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이발소-[김이듬]

내리막길에서 급정거를 한 건 순전히 한 사내 때문이었죠 흙먼지 뒤집어쓴 머리를 쑥 내밀며 막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죽순 같았어요 나는 도로 묻히려는 그 사내를 다독거려 백일홍 가지에 약속을 걸어두고 맞은 편 이발소로 데려 갔어요 육계 머리칼을 뜯어 비눗물에 담그고 문질렀지요 뻣뻣했던 머리칼이 파래처럼 부드러워졌어요 의자에 누워 있던 사내의 튀어나온 눈이 따가울까 봐 나는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닦아냈지요 매일 머리를 감겨 달래면 어쩌나 화를 내면 어쩌지 내가 도로 사내의 팔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새 노을지고 백일홍 꿈결같이 졌네요
어디쯤이었을까
나는 사내를 끌어올린 구덩이를 찾지 못하고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듯 도로를 헤집는데 사내는 일을 마친 성기처럼 안으로 쑤욱 들어가 얼굴만 내민 석인상이 되었네요



나의 기억에 반쯤 묻힌 당신을 꺼내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드려요
어디쯤에서 잘못되었나 고민하다가
광한루 지나
만복사지 옆 비탈길에서
비뚤하게 다시 만나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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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스침으로도 억겁의 세월을 두고
문득 이 세상에 사연이나 이유없는 삶이란 게 있을까요?
논밭가에 나뒹구는 도자기 조각 이나
기와편에 새겨진 만복사 삐뚜름한 명문 하나 혹은 목떨어진 불상에 내려쬐는
하오의 햇살 속에서도
지극히 선한 그리움으로 안겨오는
그대여, 꿈결같이 젖은 목소리로 다시 부르고픈 이름 그대여!

바쁘게 정신없이 참 잘살다가도
어느날 미친놈처럼 하 그리 문득 꿈인듯 생시인듯
폐사지를 떠올리거나 아니면 경주박물관 뒤뜰 왼갖 석물들 곁에 라도
왼종일 하루쯤 떠헤메이게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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