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꽃들 돌런갱어 시리즈 1
V. C. 앤드루스 지음, 문은실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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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통 작가에 대한 첫인상은 처음 만난 작품으로 결정된다. 그 이후의 작품들은 개별 독자에게 있어서는 처음 읽은 작품의 아우라를 웬만해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앤드루스와 처음 만난 작품은 <오도리나> 였다. 그 작품을 읽었던 시기가 중학교 1학년 쯤이었고, 재미있었지만 기괴하기 짝이없는 소설 정도로 기억을 했다. 그래서일까 그 뒤에 읽은 앤드루스의 작품들은 죄다 근친상간의 그늘을 뒤집어 쓴, 기괴하기 짝이없는(그야말로 딱 '고딕' 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그 기괴하기 짝이없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완역판이 나왔다는 말에 출간 당일 사들이고, 받자마자 읽었던 것은 그래도 재미있더라, 하는 그 기억때문에.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첫 느낌은, 어라? 이게 아닌데? 였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나는 많아야 열여섯쯤의 사춘기 소녀였고, 지금의 마흔이 멀지 않은 애 둘의 엄마, 그리고 정보사회의 발달과 열여섯 이후 14년 남짓의 세월덕분에 나는 이미 실화로 존재하는 수많은 기괴하고 엽기적인 사건들을 알고 있다. 더이상은 순수하지 않은 아줌마의 눈에 이 이야기는 어라? 고작 이거였어? 하는 느낌이랄까. 벽장 너머의 괴물을 두려워하며 부들부들 떨다 어느날 나이가 주는 용기에 힘입어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그 안이 텅비어있더라하는 걸 발견한 뒤의 허무함쯤에 비견할 수도 있겠다. 


총 다섯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의 첫번째 권인 이 책의 이야기는 간명하게 몇줄로 요약할 수 있다. 


이복 삼촌과 결혼한 코린은 크리스토퍼, 캐시, 캐리, 코리 네 남매를 낳았고, 남편이 죽은 뒤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친정으로 돌아가서 네 아이를 낳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이 넷을 다락방에 숨긴다. 3년 4개월 16일동안 그 다락방에 갇혀 지내던 아이들은 막내의 죽음 이후 그 집을 탈출한다. 


이게 끝이다. 


처음에 아이들을 위해 애쓰던 엄마 코린은 점점 아이들에 관해 잊어가고 새로운 사랑과 생활에 빠져들게 되며 아이들은 그 안에서도 제대로 자라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국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되고, 사춘기에 접어든 남매는 금지된 사랑의 감정에 빠져들고. 


이게 열여섯의 나에게는 무척 충격적인 내용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마흔이 가까운 나에게는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가 되어 버렸다. 이해 못할 것도 없고, 에로틱하지도 로맨틱하지도 않다. 이게 대체 왜 '고딕 로맨스' 라는 이름이 붙어버렸을까.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많은데, 이제는 많은 성폭행을 포함한 성추행이 가족에 의해 일어나고, 아동폭력 가해자의 90% 이상이 친엄마를 비롯한 친족에게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버렸는데. 더구나 그 아이들에게 일어난 일은, 성폭행도 아니었고, 납득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 나이의 아이 둘만을 가두어 놓고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 그게 더 나쁜거지. 아아, 이 책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기엔 난 이미 너무 더럽혀져버렸어.


열여섯 그때는 캐시의 감정선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다면 이제는 코린이 보인다. 과거에는 있을 수 없는 소설적 창작의 산물이라고 느꼈었다면 지금은 글쎄, 이해를 하고 납득을 한다기 보다는 그녀가 그렇게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그녀도 그렇고 코린의 엄마, 캐시의 외할머니도 그렇고 그냥 딱 상상할 수 있을만큼 그 안에서 움직였다. 인간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모성이라는 것이 때로는 환타지일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기에 


그래서 다시한번, 어라, 뭐야,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책 맞나?


이 책이 더는 기괴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반증일테다. 그때만큼 환상적으로 재미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 책은 사춘기에 읽어야 더 재미있는 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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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5-01-2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제작년까지 김연수책 다 읽어내기가 괴로웠는데, 작년 말에 갑자기 너무 재미있는거에요. 책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하는 것의 극단적 경험이었어서 이 책 나왔다고 얘기 듣자마자 다시 읽을 기대감에 별 생각이 다 들어요. 저도 딱 중학교때 즈음에 읽었었네요. 그 뒤로 그 뒤로 책을 몇 천권은 더 읽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되게 선명하게 기억나요. 그 중에 하나가 발레리나는 다리 힘이 엄청 세다. 는 거. ㅎㅎ 리뷰보니 마음의 준비반 기대반 또 설레네요.

아시마 2015-02-05 16:26   좋아요 0 | URL
책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한다는 말, 저는 아주 어렸을 때 들었거든요. 모파상 여자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결혼전, 결혼 후, 아이를 낳은 뒤 읽으면 다 제각각의 감상이 나온다는 말이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그게 제가 책을 사서 여러번 읽게 되는 가장 큰 동력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직접 경험해 보면, 더욱 놀라운 느낌이더라고요.

이 책 읽은 뒤에 하이드님도 꼭 리뷰 써 주세요, 보러 가겠습니다~ ^^

다락방 2015-01-30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늘 그 생각을 했어요. 이 책을 어른이 되어 읽었다면 그때만큼 강한 인상을 받았을까? 하고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겠지요. 지금 아시마님의 리뷰처럼요. 리뷰 쓰신 문장들 중에 `이제는 코린이 보인다`는 문장이 아주 인상 깊어요, 아시마님. 뭔지 알 것 같아서요. 그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전에 보이지 않던 인물이 보인다는 거 말예요.

아시마 2015-02-05 16:31   좋아요 0 | URL
음. 내용말고 책 그 자체로 봤을 때 그다지 잘 쓴 소설은 아닐 것이다, 하는 선입견이 있었는데요. 그 보다는 괜찮더라고요. 기대치가 워낙 낮았던 터라.

코린이란 인물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그렇다고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인물인 건 아닌데, 음... 뭔가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그래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기생해야만 하는 인물이라면 어쩌면 저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다... 하는 생각도 하고. 그 선택을 이해한다는 건 아니지만, 음... 나이가 주는 연륜이겠죠. 이런 인간도 있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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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정글만리>를 읽으면서 결국 문학은 작가와 함께 늙어가는 것인가를 생각하다 떠올린 작가가 하루키다. 하루키는 '문학적' 나이를 먹지 않는 작가다. 그의 소설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이고, 그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는 30대의 감성을 여전히 유지하며 글을 쓴다. 육체의 늙음과 정신의 늙음이 함께 가지 않는 것이다. 젊게 사는 방법을 말하는 많은 책들에서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이 정신을 젊게 유지하라는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하루키는 성공했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나이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몇 안되는 작가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책은 자카르타에서 읽었다. 이 책을 주문해 놓고, 책을 받기까지 기다리기가 안타까워 하루키의 또다른 소설 <상실의 시대>를 먼저 읽었다. 책 면지에 써 놓은 읽은 날자를 보니 2003년 10월 12일에 이 책을 처음 읽고, 다시 2013년 9월 8일에 또 읽었다. 읽고는 십 년이 지나도 재미있구나, 십 년 뒤에 또 만나자, 라는 오골거리다 손발이 녹아버릴 문구까지 써 놓았다. 헐. 어쨌든 상실의 시대를 읽고나서 다시 한달 뒤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2013년 10월 31일의 일이다. 그래서 그런가, 나에게 이 책은 <상실의 시대>의 후일담으로 읽힌다. 속편이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쓴 글이 <상실의 시대>가 아니듯, 마지막으로 쓴 소설도 이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상실의 시대>와 <색채가 없는...>이 책이 하루키 문학의 양쪽 괄호처럼 느껴진다. 와타나베=다자키 쓰쿠루 이고, 이건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같다. 마치, 박완서 선생님의 책 <나목>과 <그 남자의 집> 같은 느낌이랄까. 


정확히 말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등단을 했고, 1987년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원제)으로 전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많은 독자를 하루키의 세계로 끌어들인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 역시 <노르웨이의 숲>(난 <노르웨이이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처음 읽었고, 지금도 <상실의 시대>라는 이상한 제목보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이 그 책의 내용과 훨씬 부합한다고 생각한다)으로 하루키를 처음 만났으니까. 그래서 나에게 <노르웨이의 숲>은 그의 데뷔작처럼 느껴진다. 박완서의 <나목>처럼. 쓸데없는 잡설을 하나 더 붙이자면 <노르웨이의 숲>은 그가 그리스에 체류하며 쓴 작품이다. <먼 북소리>라는 그의 그리스-유럽 여행기(체류기?)에서 나오는 '쓰고 있는 소설, 또는 써서 일본의 출판사로 보내는 소설'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되시겠다.


<노르웨이의 숲>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때 서른일곱 살이던 나는 보잉 747기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라고. 그리고 그 비행기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게 되고 18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색채가 없는....>의 다자키 쓰쿠루는 36살이다. 현재의 여자친구 기모토 사라가 '무슨 영문인지 쓰쿠루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다섯명의 친밀한 그룹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색채 가득한 네 명과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p.24)


<노르웨이의 숲>에서 고등학생인 와타나베에게는 3명이 모인 그룹이 있다. 와타나베의 가장 친한 친구 기오키와, 기오키의 연인인 나오코. 처음에는 나오코의 친구를 불러내 넷이 더블 데이트 같은 것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기즈키와 나오코와 나(와타나베) 셋이 남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이야기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는 것이 제일 마음 편했고 또 잘 어울려졌다. 다른 아이가 끼여들면 분위기가 어쩐지 어색해지곤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1989, p.44


와타나베의 이러한 친구 관계는 다자키 쓰쿠루에게도 비슷하다. 단지 숫자가 다섯으로 달라졌을 뿐.


"우리들 사이에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암묵적인 룰이 있었어. '가능한 한 다섯이서 같이 행동하자' 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어. 이를테면 누군가와 누군가가 둘이서만 뭔가를 하는 건 가능한 한 피하도록 하자.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룹이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하나의 구심적인 유닛으로 존재해야만 했지. 뭐라고 하면 좋을까, 우리는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 같은 걸 유지하려 했던 거야."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 그 물음에는 순수한 놀라움이 배어있었다.

쓰쿠루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고등학생이니까 이런저런 이상한 생각도 하는 거지."


p.28-29


와나타베가 가지고 있던 세사람의 조화로운 공동체는 기즈키의 느닷없는 자살로 깨어진다. 기즈키의 자살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고(소설 내내 끝내 안나온다. 내가 이 소설을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이라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가의 시점이라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극중 인물 '나'는 끝내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고베에 남겨둔 채 도쿄의 대학으로 진학을 해 버린다. 


쓰쿠루의 그는 나머지 네명의 친구들을 나고야에 남겨둔 채 홀로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지만, 방학이나 연휴때면 어김없이 나고야로 내려가 친구들을 만났다. 도쿄라는 낯선 환경 안에서도 그는 신칸센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만 가면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친밀한 장소'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힘이 된다. 그 조화로운 친밀한 장소는 대학 2학년 여름에 깨어진다. 그 전 5월의 연휴때만 해도 멀쩡하던 그 장소는 여름에 나머지 네명의 친구가 동시에 쓰쿠루를 내치면서 그를 죽음과도 같은 상태로 몰아갔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들판의 우물 이미지가 나온다. 이건 나오코가 와나타베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우물은 초원이 끝나고 잡목 숲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있다. 땅 밑으로 빠끔히 열린, 지름 1미터 가량의 어두운 구멍을 풀들이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둘레에는 목책도, 높다란 돌담도 없다. 다만 그 구멍만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가장자리의 돌들은 비바람을 맞아 희끄무레하게 변색됐고 여기저기 틈이 벌어지고 무너져 내려 있다. 작은 녹색 도마뱀이 그런 돌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몸을 기울여 그 구멍 속을 들여다보이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내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그 우물이 아무튼 지독하게 깊다는 사실 뿐이다. 어림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리고 그 구멍 속에는 암흑이-이 세상 온갖 종류의 암흑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암흑이- 가득 차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1989, p.18


친구들에게 내침을 당한 쓰쿠루 역시 그와 비슷한 절망의 우물을 겪는다.


도쿄로 돌아오고서 다섯 달, 쓰쿠루는 죽음의 입구에서 살았다. 바닥없는 시커먼 구멍의 테두리에 아주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 살았다. 잠을 자다 몸을 뒤척이면 그냥 허무의 심연으로 떨어져 내리고 말 것 같은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를 느꼈을 따름이었다. 


p.52-53


나오코의 우물은, 나오코가 와타나베와 꼭 붙어있는 한 너도 나도 절대로 빠지지 않는 우물이다. 그래서 와타나베는 그냥 죽 이렇게 너와 붙어있겠다고 말을 하지만 나오코는 거절한다. 그건 올바르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결국 나오코는 그 우물에 빠져 죽지.


쓰쿠루 역시 그 죽음의 입구 옆 공간에서 몸의 구성이 고스란히 바뀌어 버린 듯한 이상한 감각을 겪는다. 그는 그곳에서 결국 죽어 버린 것인지도 몰라, 라고 생각한다. 친구 네명에게 존재를 부정당했을 때 다자키 쓰쿠루라는 소년은 사실상 숨을 거두었고, 여기있는 것은 '편의상 다자키 쓰쿠루라고 부르는 그릇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그 내용물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p.58)고 느낀다. 그렇게 쓰쿠루는 '흐트러짐 없는 조화로운 장소'를 잃은 채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하이다라는 새로운 친구도 만든다. 와나타베가 미도리를 만나는 것처럼. 


임사의 체험까지 한 쓰쿠루는 여자친구 사라의 도움으로 색채가 있는 네 친구의 현 주소를 받아 들고 과거를 재구성 하기로 한다.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갔던 친구들의 내침이 왜 있었는지를 탐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가장 먼저 아오를 찾아간다. 운동 선수였던 아오. 지금은 자동차 딜러 일을 하고 있는.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이후는 스포일러가 될 것이므로 생략. 


여기까지 쓰고보니 <노르웨이의 숲>과 <색채가 없는...>은 별로 관계가 없는 이야기 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색채가 없는...>이 <노르웨이의 숲>의 후일담이라는 생각은 변하지가 않는다. 나오코와 시로의 이미지는 겹친다. 레이코씨와 사라의 이미지역시 겹친다. 


이야기는 소설적 구성을 달리했을 뿐, 결국은 고등학생 남자가 삼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16-18년 뒤로 시계를 돌려 과거를 재구성 하는 이야기이다. 그 재구성이 그를 어찌 바꾸어 놓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두권의 책을 순차적으로 이어 읽어 보시기를.


하루키는 여러가지 면에서 재능이 있는 작가이긴 하지만 역시 1Q84 류의 책 보다는 이런식의 리얼리즘에 기반한 책이 더 어울리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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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5-01-2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가 설정한 구도가 현재 나이도 돌아가는 스무 살도 삼사십 대의 어떤 해소되지 않은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 같아요. 아시마님 리뷰를 읽으니 노르웨이의 숲을 빨리 제대로 읽고 싶어져요.

아시마 2015-01-28 18:25   좋아요 0 | URL
음... 감히 말하건대, 칼의 노래를 읽지않고 김훈을 말 할 수 없고 태백산맥을 읽지 않고 조정래를 말 할 수 없는 것처럼, 노르웨이의 숲을 읽지 않고 하루키를 말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개별의 작품에 대해서는 말 할 수 있겠지만 그 작가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려면 반드시 읽어줘야 하는 작품들이 있죠. 가장 잘 쓴 작품이라기 보다는( 사실 그 평가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니까요) 그 작가스러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다른 작품들이 모두 그 작품의 파생형으로 보일 수도 있을만큼요. ( 물론 그렇다고 자가 표절 또는 복제를 의미하는 건 아니구요)

블랑카님의 노르웨이의 숲 감상기가 궁금합니다. ^^*
 
[세트] 정글만리 1~3 세트 - 전3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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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6월 1일, 동아일보에 소설가 횡보 염상섭이 칼럼을 썼다. "문학도 함께 늙는가" 라는 제목이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칼럼의 내용을 요약하면 '지금도 멋지게 연애소설을 써 낼 수 있는데 어찌 늙었다 할 것인가. 나는 늙었지만 나의 문학은 늙지 않았다.' 정도가 되겠다. 


그러자 1958년 6월 21일 약관 24세의 젊은 평론가 이어령이 경향신문에 "문학도 함께 늙는가를 읽고" 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칼럼의 내용을 요약하면 '전쟁 직후의 암울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젊음이 단지 연애나 하는 것으로 알고 계신 선생의 젊음에 대한 시각이 이미 늙었다.' 정도 되겠다. 거 참 대학 갓 졸업한 스물 네살 평론가가 예순 둘 먹은 노 소설가에 대해 쓴 글치고는 참 대담하다 해야할지 버릇없다 해야할지.


그러나 어쨌든 이어령의 말에 수긍을 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50년대 후반, 한국의 젊음은 연애 타령을 하고 있을만큼 여유있지 않았다. 당시의 젊은 작가군이라고 할 수 있는 하근찬, 선우휘, 송병수, 박경리 등등은 연애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전쟁 직후의 젊음에게 닥친 암울한 사회상에 대해 글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 시대의 대부분의 젊은이에게 연애는 사치의 감정일 수 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염상섭이 젊은 문학의 상징을 멋들어진 연애소설 정도로 생각한다면, 맞다, 그의 문학은 늙었다.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읽는데 문득 염상섭의 그 칼럼이 떠올랐다. 대하소설은 어쩔 수 없이 인물이 전형성을 띌 수밖에 없다, 라고 변명해 주기에는 그 자신의 소설 태백산맥이 말문을 막는다. 태백산맥의 인물 그 누가 전형적이던가. 그러나 이 소설의 주재원 전대광은 지나칠 만큼 전형적이다. 전대광이 되어도 되고 박대광이 되어도 되고 이대광이 되어도 된다. 주재원은 다 그만큼이지 않나, 라고 이야기 하기엔, 글쎄...... 장화 홍련같은 이야기를 2010년도에 읽게되면 당황스럽다. 


감히 조정래와 같은 대작가에게 젊은 김영하의 에세이를 들이대는 것은 이미 60년도 더 전의 늙은 소설가와 젊은 평론가의 지상 대담을 보는 것만큼이나 민망하지만 그래도 한번 들이대어 본다. 


부자를 정말 부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다. 

......

만약 가난한 사람을 정말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싶다면 그 가난한 이로 하여금 부자들에 대한 엉터리 속설들을 말하게 하면 된다. 부에 대한 자기만의 터무니없는 오해와 과장이 그의 가난을 좀 더 실감나게 드러낸다. 


김영하, 보다, 문학동네, 2014, p.25-26,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


가진 것에 대한 나열로 부유함을 묘사하는 것은 이미 낡았다. 현대의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 시대로까지 진화해 나가는데, 조정래의 이 소설에서 부유함은 끊임없는 소유의 나열로 묘사된다. 김영하의 소설 작법이 정답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고, 2013년에 쓰여진 이 소설이 왜 이렇게 늙은 소설로 느껴지나 고민하다보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는 거다. 이런 묘사법 때문인가, 너무나 전형적인 인물 때문인가. 각나라의 민족성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일본인은 너무나 지나치게 전형적인 일본인으로, 한국인은 또한 너무나 지나치게 한국적으로, 중국인은 백년 전 우리가 상상하던 중국인 그대로 형상화 되어 있는 인물들은 재미가 없다.


그래.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는 거기에 있다. 재미가 없다, 재미가. 


다시한번 말하지만, 조정래는 태백산맥의 작가다. 내가 이미 열번도 넘게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그 책을 잡으면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림을 작파하고, 인상깊은 구절에 밑줄을 긋는 것마저 잊게 만들고, 책의 면지에 읽은 날 기입을 하는 것마저 다음권을 읽느라 제껴버리게 만드는 그 태백산맥의 작가다. 태백산맥은 이미 30여년전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지금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 


그 조정래가 쓴 책임에도 이 책은 재미가 없다. 세권의 책을 읽느라 진땀을 뺐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도 않았고, 매력있는 인물도 없었다. 그저 지겨웠다. 


이쯤되면 생각하는 것이다. 문학도 (작가와)함께 늙는가. 


도무지, 이 책이 왜 베스트 셀러의 목록이 이다지도 오래 이름을 올리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썩어도 준치라고 어쨌든 조정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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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5-01-27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문학도 함께 늙는가, 제목도 멋지고 글 내용은 엄지 척 치켜세우고 싶네요!^^
조정래 작가님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정글만리는 땡기지 않아 사놓기만 하고 안 읽었는데...그 이유 중 절반은 광고를 너무 많이 해서 반발심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작가가 작품으로 증명하면 되지 뭔 홍보를 저렇게 많이...ㅠ

아시마 2015-01-28 10:16   좋아요 0 | URL
예전에 소설가 최일남 선생이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노년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작가와 함께 나이먹어가는(늙어간다는 것과는 의미가 좀 다른) 소설에 관한 이야기였죠. 그때 생각했던 거거든요. 젊었던 작가가 늙어가면서 작품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그렇다면 젊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글은 젊은 작가가 쓴 글이거나 지금은 대가가 된 늙은 작가들의 젊은 시절에 쓴 글일수 밖에 없는 것인가 뭐 그런 저런 생각.

조정래의 소설작법 자체가 워낙 좀 고전적이기는 해요. 흔히 말하는 실험소설 같은 걸 쓰지는 않죠. 그런 소설들에 어울리는 문체도 아니고요. 흠...

소설가 김동리는 요즘으로 치면 참 젊은 나이에 절필 비슷하게 했는데요, 글을 쓰지 않으면서도 한국 문학계의 대부(아 이 식상한 표현이라니.)로 오래오래 계셨어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이 해요. 황순원 선생님도 어느 시기 이후로는 글을 쓰지 않으셨죠. 이런 것들을 보면 문학은 결국 작가와 함께 늙어가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조정래 선생님 참 좋아하고, 정말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하지만, 이제는 어쩔수 없이 인정. 그분의 문학은 늙었나봐요.

다락방 2015-01-2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태백산맥을 안읽었어요. 조정래는 공교롭게도 정글만리로 처음 만났습니다. 정글만리를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 음, 그렇지만 이런 식이라면 태백산맥을 읽지 않아도 되겠군 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책이라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까지 볼 필요는 없겠다 싶었던거죠.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친구들이 노여워했어요. 정글만리는 아니다, 태백산맥은 진짜 다르다, 태백산맥은 좋다, 태백산맥은 읽어라, 하고 말이지요. 크...그래서 작가의 첫 책으로 어떤 걸 읽느냐는 중요한 것 같아요.

아시마 2015-01-28 10:18   좋아요 0 | URL
으악! 태백산맥을 읽지 않고 조정래를 말할 수는 없어요. 태백산맥은 조정래 문학의 절정기예요. 그 이후 아리랑이 나오고 한강이 나오지만 그야말로 가파른 하향곡선이예요. 죄송하게도. 아리랑까지는 그럭저럭 읽어주지만, 한강은, 아. 한강은. ㅠ.ㅠ

물론, 소설가는 그 시대에 대한 기록의 의무가 있다, 라는 시점에서 한강의 작품적 가치는 인정하는 편이긴 한데... 참 재미가 없죠, 한강도.

그렇지만 다락방님이 태백산맥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_-;;; 정글만리가 재미있었다면 태백산맥엔 환장을 하실지도. ㅎㅎㅎ

말리 2015-01-2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전형성과 일반성 이었든가, 뭐 그런 논쟁이 기억 납니다. 전형이란 무엇인가? 제 생각엔 이 책의 그 누구도 전형성조차 획득하지 못한 것 같아요. 모든 인물이 피상적이지요. 아직도 나오는 tv광고가 볼때마다 마음을 아득하게 합니다. 작가에 대한 회한보다 이런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우리의 문학적 감수성이 뼈아픕니다. ... 전 태백산맥 무척 좋아했지만, 7권부터는 그만큼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6권까지만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시마 2015-01-29 15:09   좋아요 0 | URL
글쎄요. 우리의 문학적 감수성이란 아파야 청춘이다 따위의 책을 백만부 해 치우는 그런거니까요. 아플 뼈도 없단 느낌이라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 책의 일본인에 관한 묘사나 중국 주재원에 관한 묘사 등등은 각종 해외 주재 커뮤니티에서 읽을 수 있는 단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피상적이라는 말도 맞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그래서 저는 여전히 조정래라는 한 작가에 대한 회한이 들어요. 분명 이보다 더 잘 쓸 능력이 있으신 분인데요. 늙어서 힘이 딸리시나.
 
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나는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의 말이 책의 서두에 있어도 가장 나중에 읽고, 에세이를 읽을 때는 작가의 말이 말미에 있어도 가장 먼저 읽는다.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 작가의 말이 나의 마음에 확 와 닿았다. 그래서 이 책의 리뷰는 이 책의 말미에 실린 김영하의 작가의 말의 일부를 따오는 걸로 시작해야 한다. 


2012년 가을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생각보다 많은 것이 낯설었다. 사 년 남짓 해외를 떠도는 사이에 한국 사회는 또 많이 변해 있었다. 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는 없다. 그 전이 어땠는지부터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워낙 빨리 변화하는 나라여서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것이 거의 없다. 


p. 207, 작가의 말


2014년 여름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일단은 나의 포지션이 변해 있었다. 미취학 영유아 둘을 데리고 떠났던 나라에,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와 곧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일곱살 아이 둘을 데리고 돌아왔으니까. 나의 스위치를 애엄마 모드에서 학부모 모드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남의 이야기같던 사교육 시장은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어지러웠다. 이곳이 내가 떠났던 그 나라 맞나 싶었다. 낯 설어도 이렇게 낯 설 수가 없었다. 


김영하는 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는 없다 라고 말했지만 나는 적어도 한가지는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있다. 떠나기 전만해도 외제차 옆은 주차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는데 불가능할 정도로 외제차가 넘쳐났다. 세대에 한대꼴로 외제차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우디와 벤츠 사이에도 주저없이 차를 넣는다. 피할 수가 없으니. 김영하라면 이 현상에 대해 뭐라고 설명을 할까. 뭔가 시크한 어조로 한국 경제의 현황에 버무려 멋들어진 설명을 내놓지 않았을까. 사 년 남짓 해외를 떠돌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 남자는 무엇이 가장 낯설었을지 궁금하다.


나는 김영하의 시크한 어조를 좋아하는데 김영하의 chic는 세련되고 멋있다기보다는 냉소적이다. 세상에서 한발쯤 발을 빼고 영화 관찰하듯 보는 느낌이랄까. 언제나 김영하는 그랬다. 그 사건의 현장에 뛰어든 당사자나 경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위치를 견지한다. 그런 어조는 소설을 쓰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전달은 명쾌하고 산뜻했다. 그는 구질구질하게 휩쓸려 들어가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작가의 말에 그대로 설명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가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p. 208-209, 작가의 말


그러니까, 김영하의 보는 방식은 곧 본 것에 대해 홀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다. 그 현상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가 된다. 관찰을 하고, 그 관찰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야말로 놀라운 화학변화가 일어난다. 하나의 현상이 김영하라는 촉매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재탄생 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이건 그야말로 연금술이다. 글을 읽는 내내 야~ 진짜 똑똑하거든 이 작가는. 어쩜 이런 생각을 다 해내냐.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한때 김국진이 우리나라 최고의 개그맨이었을 때, 누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김국진을 혼자 방에 가두어 놓고 뭐하고 있나 몰래 관찰하고 싶은 느낌이라고. 이 생각을 현실로 옮기면 미저리 버금가는 호러물이지만, 상상만을 하면 최고의 개그물이 된다. 때때로 나는 김영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 똘똘한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나? 뭐 이런 느낌. 


이 책을 출간 된 직후에 읽었다. 그러니까, 2014년 9월에. 그리고 한강의 소설 <소년이 간다>를 읽고 나서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챕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p. 115-116,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은, 광주의 이야기가 왜 역사나 다큐가 아닌 영화나 소설로 기록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진실을, 진심을 가장 잘 전달하는 최고로 효과적인 매체이니까. 내가 김영하를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이런 똑똑한 통찰력 때문이다. 이 낯선 세상에 아직까지는 반드시 필요한 촉매라서. 이 낯선 세상을 이해하고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니까.


ps.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에 이어 '읽다' 와 '말하다' 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약 석달 간격으로 출간할 예정이라는데 석달 지났다! 작가와 출판사는 약속을 지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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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사마미식 수납법 - 매일매일 조금씩 내게 필요한 것만 남기는 인간적인 집정리
까사마미 지음 / 동아일보사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엄마는 깔끔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걸레는 언제나 수건과 동일 수준의 청결도를 유지했고, 방바닥은 늘 보송했다. 하도 여러번 삶아 희끗한 색으로 변질된 엄마의 수건에서는 늘 햇살의 냄새가 났다. 초록색 3M 수세미는 엄마의 최고 애용품이었고 덕분에 투명한 유리컵은 얼마되지않아 자잘한 기스덕에 희뿌옇게 되었지만 깨끗함만은 보장할 수 있었다. '쓰뎅' 냄비부터 크리스털 컵까지 엄마의 초록색 수세미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엄마는 정리 정돈엔 젬병인 사람이었다. 좁은 집에 많은 아이들, 그만큼 많은 살림이었지만 수납공간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은 집에서 엄마는 늘 짐을 들었다 놨다 먼지만을 닦았다. 깨끗했지만 어질러진 집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엄마의 집을 떠난 게 20년 전이다. 하숙을 하다 자취를 하고, 다시 신접살림을 꾸리고, 친구와 둘이 쓰던 하숙방에서 원룸으로, 다시 복도식 구형아파트에서 먼 외국 낯선 구조의 집에서 다시 새아파트로. 그 사이 둘이었던 가족은 셋에서 넷이 되고 짐은 점점 늘어났다. 오천권이 넘어가면서 헤아리기를 포기한 책들과, 어느새 세대로 늘어나 버린 재봉틀과 엄청나게 사들인 그릇들의 틈바구니에서 더는 엄마식 살림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정리 정돈은 보고 배우는 것이 가장 크다. 요즘같이 시어른을 모시고 살지 않는 것이 보편화 된 환경에서 엄마의 살림법은 딸에게로 전수되었다. 새로 살림을 시작하는 딸은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엄마의 방법 외의 방법을 모르므로 엄마의 방법대로 집안을 정돈한다. 나의 경우에 그건 최악의 방법이었다. 살림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이라도 있으면 당장 등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포털 사이트 검색을 한다.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나는 알라딘을 찾는다. 알라딘 검색창에 살림법, 수납법 등등의 검색어를 입력했고 열권이 넘는 책을 주문했다. 음, 나는 스케일이 크다.(스파르타의 페르시안 왕 '나는 관대하다' 어조로 읽어야 한다.)


감히 말하건대, 종이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할 책이 태반이었다. 집안을 정리하고자 쓰레기를 생산하는 형국이니까. 살림 관련 책들을 집필하고 출간하는 집필자들과 출판사들에게 이르노니, 볼만하고 쓸만한 수납도구를 만드는 능력이 그리 흔한 능력이 아니라네. 책에서 나오는 수준의 수납도구를 만들 수 있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면 수납관련 책을 사지도 않을걸세. 이미 필요 없을테니.


그 와중에 걸려든 책이 이 책이다. 


까사마미는 네이버의 유명 수납, 살림, 인테리어 블로거....라고 한다. 난 블로그를 잘 방문하지 않으므로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는 모르겠고, 이 책은 도움이 된다. 단, 살림 레벨 중급 이상자들에게만.


초기의 나처럼 완전 쌩초짜로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난해하다. 집이 좁은 사람들에게도 맞지 않다. 수납의 기본중에 기본은 공간의 확보다.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은 쓸모가 없다. 그래서 별 반개 뺐다. 


자, 이제 나 살림 좀 잘 하고 싶어서 살림하려고 애 좀 써 봤어, 우리집 그럭저럭 빈공간은 있어.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펼쳐보자. 구석구석 요긴하고 쓸만한 아이템들이 꽤 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물건을 사용하기 편하게 수납하는 법이 많다.


역시나, 옷 접는 방법은 대체 옷을 이렇게 공들여 접어서 뭘 어쩌겠다고, 싶긴 하지만. 그래서 별 반개 또 뺐다. 


157개의 아이디어로 나누어서 정리된 책의 구성도 찾아 보기 좋아서 도움이 된다. 


이제, 엄마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주택과 나의 아파트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엄마는 여전히 깨끗하지만 어질러진 집을 가지고 있고, 나는 깨끗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정돈 된 집을 가지고 있다. 


까사마미,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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