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résentation 또는 représenter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질문하셨죠?
그런데, 이 문제는 사실 représentation 또는 représenter가 지닌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만이
아니라 정신분석에 대한 이해, 또는 (탈)구조주의 언어론 등과 긴밀하게 관련된 문제여서
여기서 이 문제를 좀더 상세히 검토해봤으면 좋겠지만, 앞으로 다른 기회에 좀더 정교한 논의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냥 간단히 몇 자 적어봤습니다.
다시 한번 환기하자면 문제가 되는 표현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에서 이데올로기를 정의하고 있는 다음 문장이죠.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représent .
또는 다음과 같은 표현도 이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죠.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se représentent”하는 것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représenté
[표상/재현/상연된]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된 représentation 또는 représenter가 지닌 의미를 모두 표현해줄 수 있는
우리말을 찾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시다시피 représentation은 매우
다의적인 개념이죠. 인식론적/심리학적 의미의 "표상"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또한 "재-현", 곧 "re-présentation"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죠. 그런데 이 때의 "재-현"
이라는 말은 원래 존재하던, 또는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사물이나 실재 x를 사후에,
또는 모방해서 나타낸다는 의미도 갖고 있겠지만, 이 경우에는 사실 "표상"이라는
말과 크게 다른 의미를 갖기는 어렵겠죠. 재현되는 대상과 재현 사이에 원본-모방의 관계
또는 유사성의 관계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재-현", "re-présentation"이라는
말에서 중심적인 것은 "현", 곧 "현시(顯示)"라는 데 있다기보다는 "재"라는 말,
곧 "되풀이", "반복", 또는 더 나아가 "대체"라는 의미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re-"의 작용은 원초적으로, 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 x의
존재를 미리 전제하고, 사후에 이를 모방하거나 표상하는 작용이라기보다는 실재-사물
또는 실재적 관계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해 있는 세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작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죠.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re-présentation"을 원본-모방의
관계로 보는 것은 사실 "재-현"의 작용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표상/오인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죠.
더 나아가 알튀세르가 사용하는 représentation 개념 속에는 "상연"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곧 어떤 주체 또는 배우/행위자들이 허구적인
역할들을 실행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죠. 이들이 허구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은 물론 상상적으로 부여받은 "정체성identity"이 되겠죠.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범주 중 하나가 "reconnaissance", 곧 상상적인 동일성/정체성을
부여받은 주체-행위자/배우들이 서로에 대해 서로의 동일성/정체성을 "인정"해주고,
또 그를 통해 자신의 동일성/정체성을 인지-재인지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reconnaissance"라는 범주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알튀세르가 사용하는 représentation 개념은 독일어의 Vorstellung
개념보다는 Darstellung 개념에 좀더 가까운 게 아닌가 합니다. Darstellung 개념에는
Vorstellung, 곧 "표상"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현시"나 "표현"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고,
더 나아가 "상연"이라는 의미와 "서술-제시"라는 의미도 담겨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représentation을 하나의 우리말 단어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어로야, 불어 원어가 지닌 다양한 의미야 어찌 됐든
어원이 같은 단어인 "representation"으로 표기하면 되니까 별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말로
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죠. 이는 영어사용자들에 비해
그만큼 우리에게 불리한 점이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그만큼 유리한 기회이기도
하겠죠. 영어사용자들이 별 문제 없이 넘어가는 사실을 우리는 하나의 문제로, 심각한 문제로
절감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너무 아전인수격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