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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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한 유전by 강화길

 

읽은 날 : 2025.4.18.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까지의 5-6년간, 나는 거의 매년 한 번 씩 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명은 매번 동일해서 편도선염이었고, 대학을 다니고 있을 무렵의 겨울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기에 입원하는 병원도 매번 동일했다. 지금은 없어진 창원 주택가 모퉁이의 자그만 종합병원.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약속한 듯 물었다. 편도선 제거 수술을 하지 그랬니.

 

매번 같은 병원에서 매번 같은 의사에게 진료를 보니 의사는 내가 왜 아픈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았다. 편도선이 약한 것은 엄마 쪽의 유전이요, 그럼에도 무려 입원씩이나 하게 될만큼 심하게 앓는 것은 내 탓이었다. 몸은 쉬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성실하게 전달하는데 그 컨디션 난조를 뚫고도 내 하고 싶은 일들을 해버리는 성격이라 못 버틴 몸땡이가 강제 셧다운을 시켜버리는 게 나의 편도선염이라는 게 그분의 판정이었다. 이 편도선염조차 없다면 너는 크게 앓게 되리니 제거 수술 대신 그냥 일년에 한번쯤 병원 입원하는 걸 택하라고. 그분의 말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너도 철들면 나아지겠지.”

 

편도선염은 말 그대로 염증이라 통증과 고열이 기본인데 사람이 열에 들뜨면, 세상이 몽롱해지기 시작한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허공을 둥둥 떠 다니는 느낌, 체감되는 입김의 뜨거움. 그 중 제일 재미있는 건 약물의 효과로 실시간으로 열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하는 것과, 역시나 그 약물의 효과가 떨어질 때쯤 실시간으로 열이 오르는 것을 실험 관찰하듯 보는것이었다. 그럴 때 내 몸은 투명 실린더 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이라니. 드래곤 브레쓰를 내뿜으며 오한과 더위를 오고가는 3-4,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고 그렇게 한바탕 앓고 나면 봄이 왔다. 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샛노란 산수유 꽃을 보며 김종길의 <성탄제>를 중얼거리던 날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의사의 말대로 내가 철든것인지, 20대 중후반부터는 편도선염의 횟수가 줄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심각한 고열이 오지도 않았다. 더는 편도선염으로 입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왔어, 왔어. 왔다고. 그분이 강림하셨어.

 

몸과 정신이 분열했다. 통증을 견디면서도 그 목젖 너머의 염증과 고열이 연락 끊어진 옛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그 몽롱함과 세상에서 유리된 느낌은 기꺼울 정도.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읽었다. 눈에 띄는 책 중에 가장 작고 가벼워 보였기에 골랐고 오르내리는 열 사이사이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깨면 다시 읽고. 눈은 글자를 읽는데 내용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 책을 끝냈을 때 내게 강림하셨던 그분도 퇴각을 알렸다.

 

처음 읽은 강화길의 작품은 다른 사람이었고, 2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었기에 읽었다. 작가에 낯가림이 심한 내가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문학상이다. , 나는 권위에 순순히 복종하는 소시민일 뿐이니까, 라고 이야기 하기엔, 이 문학상에도 낯가림을 좀 하는 편이긴 해서. 내가 믿고 보는 문학상보다 믿고 거르는 문학상이 더 많긴 하다. 하여튼 한겨레 문학상은 믿고 보는 문학상이라 강화길이라는 낯선 작가를 만났는데 그녀의 글은 내가 한겨레 문학상에 대한 신뢰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 이어서 괜찮은 사람을 읽었고 이후 출간한 작품들도 모두 따라 읽었다. 특히 대불호텔의 유령은 심윤경의 책 영원한 유산과 붙여 읽은 탓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비슷한 시대, 건물을 중심으로 한 서사, 남성 화자와 여성 화자의 차이. , 이런 대조 대비 너무 재미있는 거 있지. 읽은 직후엔 두 글을 가지고 리뷰 써야지 해 놓고는 이러고 있다, 내가.

 

강화길은 오컬트 요소를 글에 잘 끌어들인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는데 서사가 강한 작가라 그 해체된 이야기와 환상과 오컬트 요소들이 하나의 강력한 서사에 묶여 단단한 구조를 이룬다. 강화길의 환상은 오해에서 시작해 인지부조화로 끝난다. 오해라는 요소를 가장 잘 다룬 작품이 다른 사람이었고, 여기서 오해는 타인이 나를 오해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를 오해하는 인지부조화까지를 포함한다. 강화길은 그 오해를 교정하는 대신 오해를 오해 그 자체로 인정하고 끝까지 밀고 나간다. 바로 이 시점에서 강화길의 강력한 서사가 힘을 발한다. , 이 작가 글 참 잘 쓰네.

 

그리고, 이번에 강림하신 그분과 함께 하는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앞에 안 읽고 넘어간 페이지, 또는 챕터가 있었나.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아 이 장면 왜 이렇게 낯설지 않고 좋지. 하며 읽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중편 한권을 읽었는데, 읽긴 읽었는데 서사는 서로 연결되지 않고 이 인물이 앞에 나왔던 그 인물인가, 앞에 나왔던 그 인물은 대체 어찌된 거지. 이러면서. 느슨하고 성긴 소설이었는데 장면 장면의 서사가 하도 강력하고 매력있어서 그냥 글을 읽는 것만으로 좋았다. 이야기가 하나로 온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편인데, 이 소설은, ,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 라고 묻는다면 글쎄, 내가 읽기는 읽었는데, 무슨 이야긴지는 모르겠어.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아. 참 좋았다. 강화길의 여성서사는.

 

ps. 개인적으로 여성서사이런 류의 분류,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화길에게는 쓰게 된다.

 

2025.4.28.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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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책장 2025-05-0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0대 때부터 앓고 있는 잔병들이 지금까지 절 괴롭히는 중인데 의사선생님이 오히려 안쓰러워할 정도였어요.
우스갯소리로 실손보험 없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ㅎㅎ
편도선염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입원할 정도였으면 엄청 고생하셨겠어요ㅜ
아픈 와중에도 책 한 권 뚝딱 읽으시다니 • ᵕ •
아프지마시고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ෆ
 
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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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by 한강

 

읽은 날 : 2025.4.27.

 

1. 매년의 노벨문학상 발표날이 되면 온갖 언론사와 문학단체에서 시인 고은의 집 앞을 찾아가 지랄 발광 난장판을 벌여대던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난장판에 지친 고은은 발표날 즈음이면 집을 비우기 시작했다 한다.


2. 김혼비, 박태하의 전국 축제 자랑에는 웃지도 차마 울지도 못할 장면이 하나 기록된다. 벌교 꼬막축제에서 펼쳐진 작가 조정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위한 발대식’. 심지어 조정래 작가를 모셔다 놓고 한 행사였다. 맙소사.

 

강소국 반열에 들어섰지만 한국인들 스스로도 너무 잘 인지하고 있는 사회 각 분야의 빈약한 기초를 단박에 덮어 줄 외부의 권위로 지나치게 자주 소환되는 노벨상, K-노벨상-집착의 한쪽 끝이 이곳 벌교까지 닿아있었다. 세상에 노벨 문학상을 받자고 발대식을 한다는 발상이 가능하다니!

김혼비, 박태하 전국 축제 자랑, 민음사, 2021, p.247

 

3. 그래서 2024년 한강의 수상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앞통수와 뒤통수를 동시에 쳤다. 그 중 제일 억울할 사람은 언론과 문학계의 호들갑에 매번 이름이 오르내리던 그 작가들일 게다. ‘억울할거란 무심한 언사조차 억울할 것을 알고 있지만, 대체 어찌 설명해야 하지. 작가님들의 무고함을 제가 압니다. 라고 해야하나.

 

4. 2024년 노벨상 수상 이후, 한강의 첫 책이 나왔다. 이 책이 15,000원이다. 페이지수를 세는 정도가 아니라 글자의 갯수를 세어야겠다. 문지, 너무하지 않습니까.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문장은 여전히 아름다운 울림이 있다. ‘한국문학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라는 찬사는 2001년 김훈의 칼의 노래에 동인문학상을 수여하며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이 한 찬사인데, 슬쩍 빌려다 써 본다. ‘한국문장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라고.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한국어 문장이라니.

 

6.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의 한 구절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p.20)라는 구절을 읽었다. 한강은 그 죽은 자들에게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으로 그들의 언어를 기록한다. 이미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한강의 경구 역시 그 언어에서 답을 찾는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p.19)

 

7. 아마도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에, 작가가 쓴 일기에 가까운 글 출간 후에첫 장은 한강이 이 소설을 얼마나 힘들게 썼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이렇게 못하지 싶게. 그 모든 고통과 인내 속에서도 작가는 쓰고 싶었기에 썼을 것이고, 써야만 했었기에 썼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

 

더 이상 이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p.41)

 

울면서 장편을 완성한 한강은 더 이상 눈물로 세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축한다.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죽은 자들에게 빌려드려 언어로 기록하는 일은 참혹했다. 과연 가능할까 회의하며 포기하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하고, 그럼에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여 다시 시작하는 나날들. ‘더이상 이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축하게 되는 그 심정. 그 노력의 결과가 노벨상이다.

 

8.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p.74)에 기대어 가이없어 보이는 노력을 하게 되는 일. 그것이 언어를 사용하는 일이다. 박경리가 말하듯,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 해도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 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박경리, 거리의 악사, 민음사, 1977, p.10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이 산문은 토지의 자서自序로 쓰였다.)이다.

 

9. 작가의 희망 찾기에 무한 감사를.

 

2025.4.27.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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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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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by 김영하

 

읽은 날 : 2025.4.6.

 

의도하지 않게 영원히 지속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영원한 천국정유정, 은행나무, 2024)를 읽고 연달아 단 한 번의 삶에 대한 글을 읽게 됐다. 정유정의 글은 읽을 책을 차례대로 줄을 세워놓았던 라인에 놓여있었고, 김영하는 김영하였기에 배송받자마자 읽은 건데 일이 참 공교롭게 그리 되었다. 삶의 이런 우연성이 나는 좋다. 일부러 그런거라면 그건 좀, 너무, 도식적이잖아.

 

김영하는 내가 대학 신입생이던 1995년에 등단했다. 첫 번째 산문집은 2000굴비낚시, 영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다. 두 번째 산문집이 2002포스트 잇이다. 그 즈음부터 나는 책을 모으기 시작했기에 김영하의 에세이집이 나오는 족족 실시간으로 따라 읽었다. 나보다 9살이나 많은 작가를 나와 동시대 작가로(9살 정도면 동시대 맞나.), 나와 함께 나이 먹어가는 작가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거기에 있다.

 

주제를 정하지 않은 진짜 산문집으론 첫 번째 권이 될 포스트 잇에서 김영하는 소설과 산문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평범한 인간들의 내면에 괴물이 한두 마리쯤은 숨어 있다고 늘 생각한다. 수효가 문제일 뿐, 없는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괴물이 내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선다. 우리는 뚜벅뚜벅 지상으로 향한다. 마침내 땅 위로 올라오면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소설이라 부른다. ……

그런데 한 번 지상으로 올라온 그 괴물들은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 양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시정의 잡사에 참견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들은 그들을, 잡문 혹은 산문이라 부른다. …… 개중에는 괴물로서의 특성을 완전히 망각한 말랑말랑한 글도 있지만 아직 털갈이가 채 끝나지 않은 괴물의 축축한 글도 있다.

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4-5

 

25년여 전의 영하씨의 산문은 털갈이가 채 끝나지 않은 괴물의 축축한 글이 꽤 된다. “평생 지나간 것이나 그리워하도록 되어먹은 것이 인간이라는 흉물”(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71) 이라거나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사랑의 비극이다. 사랑은 낭비이며 사치이며 한가한 감정놀음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러나 자기는 전혀 사랑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잔인한 자들은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다. ‘그냥……으로 시작하는 대답을 기어이 그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말하는 자를 한심하게 만드는 놀음을, 그들은 즐긴다.”(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123) 이라거나 왜 문학인가? 좋다. 말해주마.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쩌자고 문학이냐, 아니면 왜 하필 문학이냐, 혹은 미쳤다고 문학이냐는 뜻이지 않은가.”(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229) 이런식이다. 시니컬하고 사납다. 소설속 정제된 언어들과 달랐다. 물론 영하씨의 초기 작품들도 이렇게 폭력적이긴 하지만. 나는 이 에세이를 읽고 똘똘한 아이의 세상 인상기라는 제목을 달아 준 적이 있다. 갓 서른이 된 남자라기 보다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랬던 영하씨의 산문은 나이를 먹어가며 달라진다. 입고 있는 양복에 익숙해지고, 사회적 언어를 사용하는데 더 노련해지며 날것의 감정을 토해내는 대신 순화하고 돌려서 말하는 법도 익혔다. 갓 서른이 되었던 사람이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환갑이 멀지 않게 되는 나이까지 성장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스마트하고, 여전히 예민하지만 이제는 사용하는 언어의 질이 달라져 간다.

 

이십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십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애써 믿으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애써 찾아내, 사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복복서가, 2025, p.77

 

김영하는 지금까지 산문을 통해 자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직업군인 아버지가 있고, 전업주부 어머니가 있고, 남동생이 하나 있고, 연세대를 나왔고, 부산 출신 아내와 결혼을 했고, 이걸 좋아하고 저걸 취미로 가지고 있고 블라블라블라. 아버지의 직업 덕에 매년 전학을 해야했던 초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첫사랑 이야기며, 대학 시절의 이야기며. 김영하에 대한 정보는 어느 글에서나 넘쳐나서 이쯤 되면 이 사람을 친근하게 느끼는 것도 인지상정일 것 같은데, 묘하게 거리를 두는 느낌이 있었다. 하긴 공인이니까, 자신의 정보를 각색하는 것도 당연하지 싶으면서도 아니, 전혀 각색되지 않은 날것의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는데도 묘하게,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는데 사실은 하나도 듣지 않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박완서나 박경리의 글이나 인터뷰는 자신의 모친에 대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판단으로 넘쳐난다. 그것이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는지 선명하게 선이 그어질 정도로. 그런 인터뷰와 산문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김영하의 우리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어요. .” 이라는 정보는, 정보를 받았으나 받지 않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하긴,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해야할 의무는 없잖아? 그 기묘한 거리감을 나는 김영하의 세련된 처세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다 이 책을 읽고 드디어 생각했다. , 그랬군. 그동안 정보는 주었는데 감정은 주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 김영하의 작품과 연관 지을 선이 그어지지 않았던 거지. 이번 산문집에서 김영하는 자신의 아버지에 관하여, 그리고 어머니에 관하여 꽤나 자세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자신이 그분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마도 두 분 모두 돌아가신 뒤이기에 가능했던 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평생 쓸 일이 없겠구나. 하하하.) 어쩌면 그렇게까지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나이를 먹어가며 모서리가 좀 둥글어지는 모습일 수도 있겠고.

 

김영하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느끼는 김영하는 초기작을 쓸 때부터 이미 완성형의 작가였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한편 글을 쓸 때마다 나아지는 작가란, 발전하는 모습이니까 좋은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음, 그건 그거대로 또 좀 별로이지 않나. 어쨌든 소설이 나아진다는 느낌보다는 소재와 주제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수는 있는 정도지 처음부터 글 진짜 잘 쓰는 작가이긴 했다. 타고난. 그래서 소설의 발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에세이를 따라가면서는 할 말이 좀 생긴다. 작가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고. 좋아하는 작가와 동시대에 함께 나이먹고 있다는 축복을 맘껏 누리는 중이다.

 

2025.4.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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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4-07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반가워요. 그리고 김영하 작가의 사적인 고백에 대한 감상 아시마님이 정리해주시니 제가 느낀 뭔가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감정이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솔직한데, 뭔가 감정이 넘치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이런 거였군요. 자신의 사적인 정보를 노출할 때 태도라는 게 뭔가 의도를 가지면 거부감이 드는 부분이 있잖아요. 김영하 작가에겐 그런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담백한데 그게 오히려 뭔가 더 울림을 주는... 김영하 작가의 나이듦에 대해 저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어요.

아시마 2025-04-28 10:12   좋아요 0 | URL
처음에 전 김영하를 김연수 앞에 두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엔 김연수가 김영하의 앞에 놓이게 됐죠. 그리고 요즘은, 김연수에 대한 호감도가 전혀 줄지 않은채로 김영하를 김연수의 앞에 다시 데려다놔야하나 하는 고민중에 있습니다. (여기서 앞과 뒤의 이야기는 제 책장에서의 위치를 말함입니다. ^^) 김영하의 최근 소설들에 그렇게 감탄한 것도 아닌데(저는 김영하 초기의 그 살벌한? 강력한? 소설들을 좋아합니다.)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나이 들며 달라지는 모습을 제가 실감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
답글이 늦었어요, 나름 오래 고민하느라 답이 늦었답니다. ^^
 
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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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by 정유정

 

읽은 날 : 2025.4.5.

 

1. ‘사이버 가수아담이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81월이다. 당시 기술로서는 최첨단이었겠으나 지금의 눈이 아닌 그때의 눈으로 보아도 이미 어설프기 그지없는 3D 그래픽에 아이고, 이건 좀 무리수 아닌가 중얼거리며 그냥 신경을 껐는데 의외로 엄마가 아담을 몹시 신기해했다. 그래서 저건 대체 뭐냐? 고 묻는 엄마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망연했던 기억이 있다.

 

2. 키오스크의 일반화와 함께 디지털 소외계층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음식점에서 식음료 주문을 하지 못하거나, 택시 호출을 하지 못해 길에 하염없이 서 있게 되는 노년층에 관한 이야기들.

 

3. 나의 음악취향은 매우 올드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바, 사람은 20대 초, 가장 감성적으로 말랑할 때 들었던 음악을 평생 듣게 된다는데 내가 그러하다. 요즘 출퇴근시 듣는 플레이 리스트 안의 음악들은 죄다 세기말의 음악이다. 좋아하는 가수도 거기에 멈춰있는 나는 요즘 아이돌은커녕 버추얼 아이돌의 이야기로 넘어가면 저건 대체 뭐냐라고 묻던 엄마의 얼굴과 닮은 얼굴이 된다.

 

4. 정유정에 대한 나의 평이 박한 것에 비하면, 정유정이 출간한 모든 소설을 다 읽어왔다. 그리고 정유정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갔다. 정유정이 그리는 인물에 동의하기는 어려우나 한국 작가로는 드물게 서사에 강한 작가라는 점만은 인정한다. 좋아하지 않는 작가의 신작을 진득하게 읽어가는 재주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식으로 평가가 조금씩 상향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역시 소설가는 서사지.

 

5. 헌데 이 소설을 읽고는 좀 당황했다. 여전히 순간순간 몰아치는 서사의 재주는 발군인데 이 소설 자체는 당황스러웠다. <롤라>라는 가상의 세계와 롤라 극장드림시어터와 설계자. 아담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끝내 실패한 엄마처럼 버추얼 아이돌의 가치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내가 이 소설의 세계에 몰입하기는 어려웠다. 소설이란 모름지기 이 소설 속 롤라 극장이 그러하듯 자신의 자아가 서사 속 주인공의 자아로 대체되기에 가상의 삶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p.20)하는데에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순간순간 시스템 오류를 일으켜 이야기에서 튕겨지는 기분이었다.

 

6. 어느새 사이버 가수 아담을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나이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과학과 신기술의 발달은 그때의 속도와는 비교도 안되게 빠르고,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 것인가 독자를 납득시키는데에 실패한 작가의 문제인 것인가.

 

7. 2004년 개봉해 브래드 피트의 절정기 미모를 영원히 감상할 수 있게 한 영화 트로이. 바다의 요정 테티스와 인간 남자 펠레우스 사이에 태어난 아킬레우스는 갓난아기였을 때 테티스가 저승의 강 스틱스에 빠트려 상처 입지 않는(죽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준다. 죽어서 불멸의 명성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영원히 이어지는 삶으로 인해 그는 잊혀지는 존재가 될 뿐이다. 결국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면 불멸의 영광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신탁에 참전한다.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언젠가 죽거든.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아킬레스가 신녀 브리셰이스에게 하는 말은 두고두고 곱씹어 볼 여지가 있다. 불멸과 영원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8. 일회성과 유한함 때문에 오늘이, 지금이, 이 순간이, 인간의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롤라>라는 공간과 거기에 대한 인물들의 집착에 동의하지 못했기에 끊임없이 소설에서 튕겨져 나오는 경험을 했다, 나도 이제 버추얼 아이돌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디지털 소외계층이 되었기에 이 소설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인가.

  

9. 작가는 그러니까 이 소설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지막 욕망에 대한 이야기”(p.523 작가 후기에서)라고 말하지만 음, 글쎄. 120204년의 지구는 새하얀 얼음별이 되어 지구상 동식물 대부분이 멸종을 맞(p.384)았고, 인간은 <롤라>에 업로드 되어 혼자의 고독한 삶을 영원히 살아간다. 가상 공간에 업로드 된 인간도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감각으로 인지하는 몸이 있다는 것만으로 몸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신동집의 시 <오렌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래, 그 가상공간에서라도 살면 되잖니, 영혼이라고 할지 정신이라고 할지가 있으니까. 실체가 뭐가 중요하니, 싶다가, 내가 다시 소설에서 튕겨나와 버린 순간은 이 부분이다.

 

버스 승강장을 지나자 어둠의 벽이 나를 막아섰다. 이 벽은 그의 영역이 시작되는 경계선이었다. …… 나는 몸을 돌리고 벽을 향해 섰다. 어둠의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발을 디디자 만경로가 등 뒤로 물러나며 벽이 닫혔다. 동시에 황막한 사막이 나를 감쌌다. 내 거처로 들어온 것이었다. (p.394)

 

그러니까 말이다. <롤라>에 업로드 된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으로 구축된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 살아간다. 그 안에서 만나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죄다 내 기억에서 불러낸 사람들일 뿐이다. . 이 고독의 극한을 보여주는, 고통의 영원이라니. 이건 마치 영원히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아 우주를 홀로 떠돌고 있는 인간을 볼 때와 같은 고통이다. 그래서 경주를 다시 <롤라>로 불러들이기 위해 애를 쓰는 해상의 노력이 이해되지 않았고, 해상을 롤라에 업로드 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이의 노력도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가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졌으니까. 말이야 업로드지만 결국은 죽는 거잖아. 그나마 업로드라도 하면 영혼이, 아니 정신이 남아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업로드 하지 못하고 죽은 연인에 대한 기억은 간직한채 고독속 영원을 누리는 삶이라니. 이게 과연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맙소사.

 

10. 결국은 <롤라>에 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에 따라 이 소설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겠다. 롤라를 긍정할 수 있어야 이 소설 전체를 따라갈 수 있는데. . 1998년의 아담을 보며 했던 생각을 또 한다. 무리수예요. 기원전 8세기부터 호메로스 옹이 외쳤잖아요? 영원과 불멸은 달라요! 인간은 소멸할 수 있기에 아름답고 가치있는 거예요.

 

11. 몸과 영혼(정신)이 분열되어 정신만이 남은 메트릭스의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고, 이미 지난 세기 말에 워쇼스키 형제가 말했답니다. 우리 이미 한번 봤잖아요. 그 세상 별로예요.

 

2025.4.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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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여성

 



어느날 우리집 책장에 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마어마한 벽돌책이 나타났다. 숫자와 지명, 유명 장군의 이름으로 요약되는 전투와 전쟁의 이야기는 스펙타클한 재미가 있다. 그것이 실화, 진짜로 있었던 일이기에 더욱. 물경 9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삼국지 읽듯 숨도 안 쉬고 독파했다. 전쟁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는 나는 뇌의 어디가 고장 난 거 아닐까. 사이코패스였는데 나만 몰랐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야기가 식상해져 갈 무렵이었다.

 

트럼프가 또 다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재선이 못 될 것을 예상했듯,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이길 것도 예상했던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세계에 던진 파문은 늘 그렇듯 무엇을 예상했건 그 이상이었다. 어머 어머 어머 미쳤나봐, 어머 어머 어머, 라는 말만 반복하게 만들던 트럼프의 행보가 외교로 넘어갔을 때, 그리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넘어갔을 때는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마 세계 경찰 캡틴 아메리카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나보다.

 

전 세계에 실시간 생중계 된 첫 번째 전쟁은 91년 걸프전이었다. 사막의 방패Operation Desert Shield,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 사막의 기병도Operation Desert Sabre 라니. 이 화려하다 못해 낭만적이기까지 한 작전명에 이어진 전투 상황의 실시간 중계는 전쟁을 더욱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게 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요격하는 장면(실은 이게 조작된 화면이라고는 하더라만)은 갤러그 게임을 연상시켰다. 사람의 생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우주 저 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사랑스러운 소설 <빨간머리 앤>의 마지막 권은 제1차 세계대전을 시대 배경으로 한다. 앤과 앤의 가족이 사는 곳은 캐나다의 본토도 아닌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고,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아니다. 다만 영연방 국가의 일원으로 영국이 참전하자 캐나다에서도 의용군을 모집하여 영국군의 일원으로 보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앤의 아들들도 참전한다.

 

릴러는 처음의 충격이 지나자 슬픔에 잠기면서도 이 일 전체의 낭만적인 요소에 반응을 나타냈다. 군복차림의 젬은 확실히 훌륭했다. 캐나다 젊은이들이 조국의 요구에 이처럼 재빨리 이해타산을 버리고 두려움없이 응한 것은 생각만 해도 멋졌다.

루시모드 몽고메리, ANNE8. 아들들 딸들, 김유정 역, 동서문화사, 2009, p.77

(동서문화사 판 ANNE은 총 10권의 소설이지만, 앤과 앤의 자녀들을 주축으로 하는 이야기 자체는 8권으로 끝나고, 9, 10권은 애번리 인물들의 자잘한 삽화같은 단편 모음이다.)

 

지나간(끝난) 전쟁과 타지의 전쟁은 언제나 낭만의 요소를 품고 있다. 젊고 잘생긴 제복 차림의 남자와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여성. 오죽하면 로망스의 시작이 기사도 문학일까.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군복차림은 훌륭하고 멋지다. 릴러의 느낌처럼.

 

그렇게, 남의 땅에서, 숫자의 뒤에 숨은 익명성에 기댈 때 전쟁은 낭만적인 이야기이고 흥미진진한 게임이 된다. 아마도 그래서 이 지구상에 전쟁이 끝나지 않는 모양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산 건 누군가가 자신이 그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은 책으로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전쟁과 여성이라니 뜻밖의 조합이다.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쉽게 납득되는 제목이기도 했다. 전쟁이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은 건 맞지 뭐. 전쟁과 여성이라니 뭐 어쩌라는 거지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역, 문학동네, 2015, p.17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남자니까, 당연히 전쟁에 관해 서술하는 것도 남자여야 하지 않나. 여자들은 남편과 아들을 전장에 보내고, 그들의 자녀를 키우며 다쳐서 돌아온 남자를 보살피는 존재로 전장의 후방에 위치하니까. 굳이 전쟁의 한가운데에 여성이 있다면 그건 전쟁 범죄의 희생자로서였다. 그러나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2차 세계대전의 부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모두 남성이다.)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한국문학은 아버지 부재의 문학이다. 이건 작가의 성별이나 주인공의 성별과 관계없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라 더 흥미롭다. 시대 배경이 20세기의 중반, 일제 강점기 후반부이거나 6.25를 전후로 한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문학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부재를 통해 주인공의 삶을 조건을 더 열악하게(가난하게) 만들거나, 존재감이 너무도 희미해 있지만 있지 않은 존재다. 이러한 한국 문학의 기이한 부성부재’(또는 모성과다’)의 현상은 꽤 오래 끈질기게 이어져 20세기 후반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에도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외국의 문학(특히 이웃 일본의 문학은 오히려 어머니 부재라는 느낌이 들만큼 부성이 강조된다.)에 비해 한국 문학은 대부분 어머니 혼자 아이를 낳아 어머니 혼자 기른다. 김원일 마당 깊은 집-남성작가, 남성주인공-, 박완서 엄마의 말뚝-여성 작가 여성주인공-등등을 봐도 그렇지만 말이다, 한국 문학에서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있지는 않다는 것을.”라는 멋진 조언을 남기는 닉 캐러웨이의 아버지 같은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년 작품이다)

 

그 시대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그런 멋진 조언을 남길 만큼(또는 자녀가 그런 조언을 기억할 수 있을 나이가 될 때까지) 자녀의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독립 운동을 하러 만주와 상해로 떠났고, 돈을 벌러 일본으로 징용을 갔고, 나중에는 전쟁으로 끌려갔다. 그 빈 자리를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가 채웠다. 그 시대 한국 여인들은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다. 한국 작가들이 어머니 찬양을 할 수 밖에 없는 근간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이 비슷한 상황은 2차 세계대전, 소련에서도 일어난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들이었다.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주로 소련 영토 내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 2,900만 명에 이르는 소련 시민들이 사망했으며 동시에 전체 독일군 사상자의 80퍼센트 역시 동부 전선에서 발생했다.

폴 콜리어 외2차 세계대전강민수 역플래닛미디어, 2020, p.6

 

2,900만 명의 소련 사망자는 1,200만 명의 군인 사망자 외 1,700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로 나뉜다. 소련 콜호스(집단농장)의 남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자국의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투입되어 남아있는 건 노인, 여자, 아이들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소련의 소녀들은 자원 입대했다. 위생병이나 통신수 같은 지원부대만이 아니라 저격수나 고사포병, 심지어 보병 같은 전투부대에도 지원해 직접 총을 들고 싸웠다. 그녀들에게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는 없고, 내 땅은 지켜야했다.

 

전쟁이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게 되는 이유는 신체 차이에서 온다. 전쟁터에서는 남자라는 것이 곧 능력이요, 권력이 된다. 신체 능력이 월등하니까. 키와 완력의 차이는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열다섯 열여섯의 소련소녀병사들은 그 차이를 극복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그들의 동료로서 함께 싸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키가 작아도, 힘이 없어도 총을 쏠 순 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들과 함께 싸운 남자 병사들은 동료애를 느끼기보다는 이런 소녀들마저 전장으로 끌어들인데 대하여 남자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에 대해 소녀들이 과연 고마워했는지는 다음 문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는 전쟁이라면 토할 것 같고,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 책을 쓸 수만 있다면, 미치도록 쓰고 싶다’(p.28)고 말한다. 그래서 무기질의 숫자와 지명이 지워낸 개별 인간의 증언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 개별 인간 중에서도 전쟁이라는 무정부의 상황 속 여성의 목소리를. 그녀가 이 책을 쓸 무렵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다. 그 전쟁을 보고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벨라루스 작가인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쨌든 그녀의 시도가 실패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김훈이 그린 이순신에게도 그랬다. 포로로 잡혀 온 일본군의 울음은 그가 일본군이라는 뭉뚱그린 적이 아니라 개별의 사람임을 인식하게 한다. 내 앞에 서 있는 각자가 모두 개별의 인간이라는 인지를 하는 순간,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휘둘러 그의 생명을 빼앗기는 불가능해지는 지점이 온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1, p.254

 

그리고 전쟁이 멈추는 실마리는 아마도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 숫자가 아닌 사람 그 개별성을 인지하는 순간에.

 

그래서 개별 인간의 전쟁 체험담은 전혀 낭만적이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다. 인상을 찡그릴만큼 고통스러워서 숙제하듯 글을 읽었다. 내가 하도 괴로워하며 책을 읽으니 남편이 옆에서 대체 왜 읽고 있냐, 집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 다른 거 읽지. 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러게. 도대체 왜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읽어야만 했으니까. 라고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읽어야만 했으니까. 세상에는 흥미와는 관계없이, 재미와는 관계없이 읽어야만 하는 책들도 가끔은 있다.

 

전쟁의 원인(트로이의 헬렌)이나 보호의 대상(앤의 릴러)이 되지 않고 전쟁에 직접 참여한 여자의 목소리를 내게 처음으로 들려준 책은 김서령의 여자전(푸른역사, 2017)이었다. 그 전까지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여자는 잔 다르크나 뮬란 같이 아마조네스 전설에서나 나오는 존재였다. 그게 아니면 나이팅게일이나 마타하리같이 후방을 지원하는 의료인력이나 미모를 활용한 스파이 활동을 하는 정도. 물론 세례 요한을 죽인 루 살로메 같은 암살자도 있고 만주를 누빈 독립운동가 중에도 여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군부대에 소속되어 직접 전투요원으로 참여하는 여성을 상상하는 건 어려웠다. 뭔가, 상상력의 한계 밖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여군이 있다는 것도 알고, 냉병기의 시대가 지나간 지금 여성이 전쟁을 수행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늘 전쟁은 남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밤중에 군인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더니 붙잡힌 동지들을 몇 끌고 나갑니더. 끌려 나갔다 온 젊은 여자들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바닥에 엎드려서 울고……. 그게 뭔지 내가 다 알았네요. 가족을 잃고 죽음을 목전에 둔 누더기 같은 여자들을 그 틈에 강간하다니.

김서령, 여자전, 푸른역사, 2017, p.18

 

지리산 토벌의 결과로 잡아 온 빨치산 여성을 강간하는 대한민국 국군이라니. 그래,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을 거라고 각종 소설을 읽으며 했던 생각을 실체적 진실로 만났을 때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이런 충격을 작가 김서령도 겪는다. 중공군으로 6.25에 참전했던 윤금선의 증언을 들을 때. “난생처음 듣는 내용이기도 했고 난생처음 생각해본 관점이기도 했”(김서령, 여자전, 푸른역사, 2017, p.137)단다. 아이들과 젊은이는 몰살당하고 노인들만 남은 마을을 보며 미국이라면 저절로 원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 미군이 중심이 된 UN군 참전으로 북한의 침략을 막아냈다, 라는 교육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뇌가 문득 흔들렸다. 북한 주민은 우리의 동포고, 헌법상 북한 땅도 대한민국의 영토라면서 그들을 죽인 미국에 감사를 느끼는 인지부조화. 거기에 같은 한국 여성을 강간하는 한국 군인이라니. 때로 여자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전쟁을 치러내는 지도 모른다.

 



크리스티나 램의 책은 야디지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낯선 이름의 종교(이자 종족)를 가진 이들은 인근 이슬람 교인들에 의해 사냥 당한다. 남자 야디지 족은 죽이고, 여자 야디지 족은 성노예로 팔려나가고 거래된다. 종교의 이름으로 허용되는 이 끔찍한 짓을 가장 먼저 응징해야 할 것은 스스로는 평화로운 종교라고 주장하는 이슬람 교인들과 같은 이슬람권 국가여야 할 거 같은데, 정작 이들을 구해주는 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이슬람은 가해자이기만 한가하면, 미얀마의 로힝야족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족을 박해하는 건 자비와 깨달음의 종교라는 불교 신도들이다. 이 과정에서도 로힝야족 여인들은 강간의 대상이 된다.

 

이 책의 내용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가해는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때로 강간은 전쟁의 무기로 사용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의 붉은군대는 사흘간 베를린의 독일 여성을 정책적으로 강간한다. 당시 베를린의 여성 셋 중 하나는 소련군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독일 여성을 욕보이는 것은 나치에게 열등 종족으로 취급당한 러시아인이 쓸 수 있는 보복 수단 중 하나였다. 여성의 성은 가장 쉬운 공격 대상이었다.

크리스티나 램, 관통당한 몸, 한겨레, 2022, 9.강간군대와 사냥의 시간

 

여자와 동료가 되어 전쟁을 치르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던 소련 남자들이 독일에 가서는 여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 물론 죄책감을 느낀 남자와 강간을 한 남자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동일인 일수도 있겠지.). 여자를 강간하는 것이 보복 수단이라니. 정작 저들을 죽인 건 나치 독일의 남자였는데. 이런 찌질한. 그러나 이조차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일이 콩고 민주공화국에서는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다.

 

같은 나라, 같은 종족의 성인 남자가 18개월 된 여아를 강간한다. 처녀의 피가 자신들을 더 강하게 해 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이쯤 되면 인류혐오를 느끼게 된다.

 

다시,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을 본다. ‘여성의 몸, 전장이 되다.’

 

강간은 일회성의 훼손이 아니다. 강간을 당한 사람은 지속적으로 그 후속 피해를 입는다. 신체의 훼손이 복구된 뒤에도 내면은 끊임없이 죽어간다. 심부 화상이 계속 진행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강간 피해자 한 사람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의 가정은 파괴되고, 공동체는 해체된다. 이것은 목숨을 잃는 것 이상의 고통이다. 심지어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입었음을 외부에 쉽게 발설할 수도 없다. 피해자임에도 사회에서 경원시 되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에. 성폭력은 참 특이한 폭력이다. 전쟁이 끝나도 강간 피해자의 전쟁은 끝이 나지 않는다. 몸이 전장이 되는 거다.

 

대한민국에서 성희롱 관련 재판이 처음으로 있었던 게 94(최종심은 99)이다. 서울대 신정휴 교수는 대법원까지 질질 끌고 간 끝에 끝내 패소했고, 대한민국은 처음으로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성희롱을 저지르면 처벌을 받는다는 선례는 미래에 있었을 수도 있었을 수많은 성희롱 범죄를 예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처벌은 중요하다. 처벌받기 전까지 신정휴 교수는 제가 잘났다고, 죄가 없다고 책까지 펴냈다. 나는 성희롱 교수인가(혜화당, 1998)라는. 그리고 대법까지 끌고 가(세 번이나 무죄를 주장한 건 웃기고, 세 번 다 유죄를 선고받은 건 통쾌) 최종 선고가 난 1999년 이후, 온갖 성희롱 관련교육과 백서가 나왔다. 이 판결은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조금 더 나아진 것 뿐만 아니라 남자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게 범죄인 줄 모르고 하는 일도 죄의 무게는 동일하고 가해력도 동일하다. 그게 죄라는 것을 알고 나면 하지 않을 사람들도 참 많다. 인간이란 간사해서 말이지. 처벌 받을 것을 알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쟁 성범죄가 처벌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동일할 것이고, 전쟁 강간 범죄도 그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할 것인데, 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세워진 국제 재판소에 성폭력 기소는 단, , , 도 없었다. , , , . 말이다.

 

사람들은 전시 강간 문제로 상대국의 비인도성을 비난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베를린에서 붉은 군대가 사흘간 8세에서 80세 사이의 독일 여성을 체계적(믿어지지 않겠지만)으로 강간했다거나 일본이 중국의 난징 대학살을 저지르는 과정에 수많은 여성에 대한 강간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 적국이 얼마나 비도덕적 비인도적인지에 관하여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6년 열린 난징에서의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에서 강간문제는 빠져 있었다. 강간이 전쟁 범죄로 처벌 된 것은 1998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심지어 이 판결은 항소심 후 뒤집히기까지 했다.) 같은 해,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고, 이 책이 쓰여지기까지 21년동안 전시 강간에 유죄판결을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단 한번의 경우가 있었지만 항소심으로 뒤집힌다.) 이렇게나 심각한 범죄인데 이렇게나 소홀하게 취급되다니.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안다. 그런데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기에 범죄가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된다. 처벌하지 않는다면 범죄는 반복된다.

 

이 반복되는 범죄를 멈추라고 외치기 위해 이 책은 쓰여졌다. 가해자가 처벌받을 때까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사람들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 잊지 말라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한꼭지로 등장하는 수요집회 이야기는 무참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60년을 넘어 70년을 넘어 80년이 지난 이야기를 10, 20, 30년째 하고 있는데도, 피해자가 있고 증언을 하는데도 왜. . .

 

가끔 그런 책이 있다. 읽지 않았다는 부채감을 안기는 책. 눈에 띌 때마다 언제 읽을 거야? 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 책. 참 열심히도 다른 핑계를 찾아 외면하게 만드는 책. 크리스티나 램의 관통당한 몸이 그랬다. 역시 앞부분 몇 장을 읽다가 덮었다. 악몽을 꿀 것 같아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책과 나란히 꽂아두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리고 한참 뒤 묵혀 둔 숙제를 하듯 이 두 권의 책을 이어 읽었다.

 

아아, 삐뚤어질테다. 이 망할놈의 세상.

 

여자전 : 2019.2.14

제2차 세계대전 : 2025.2.10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2025.2.13

관통당한 몸 : 2025.2.24


2024.3.31.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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