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노릇 사람노릇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몇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만병통치약은 우황청심원이었다. 그걸 한번에 열 너댓개씩 사다가 장롱속에 구메구메 넣어두시곤 두통이 날 때, 소화가 안될 때, 노동이 과해 허리가 아플 때, 아이들이 시끄럽게 해서 심통이 날때, 자식들이 괘씸해서 겁을 좀 줄 때 매번 할머니는 그 우황청심원을 꺼내다 드시곤 했다. 한번에 온전히 하나를 다 드시는 법도 없이, 증세에 따라 청심환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작은 과도로 뚝뚝 잘라 반절을 드실 때도 있고 반에 반을 드시기도 했다. 약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꿀꺽 삼키고 물로 입안을 한번 가시고는 휘유- 하는 한숨과 함께 명치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쓸어내리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매번 다른 증세에 똑같은 약을 처방하는 꼴이지만 효과는 틀림 없어서, 우황청심원을 드시고 30분만 지나면 씻은듯이 괜찮아지셨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우황청심원이 도대체 무슨 약인지 어떤데 먹는 약인지를 잘 모른다. 안티프라민과 함께 노인네들 필수 상비약인 것만은 틀림 없지만.  

비슷한 용법 용례를 가진약으로 친정엄마에겐 구심이 있고, 갓 태어난 아기들을 위해서는 기응환이 있다. 도대체 이 약들의 정체는 알수가 없으나, 효과만은 틀림이 없다... 고 한다. 뭐, 난 기응환 울 애들 안먹여 봐서 모르겠다. 하정훈이 먹이지 말래서.  

내 마음의 만병통치약은 박완서다. 

마음이 괜히 우울해지고 가라앉을 때, 이유가 꼭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딱히 그럴필요는 없는데도 청승을 떨고 싶어질 때 박완서의 책을 펼치면 어느새 마음은 갓 감아 정갈하게 빗질해 내린 머리채처럼 단정하고 가지런해진다. 현실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우뚝 선 것 같은 박완서의 글들은 세상살이가 얼머나 엄정하고 힘드는지, 하지만 그 힘든 사이사이로 얼마나 재미있고 유쾌한 일이 많은지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보여준다.  

박완서의 글을 읽다보면 도대체 내가 언제 왜 우울했는지 뭣때문에 우울했는지를 잊어먹게 되거나 고작 그까짓 일로 그랬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진다. 그 소녀스런, 청승의 기운이 민망해져 버리는 것이다. 박완서 샘이 일곱살 무렵에 박적골 고향집 툇마루에서 새빨간 노을을 보면 느꼈다던 그 청승, 그걸 난 서른 일곱이 멀지 않은 이 상황에 떨고 앉았으니 민망해질밖에.  

이번에도 괜히 마음이 가라앉고 쓸쓸했다. 하긴 괜히라고 할 수는 없고, 지금 내 상황이 좀, 나 우울해 라고 외치면 주변에서 어머 어쩌니, 그래 쟤가 그럴 상황이지 하고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역시나 지금 내 상황이 나 우울해 라고 마음껏 청승을 떨고 있을 그럴 상황도 아닌 것이다. 내 청승을 받아주는 거야 남들의 호의니 나름대로 좋지만, 청승떨고 있는 동안 엉망진창이 될 내 생활들은 어쩌나.  

남들의 위로와 동정이 확실히 예비되어 있는 청승떨기는 감미로운 유혹이라 쉽게 떨치기가 힘들다. 그럴때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그야말로 냉수를 들이키고 속을 차리는 기분이 된다. 아이코야~ 얘 누군 너만 아닌줄 아니? 라는 말을 하는가 싶다가는 갑자기, 얘얘, 내 얘기좀 들어봐라 며칠전에 우리집 앞마당에 제비가 날아왔는데 말이지, 라는 식의 유쾌하기 그지 없는 수다를 잔뜩 들어 기분전환이 확 되는 그런 기분이랄까. 기분 전환이라는 게 그 가벼운 기분 전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뭔가 옷깃을 가다듬고, 그래, 열심히 살아아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박완서의 글을 읽고나면 세상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 그건 박완서의 글줄들이 가지고 있는 건강한 속물성에서 나올 것이다. 작가는 가리지 않고, 치장하지 않고, 굳이 미화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소시민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그게 참 좋다. 게다가 그 맛깔진 말솜씨라니.  

이 책은 1998년 IMF를 통과하던 무렵의 산문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비슷한 시기의 산문을 모은 책으로 김훈의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도 있다. 예전에 읽었던 이 책을 새로 꺼내 읽으면서 새록새록 김훈과 박완서가 하는 말이 어찌 이리도 똑같은가 감탄하며 읽었다. 이런 일을 저지른자에 대한 분노, 무능력한 사회 지도층에 대한 경멸, 고통받는 서민에 대한 따스한 관심. 그러면서도 위악적이다 싶을만큼 냉정한 서술태도. 그 태도가 오히려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소설 <그 산이>에 이어 이 책까지 읽고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다.  

내일부터는 또, 좀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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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1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먼데까지 이 책을 챙겨가는걸 잊지 않으신거로군요! 다행이에요.

아시마 2010-04-20 02:54   좋아요 0 | URL
^^ 만병통치약인걸요. 타이레놀과 함께 꼭꼭 쟁여놨죠.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