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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안도하게 되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by 무라카미 하루키
읽은 날 : 2024. 1. 19
내가 처음으로 읽은 하루키의 소설은 해적판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1987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 소설은 1988년 한국에서 무려 세 개의 출판사에서 판권계약 없이(!!!) 해적판으로 번역 출간되었고, (다행히 1989년 문학사상사에서 정식 판권 계약을 하고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달고 정발되기는 한다.) 내가 읽은 것은 그 해적판 중의 한권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이었고, 집에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로 복귀하기 전에 큰집에 들러 인사를 하러 간 참이었다. 큰집에 갔는데 인사를 드릴 큰아버지도 큰어머니도 계시지 않았고, 기다렸다 인사를 드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어른을 기다리면서 그 책을 읽은 거였다. 점심때는 지난 이른 오후 시간에 책을 잡았고,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어른들은 귀가하지 않았다. 책이 끝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렇게 어두웠는데 내가 어떻게 책을 읽었지 싶게 어둑신한 방에서 망연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하루키는 해거름의 작가라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날 큰집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복귀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날 그 집에서 읽은 하루키의 책, 그 제목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니, 너무 세련됐잖아!
그 뒤, 하루키가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 작가가 되었음에도 나는 딱히 하루키를 찾아 읽지 않았다. 다른 좋은 소설도 많았으니까. 그랬던 나를 하루키 월드로 끌어들인 책은 2003년 출간된 『해변의 카프카』였다. 하루키의 작품치고는 별로 반응이 없었던(또는 좋지 않았던) 작품이었다는데, 나는 열광하며 읽었다. 가출 소년 카프카가 머물던 ‘고무라 기념 도서관’의 존재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 책이 『해변의 카프카』의 연장 선상에서 읽혔다.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스핀오프가 아니라. 이계의 도서관이라니. 아니, 도서관이라는 이계라니 너무 매력적이잖아. 생각하면서. (작가 후기에서 카프카 이야기가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아니어서 조금 슬프기도)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p.11)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이어지는 열여섯, 열일곱 소년과 소녀의 달달한 연애담은 소설의 제목에 나오는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가 아마도 이 어린 연인이 만들어 낸 완결되고도 고립된 둘만의 세상이겠구나 상상하게 만들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길고 긴 편지를 주고 받는 어린 연인이 만나서 구축하는 이상향 같은. 그러나 하루키는 하루키답게, 그 예상을 깨부순다.
‘이 실제 세계’(p.18)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그 도시’에는 실제 세계의 ‘나’가 상실하는 열여섯의 ‘너’가 있다. ‘그곳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p.703)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p.737)다. 그 도시를 알려준 것은 열여섯의 ‘너’이고 너와 함께 그 도시를 만들어 나간 것은 열일곱의 ‘나’이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 M**이자 원래의 ‘나’가 그렇듯. 너와 나는 열여섯 열일곱 때 만든 그 도시에 열여섯 열일곱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언젠가 밤하늘에 떠 있는, 아니, 보이는 별들 중 많은 수가 실제로는 별의 생명을 다하여 이미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보는 건 몇십 몇백만 광년을 달려온 별의 빛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멍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분명 내 눈 앞에서 반짝이고 있는 저 별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사라진 별이라고? 저렇게 반짝이고 있는데 이미 없다고? 존재와 무존재가 엉망으로 뒤섞이던 느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어떤 행동도, 백만광년 떨어진 별의 외계인은 내 존재가 이미 사라진 뒤의 백만광년뒤에 볼텐데, 그럼 나는 백만광년을 사는 것인가. 하는 생각. 삶은 뭐고 죽음은 뭔가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인가 나는 백만광년을 달려 온 이미 사라진 별의 빛을 보고 있는데 그럼 저 별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p.725-726)라는 설명으로 하루키는 그 도시와 이 실제 세계, 열일곱의 나와 마흔다섯의 내가 동시에 분리 중첩되는 것을 설명해 낸다. 아니, 명확하게 분리시킨다. 실제세계의 ‘나’는 열일곱의 나를 열여섯의 너와 함께 둘이 만든 도시에 남겨두고 실제세계로 돌아오기로 한다. 도대체 얼마만한 사랑이면 그 나이의 나를 뚝 잘라서까지 둘만의 완결된 세계에 남겨두고 싶어질까.
열여섯의 너를 잃은 ‘나’는 불완전해진다. 그렇게 열일곱 이후 이 세상을 사는 내내 어딘가 한군데가 상실된 채로 이 세상을 겉돌며 살아간다. 그것은 어떻게해도 메꾸어지지 않는 상실이다. 끝내 열일곱의 나를 떼 내어 열여섯의 너를 다시 만나게 해 주고서야 완전해지는 그런 삶. 열일곱의 나와 분리되어 실제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쓸쓸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안도감이 들었다. 이 세상에, 여러개의 현실중에 적어도 두 개의 현실에서 행복한 두 사람이 있겠구나 하는. 열여섯의 너와 만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의미없는 도시에서 영원히 나이 먹지 않고 살아갈 열일곱의 ‘나’ 와, 드디어 열여섯의 너를 상실한 아픔을 가진 열일곱의 나와 분리되어 아마도 커피숍 그녀와 행복할 마흔다섯의 ‘나’ 둘 다 이제는 행복하겠구나, 하는 안도감.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p.568)라는 나의 고백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해졌겠구나 하는 안도. 그렇게 안도하고 나니 뜻밖에 이 소설이 참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문득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기묘한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계속 읽게 하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본디 이렇게 따뜻하였구나, 하는 깨달음.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도서관, 이계의 도서관이든 도서관이라는 이계든.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p.5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