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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읽으면서 결국 문학은 작가와 함께 늙어가는 것인가를 생각하다 떠올린 작가가 하루키다. 하루키는 '문학적' 나이를 먹지 않는 작가다. 그의 소설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이고, 그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는 30대의 감성을 여전히 유지하며 글을 쓴다. 육체의 늙음과 정신의 늙음이 함께 가지 않는 것이다. 젊게 사는 방법을 말하는 많은 책들에서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이 정신을 젊게 유지하라는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하루키는 성공했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나이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몇 안되는 작가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책은 자카르타에서 읽었다. 이 책을 주문해 놓고, 책을 받기까지 기다리기가 안타까워 하루키의 또다른 소설 <상실의 시대>를 먼저 읽었다. 책 면지에 써 놓은 읽은 날자를 보니 2003년 10월 12일에 이 책을 처음 읽고, 다시 2013년 9월 8일에 또 읽었다. 읽고는 십 년이 지나도 재미있구나, 십 년 뒤에 또 만나자, 라는 오골거리다 손발이 녹아버릴 문구까지 써 놓았다. 헐. 어쨌든 상실의 시대를 읽고나서 다시 한달 뒤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2013년 10월 31일의 일이다. 그래서 그런가, 나에게 이 책은 <상실의 시대>의 후일담으로 읽힌다. 속편이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쓴 글이 <상실의 시대>가 아니듯, 마지막으로 쓴 소설도 이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상실의 시대>와 <색채가 없는...>이 책이 하루키 문학의 양쪽 괄호처럼 느껴진다. 와타나베=다자키 쓰쿠루 이고, 이건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같다. 마치, 박완서 선생님의 책 <나목>과 <그 남자의 집> 같은 느낌이랄까.
정확히 말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등단을 했고, 1987년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원제)으로 전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많은 독자를 하루키의 세계로 끌어들인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 역시 <노르웨이의 숲>(난 <노르웨이이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처음 읽었고, 지금도 <상실의 시대>라는 이상한 제목보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이 그 책의 내용과 훨씬 부합한다고 생각한다)으로 하루키를 처음 만났으니까. 그래서 나에게 <노르웨이의 숲>은 그의 데뷔작처럼 느껴진다. 박완서의 <나목>처럼. 쓸데없는 잡설을 하나 더 붙이자면 <노르웨이의 숲>은 그가 그리스에 체류하며 쓴 작품이다. <먼 북소리>라는 그의 그리스-유럽 여행기(체류기?)에서 나오는 '쓰고 있는 소설, 또는 써서 일본의 출판사로 보내는 소설'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되시겠다.
<노르웨이의 숲>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때 서른일곱 살이던 나는 보잉 747기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라고. 그리고 그 비행기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게 되고 18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색채가 없는....>의 다자키 쓰쿠루는 36살이다. 현재의 여자친구 기모토 사라가 '무슨 영문인지 쓰쿠루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다섯명의 친밀한 그룹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색채 가득한 네 명과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p.24)
<노르웨이의 숲>에서 고등학생인 와타나베에게는 3명이 모인 그룹이 있다. 와타나베의 가장 친한 친구 기오키와, 기오키의 연인인 나오코. 처음에는 나오코의 친구를 불러내 넷이 더블 데이트 같은 것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기즈키와 나오코와 나(와타나베) 셋이 남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이야기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는 것이 제일 마음 편했고 또 잘 어울려졌다. 다른 아이가 끼여들면 분위기가 어쩐지 어색해지곤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1989, p.44
와타나베의 이러한 친구 관계는 다자키 쓰쿠루에게도 비슷하다. 단지 숫자가 다섯으로 달라졌을 뿐.
"우리들 사이에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암묵적인 룰이 있었어. '가능한 한 다섯이서 같이 행동하자' 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어. 이를테면 누군가와 누군가가 둘이서만 뭔가를 하는 건 가능한 한 피하도록 하자.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룹이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하나의 구심적인 유닛으로 존재해야만 했지. 뭐라고 하면 좋을까, 우리는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 같은 걸 유지하려 했던 거야."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 그 물음에는 순수한 놀라움이 배어있었다.
쓰쿠루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고등학생이니까 이런저런 이상한 생각도 하는 거지."
p.28-29
와나타베가 가지고 있던 세사람의 조화로운 공동체는 기즈키의 느닷없는 자살로 깨어진다. 기즈키의 자살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고(소설 내내 끝내 안나온다. 내가 이 소설을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이라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가의 시점이라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극중 인물 '나'는 끝내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고베에 남겨둔 채 도쿄의 대학으로 진학을 해 버린다.
쓰쿠루의 그는 나머지 네명의 친구들을 나고야에 남겨둔 채 홀로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지만, 방학이나 연휴때면 어김없이 나고야로 내려가 친구들을 만났다. 도쿄라는 낯선 환경 안에서도 그는 신칸센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만 가면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친밀한 장소'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힘이 된다. 그 조화로운 친밀한 장소는 대학 2학년 여름에 깨어진다. 그 전 5월의 연휴때만 해도 멀쩡하던 그 장소는 여름에 나머지 네명의 친구가 동시에 쓰쿠루를 내치면서 그를 죽음과도 같은 상태로 몰아갔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들판의 우물 이미지가 나온다. 이건 나오코가 와나타베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우물은 초원이 끝나고 잡목 숲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있다. 땅 밑으로 빠끔히 열린, 지름 1미터 가량의 어두운 구멍을 풀들이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둘레에는 목책도, 높다란 돌담도 없다. 다만 그 구멍만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가장자리의 돌들은 비바람을 맞아 희끄무레하게 변색됐고 여기저기 틈이 벌어지고 무너져 내려 있다. 작은 녹색 도마뱀이 그런 돌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몸을 기울여 그 구멍 속을 들여다보이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내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그 우물이 아무튼 지독하게 깊다는 사실 뿐이다. 어림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리고 그 구멍 속에는 암흑이-이 세상 온갖 종류의 암흑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암흑이- 가득 차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1989, p.18
친구들에게 내침을 당한 쓰쿠루 역시 그와 비슷한 절망의 우물을 겪는다.
도쿄로 돌아오고서 다섯 달, 쓰쿠루는 죽음의 입구에서 살았다. 바닥없는 시커먼 구멍의 테두리에 아주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 살았다. 잠을 자다 몸을 뒤척이면 그냥 허무의 심연으로 떨어져 내리고 말 것 같은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를 느꼈을 따름이었다.
p.52-53
나오코의 우물은, 나오코가 와타나베와 꼭 붙어있는 한 너도 나도 절대로 빠지지 않는 우물이다. 그래서 와타나베는 그냥 죽 이렇게 너와 붙어있겠다고 말을 하지만 나오코는 거절한다. 그건 올바르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결국 나오코는 그 우물에 빠져 죽지.
쓰쿠루 역시 그 죽음의 입구 옆 공간에서 몸의 구성이 고스란히 바뀌어 버린 듯한 이상한 감각을 겪는다. 그는 그곳에서 결국 죽어 버린 것인지도 몰라, 라고 생각한다. 친구 네명에게 존재를 부정당했을 때 다자키 쓰쿠루라는 소년은 사실상 숨을 거두었고, 여기있는 것은 '편의상 다자키 쓰쿠루라고 부르는 그릇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그 내용물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p.58)고 느낀다. 그렇게 쓰쿠루는 '흐트러짐 없는 조화로운 장소'를 잃은 채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하이다라는 새로운 친구도 만든다. 와나타베가 미도리를 만나는 것처럼.
임사의 체험까지 한 쓰쿠루는 여자친구 사라의 도움으로 색채가 있는 네 친구의 현 주소를 받아 들고 과거를 재구성 하기로 한다.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갔던 친구들의 내침이 왜 있었는지를 탐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가장 먼저 아오를 찾아간다. 운동 선수였던 아오. 지금은 자동차 딜러 일을 하고 있는.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이후는 스포일러가 될 것이므로 생략.
여기까지 쓰고보니 <노르웨이의 숲>과 <색채가 없는...>은 별로 관계가 없는 이야기 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색채가 없는...>이 <노르웨이의 숲>의 후일담이라는 생각은 변하지가 않는다. 나오코와 시로의 이미지는 겹친다. 레이코씨와 사라의 이미지역시 겹친다.
이야기는 소설적 구성을 달리했을 뿐, 결국은 고등학생 남자가 삼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16-18년 뒤로 시계를 돌려 과거를 재구성 하는 이야기이다. 그 재구성이 그를 어찌 바꾸어 놓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두권의 책을 순차적으로 이어 읽어 보시기를.
하루키는 여러가지 면에서 재능이 있는 작가이긴 하지만 역시 1Q84 류의 책 보다는 이런식의 리얼리즘에 기반한 책이 더 어울리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