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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치 체포록 - 에도의 명탐정 한시치의 기이한 사건기록부
오카모토 기도 지음, 추지나 옮김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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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풍풍 누나"라는 이름으로 불린적이 있다. 아마 내가 초등 고학년쯤 되었을 때였지 싶은데, 그 시기 평일 오전 TV에서 방영하던 유아 프로에 <풍풍 임금님>이 등장해 유아들에게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그야말로 풍풍 해 주며 인기 몰이를 하고 있었다. 나의 풍풍 누나라는 별명은 사촌 동생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2-3주에 한번, 길면 한달에 한번쯤 만나 서로의 집에서 자곤 했던 외사촌 동생 둘과 내 친동생 하나를 청취자로 나는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잡탕으로 뒤섞어서 주저리 주저리 풀어놓곤 했다. 그것도 만날때마다 시리즈로 이어가며. 그 시기의 내가 창작(아니, 짜깁기) 했던 이야기로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남십자성의 비밀>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가진, 흡혈귀 이야기였다. 한참 피며 귀신이며 모험에 열중하던 시절이었다. 흡혈귀가 된 주인공을 사람으로 바꿔놓기 위해서 피를 완전히 빼고 새로운 피를 교차 수혈한다는 황당한 발상에, 한방울이 남아서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어이없는 설정에도 동생들은 열광했다. 여기서 남십자성은 남반구에서 관측되는 그 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남쪽의 십자모양 성(城)되시겠다. 물론 흡혈박쥐들의 본거지였다.

나는 단연 이야기 달인의 자리로 뛰어올랐고, 동생들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 줄거냐고 졸라댔다. 때로는 10살 이쪽저쪽의 아이들이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느라 새벽이 이울도록 잠도 안자고 있다가 무섭다며 안방으로 뛰어가기도 했다.   

모든 것은, 전설의 짜집기였건만.  

근 1년이 넘게 사촌들 위에 군림하게 만들었던 그 풍풍 누나의 비밀 보따리는 전설의 고향과 초등학교앞에 떠돌던 말도 안되는 해적판 괴담집이었다. 그땐 그런거 많았다. 중국 귀신 전설, 일본 귀신 전설, 학교 귀신 전설 등등등. 최근에 읽고 들은 무서운 이야기들은 생각도 나지 않는데, 그야말로 돌아서면 까먹는데 어릴때 전설의 고향에서 이불 뒤집어 쓰고 봤던 "내 다리 내 놔"를 비롯한 전설과 괴담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살아남아 내 상상력의 바탕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변주된다. 그건, 일종의 씨앗 같은 거다.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닌 씨앗. 복숭아씨나 사과 씨앗 같은. 그것을 심고 가꾸어 그것에서 비롯된 무언가를 만들어 섭취하게 하는 것. 그 자체로는 먹을 수도 없고, 먹을 것도 별로 없고, 먹어본들 맛도 없지만, 그것이 없이는 결과물도 없는 그런 것.

이 책 한시치 체포록도 일종의 씨앗같은 책이다.  

처음엔 셜록 홈즈 시리즈의 번안 소설로 기획되었던 이 책은, 결국 번안물이 아닌 순수 창작물이 되기는 했으나 태생적 한계랄까, 그런 것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번안물의 냄새가 난다고 해야하나. 번안물이 아닌데도. 인물들은 평면적이고(에도시대 인물들의 특징인가) 전형적이며 악당은 악당으로서 공통점을 가지고, 선인은 선인으로서 공통점을 가지고, 각각의 사건 역시도 비슷한 유형을 띤다. 괴담처럼 보이지만, 결국 괴담은 단 한편도 없이 모두가 인간의 소행이라는 점도 그 소행이 밝혀지는 과정이 박진감 넘치기 보다는 그냥, 음, 담담해서 별로 재미가 없다. 게다가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세련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게 만드는 건, 우직하게 촌스러운데서 오는 매력이랄까. 온갖 산해진미와 눈같이 보얀 쌀밥에 질린 사람이 깡보리밥집을 찾아가는 것과 비슷한 심리?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상상을 했다.  

이 책 자체로는 크게 재미가 없는데, 분명 무언가를 자극하는 부분은 있다. 이 이야기의 이 부분을 이리 비틀고 여기는 저렇게 꼬고, 여기는 잘라버리고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고, 이런 사건을 추가하면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에서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파생시킬 수 있을 것 같은, 힘찬 이야기다. 기교없이 우직하고 세련되지 못하게 밀고 나가는 서술이 가진 힘이라고 할까.  

표지를 보고는, 뭔가 엄청나게 재미있는 괴담을 기대하고 펼쳤다가... 화나서 별 하나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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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노릇 사람노릇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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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만병통치약은 우황청심원이었다. 그걸 한번에 열 너댓개씩 사다가 장롱속에 구메구메 넣어두시곤 두통이 날 때, 소화가 안될 때, 노동이 과해 허리가 아플 때, 아이들이 시끄럽게 해서 심통이 날때, 자식들이 괘씸해서 겁을 좀 줄 때 매번 할머니는 그 우황청심원을 꺼내다 드시곤 했다. 한번에 온전히 하나를 다 드시는 법도 없이, 증세에 따라 청심환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작은 과도로 뚝뚝 잘라 반절을 드실 때도 있고 반에 반을 드시기도 했다. 약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꿀꺽 삼키고 물로 입안을 한번 가시고는 휘유- 하는 한숨과 함께 명치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쓸어내리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매번 다른 증세에 똑같은 약을 처방하는 꼴이지만 효과는 틀림 없어서, 우황청심원을 드시고 30분만 지나면 씻은듯이 괜찮아지셨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우황청심원이 도대체 무슨 약인지 어떤데 먹는 약인지를 잘 모른다. 안티프라민과 함께 노인네들 필수 상비약인 것만은 틀림 없지만.  

비슷한 용법 용례를 가진약으로 친정엄마에겐 구심이 있고, 갓 태어난 아기들을 위해서는 기응환이 있다. 도대체 이 약들의 정체는 알수가 없으나, 효과만은 틀림이 없다... 고 한다. 뭐, 난 기응환 울 애들 안먹여 봐서 모르겠다. 하정훈이 먹이지 말래서.  

내 마음의 만병통치약은 박완서다. 

마음이 괜히 우울해지고 가라앉을 때, 이유가 꼭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딱히 그럴필요는 없는데도 청승을 떨고 싶어질 때 박완서의 책을 펼치면 어느새 마음은 갓 감아 정갈하게 빗질해 내린 머리채처럼 단정하고 가지런해진다. 현실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우뚝 선 것 같은 박완서의 글들은 세상살이가 얼머나 엄정하고 힘드는지, 하지만 그 힘든 사이사이로 얼마나 재미있고 유쾌한 일이 많은지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보여준다.  

박완서의 글을 읽다보면 도대체 내가 언제 왜 우울했는지 뭣때문에 우울했는지를 잊어먹게 되거나 고작 그까짓 일로 그랬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진다. 그 소녀스런, 청승의 기운이 민망해져 버리는 것이다. 박완서 샘이 일곱살 무렵에 박적골 고향집 툇마루에서 새빨간 노을을 보면 느꼈다던 그 청승, 그걸 난 서른 일곱이 멀지 않은 이 상황에 떨고 앉았으니 민망해질밖에.  

이번에도 괜히 마음이 가라앉고 쓸쓸했다. 하긴 괜히라고 할 수는 없고, 지금 내 상황이 좀, 나 우울해 라고 외치면 주변에서 어머 어쩌니, 그래 쟤가 그럴 상황이지 하고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역시나 지금 내 상황이 나 우울해 라고 마음껏 청승을 떨고 있을 그럴 상황도 아닌 것이다. 내 청승을 받아주는 거야 남들의 호의니 나름대로 좋지만, 청승떨고 있는 동안 엉망진창이 될 내 생활들은 어쩌나.  

남들의 위로와 동정이 확실히 예비되어 있는 청승떨기는 감미로운 유혹이라 쉽게 떨치기가 힘들다. 그럴때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그야말로 냉수를 들이키고 속을 차리는 기분이 된다. 아이코야~ 얘 누군 너만 아닌줄 아니? 라는 말을 하는가 싶다가는 갑자기, 얘얘, 내 얘기좀 들어봐라 며칠전에 우리집 앞마당에 제비가 날아왔는데 말이지, 라는 식의 유쾌하기 그지 없는 수다를 잔뜩 들어 기분전환이 확 되는 그런 기분이랄까. 기분 전환이라는 게 그 가벼운 기분 전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뭔가 옷깃을 가다듬고, 그래, 열심히 살아아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박완서의 글을 읽고나면 세상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 그건 박완서의 글줄들이 가지고 있는 건강한 속물성에서 나올 것이다. 작가는 가리지 않고, 치장하지 않고, 굳이 미화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소시민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그게 참 좋다. 게다가 그 맛깔진 말솜씨라니.  

이 책은 1998년 IMF를 통과하던 무렵의 산문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비슷한 시기의 산문을 모은 책으로 김훈의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도 있다. 예전에 읽었던 이 책을 새로 꺼내 읽으면서 새록새록 김훈과 박완서가 하는 말이 어찌 이리도 똑같은가 감탄하며 읽었다. 이런 일을 저지른자에 대한 분노, 무능력한 사회 지도층에 대한 경멸, 고통받는 서민에 대한 따스한 관심. 그러면서도 위악적이다 싶을만큼 냉정한 서술태도. 그 태도가 오히려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소설 <그 산이>에 이어 이 책까지 읽고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다.  

내일부터는 또, 좀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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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1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먼데까지 이 책을 챙겨가는걸 잊지 않으신거로군요! 다행이에요.

아시마 2010-04-20 02:54   좋아요 0 | URL
^^ 만병통치약인걸요. 타이레놀과 함께 꼭꼭 쟁여놨죠. 하하하.
 
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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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직전,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이 책은. 인천공항의 서점에서 간신히 구해든 책을 손에 쥐고 비행기에 올랐다. 아이를 재워놓고,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펼쳐서 읽었다.  

한강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는 문득문득 슬프고 서러워진다. 그녀의 소설들이 가진 색채는 "갓난 아이의 손바닥만한 연푸른 피멍(한강, <내 여자의 열매>,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 비평사, 2000, p. 217)" 같고,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 식물적인 무엇 (한강, <몽고반점>, 《채식주의자》, 창비, 2007, p. 101)" 같다. 그건 몽고반점의 색채다. 

아주 어릴때, 갓 태어난 사촌동생의 엉덩이에 넓게 퍼져있던 몽고반점을 보고 그게 무어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뜻밖에도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안나가려고 버틸때 엄마 고만 괴롭히고 얼른 배 밖으로 나가라고 삼신할머니가 엉덩이를 철썩 때려 내 보낸 흔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은 참 슬펐다. 여하한 이유로든 나가기 싫었던 엄마 뱃속에서 억지로 내쫓긴 아기가 그렇게 작고 연약하다는 건 더 슬펐다.  

그 뒤 한동안 잊고 있던 그 말은, 내가 첫 아이를 낳아 처음으로 기저귀를 갈아 주던 순간에 다시 떠올랐다. 너도 내 뱃속에서 나가기가 싫었니, 그래서 엉덩이를 맞고야 나왔니,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울었던 거니, 문득 아이의 울음이 서러운 흐느낌으로 들렸다.  

한강의 인물들은 모두가, 그렇게, 지독히도 연약하고 무방비한채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누군가에게 엉덩이를 채이고 떠밀려 세상에 나온 것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섞여들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돈다.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도 그렇고, <검은 사슴>의 의선도, <그대의 차가운 손>의 주인공들도, 단편의 주인공들도 모두가. 그래서 그들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연약하고, 섬세하고, 상처받기 쉽고 서럽다.  

이번 소설에서도 한강 특유의 주인공들, 그렇게 엉덩이를 걷어채여 세상에 나온듯 연약하고 순결한 인물들이 나온다. 그리고 또한 한강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피와 죽음, 불과 물의 원형 그리고 재생(창조자-즉 예술가) 모티프가 한 가득이다. 한강의 소설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은 여기다. 인간으로서, 아니, 세상 속의 생활인으로서의 죽음과, 거기에 이어지는 예술가로서의 창조를 통한 재생. 한강은 아마도, 넘지 못할 것, 죽음이라는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그 죽음을 뛰어넘고 싶어서 바람을 느끼면서도 장대를 들고 뛰었던 인주처럼, 지금이 아닌 다른 것을 꿈꾸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자면, 한강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죽음 이미지는 아마도,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숴야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달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숴야 하는 거야.
p. 324

라던 서인주의 말처럼, 다시 시작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한강의 주인공들은 아티스트가 많다. <채식주의자>의 비디오 아티스트나 <검은 사슴>의 사진작가 <그대의 차가운 손>의 라이프 캐스팅 작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그리고 이번 소설의 화가와 작가까지. 결국 한강은 소설에서 끊임없이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마지막 이정희의 안간힘처럼 살고싶다 살고싶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문도 모른채 이 세상에 떠밀리듯 나와 엉망진창 지독히도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살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그 고통스런 몸부림을 읽고 있는 건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다. 몽고반점을 달고 나온 사람의 천형.  

힘들고 무거운 내용과 아름답지만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 기법을 차용하여 소설은 빠르게 읽힌다.  

한강이 써 낸 또 한편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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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3-2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기부처]를 꽤 인상깊게 봤어요. [몽고반점]은 두번째 읽었을때야 아! 했답니다. 그래도 역시 제게는 [아기부처]가 제일 좋은 그녀의 작품인데요, 이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가 또 한편의 걸작인가요? 외면할수가 없군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아시마 2010-03-26 14:22   좋아요 0 | URL
전 한강 소설을 죄다 좋아해서요. 아기 부처나 몽고반점을 좋아하셨다면 이 작품도 아마 좋아하실 거예요. 딱 한강스러운 분위기의 한강스러운 인물이 나오는 한강스러운 작품인데도, 매너리즘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 것 또한 신기하구요.
제가 한강을 참 좋아하거든요. ^^

트윈 2010-03-21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오랫만에 왔나봅니다.
갑자기 없어져버린 홈페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아시마의 라이브러리"는 잊어버리지않아 검색해서 겨우 찾아왔네요.
먼곳으로 이사도 가버리시고 ...
건강히 잘 지내시고 다음에 아시마님의 글로 만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아시마 2010-03-26 14:23   좋아요 0 | URL
아이코야. 예전 홈페이지 없어진게 언젠데요. ^^
회자정리 거자필반~ ^^ 이사간 아시마는 곧 컴백홈 하겠지요. 아하하.
글이라... ^^ ㅎㅎㅎ 늘, 열심히, 쓰고는 있어요!
 
<울지마 죽지마 사랑할거야>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울지 마, 죽지 마, 사랑할 거야 - 지상에서 보낸 딸과의 마지막 시간
김효선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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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직후, 신생아기에 황달과 호흡불안정으로 입원했던 것과 돌이 되기 전, 문틈에 손이 끼어 정형외과로 달려갔던 것을 제외한다면, 예방접종을 위해서 외엔 병원에 갈 일이 없었던 둘째놈이 아팠다. 태어나 두번, 감기를 앓았지만 매번 병원의 도움없이 영차, 이겨냈던 놈이었다. 큰놈도 그랬지만 둘째놈도 하루저녁 열이 좀 올랐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어이없을만큼 멀쩡해져서, 병원가기도 민망해 안가고 버티면 콧물 좀 흘리다 열흘이면 씻은듯이 낫는 놈들이었다. 그 흔한 해열제도 콧물약도  한번 안먹여봤다.

그 둘째놈이 아팠다. 토요일 친할머니댁에 잠깐 갔다오더니 그길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으레 괜찮으려니, 게다가 병원도 하지 않는 토요일 저녁이라 간간히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정도의 처치만하며 버텼다. 일요일 아침, 열이 내렸고, 나는 의기양양 웃으며 말했다. 울 애들은 참 희한해. 무슨 애들이 이렇게 건강하담. 이라고. 그러나 일요일 오후, 열은 다시 무섭게 치솟았고, 정신없이 애를 업고 집 근처 파티마 응급실로 달려갔다. 거기서 잰 열은 39.7도. 큰놈을 키우는 내내 최고로 올랐던 열이 39.5도였다.  

혼비백산해서 얼이 빠진 나에게, 응급실에선 겨우 14개월 된 놈의 몸에 링거를 꽂자고 했다. 그 상황의 엄마에게 yes, yes, yes 라는 대답 외에 무슨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얼떨결에 간호사를 따라 격리된 방으로 가 아이의 손목에서 혈관을 찾는 걸 지켜봤다. 손목에서 혈관 찾기는 실패. 간호사는 다시 발목에서 혈관을 찾아냈고, 짜내듯 몇방울의 피를 뽑아낸 다음 링거를 연결했다. 폐렴 징후를 살펴보느라 가슴 엑스레이를 찍고, 울다지친 아이와 응급실의 침대에 누웠다. 친정곳에선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종합병원의 응급실에는 소아전용 코너가 따로 있었고, 수시로 드나드는 아픈 아이는 왜 그리도 많던지. 증세는 또 얼마나 다양하던지. 열이 높은 아이, 토하는 아이, 이유없이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르는 아이. 아이의 증세는 다양한데 보호자들이 표정은 한결같았다. 아마 나의 표정도 그랬을 것이다. 속수무책의, 죄책감과 무력감이 절반씩 뒤섞인 그 표정, 의사나 간호사가 나타날 때마다 그 죄책감과 무력감의 소용돌이를 뚫고 튀어나오는 간절함.  

새벽 한시가 되어서 아이의 열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월요일, 열은 또다시 무섭게 올랐다. 이번에는 친정의 단골 내과이자 그 동네에서는 제법 잘한다고 소문난 내과 겸 소아과를 방문했다. 월요일 오후 3시. 열은 39.7 이번에도 내려진 처방은 링거였고 거기에 해열제 근육주사까지 나왔다.  

자지러지는 아이의 몸을 온몸으로 누르고, 간호사가 혈관을 찾게 도와주는 동안을 어떻게 견뎠는지 나도 모르겠다. 도저히 아이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는데,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 안될것 같기도 했고, 그 눈에 떠오른 표정을 읽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괜찮단 메세지를 전해줘야만 할 것 같기도 했다.  

500cc 링거 한팩을 다 맞는 내내 아이는 잠이 들어서조차 내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했다. 열이 높아 손난로처럼 따끈해진 아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중얼중얼 내가 아는 모든 노래를 다 불렀다. 겨우겨우 열이 떨어진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갔지만, 밤이 되자 열은 다시 올랐고, 화요일엔 결국 입원을 했다. 그렇게 화요일밤과 수요일밤, 이틀을 병원에서 보내고 목요일이 되어 돌아온 집에 이 책이 와 있었다.  

열은 내렸지만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내내 잠을 자거나 깨어있는 동안에도 내게 붙어 있으려고만 하는 아이를 업고, 이 책을 읽었다.  

18살, 고등학교 2학년때 백혈병이 발병해 21살에 죽은 딸의 병상기록. 

책을 읽는 내내, 뜻밖에도 기독교란 종교가, 그 중에서도 개신교가 아름다운 종교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아름다운 크리스천도 있구나... 아니, 크리스천이어서 아름다운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 

딸의 발병앞에 신에게 의지하는 모습은 그만큼이나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뭉쳐 한 사람을 도와주려는 신앙인들의 모습도 아름다웠고, 기도 제목을 정하고 중보기도를 하고 작정기도를 하고(나는 이런 단어들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이런 모습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도움이 아닐까. 

그런 모습들이 하도 아름다워서, 이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프면서도 따스해졌다. 사실 따지고보면 정말 고통스럽고 비참한 상황인데도, 고통스럽지만은 않게, 비참하지는 더더욱 않게, 죽은 서연도 딸을 잃은 저자도 정말 힘들고 아프겠지만 그래도 뭔가 다행스러웠다. 종교란 건 참 좋구나, 이 사람들 마음 참 많이 아프겠지만, 그래도 그야말로 하느님과 종교와 신앙의 힘으로 그 도움으로 그 아픔들을 위로받고 있겠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종교는, 정말 참, 좋구나.  

이 책을 덮을때쯤 작은 놈도 어느정도는 회복이 되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낮잠에 드셨고. 

건강이란,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거라던데, 

건강한 아이여서 참 고맙다고, 그리고, 그 건강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 감사해야 할 것이라는 걸 잊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다. 큰놈이나 작은 놈이나, 내게 와 주어서,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참 고맙다고, 이게, 고마워 해야할 일이라는 걸, 너희 두놈에게나 세상에게나 신에게든 누구에게든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걸 잊지 않겠다고. 

감사해야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감사할 일이 많아질 수록, 인간은 참 작아진다.  

내가, 아이를 잘 키워서, 내 아이가 건강한 게 아니라, 그저, 건강한 아이를 신이 나에게 맡겨주신거라는 걸 잊지 말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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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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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글쓰기, 더 나아가 모든 창작행위는, 그리고 그 결과물은 제일 먼저 창작자를 매료시킨다. 자신의 창작물에 매료되지 않는 사람은 창작행위를 지속할 수 없다. 자신의 창작물에 매료되는 사람에게 창작의 행위란 피와 고름을 찍어 쓰는 것과 같은 고통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이다. (사실 나는 아리영의 그 유명한 대사 "피와 고름을 찍어 썼다."는 말보다 더 웃긴 창작 관련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진짜 창작자는 창작의 결과물만이 아니라 창작의 과정 그 자체를 즐긴다.

스티븐 킹은 그 창작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소설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최초의 독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인 나조차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미리 알면서도 그 소설의 결말을 정확히 짐작할 수 없다면 독자들도 안절부절 못하면서 정신없이 책장을 넘길 거리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p. 201 

스티븐 킹의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 그리고 흡인력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아, 이 상투적인 표현이라니) 압도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작가 스스로가 정말 재미있어 못견뎌 하며, 그 다음 이야기와 결말을 알고 싶어 몸부림치며, 소설 그 자체에 푹 빠져 쓴 글이기 때문이다.  

아마추어의 것이든 프로의 것이든, 하는 동안 즐거워 했는지 아닌지는 그 결과물을 다른 사람이 즐기게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다. 결국, 쓴 사람이 재미있게 써야 읽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는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글을 쓰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할 때 소설이 추구할 수 있는 최대의 가치이자 덕목인 "재미"만을 생각한다면, 결국 그 최고의 가치를 획득하는 글은 글을 쓰는 사람이 재미있어서,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내지 못할 것 같아 쓴 그런 글이다.  

물론 소설을 써서 꽤 많은 돈을 모은 것은 사실이지만,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종이에 옮겨놓은 낱말은 단 한 개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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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쓴 진짜 이유는 나 자신이 원하기 때문이었다. 글을 써서 주택 융자금도 갚고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냈지만 그것은 일종의 덤이었다. 나는 쾌감 때문에 썼다. 글쓰기의 순수한 즐거움 때문에 썼다.
p. 308 

누군가 이 글이, 그의 소설들 못지 않게 재미있는 글이라고 추천하기에, 사두고 백만년간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던 책을 꺼내 읽었다. 정확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이미 콘테이너에 실려 저 푸른 태평양을 넘실넘실 건너가고 있는 중이고, 내가 읽은 책은 친정 동생의 책장에 꽂혀있는, 동생 전 남친이 동생에게 물려준 책이다. (앗, 이건 제부 될 사람이 알면 안된다.) 스티븐 킹의 소설들을 죄다 콜렉션 하고 있으면서(스티븐 킹이 무슨 치토스냐고. 언젠가는 읽고 말거야... 라니)도 막상 읽은 책은 단편집 하나 장편 한권 그리고 이 책이다. 세권의 책을 순위를 매기자면, 글쎄,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책은 소설이 아니면서도 소설들만큼이나 재미있고, 무엇보다 그의 소설들 만큼이나 엄청난 흡인력을 가지고 독자를 끌어당긴다는 사실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고(아, 스티븐 킹이 봤으면 뿡야! 라고 외치며 붉은 줄 쫙, 돼지꼬리 땡땡! 했겠다.) 그의 작가로서의 성공기를 따라 갔다. 그 사이사이 오는 그의 글쓰기 방법과 창작론은 굉장한 덤이었고. 그의 첫 소설 캐리의 보급판 판권이 40만불에 팔리는 장면에서는 나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너무 기뻐서. 아, 이 남자는 정말이지, 정말이지, 정말이지! 대단한 엄청난 훌륭한 괴물같은 엑설런트하고 스펙타클하고 어메이징하고 언빌리버블하고 초 특급 울트라 마징가 제트 같은! 이야기 꾼이다. 그가 끝도 없이 끝도없이 끝도없이, 말하는,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그 스토리, 그거 우리말로 바꾸면 이야기니까.  

스티븐 킹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졌다.  

Ps. '수정본 = 초고 - 10% ' 라는 말, 그래서 적절한 삭제작업의 효과는 즉각적이며 또한 놀라운 문학적 비아그라라고 부를만 하다는 건, 한국의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윤기 선생도 산문집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에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있다. 이윤기는 숱제 '수정본 = 초고 - 50% ' 이라고 한다. 신문 기고문을 쓸 때는 처음엔 원고지 10매를 써서 그걸 5매로 줄인다나.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의 기본 원칙은 대개 비슷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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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3-12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영의 말 쓰러졌습니다. ㅋㅋㅋ 재미있지요, 이 책? 그런데 아시마님 리뷰가 더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