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세트 - 전10권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김이경의 소설 <순례자의 책>에 보면 저승에 가서 책을 저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단다. (아직 주문해 놓고 받진 못했다.) 그 구절을 보며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죽어 저승에 간다면, 나는 최명희 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다. 선생님은 아마, 저승에서도 혼불을 쓰고 계실거다. 아, 저승에 있는 사람들은 좋겠다. 혼불을 읽고 있을 거 아닌가. 보르헤스가 그랬다던가, 천국은 아마 도서관의 풍경과 닮아 있을 거라고.(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내가 상상하는 천국도 그렇다.

이 소설 혼불은, 미완의 소설이다. 98년 암으로 세상을 뜨신 선생님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혼불의 6-7부를 구상하고 계셨다고 하니. 실제로 이야기는 막 시작하려다 끝이 나버린다. 강모는 아직 뜻을 펼치지도 못했고, 강실이의 운명은 오리무중이고, 효원이는 아직, 종부의 막중한 책임을 지고 가문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다. (혼불은 본래, 효원이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할 것이었단다. 서희가 최참판댁을 재건하는 것처럼.) 

이 소설, 혼불은 내게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와 전혀 다르면서도 닮은 꼴이다. 

박경리 선생님이 처음 토지를 구상하실때 본래 생각했던 지역은 전라도였단다. 경상도는 산이 많고 평야가 협소하여 만석꾼이 나올수가 없는 곳이라 만석꾼 최참판댁을 건설하기가 힘들었던 것. 그러나 경남 통영-진주 태생인 박경리 선생님은 전라도 사투리에 자신이 없어 막상 전라도를 선택하기도 망설이고 있던 차에, 당시 불교 미술을 공부하던 딸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다 하동 평사리를 보고는 그곳을 토지의 배경으로 삼고 집필에 들어간다. 실제로,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를 쓰는 내내 평사리에 내려간 적은 없단다. 하긴, 만주 용정땅의 서희를 그린 2부를 집필하던 시기엔 한국과 중국이 수교국이 아니라 용정 땅을 가 볼수도 없었다. 박경리 선생님은 그 땅의 지도 한장을 벽에 갖다 놓고 소설을 썼다는데 훗날 수교후 가 본 실제 용정땅은 박경리 선생님이 묘사한 것과 거의 흡사해(실제로 하동촌도 있단다)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란 참 대단하다.  

박경리 선생님이 하동 평사리를 선택해 경상도를 묘사해 낼 때, 최명희는 전라북도 남원을 선택해 전라도를 묘사해 낸다. 전라도의 음식과 전라도의 풍속과 전라도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최명희의 붓끝에서 아름답게 피어난다.  

효원과 강모의 혼례식때 효원의 대례복 입는 장면의 묘사는 박완서 선생님의 <미망>에서 태임이의 송도 혼례식 특유의 큰머리(화환) 장식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한국 문학의 백미라 할만하다. 전라도 특유의 내방가사가 그대로 살아나오기도 하고, 신분제도와 관혼상제의 풍속에 관한 묘사, 집안 내부 묘사나 바느질에 관한 묘사 등등은 섬세함의 극치를 달린다. 

물론 이 아름다운 소설도 단점은 있다. 지나치게 자료조사와 고증에 빠진 나머지 일정부분 남원 사지같은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고, 소설이 이제 막 전개될 즈음에서 작가가 사망한 탓에 주인공 강모의 성격도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면도 있다. 강실의 운명은 너무 가파르게 하향곡선을 타기만 해서 안타깝게 만드는데, 이 역시 작가의 죽음으로 구제받지 못하고 저 구렁텅이에 빠진채 끝이난다. 이 소설을 읽고나면, 정말이지, 

저승에 가서라도 그 뒷이야기를 읽고 싶어진다. 효원은 아마, 서희 못지 않은 대찬 여인이 되었을텐데.  

토지 집필기간 26년, 혼불 집필기간 17년, 배경으로 하는 시대는 비슷한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이고, 여인 중심의 이야기 구조도 동일하다. 최명희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토지에 버금가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얻었을텐데 안타깝다는 말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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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09-12-1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마나, 아시마님 저 지금 소름끼치는 것 알아요? 저 이거 읽어 볼라구 밤새 검색에 검색했던 기억이...그런데 참 정보가 없더군요, 아무래도 대하 소설은 애까지 데리고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조정래의 '태백산맥' 읽고 이 책은 안읽기로 했었는데. 박완서 샘 '미망'은 어땠어요? 그것도 읽어 보려고 하다 말았는데. 이런 류 너무 좋아요. '혼불'은 지루하다는 의견이 좀 있더라구요. 시도해도 후회하지 않을까요? 저 아시마님 따라하려고 ㅋㅋㅋ 아홉시 취침 딸 여덟시로 당겨 보려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아시마님처럼 능률이 안오르네요.

아시마 2009-12-14 23:56   좋아요 0 | URL
읽기가 쉬운 글은 아니예요. 그렇지만 굉장한 미문이예요. 작가가 정말 공들여 썼다는 느낌이 역력한 글이죠. 그야말로 피를 찍어 글을 쓴다는 게 이런거구나 느껴지는 그런 글. 김훈을 좋아하신다면 아마 이 글도 좋아하실텐데, 그래도 서사가 약하다기보다는 너무 방대하게 뻗어나가구요, 인물들이 좀 난해해요. 하나같이 다들 좀 꼬여있죠. 토지에 평사리의 농부들이 있다면 혼불엔 거멍굴의 천민들이 있는데 그 인물들이 평사리의 농부들과는 달리 좀 다들 음험하게 꼬여있어서 쉽게 읽히지가 않아요. 음침하죠. 게다가 자료 고증에 너무 집착했다 싶은 부분도 있어서 남원의 역사가 나오는 부분은 지루해요. 책장이 잘 넘어가질 않죠. 그렇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정말 굉장한 소설이예요. 저 10권 마지막 읽고 막 막 소리질렀잖아요. 기다려도 이 뒷이야기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좌절스러웠는지. 오죽하면 저승가서라도 읽고 싶은 글이라고 할까요.

아시마 2009-12-14 23:43   좋아요 0 | URL
박완서 샘 미망은, 후훗. 굳이 표현하자면,
경상도에 토지, 전라도에 혼불, 황해도에 미망 이라고 하면 될까요?
셋다 배경이 되는 시대도 같고, 여자가 가문을 계승한다는 그 기둥도 비슷하구요.
정말 박완서 스러워요.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전 문학사상사판 <미망>으로 읽었는데 요즘은 세계사 박완서 전집내에 <차마 잊힐리야>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죠. 개성 송도 이쪽 사투리를 보는 재미에, 그쪽 생활상 보는 재미 정말 대단하죠. 정말정말정말 딱 박완서예요. 꼭꼭 보세요. 박완서 샘은 보증수표라니까요. 버릴 작품이 하나도 없어요.

2009-12-15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시마 2009-12-15 23:24   좋아요 0 | URL
혼불도 물론 강추지만 읽기 쉬운건 미망이예요. 분량도 그렇고 스타일도.
예전에 드라마 한건, 홍리나가 머릿방 아씨, 채시라가 태임이, 김상중이 종상이로 나왔는데 사실 소설 본래 내용을 너무 많이 각색해서 별로구요, 또 미망은 서사 그 자체보다 세밀한 풍속 묘사가 더 매력적인 작품이라 꼭 책으로 읽으시라고 강추드리고 싶어요. 채시라가 연기를 잘하지만, 미망의 태임이를 제대로 살리진 못하지 않았나 생각하거든요.
이번 주 내내 서울은 영하일거라네요. 님도 건강조심하세요.
혼불 문학관은 저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해요. ^^

갓난눈 2009-12-2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크게 공감헙니다. 빠르고 즉물적인 것만 추구허는 세태를 중화시키는 최고의 길은 '문학'입니다. 가장 천천히 읽어야만 했던 우리문학이었고 그만큼 깊게 천착헐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강실이 갓난눈이 넘 예뻐서 제 별칭을 갓난눈으로 했네요~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병자호란의 성격은 이전의 임진왜란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정복 전쟁, 즉 실리를 취하겠다는 왜와 그 실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조선의 전쟁이었고, 병자호란은 명분의 전쟁이었다. (하긴, 청의 입장에서는 정복전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청의 변방으로 복속시켰다고 생각했을지도.) 마치. 예송논쟁처럼.

김훈은 언젠가, 자신은 그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단어는 쓰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백개 남짓한 단어만 손에 남더라나. 하기는, 생각해보면 우리가 쓰는 단어 중에 명확히 뜻을 알고 쓰는 단어는 몇개나 될까. 사랑은 무엇이고 명분은 무엇인가. 산다는 건 무엇이고 죽는것은 무엇인가. 명예를 잃고 숨길이 붙어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명예롭게 죽어 이름을 남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병자호란으로부터 다시 3-400년을 흘러 한국의 위인전과 교과서에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의 이름은 우뚝한데, 김상헌은 죽은 것인가 살아있는 것인가.  

이 전쟁은 명분과 명분의 부딪침이었다. 명을 정복하고 새로이 일어선 청이 대륙의 새 주인임을 인정받고자 하는 명분, 아직은 명의 명줄이 붙어있으니 이전의 사대를 유지하고자하는 조선의 명분. 이 명분의 싸움은 조선 내에서도 치열하다.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명분은, 재세在世, 즉 살아남음, 삶에 있다. 이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아야 그곳에 비로소 삶이 있다는 것이다. 척화를 주장하는 김상헌의 명분 또한 삶에 있다.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는 것은 이미 죽은 삶이라는 것이다. 둘의 명분과 목적은 같으면서 다르다. 해서 두사람의 주장은 첨예하게 부딛친다.  

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p.269) 

눈 앞엔 단 하나의 길만이 놓여있다. 화친, 죽음과도 같은, 아니, 조선의 선비에겐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길. 그 치욕의 길을 건너는 자만이 저편의 삶에 닿을 수 있는데, 이미 죽음을 경험한 뒤의 삶은 삶인가 아닌가. 

남한산성 내의 싸움은 치욕을 건넌 뒤의 삶도 삶인가 아닌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이었다. 모두가 살아남고자하고 모두가 그 치욕을 겪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에 대한 원망의 소리는 드높고 그 속에서 모두가 믿는 것은 오직하나 최명길이다. 순결한 무장 이시백은 묘당의 마음을 단숨에 정리해 준다. 

지금 싸우자고 준열한언동을 일삼는 자들도 내심 대감을 믿고 있는 것 같았소. 충렬의 반열에 앉아서 역적이 성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겠소. 이 성은 대감을 집행할 힘이 아마도 없을 것이오.
(p.218) 

그래서 그들은 차마 함께 할 수도,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는 최명길을 붙들고 늘어진다. 이 엇갈림 속에서 묘당의 마음은 이리저리 뒤섞여 분간할 수 없게되고, 김훈의 문체는 전에 없이 만연체로 늘어졌다. 하나의 문장이 페이지 절반을 차지할만큼 길어지는 것은 사람들의 내면을 진술할때다. 그 긴 만연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헷갈린다. 아마 김훈이 노린 것도 그것일 것이다. 명분을 지키면서 삶을 얻고자하는 사람들의 욕심이 그와 같다. 중언부언 말이 길게 늘어지나 결국은 말이 아닌 말. 그래서 김훈은 청국 칸의 입을 빌어 사람들에게 호통을 친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p.284)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인조에게서 나는 결정권자의 외로움을 읽는다. 치욕을 견디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치욕을 견딜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무섭다. 치욕을 견디는 것은 가벼운 일이다. 왕은 신하들의 손에 등떠밀려 어쩔수 없이 신하와 나라를 구해 치욕을 견디는 자의 위치로 가고자 하나 충렬의 반열에 앉고자 하는 신하들은 끝내 결정은 니가 내리고 나는 너를 따를 뿐이라고 말한다. 하긴, 그게 충이긴 하다.

-비록 야지에서곤고하나 이 나라는 전하의 나라이옵니다. 중론을 묻지마시고....
-묻지 말고, 어찌하라는 말이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p.297)

이 책을 2년 전 출간 직후에 읽었었다. 그때는 글쎄, 그렇게까지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신하들의 만연체 문장에 휘말려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말인가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가 허둥지둥 문자를 따라가기 바빴었다. 2년여를 묵혀뒀다 다시 읽으니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선연하게 잡힌다.  

명분(명예)도 지키고 삶도 얻는 길은 없다. 살아남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루어야 하며,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 치욕이라고 말할수도 없는 것이다. 김훈이 말한다. 명분을 지키고 충열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내가 아닌 누군가의 치욕을 딛고 가는 그것이 가장 치욕스런 일이라고.  

한때 나는 남한산성이 별로라고 생각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의 열풍을 이해하지도 못했었다. 이 책은 칼의 노래와 같이 나를 매혹시키지는 못했다. 그 생각을 지금에사 수정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열광하지 않을수 없었을듯. 아무런 치욕도 책임도 감당하지 않으면서 오직 명예를 지킨 삶만을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혐오스런 존재인지 이 책은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내면을 만천하에 펼쳐보인다. 삼엄한 시선이다. 무섭다. 김훈이 묻는다. 너는 뭐 했느냐고, 치욕을 견디지 않은 너는, 치욕을 당면하지 않은 너는 과연 순결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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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09-12-1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은 소설 다시 읽으시나요? 전 한 번 읽고 그냥 둬서 그런지 이런 깊이 있는 리뷰가 안나오네요. 좋은 리뷰입니다. 김훈 책을 무조건 사서 읽는데 저도 솔직히 남한산성은 집중이 안되더라구요.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아시마 2009-12-14 16:31   좋아요 0 | URL
몇몇 소설은 여러번 읽죠. 책을 읽을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글들이나 중심이 변화하는 소설들이 있거든요. 전 그런걸 좋아하거든요.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달라졌다는 걸(그게 발전이든 퇴보든) 느끼게 해 주니까요. 문체가 아름다운 소설은 그 문체에 반해서 여러번 읽기도 하고요. 토지랑 빨간머리 앤은 열번 넘게 읽은 것 같아요. 빨간머리앤은 우울할때 읽으면 완전 행복해지거든요. 토지는 읽을때마다 연애하는 기분이 들어요. 막 새로운 인물을 만나거든요. 태백산맥이나 칼의 노래도 다섯번 넘은 것 같고... 음. 읽었던 소설을 또 읽으면 새로운 소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이 있어요. 처음 읽어서 이해가 잘 안되는 소설은 일부러라도 한 1-2년 묵혀뒀다 다시 읽기도 하구요. 아, 박완서는 무조건 재독 삼독 하죠. 매번 읽어도 매번 재미있어요. 이건 새로운 느낌 때문이라기 보단 말 그대로 재미 때문에 새로 읽어요.
결국 전, 읽었던 소설 다시 읽는 걸 좋아하나봐요.^^

blanca 2009-12-1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머리앤 너무 좋아요. 드라마는 뒷부분 완전 개작해서 너무 지루하더라구요. 그래서 실제 빨간머리앤 뒷부분도 지루할까봐. 읽지는 않았답니다. 참 구실도 가지가지죠? 생일 선물로 지르려고 했는데 남편이 말려서 좌절당하기도 했구요. 지금 보니 태백산맥도 읽으셨군요. 다섯번. 우와....저 한 번 읽는 데도 살림 다 작파했었는데...이런 식이면 아시마님의 책 구입은 정당화할 만합니다. 근데 컵은 왔나요? ㅋㅋㅋ 오면 좀 사진이라도...

아시마 2009-12-14 23:29   좋아요 0 | URL
오오, 빨간머리앤은 절대 지루하지 않아요. 그런데, 동서문화사판은 솔직히 좀 별로구요. 번역도 판형도 다 그저그래요. 예전에 청화문화사라는데서 나온 8권짜리가 있어요.(전 친정언니가 청화문화사판 가지고 있고 제가 동서문화사판 가지고 있는데 맨날 바꾸자고 조르는 중) 방문판매 비슷한 형식으로 봉고차에서 강매하던 책인데 의외로 대박 괜찮았죠. ㅎㅎ
빨간머리 앤이 지루하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애번리에서 학교 선생하는 이야기, 레드먼드 대학다니면서 길버트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하는 이야기, 결국 길버트랑 결혼해서 신혼 생활하고, 애 낳고(아들셋 딸셋) 그 애들의 성장기까지 보고 있으면, 정말 행복해 미쳐요. 꼭꼭 보세요.
근데 솔직히, 동서문화사판은 사라고 권하고 싶지가 않구요, 헌책방 같은데서 청화문화사 판 구할수 있으면 구해보세요.

전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장편 대하소설은 잡으면 정말 미친듯이 읽어서(전 항상 살림은 작파했고, 대하소설 읽을때는 잠을 작파하는지라... ㅎㅎㅎ 하루에 두세권씩 휙휙 읽어제껴요. 태백산맥도 뭐 일주일이면 땡. 읽고나면 몸살하죠. 진짜 환장하게 재미있지 않아요?

컵은, 아직 안왔어요. 이번에 주문할때 구하기 힘튼책을넣었더니 내일이나 모레 온다네요. ㅎㅎㅎ 기대 만빵이죠.

blanca 2009-12-1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 구하기 힘든 책이라니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님 때문에 왕창 지름신이...무엇보다 박완서샘의 '미망'을 읽구 싶군요. 혼불은 알라딘에서 세트로 안파네요. 참. 환장하게 재미있다, 저 뿜었습니다. 환장하죠, 그냥. 주변 사람 아무도 안알아줘서 넘 슬펐는데 아시마님이 있어 외롭지 않게 되었네요 ㅋㅋㅋ

아시마 2009-12-15 23:2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 책 볼때 밑줄 그어가며 보는데요, 사실 태백산맥이나 몇몇 소설엔 밑줄 하나도 안그었어요. 인상적인 구절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설에 너무 푹 빠져서 밑줄 긋는 것도 귀찮더라구요. 그정도로 정신없이 읽어요.
우리집 충무공도 제가 책 읽고 있으면 가끔 글케 재미있냐? 그럴 정도예요. 아니 내 낭군 씩이나 되면서, 집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책을 읽지 않을수가 있지요? 블랑카님 부군은 책 읽으시나요? 제 남편도 저를 신기해하지만 저도 제 남편이 진짜진짜진짜 신기해요.
근데근데, 저의 지름신을 분양받으시면, 움움... 저처럼 남편을 충무공이라 부르고 받들어 뫼셔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실지도. 냐하하...

에파타 2009-12-21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푸하하하하~깔깔깔~정말 넘 통쾌하신 분들이군요..배꼽빠집니다.지붕뚫고 하이킥 황정음씨 때문에 배째고 사는데, 우연히 들린 실제인물들이 이렇듯 혼을 빼놓다니요..정말 행복합니다요..
 
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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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은밀한 따돌림을 받았던(또는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그리고 또 한번 깜짝 놀랄 때는, 단 한번도 따돌림을 받았거나 받았다고 느꼈던 적이 없는 사람 또한 왜 이렇게 많은지.  

이 글의 제목 <우아한 거짓말>이 누구의 말일까를 읽던 중간에 잠깐 생각해 봤었다. 난 화연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도 진실도 아닌 것이, 해서 부정할 수도 없고 긍정할 수도 없이 애매한 꼬투리만 남아 있는 그 말. 거짓은 거짓인데, 우아하게 포장되어 있는 거짓. 거짓의 천박하고 더러운 속성을 잘 포장하고 있는 그 우아함이라니. 내용은 널 욕한 거지만 형식은 널 욕한게 아닌 게 되는 그 말.  

대부분 나는 미라였고, 때때로 나는 천지였으며, 가끔은 화연이이기도 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의 여자아이들은, 질투의 화신이다. 화연의 천지에 대한 괴롭힘도 처음엔 아니었을 지라도 그 질투로 인해 집요한 힘을 얻는다. 차라리 천지가 한번쯤, 화연이 파 놓은 구멍에 풍덩 빠져서 왕따가 되어버렸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연이 천지를 괴롭히기를 중단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게 집요하고 교묘하게 쫓아다니지는 않았을텐데. 밟아도 밟아도 밟히지 않는 천지는 화연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질투의 대상이었고, 끝내는 싸워 무찔러야 할 무언가였지 않았을까. 화연과 천지의 처지가 뒤바뀌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화연의 괴롭힘은 점점 더 교묘해지고 더 집요해져 갔다.  

살다보면 그런 애들 꼭 있다. 중 고등학교의 교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강의실에도 존재하고 아파트 아줌마들의 커뮤니티 안에도 존재하고, 학부모 모임에도 존재한다. 뭐 보통은, 중학교때 그러던 애들이 고등학교때도 그러고 대학 가서도 그러고, 애를 낳은 엄마가 되어서도, 그 애의 학교 학부모 모임에 가서도 그러기는 하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면 궁금해진다. 쟤는 왜 저럴까, 도대체 어떤 부모아래서 어떤 성장환경으로 자랐길래 저런 성품을 가지게 되었을까, 저러고 살면 자긴 좋을까.  

이 글, <우아한 거짓말>에서는 화연이 타고났다고 말한다. 물론 가겟일에 바빴고 늙은 부모가 화연을 살뜰하게 보살펴 줄 수 없는데서 오는 공동이 있기는 했겠지만, 그런 상처가 생기는 모든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고, 초등학교 4학년, 우리나이 11살에 이미 돈주고 가는 학원에서 조차 쫓겨나는 아이니까. 타고나나 보다, 싶다.  

이런 유형의 아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똑같이 화연이가 되는 수 밖에 없다. 스트레이트한 창으로는 절대 못건드린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화연이가 되곤 했다. 그리고 그 뒷맛은 참. 쓰다.  

청소년 문학의 한계인 걸까, 만지의 화연에 대한 용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화연은 끝내, 반성하지 않고, 그저 겁을 먹었을 뿐이고, 도망치려 했을 뿐이다. 엄마 아빠의 삶의 터전인 중국집을 망하게 하여, 엄마 아빠로 하여금 이 동네를 뜨게 만들어 자신도 어부지리로 도망가고 싶어서 벌이는 화연의 그 행태들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화연의 의도가 성공했다면 화연은 또다른 학교로 가서 또다른 천지를 찾았겠지. 토지에 종종 나오는 말이지만, 개털 굴뚝 속에 삼년 묵혀도 소털 안된다.  

하지만, "얘들아, 너희들이 나쁜게 아냐"를 외치고 "위 아 더 월드"를 외쳐야 하는 청소년 문학으로서야 그렇게 결론 내릴 수 밖에 없겠지. 자, 만지도 화연이를 용서했어,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너희도 화연이를 용서해. 글쎄. 천지와 같은 경험이 있다는 작가가 아직도 모르나. 화연이 같은 유형은 그냥 유전자에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서 타고나는 거다. (흠. 이건 이 리뷰의 제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이긴 하구나.) 한동안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반성해서가 아니라, 그럴 상대가 없어서, 지금 나의 위치가 약해서, 하지 못할 뿐이다. 걍 냅다 집어서 이런 유형의 인물들만 모여있는 외딴섬에 가두거나 정신과에 가두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는데. 

 이놈의 우아한 거짓말의 해악은 너무 크다. 그런데 문제는, 때때로 나도 이놈의 우아한 거짓말을 할 때가 있다. 교묘하게 잘 포장된 거짓말, 진실의 갈피에 살포시 끼어들어가는 그 거짓말. 단지, 자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이고, 특정 대상을 두느냐 두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만, 여튼 나도 나쁘다.  

화연에 대한 분노 때문일까, 이 글이 그다지 슬프게 읽히지는 않았다. 전작 완득이를 읽을때도 그랬지만, 이 작가, 소재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슬플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시해 놓고 질펀한 울음바다로 만들지 않고 사뿐사뿐 상황을 잘 전개해 나간다는 면에서는 박수를 쳐 줄만 하지만, 만지도 만지의 엄마도 지나치게 쿨하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인 만지의 화연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 하긴 또,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어쩔수 없이 누구나 쿨 해질 수 밖에 없을수도 있겠다만.  

전체적으로 꽤 잘 쓰여진 글이고, 인간의 심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글이었지만, 마지막 화연에 대한 만지의 용서가 너무 도식적인 것 같아 별 하나 뺐다.  

이 글의 전후에 스티븐 킹의 캐리를 읽었는데(캐리를 반쯤 읽다가 우아한 거짓말을 읽고 캐리의 뒷부분을 마저 읽었다.) 우연히 둘 다 집단 따돌림에 관한 글이다. 장르의 차이도 있고 대상 독자의 차이와 극중 따돌림 유형과 정도의 차이도 있겠으나, 글쎄, 따돌림에 대한 복수라면, 캐리 정도는 해야. 난 오히려 캐리가 슬프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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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2-1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스티븐 킹의 단편선을 읽고 너무 무서워서 그의 다른 책들을 못읽겠더라구요. [캐리]도 지나치게 무섭고 불편할까봐 도무지 시도를 못하겠는데... 아시마님은 어땠나요? 읽기에 무리 없던가요? 슬프기만 하고 무섭지는 않나요, 혹시? 전 무서운걸 못읽겠어요. ㅜㅡ

아시마 2009-12-12 13:55   좋아요 0 | URL
스티븐 킹 단편선 (혹시 황금가지판 스티븐 킹 전집의 5번 읽으셨나요?) 전 다인 임신했을 때 읽었잖아요. 아오. 완전 소름이 오도도도 돋는 무서운 글이었는데,(아놔, 나 왜 임신했을때 이런 글을 읽었냐고요.) 그만큼 잘 쓴 글이기도 했잖아요. 처음으로 읽은 스티븐 킹이었는데 사람들이 왜 스티븐 킹을 좋아하는지 알겠다 하면서도 무서워서 전집의 다른 책들은 손도 못댔잖아요. 저도.

단편집 읽고 몇년만이야. 이제야 스티븐 킹 읽기 시작했는데요. 장편은 캐리가 처음이라 단정할 순 없지만, 이사람, 장편보다 단편쪽이 나은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캐리는... 무섭다기 보단, 전 많이 슬펐어요. 읽는 내내.

다락방님께 살짝 말씀드리는 건데요, 사실 이 리뷰는 가짜예요. 쓰레기야. 언젠가 제대로 된 <우아한 거짓말>에 대한 리뷰를 쓸 수 있게 되면 다시 읽어줘요.

다락방 2009-12-12 17:37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저도 말씀하신 그 책으로 읽었어요. 아 너무 무서워서 잠을 못자겠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작품 읽을 생각도 못하다가 제가 아주 신뢰하는 분이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정말 좋다길래 사놓았거든요. 그런데 여전히 읽지는 못하고....[캐리]도 일전에 영화 예고편인가에서 살짝 보았는데 막 무서울 것 같더라구요. 읽기도 전부터 덜덜.

네, 언젠가 또 리뷰를 쓰시게 되면 또 읽을게요!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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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년 전에 아버지 환갑이 있었다. 큰아버지와 울 아버지는 쌍둥이인지라, 두분의 환갑잔치를 하느라 사촌형제들이 다같이 모였다. 펜션을 빌려 1박 2일의 잔치를 하고 다음날 아침 사촌들끼리 모여 이런저런 수다를 떨때, 당시 이슈가 되던 뉴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아버지가 한강 다리에서 자식 둘을 한강물에 던져넣었던 사건.  

모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긴 했지만 당시 둘째가 돌즈음이었던 사촌언니의 충격은 유난했다. 눈물까지 보이며 자기는 그 뉴스를 보는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아 저녁 내내 울었다고. 솔직히 그땐 그럴것까지야 있나. 했었다.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해 첫째를 낳고 누워있을 땐 영아 유기가 한참 이슈가 되었었다. 지금도 궁금한 건, 그해에 유난히 영아 유기가 많았던 건지, 내가 그런 류의 뉴스에 예민해서 자꾸만 들렸던지 하는거다. 갓 태어난 신생아를 병원 화단에 버린 사건, 아파트 화단에 유기되어 죽은채 발견된 신생아. 그 뉴스들을 접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그제서야 나는 아버지 환갑 무렵 사촌언니의 유난했던 충격이 이해되었다.  그건 그냥 뉴스가 아니었다. 그 참담했던 심정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중에, 첫째가 돌이 지난 다음에 읽었던 루안 브리젠딘의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 이라는 책을 읽고서야 사촌언니와 나의 그 유난한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그 책에 의하면, 출산 후 2년까지 여자의 뇌는 그런 류의 충격(영아 유기, 아동 학대, 아동 살해, 유괴 등등, 아동을 상대로 한 범죄)에 대해 평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호르몬 덕분에. 

사람이 자기가 현재 처해있는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어떤 사건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 이겠지만,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에서 읽느냐에 따라 그 책이 주는 감동은 전혀 달라진다. 나는 이 책을 신경숙의 소설 중 가장 인상깊게 읽었고, 지금까지 써 온 신경숙의 소설중에선 가장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정말 그런건지 나의 상황이 그러해서였는지는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은 건, 2009년 1월 4일. 내가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였다. 첫째도 둘째도 산후조리는 친정 엄마가 서울로 올라와서 해 주셨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밥 먹고, 애 젖먹이는 것 외엔 꼼짝도 안하고 엄마의 수발을 받던 시기였다. 내 생애 두번째로 엄마를 독점하던 시기. (처음으로 엄마를 독점했던 시기는 당연히 첫째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던 한달이었다.) 

그 시기는, 그렇게도 힘들다는 산후조리를 해 주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엄마에겐 휴식의 시기이기도 했다. 가장 적은 양의 빨래를 하고, 가장 적은 양의 밥을 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 외엔 오롯히 휴식할 수 있던 시기.  

첫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의 산후조리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엄마가 차려주던 하루 일곱끼의 밥은 새벽 4시부터 시작되었다. 새벽 4시가 되면 엄마는 남편과 내가 자고 있는 안방으로 살그머니 들어와 사위의 잠을 깨울까 저어하면서도 나를 흔들어 깨워 밥을 먹였다. 수북하게 고봉으로 담은 밥과 냉면 사발 가득 담긴 미역국을 다 먹이고서야 다시 잘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 끼니(엄마의 표현대로라면 새벽참)는 오전 7시 30분경, 정식 아침, 오전 10시-11시경 오전 참, 오후 1시 점심, 오후 4시 오후 참, 저녁 7시 저녁, 밤 10시-11시 밤참까지, 꼬박 일곱끼였다. 참과 식사의 양의 차이는 없었다. 머슴밥같이 고봉으로 담은 밥에 냉면사발 가득한 미역국. 반찬이라고는 간장에 백김치였고 국은 한달 내내 미역국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려준 엄마보다 먹은 내가 더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이고보면 난 결국은 이기적인 자식일 뿐이고. 먹기가 힘들어 짜증을 부리면 엄마는 매번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안먹으면 젖이 안나고, 많이 먹어야 회복이 된다고. 덕분에, 애 가지고 찐 살이 하나도 안빠졌지. 그래봐야 6kg지만.  

엄마의 무지막지한 산후조리는, 말하자면 당신의 한풀이이기도 했다. 넷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지만, 엄마는 단 한번도 산후조리라는 걸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나의 할머니이지만 참 잔인하고 심성이 나쁜 사람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할머니의 구박은 자심했고, 셋째 딸이었던 내가 태어났을때는 절정에 달해 아이를 낳고 첫국밥도 첫기저귀도 엄마가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단다. 그 찢어지는 가난속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엄마는 젖이 제대로 돌지 않아 아이는 죽자고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았고, 분유 한 통 살 돈이 없었던 엄마에게 그건 그것대로 공포였다. 내가 배 부르다고 밥을 남길때 엄마의 얼굴에서는 그 공포가 여전하게 드러났다. 꾸역꾸역, 식도에서 항문까지 모든 내장에 미역국과 밥이 그득 차 있어, 밥 먹다말고 화장실을 다녀와야했던 지경에 이르러서도 엄마가 주는 밥을 끝내 다 먹었던 건, 엄마가 하지 못했던 한풀이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느껴져서였다.  

엄마는 단 한번도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몸이 아팠는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즉,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을 뿐, 자신의 심정을 말해주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아이를 낳아 누워있으면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난 다행히, 아이를 낳고 바로 젖이 돌았고, 매번 젖이 남아 괴로웠던 젖에 관한한 축복받은 체질이다.) 그때의 엄마 심정이 와닿았다. 이런 몸으로 밥을 하고, 수도 시설도 없어 개울가로 기저귀를 빨러 다니고. 이건 50년대 이야기가 아니라 70년대, 그것도 후반기의 이야긴데도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나, 그런 일을 겪고서도 어떻게 엄마는 내가 27살, 할머니가 돌아가실때까지 명절마다 인사를 드리고 살았을까. 그분, 나에게 유전자를 물려주신 그분,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참 나쁘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책의 이 부분이 가장 마음 아팠다.  

도둑맞은 함지를 찾으러 왔다가 나는 그 어둡고 좁은 부엌에서 벽에 걸린 솥을 내려 물을 붓고 데웠소. 출산중인 아내 곁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당신을 밀치고 생전 처음 보는 당신 아내의 손을 잡고 힘내오! 힘을 내오!라고 외쳤소.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릴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리오. 미역 한가닥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집. 당신의 노모는 앞을 못보는 사람이었재요. 게다가 이미 저세상 사람인 듯했소. 아이를 받아놓고 함지에서 밀가루를 퍼내 반죽을 만들어 수제비를 끓여서는 몇그릇 퍼놓고 국물을 산모가 있는 방에 디밀어 놓고......
(..........)
칠팔일 지나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미역가닥을 마련해 당신 집에 들렀을 땐 산모는 없고 갓난쟁이만 있었소이. 당신 아낸 아이를 낳고 사흘 동안 고열에 시달리다 종내는 세상을 떠났다고 했소. 극심한 영양실조라 출산을 감당하지 못했을 거라 했소.
(...............)
전날 내 함지에서 퍼서 남겨놓은 밀가루를 또 반죽해서 미역을 넣어 수제비를 끓여 한 그릇씩 퍼서 상에 올려주고 돌아서 나오려다가 방 안의 갓난쟁이에게 내 젖을 물렸소. 내 딸애에게 먹일 젖도 모자라던 때였네.
(p.229-231) 

소설의 주요 내용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엄마의 "인생의 동무" 였던 은규씨의 죽은 아내와 남겨진 아이의 이야기가 그 순간에 그리 가슴이 아팠던 건, 아마도 내가, 아이를 낳은 직후였기 때문이고, 아내가 출산을 하는데 미역한가닥 마련해 놓지 못하고 극심한 영양실조에서 아이를 낳았던 엄마의 산후조리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어찌 그리 마음이 아프던지.  

그럼에도 그 아프던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던 건 이기적이게도 이 구절이었다.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라. 엄마는 네가 있어 기쁜 날이 많았으니.
(p. 223) 

부모와 자식은 전생에 빚쟁이 관계라던가. 부모가 전생에 자식에게 진 빚이 있어 이생에 다 갚고 간다던가. 부모는 그래도 끝내 네가 있어 기쁜 날이 더 많았다, 라고 말하고 자식은, 이기적인 자식은 결국 신에게, 엄마를 부탁해 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책은 내내, 결국 자식들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재발견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엄마에 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나의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서의 감정에 대해, 한 인생에 대해. 저런 일들을 견뎌내는 동안 엄마가 했던 생각들에 대해. 

난 그간 엄마에게 참 모진 딸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서도 여전히 모진 딸이었는데, 이 리뷰를 쓰다보니 내가 나쁘다 욕하는 그 할머니나 나나 다를게 뭔가 싶다. 엄마의 마음을 전혀 헤아려주지 않고 나의 감정만을 중요시하는 면에서는 도대체 뭐가 다른가. 저런 과정을 거쳐 낳아 길렀는데 잘못을 했기로서니 무조건 용서받아야 하는 거 아닌지.  

그래서 이 리뷰는 상투적인 결말을 맺고 끝난다. 

엄마에게, 잘 해줘야 겠다. 정말로. 엄마를 부탁해, 라고 눈물흘리고 싶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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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맘 2009-12-1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고싶은책은데...오히려 더 구매안하게되네요...

아시마 2009-12-10 15:27   좋아요 0 | URL
에긍. 이 소설 슬프다는 말이 많아서요. 물론 슬프기는 한데, 소설 그 자체로 참 잘 짜여진 소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루안 브리젠딘의 조언대로라면, 덕수맘님이 아기를 낳은지 2년이 지났다면 저와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읽어보세요 재미있어요.

덕수맘 2009-12-14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아마 그시기랑 상관없이.저는 원체 눈물이 많아서 읽으면서 울거에요.동행이나 이런프로보면 저 너무 울어서...프로그램이 끝날때쯤되면 눈이 부을정도...
그럴때는 울아들 와서 그럽니다.
눈물나...?제 얼굴을 쳐다보면 눈물을 닦아줍니다...
그럼 다시 웃게 되고..여튼 울아들은 눈물이 나면 자기가 닦으면 큰일나는줄 알아요..
남이 닦아줘야 하는줄 알아요^^*
그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자전거 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참 나쁘다, 이 사람. 글을 왜 이렇게 아프게 쓰는가. 

하릴없이 마음이 잦아드는 날이 있다. 평소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창밖 풍경이 문득 쓸쓸하게 보이는 날엔, 김훈의 글은 피해야 한다. 그런 날 김훈의 글줄을 읽어버리면 세상 사는 것이 하염없이 쓸쓸하고 덧없는 것으로 느껴져서 어쩔줄을 모르겠다. 

이 책은 기행문이다. 기행문은 기행문인데 감상이 없다. 무릇 기행문이란 여행을 하고 난 뒤의 감상과 느낀점을 기록하는 글 아닌가. 헌데 이 책엔 아름답다, 감동적이다 이런 감정에 관한 단어가 전혀다시피 없다. 그저 김훈은 그 풍경에 대해 신문 기자 시절의 습관대로 스케치하듯 옮겨놓는다. 그런데 그 스케치들을 읽다보면 그게 보인다. 이 글줄들을 쓸때, 이 사람이 어떤 감정이었을까, 어떤 기분이었을까가.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나의 감정이 된다.   

가끔은 그런 글들이 있다. 읽을 때 나의 감정의 층위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글. 내가 책에 줄을 긋는 이유는 단 하나다. 두번째 읽을 때에도 난 이 구절에 마음이 움직일까가 궁금해져서. 김훈의 글은 읽을때마다, 그때의 기분에 따라 줄이 그여지는 부분이 달라진다. 세번째 읽는 이 책은, 그래서 밑줄 투성이다.  

지난번에 읽을 때는 그저, 이 사람은 이 한반도의 풍경을 참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엔 이 사람이 이 글을 쓰면서 느꼈을 울분이 손에 잡힌다. 그 울분과 눈물을 꾹꾹 참으며, 그 울분과 눈물을 글에 섞지 않으려 노력하며 한줄 한줄 써내려 갈때, 그는 아마 울었을 것 같다. 그래서 도대체 울 것이 없는 구절에서도 울컥울컥 눈물이 난다.  

참 나쁘다, 이사람. 글을 왜 이렇게 아프게 쓸까.  

대부분에서 이 책의 구절들은 여행지의 안내문 같이 건조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구절들에 결코 건조하지 않은 김훈의 시각을 섞어 넣는다. 예를 들면 이런식이다. 

봉정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고려 중기의 목조 건물인 극락전(국보 15호)이다. 이 극락적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우리 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인데, 건축 양식으로는 무량수전보다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봉정사 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장엄하고도 숨막히는 산하의 경치를 눈 아래 깔고 있지는 않다. 그 건축의 질감은 무량수전과 흡사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규모는 무량수전보다 작다. 봉정사 극락전은 고전적인 단순성의 위엄과 힘의 안정감으로 당당하다. 1363년에 이 건물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건립 연대는 그보다 앞선 고려 중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p.145)

 

이런 구절도 그 구절대로 아름답지만, 김훈의 절창이 드러나는 구절은 이쪽이다.  

살아갈수록 풀리고 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은 점점 더 고단하고 쓸쓸해진다. 늙은 말이 무거운 짐을 싣고 네 발로 서지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엉기는 것 같다. 겨우, 그러나 기어코 봄은 오는데, 그 봄에도 손잡이 떨어진 냄비 속에서 한 움큼의 냉이와 된장은 이 기적의 국물을 빚어 낸다. 사람도 봄나물처럼 엽록소를 피부에 지니고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냉이된장국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슬퍼했다. 아내를 위로한다고 꺼낸 말이 또 이지경이 되었다.
(p.37) 

쑥 된장국의 냄새는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 괜찮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의 정갈함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 풀은 풀의 비애로써 인간의 비애를 헐겁게 한다.
(p.39) 

이 구절들을 읽다가 문득 울컥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이 국토를 여행하기 시작했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괜찮다, 다 괜찮다 라는 위안을 받고 싶어서. 그런 위안이 필요할만큼 이 글을 쓸 무렵의 김훈은 힘들었나보다. 그리고 문득 마음이 쓸쓸해서 아리고 슬픈 날엔, 나도 김훈의 그 글줄에서 아픈 위안을 받는다.  

그래도 참 나쁘다. 글이 너무 아파서. 

한동안은 김훈의 글줄들을 피해다녀야겠다. 이 마초중의 상마초인 아저씨가, 어쩌자고 이런 글들을 써내는가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국내 여행기에선 거의 최고봉이란 생각을 한다. 감상을 넣지않은 기행문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건드리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정말 도대체 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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