념을 부여해서 사용하든, 불어와 영어에는 어원이 같은 동일한 단어가
있으니까, 저 단어를 옮기는 건 사실 전혀 문제될 게 없죠. 오히려 représentation을 다른
단어로 옮긴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아주 독창적이거나 터무니없거나)이 되겠죠.
제가 영어로 옮기기 어렵다고 한 건 사실은 저 단어가 아니라 "en"이라는 단어죠. 이
단어는 영어에 상응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불어에 고유한 어휘니까요. 그리고 또
내용상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함의들을 지니고 있구요. 어쨌든 이런 단어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에는 심각한 어려움이 존재하지요. 사실은 번역하기 매우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한 단계 진전된 인식과 논의를 위한 조건이 되는 셈이겠지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어떤 단어(철학 용어든 아니든 간에)를 번역
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글이나 책이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다, 심지어 불가능한 것 같다,
이런 게 반드시 부정적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오히려 이런 어려움을 낳는 용어,
글, 책이야말로 우리 언어, 우리의 개념, 우리의 인식을 좀더 풍부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기회, 도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개념의 발명이라는거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말 철학개념을 '발명'할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라는 로쟈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의 발명은 불필요하게 신조어를 남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라는 말씀에도 동감하구요. 사실 번역자가 이론가가 외국 문헌을
공부하면서 자기가 이전까지 접해 보지 못한 용어라고 해서 그것을 신조어로 표현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손쉽게 일본식 번역어를 빌려서 표기하려고 하는 건, 개념의 발명이 아니라
지적 게으름과 안이함에 불과하죠. 예를 들자면, 스피노자의 <포텐샤potentia> 같은 걸
국어사전에도 없는 "역능"이라는 신조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든지, 둔스 스코투스에서
유래하고 들뢰즈가 사용하기도 한 <헤케이타스hecceitas> 같은 용어를 "특개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든지, 또는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용어이고 프로이트도 자주 쓰는 <affect>
라는 용어를 "정동"으로 옮기는 것 등은 사실은 개념적인 인식을 더 어렵게 할 뿐입니다.
개념의 발명이라는 건, 그 이전까지는 상식적인 의미, 평범한 의미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던 어떤 단어, 말에 새로운 의미, 고유한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겠죠. 가령
독일어에 "진Sinn"과 "베도이퉁Bedeutung"이라는 서로 구분되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프레게가 이 단어들에 고유한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두 단어의 개념적
차이를 엄밀하게 하기 전까지 두 단어는 모두 "뜻"이나 "의미"를 지시하는 상이한 두
방식에 불과했죠. 마찬가지로 알튀세르가 "호명interpellation"이라는 단어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 이 단어는 군사/경찰의 용어(우리말로 표현하면 "불심검문"
이나 "수하" 정도에 해당할 텐데요)로나 사용되던 말에 불과했죠. 이런 게 고유한 의미
에서 개념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식인들까지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쓸 데 없는 신조어들을 남발하는 게 아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