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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정글만리 1~3 세트 - 전3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평점 :
1958년 6월 1일, 동아일보에 소설가 횡보 염상섭이 칼럼을 썼다. "문학도 함께 늙는가" 라는 제목이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칼럼의 내용을 요약하면 '지금도 멋지게 연애소설을 써 낼 수 있는데 어찌 늙었다 할 것인가. 나는 늙었지만 나의 문학은 늙지 않았다.' 정도가 되겠다.
그러자 1958년 6월 21일 약관 24세의 젊은 평론가 이어령이 경향신문에 "문학도 함께 늙는가를 읽고" 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칼럼의 내용을 요약하면 '전쟁 직후의 암울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젊음이 단지 연애나 하는 것으로 알고 계신 선생의 젊음에 대한 시각이 이미 늙었다.' 정도 되겠다. 거 참 대학 갓 졸업한 스물 네살 평론가가 예순 둘 먹은 노 소설가에 대해 쓴 글치고는 참 대담하다 해야할지 버릇없다 해야할지.
그러나 어쨌든 이어령의 말에 수긍을 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50년대 후반, 한국의 젊음은 연애 타령을 하고 있을만큼 여유있지 않았다. 당시의 젊은 작가군이라고 할 수 있는 하근찬, 선우휘, 송병수, 박경리 등등은 연애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전쟁 직후의 젊음에게 닥친 암울한 사회상에 대해 글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 시대의 대부분의 젊은이에게 연애는 사치의 감정일 수 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염상섭이 젊은 문학의 상징을 멋들어진 연애소설 정도로 생각한다면, 맞다, 그의 문학은 늙었다.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읽는데 문득 염상섭의 그 칼럼이 떠올랐다. 대하소설은 어쩔 수 없이 인물이 전형성을 띌 수밖에 없다, 라고 변명해 주기에는 그 자신의 소설 태백산맥이 말문을 막는다. 태백산맥의 인물 그 누가 전형적이던가. 그러나 이 소설의 주재원 전대광은 지나칠 만큼 전형적이다. 전대광이 되어도 되고 박대광이 되어도 되고 이대광이 되어도 된다. 주재원은 다 그만큼이지 않나, 라고 이야기 하기엔, 글쎄...... 장화 홍련같은 이야기를 2010년도에 읽게되면 당황스럽다.
감히 조정래와 같은 대작가에게 젊은 김영하의 에세이를 들이대는 것은 이미 60년도 더 전의 늙은 소설가와 젊은 평론가의 지상 대담을 보는 것만큼이나 민망하지만 그래도 한번 들이대어 본다.
부자를 정말 부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다.
......
만약 가난한 사람을 정말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싶다면 그 가난한 이로 하여금 부자들에 대한 엉터리 속설들을 말하게 하면 된다. 부에 대한 자기만의 터무니없는 오해와 과장이 그의 가난을 좀 더 실감나게 드러낸다.
김영하, 보다, 문학동네, 2014, p.25-26,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
가진 것에 대한 나열로 부유함을 묘사하는 것은 이미 낡았다. 현대의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 시대로까지 진화해 나가는데, 조정래의 이 소설에서 부유함은 끊임없는 소유의 나열로 묘사된다. 김영하의 소설 작법이 정답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고, 2013년에 쓰여진 이 소설이 왜 이렇게 늙은 소설로 느껴지나 고민하다보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는 거다. 이런 묘사법 때문인가, 너무나 전형적인 인물 때문인가. 각나라의 민족성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일본인은 너무나 지나치게 전형적인 일본인으로, 한국인은 또한 너무나 지나치게 한국적으로, 중국인은 백년 전 우리가 상상하던 중국인 그대로 형상화 되어 있는 인물들은 재미가 없다.
그래.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는 거기에 있다. 재미가 없다, 재미가.
다시한번 말하지만, 조정래는 태백산맥의 작가다. 내가 이미 열번도 넘게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그 책을 잡으면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림을 작파하고, 인상깊은 구절에 밑줄을 긋는 것마저 잊게 만들고, 책의 면지에 읽은 날 기입을 하는 것마저 다음권을 읽느라 제껴버리게 만드는 그 태백산맥의 작가다. 태백산맥은 이미 30여년전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지금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
그 조정래가 쓴 책임에도 이 책은 재미가 없다. 세권의 책을 읽느라 진땀을 뺐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도 않았고, 매력있는 인물도 없었다. 그저 지겨웠다.
이쯤되면 생각하는 것이다. 문학도 (작가와)함께 늙는가.
도무지, 이 책이 왜 베스트 셀러의 목록이 이다지도 오래 이름을 올리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썩어도 준치라고 어쨌든 조정래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