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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6 세트 - 전6권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평점 :
한국에서 만든 스페이스 오페라 《승리호》가 꽤 화제다. 애초에 별로 볼 마음도 없었는데 영화평을 보니 더 볼 마음이 사라진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평이 가장 와 닿는다. “기술적 성취를 가리는 몰개성의 작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 공개 하루만에 전 세계 1위로 등극했다. 한국인들의 영화평은 별론데 세계에선 꽤 인기가 있나 보다. 스페이스 오페라 답다.
2015년 기준으로 세계 영화 시장의 규모는 383억 달러(한화 약 45조원)다. 나라별 순위를 보면 2017년 기준 북미 - 중국 – 일본이 1,2,3 위를 차지하고 영국과 인도에 이어 한국이 16억 달러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력으로는 우리나라도 꽤 높은 수위에 든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인구수를 생각하면 이 민족, 영화를 참 좋아한다.
그런 한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장르가 있다. 《스타워즈》시리즈로 대표되는 스페이스 오페라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SF(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의 인기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바타》와 《겨울왕국》에 이어 역대 외화 흥행 순위 세 번째를 기록한 《인터스텔라》의 한국내 인기는 어마어마 했다. 역시나 같은 SF 장르에 포함될 《아바타》도 그렇고, 한국 사람들 SF 무척 좋아한다.
물론 《스타워즈》도 국내 관객층, 매니아 층이 꽤 있다. 인기가 없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스타워즈》가 가지는 위상에 비하면 초라하다. 희한하게 인기가 없다. 마블이 만드는 히어로 시리즈에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민족이, SF를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유독 SF의 하위 장르인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 대해서는 평가가 박하다.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는 1940년대 처음 제시되는 개념으로 《인터스텔라》류의 우주 탐사 SF와는 달리, 이미 탐사가 끝나 뭔가 세계관이 정립되어 있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전쟁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면 “우주 활극” 쯤 된다. 한국 사람들은 우주 탐사는 관심있게 지켜보지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정복전쟁에는 관심이 없나보다.
인간은 너무 거대한 것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좁디 좁은 한반도, 이 좁은 땅덩이 안에서 몇 개의 나라로 쪼개졌다가 통일하고 다시 쪼개지는 역사를 가진 한국인에게, 세계도 아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정복전쟁 이야기는 평균치 한국인의 상상력의 범주를 벗어나는 이야기여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하나의 대륙도 뭐 할 판에 한 행성을 식민지화 한다니. 으아. 이건 한국인이 접수하기엔 스케일이 너무도 큰 거지. 마블의 히어로 시리즈도 결국 배경으로 잡는 건 지구라는 걸 생각해 보면 왜 마블은 인기가 있었고 《스타워즈》는 별로였나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들, ‘활극’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장군의 아들》시리즈는 몹시 예외적인 결과물이고, 미국에서 서부 활극이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금까지 몇몇 작품들이 제작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스타워즈가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북미(하긴 미국도 굳이 따지고 들면 식민지가 독립한 국가이긴 하다만,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전 세계를 배경으로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후손들이니.)나 영국, 일본 모두 세계를 배경으로 크게 놀아본 경험들이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쨌든, 이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는 소설 『듄』의 신장판이 나왔다. (사실 이 신장판이라는 말, 출판사에서 듄 신장판 신장판 하길래 쓰기는 한다만, 왜 굳이?) 프랭크 허버트가 미국에서 첫 출간한 것이 1965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2001년으로부터 정확히 20년이 지나 새로 내는 개정판이다.(듄의 미국내 인기와 상징성, 영화와 게임등의 2차 저작물등을 생각해 볼 때, 65년에 첫 출간 된 소설이 근 40년이 지나 번역되다니 한국에서의 스페이스 오페라, 인기가 없긴 정말 없나 보다.)
이야기의 첫 시작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햄릿 풍의 우아한 궁정극이다. 영지를 나누어주는 황제가 있고, 그 황제에게 받은 봉토를 다스리는 귀족이 있다. 물론 이 모든 직위는 혈통에 따라 세습된다. 이쯤되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계략에 의한 한 집안의 몰락과 힘겹게 살아남은 아들의 복수극이 펼쳐진다. 배경을 우주의 한 행성으로 옮겨놓았고, 특이한 능력들이 등장하지만 큰 틀은 비켜나지 않는다. 그러나 듄의 진정한 가치는 그 복수극이 완성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얼마전 나는 시리즈물(또는 대하 장편소설)의 성공 제1 요건에는 등장인물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바, 길고 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를 붙잡아 두는 힘은 등장인물이 가진 매력이 거의 전부다. 듄 1편 에서의 주인공 폴 ‘무앗딥’ 아트레이데스는 그런 시리즈 물 주인공다운 옹골찬 매력의 소유자다. 이 젊고(어리고), 전설 속의 ‘퀴사츠 해더락’ 일 가능성이 있고, 정의로운 아버지, 아름답고 현명한 어머니에게서 아름다운 외모와 정의로운 성품을 물려받은 공작가 후계자이자 불의한 자들에 의해 정당한 자리에서 내쫓기는 불쌍한 아이. 독자들은 그 아이가 겪는 고난에 깊은 동정을 느끼며 그의 행동을 응원하게 된다. 주인공과 나의 동일시가 일어나는 시점이다.
폴의 고난에 찬 복수극은 의외로 쉽게, 그리고 빨리(100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빨리라고 볼 수 는 없지만, 전체 이야기로 보면 뭐.) 끝난다. 뭐야, 뭐가 이렇게 쉬워 싶게 폴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황제 위에 오른 폴과의 행복한 동일시는 끝이 난다. 폴은 말 그대로 전설 속의 ‘퀴사츠 해더락’이 맞았지만 나의 주인공이 그렇게 엄청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폴의 고뇌가 시작된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고뇌.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듄이라는 소설 그 자체의 매력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 교체를 견딜수 있는자는 그 이후의 2부부터 6부까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음.
2권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건국이 완료된 국가에서 흔히 드러나는 갈등 양상들이 우주 행성간에도 어김없이 나타나며 정복한 자, 정복당한 자, 승리한 자, 패배한 자, 차지한 자, 내쫓긴 자 각각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가운데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슬프게도 그 인물들이 죄다 별로 매력적이지가 않다. 제국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궁정극 특유의 우아한 맛도 사라진다. 아아, 누구에게 마음을 의탁하여 이 소설을 읽어내리, 한탄하는 시점이다.
그러나 2권의 고비를 넘으면 3-6부까지는 일사천리로 읽힌다. 이 소설이 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SF인지 이해하게 되고, 칼 세이건의 찬사에 동의하게 된다. 이 소설은 뜻밖에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특히 초인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인간을 조종하게 되는 문제에 대하여.
소설가 김연수는 에세이집 『소설가의 일』에서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먼 미래까지 읽히는 작품은 서가 두어 개 정도’ 라고 말했다. 물론 김연수는 시간의 압력을 견디는 힘이 그 문장에 있다고 말을 했지만, 내가 주목한 건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살아남는 작품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 그 자체다. 65년에 첫 출간 된 이 책이 40년이 아니라 60여년의 압력을 견디고도 이렇게 살아남아 ‘신장판’ 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읽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