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국 직전,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이 책은. 인천공항의 서점에서 간신히 구해든 책을 손에 쥐고 비행기에 올랐다. 아이를 재워놓고,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펼쳐서 읽었다.  

한강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는 문득문득 슬프고 서러워진다. 그녀의 소설들이 가진 색채는 "갓난 아이의 손바닥만한 연푸른 피멍(한강, <내 여자의 열매>,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 비평사, 2000, p. 217)" 같고,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 식물적인 무엇 (한강, <몽고반점>, 《채식주의자》, 창비, 2007, p. 101)" 같다. 그건 몽고반점의 색채다. 

아주 어릴때, 갓 태어난 사촌동생의 엉덩이에 넓게 퍼져있던 몽고반점을 보고 그게 무어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뜻밖에도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안나가려고 버틸때 엄마 고만 괴롭히고 얼른 배 밖으로 나가라고 삼신할머니가 엉덩이를 철썩 때려 내 보낸 흔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은 참 슬펐다. 여하한 이유로든 나가기 싫었던 엄마 뱃속에서 억지로 내쫓긴 아기가 그렇게 작고 연약하다는 건 더 슬펐다.  

그 뒤 한동안 잊고 있던 그 말은, 내가 첫 아이를 낳아 처음으로 기저귀를 갈아 주던 순간에 다시 떠올랐다. 너도 내 뱃속에서 나가기가 싫었니, 그래서 엉덩이를 맞고야 나왔니,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울었던 거니, 문득 아이의 울음이 서러운 흐느낌으로 들렸다.  

한강의 인물들은 모두가, 그렇게, 지독히도 연약하고 무방비한채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누군가에게 엉덩이를 채이고 떠밀려 세상에 나온 것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섞여들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돈다.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도 그렇고, <검은 사슴>의 의선도, <그대의 차가운 손>의 주인공들도, 단편의 주인공들도 모두가. 그래서 그들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연약하고, 섬세하고, 상처받기 쉽고 서럽다.  

이번 소설에서도 한강 특유의 주인공들, 그렇게 엉덩이를 걷어채여 세상에 나온듯 연약하고 순결한 인물들이 나온다. 그리고 또한 한강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피와 죽음, 불과 물의 원형 그리고 재생(창조자-즉 예술가) 모티프가 한 가득이다. 한강의 소설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은 여기다. 인간으로서, 아니, 세상 속의 생활인으로서의 죽음과, 거기에 이어지는 예술가로서의 창조를 통한 재생. 한강은 아마도, 넘지 못할 것, 죽음이라는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그 죽음을 뛰어넘고 싶어서 바람을 느끼면서도 장대를 들고 뛰었던 인주처럼, 지금이 아닌 다른 것을 꿈꾸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자면, 한강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죽음 이미지는 아마도,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숴야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달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숴야 하는 거야.
p. 324

라던 서인주의 말처럼, 다시 시작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한강의 주인공들은 아티스트가 많다. <채식주의자>의 비디오 아티스트나 <검은 사슴>의 사진작가 <그대의 차가운 손>의 라이프 캐스팅 작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그리고 이번 소설의 화가와 작가까지. 결국 한강은 소설에서 끊임없이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마지막 이정희의 안간힘처럼 살고싶다 살고싶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문도 모른채 이 세상에 떠밀리듯 나와 엉망진창 지독히도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살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그 고통스런 몸부림을 읽고 있는 건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다. 몽고반점을 달고 나온 사람의 천형.  

힘들고 무거운 내용과 아름답지만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 기법을 차용하여 소설은 빠르게 읽힌다.  

한강이 써 낸 또 한편의 걸작.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0-03-2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기부처]를 꽤 인상깊게 봤어요. [몽고반점]은 두번째 읽었을때야 아! 했답니다. 그래도 역시 제게는 [아기부처]가 제일 좋은 그녀의 작품인데요, 이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가 또 한편의 걸작인가요? 외면할수가 없군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아시마 2010-03-26 14:22   좋아요 0 | URL
전 한강 소설을 죄다 좋아해서요. 아기 부처나 몽고반점을 좋아하셨다면 이 작품도 아마 좋아하실 거예요. 딱 한강스러운 분위기의 한강스러운 인물이 나오는 한강스러운 작품인데도, 매너리즘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 것 또한 신기하구요.
제가 한강을 참 좋아하거든요. ^^

트윈 2010-03-21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오랫만에 왔나봅니다.
갑자기 없어져버린 홈페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아시마의 라이브러리"는 잊어버리지않아 검색해서 겨우 찾아왔네요.
먼곳으로 이사도 가버리시고 ...
건강히 잘 지내시고 다음에 아시마님의 글로 만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아시마 2010-03-26 14:23   좋아요 0 | URL
아이코야. 예전 홈페이지 없어진게 언젠데요. ^^
회자정리 거자필반~ ^^ 이사간 아시마는 곧 컴백홈 하겠지요. 아하하.
글이라... ^^ ㅎㅎㅎ 늘, 열심히, 쓰고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