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 과학과 사회 3
프란시스 위스타슈 지음, 이효숙 옮김 / 알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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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이 아닌데도 꽤나 답답할 때가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세부사항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그렇다. 가령 드라마에 나온 조연 배우의 얼굴을 떠오르는데 이름이 기억 나지 않을 때 별 일도 아닌데 궁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반면 짜증스러운 기억은 참 오래도 간다. 창피했던 일이나 불쾌한 일은 굳이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다. 가능하면 잊어버리고 싶은데도 말이다.

더구나 공부를 하려고 들 때 어떤 부분은 그렇게도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틀리고 나면 그 부분을 다시 공부할 때마다 둘 중에 틀린 쪽을 고른 것이 계속 떠오른다. 그 순간의 감정까지 떠오르니 다시 틀릴 걱정은 없겠지만 사실 울컥하기는 하다. 이렇게 불쾌했던 감정과 함께 세밀하게 기억이 날 때마다 전체적인 기억력이 뛰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불쾌한 순간의 기억이 또렷하다면 좋을 때의 기억도, 공부한 내용도 그대로 떠올랐으면 싶은 것이다.

허나 그 바람은 바람으로 그치고 기억은 아직도 불안정하다. 감정에 흔들려서 어떤 것은 좀 더 잘 기억되기도 하고 그 감정에 따라 왜곡되기도 한다. 과학과 사회 시리즈의 세 번째 책 '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는 바로 인간의 기억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먼저 기억에 대한 연구를 하는 역사를 살짝 훑어 내려간 이후에 기억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사람의 기억은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단기 기억은 말 그대로 방금 외운 것에 대한 것이라면 장기 기억은 좀 더 오래 보존하게 되는 기억이다. 한 예로 사람에게 20개의 단어를 기억하게 했을 때 첫 부분에 있는 단어와 끝 부분에 있는 단어를 기억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첫 부분에 있는 단어를 잘 기억하게 되는 것은 장기 기억에 의한 것이고 끝 부분에 있는 단어를 잘 기억하게 되는 것은 단기 기억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휘발성 메모리 같은 단기 기억에 비해서 장기 기억에 대한 것은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일회성이 아니고 끄집어내는 데에 다른 점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 기억의 경우 사건과 결부되어 있는 일화적 기억과 의미적 기억으로 나뉜다고 한다. 보통 여기에 절차적 기억이 추가된다고 볼 수 있었다. 서술적 기억은 의미적 기억이나 일화적 기억을 포함한 개념이니 구분상의 개념이란 느낌이었다.

일화적 기억은 자신이 어떤 일을 했었다는 과거의 경험적 사실과 연관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안에는 자연스럽게 의미적 기억이 녹아들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탈리아의 수도는 로마라는 단편적인 사실 정보들은 사건 속에 묻혀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에 대한 부분과 상식에 해당하는 부분 둘 다 기억의 중요 부분이지만 기억 질환이 일어난 경우 손상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허나 행동과 관련된 절차적 기억은 대부분 유지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에 읽은 기억과 관련된 책에서 어린 아이의 기억을 5분 만에 왜곡 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 실험이 나왔다. 그것을 생각하면 사람의 일화적 기억은 간단히 왜곡될 수 있는 기억이었다. 하기야 그 사람의 감정에 따라 더 잘 기억나기도 하고 잊히기도 하는 기억이니 왜곡되는 것도 놀랍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절차적 기억의 경우에는 뇌에 손상이 가서 자신의 예전 일도 상식적인 부분도 잊어버린 사람이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보면 쉽게 잊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다. 그 환자는 의식하지 않을 때는 자연스럽게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걷기 전에 걷는 일의 순서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하자 표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걷는 동작을 하지도 못했다. 무의식 상태였을 때는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기억의 분류는 물론이고 기억의 질환과 관련된 글도 있었는데 새로운 추억을 생성하지 못하는 전행성 기억상실과 예전의 경험을 잊어버린 후행성 기억상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어서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불안정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추천글에 나온 것처럼 기억이 현재와 미래를 대비한 '경험의 질료'여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기억은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데 선택하지 않은 불행으로 인해서 많은 기억을 잃어야 한다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학이 발달해도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는 부분은 너무도 많다. 사람의 구성성분을 안다고 해도 그 재료만 가지고서는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처럼 인체도 알 수 없는 데가 많은 것 중에 하나다. 그런 사람을 움직이고 그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 특정 짓는 결정적인 기억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고 기억이 취사선택되거나 왜곡되는 것은 한 사람의 하루에서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현재도 특정할 수 없는데 기억만 변하지 않길 바라는 것도 무리하기는 하다. 언젠가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도 잊힐 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대한 생각에 잠긴 것이 유쾌했다는 것만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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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왕>을 리뷰해주세요.
눈의 여왕 - 안데르센 동화집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5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김양미 옮김, 규하 그림 / 인디고(글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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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볼 때 자주 하게 되는 말이 있다. 황당무계한 설정을 가지고 경쾌하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면 '만화 같다'고, 꿈같은 이야기를 부드럽게 풀어나간다면 '동화 같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다정한 사람들이 등장한다면 동화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을 믿을 나이는 지나 버렸다. 그 말을 믿게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동화 속의 이야기조차 흔히 생각하게 되는 동화 같은 설정이나 결말이 아니란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특히 안데르센의 대표작인 인어공주에 와서는 더욱 그렇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사랑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지지만 그녀가 맞게 되는 결말은 물거품이 되는 신세일 뿐이다. 더구나 가련한 성냥팔이 소녀는 따뜻한 꿈을 꾸면서 싸늘하게 죽어간다. 동화를 읽으면서 동화 같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그 속에 숨은 싸늘함에 몸서리 처지게 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책 '눈의 여왕'을 읽는 감회가 더 새로웠다.

이 책에는 6편의 동화가 실려 있다. 사라진 소년을 찾아 나선 소녀의 이야기 '눈의 여왕', 익숙하지만 새로운 '인어공주', 중국의 황제를 위해 노래한 '나이팅게일', 열 한 명의 오빠들을 사람으로 돌려놓기 위해 고난을 겪어야 하는 여동생의 이야기 '백조왕자', 발레리나와 사랑에 빠져버린 외발의 '장난감 병정', 추운 겨울 따뜻함을 성냥을 통해 느끼려 했던 '성냥팔이 소녀'가 그 6편이다. 동화의 원전을 살린다거나 한 때 유행했던 잔혹 동화가 아니라서 편하게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읽었던 때와 달리 세부사항이 눈에 들어와서 그리 마음 편하지는 않았다. 그 때와는 다르게 읽게 된 것이다.

가령 '눈의 여왕'의 경우에는 한 소녀가 자신의 단짝인 소년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는 다르지 않다. 허나 이야기의 시작은 좀 색달랐다. 예전에 악마가 거울을 하나 만들었다고 한다. 그 곳에 비치는 무엇이든 비틀어서 보는 거울이었다. 그 거울을 통해서 보면 아름다운 것도 추하게 보였고 선한 사람도 사악해 보였다. 그 거울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 사물의 진짜 모습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거울이 깨어지면서 더 큰 문제가 생긴다. 거울의 작은 파편이라도 눈에 들어가면 시야가 비틀리고 심장에 박힌다면 마음이 사악해졌다.

소녀를 사랑했던 소년에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소년의 눈에 그리고 심장에 들어간 거울 조각은 소년이 다른 사람의 결점을 잘 찾아내도록 만든다.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소녀조차도 업신여기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거기에 눈의 여왕이 가세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어 버린다. 소년은 장난으로 눈의 여왕의 썰매에 자신의 썰매를 묶어놓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줄은 풀어지지 않았고 소년은 눈 깜짝할 사이 마을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눈의 여왕은 소년에게 입을 맞추는데 그 순간 비뚤어져 있던 소년의 심장은 얼어붙는다. 소년은 소녀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소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소년의 실종을 슬퍼한다. 그리고 그를 포기한다. 하지만 소녀는 소년을 되찾고 싶었고 소년의 행방을 강에게 물으러 간다. 그러다 소녀는 작은 배에 실수로 몸을 실고 신발도 잃은 채 정처 없이 떠내려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눈의 여왕'의 경우 자신의 친구를 찾아 나선 소녀의 이야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거울 조각에 관한 이야기는 잊고 있던 터라 왜 소년이 눈의 여왕을 피하지 않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소녀가 소년을 자발적으로 찾아 나선게 아니라 어쩌다보니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데에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어공주'역시 인어는 삼백년을 살지만 영혼이 없고 인간은 백년도 못 살지만 영혼이 있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부분이나 다리가 생긴 인어공주가 무리해서 걸어 다니다 발에 피가 흥건하다는 부분은 예전이라면 그저 넘어갔을 부분이었다. 허나 예전에 읽었던 동화를 매혹적인 삽화와 함께 다시 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세부사항 때문에 살짝 우울할 때도 있었지만 동화에서 얻은 슬픔은 눈처럼 살며시 녹아들고 행복한 결말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정적인 부분을 제외한다면 동화의 세부사항을 알게 되는 것도 흥미로웠다. 연결고리가 맞아들어 갔던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처럼 대체로 납득이 가는 전개였다. 다시 읽게 된 동화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음같이 차가운 아름다움이라도 동화의 세계는 그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동화를 다시 읽게 되는 것도 좋지만
화려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는 삽화가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헬가 게버트의 그림동화'
이 책 만큼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적당한 삽화와
다양한 동화가 같이 있는 이야기라 제법 재미있어요.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동화를 처음 읽는 어린 아이들보다
예전에 한 번 읽은 동화를 다시 읽어보고 싶은 어른들에게 적합할 것 같네요.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아이들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따스하고 눈부신 여름이었습니다.
-P97 '눈의 여왕' 중에서

이 책은 '알라딘 독자 서평단' 도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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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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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인생도 에스컬레이터를 탄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엄청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사람은 태어나서 반드시 죽는다. 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에스컬레이터처럼 사람의 인생도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든지 관계없다.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아가든지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한 번 몸을 실은 에스컬레이터가 아래에 도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에스컬레이터가 멈춰 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반적으로 그런 상황에서는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기계의 오작동이든 아니든 관성의 법칙에 따라 사람의 몸은 방금 전 움직이던 힘의 방향으로 쏠릴 테고 그 이후는 결국 뉴스에나 나오는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멈추어 선다면 사람의 인생의 최대의 공포인 죽음을 피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일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멈춰버린 사고와 같은 것이다. 다만 그 피해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이번엔 '죽음의 중지'라는 신작을 가지고 돌아왔다. 일상생활 속에서 단지 눈이 먼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되자 세상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번에도 이야기의 시작은 단순하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다른 이상은 아무 것도 없이 눈이 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냈던 작가가 이번에는 말 그대로 죽음이 멈춰버린 이야기를 낸 것이다. 소재 자체는 단순하지만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라니 많은 사람들이 꿈꿔오던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호한다. 어디까지나 처음에는 그랬다. 여파는 후에 나타났던 것이다. 처음 아무도 죽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흩어질 수가 없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을 만한 사람들이 죽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에는 술렁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점점 물결치듯 번져간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라니 놀랍고도 기뻤던 것이다. 인간 최대 공포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이들이 설렜다.

다만 아무도 죽지 않아 사상 초유의 위기에 빠진 장의사들은 울상이 되었다. 종교계의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고 죽음의 공포가 없다면 절대자에게 기대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었다. 사상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지지자도 사라질 것이 자명했다.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죽음으로 이익을 얻고 있던 종교계의 사람들, 철학자들, 장의사들은 난색을 표한다.

그와 더불어 병원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몸이 산산조각 난 사람들도 죽지 않으니 예전 같으면 손 쓸 수 없다고 애도를 표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처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쯤 되자 문제가 드러난다. 아무도 죽지 않지만 사람들이 바라던 이상향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에스컬레이터는 역방향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멈추어 버린 사람은 삶의 방향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멈춰서 버렸다. 결코 나아지지도 않지만 죽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상태로 계속 진행되다가는 새로 태어난 젊은이들이 계속 쌓여만 가는 노인들을 책임져야 했다. 자신들의 숫자보다 몇십, 몇백배가 많은 노인들을 말이다. 아무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부유한 사람들은 죽지 않는 자신의 가족들을 붙잡고 있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죽지 않는 가족들은 부담일 뿐이었다. 차마 말로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환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가족들에게 그저 짐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상황은 더 비참했다.

이때 한 노인이 결단을 내린다. 노인은 한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았고 죽음의 앞에서 멈춰 있었다. 노인은 자신이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죽음을 결심한다. 아무도 죽지 않는 상황에서 죽을 것을 결심한 것이다. 어찌된 농간인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옆 나라에서는 죽음이 존재하고 있었다. 노인은 두 딸과 사위 그리고 계속 죽어가고만 있는 손자와 함께 국경으로 향한다. 가족들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들이 결코 삶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옆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어느 순간 노인과 아이는 숨을 거둔다. 슬픔에 빠진 가족들은 노인과 아이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한 참견쟁이의 눈에 들키고 만다. 그 일에 대한 것은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비난이 쏟아지지만 동시에 은밀한 행렬이 국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단지 죽음이 멈추어 버린 땅에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봤다. 마치 여신에게 영원한 젊음을 청하지 않아 불사의 생명을 가지고 계속 늙어가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일 듯 했다. 죽음이 멈추어버린 땅에는 환자와 죽지 못한 사람들이 넘치고 보험이나 연금문제부터 풀어야 할 문제가 불어만 간다.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분이 시작이며 이야기는 교묘하게 물살을 돌려 다른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어 왜 죽음이 멈추었는지가 드러나고 그 이후의 전개가 더 매력적이었다. 소문자로 칭하는 죽음의 등장이 놀라웠던 것이다. 제목 그대로 죽음이 멈추어버린, 소재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 '죽음의 중지' 재미있게 읽었다. 혹시라도 실제로 죽음이 멈춘다면 제발 젊음도 같이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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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할 수 있다! - 불가능을 뛰어넘는 오바마의 희망 메시지
개런 토머스 지음, 김혜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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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미국 드라마 '24'가 인기를 끌었을 때 그 드라마에 대해 놀라웠던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극의 형식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미국 대통령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극의 특성상 그렇기야 하겠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이 원칙을 지키고 '존경할 만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후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통령이라는 게 드라마에서나 가능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조금 떨떠름해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대통령 후보로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버락 오바마'였다. 배리라는 이름이 아니라 '버락'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인 그 후보는 곧 돌풍을 일으켰다. 허나 그 때만 해도 그가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민주당의 정식 후보가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었다. 반농담조로 '24'의 영상이미지가 무의식중에 새겨진 사람들이 그에게 투표를 해서 정말 그가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을 눌렀다. 이쯤 되자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변화'의 바람이 이미 폭풍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 오바마는 매케인을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고 현재 세계의 관심을 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이 책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그렇게 오바마가 돌풍을 일으킨 사람일 수 있었던 이유, 배리라는 미국식 이름이 아니라 '버락'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를 그의 어린 시절 부터 하나하나 조명해가며 풀어놓고 있다. 오바마는 케냐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나 현실에 고개를 숙일 줄 몰랐던 오바마의 아버지는 하와이에서 오바마의 어머니인 앤을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오바마의 아버지 오바마 시니어는 그가 배운 것을 그의 조국을 위해 활용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오바마가 두 살일 때 아들을 두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조국의 정치적 상황을 개선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이후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외조부모와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가족들은 오바마가 자신에 대해 자긍심을 품길 바랐기에 오바마의 아버지에 대해서 과장 섞인 무용담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출생과 피부색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길 바란 것이다. 심지어 해변에서 놀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오바마를 하와이인으로 착각하자 외할아버지는 그가 하와이의 첫 군주인 카메하메하 왕의 증손자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족들의 애정 어린 시선과 보호에도 불구하고 오바마는 집 밖을 나서면 조롱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피부색 때문이었다. 오바마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즈음 오바마의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장학생과 사랑에 빠졌고 오바마와 어머니는 인도네시아로 이주하게 된다. 새아버지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오바마는 친구들의 따돌림 때문에 힘들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나라에서 가톨릭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에세이를 썼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을 아니지만 그 꿈을 어른이 되어 실현시켰다는 부분은 놀라웠다. 오바마는 혼란의 시기를 잘 적응해나가는 듯 했지만 정작 새아버지와 어머니 사이가 소원해지고 교육열에 남달랐던 그의 어머니가 오바마를 미국으로 보낸다. 아들이 좀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하기 바랐던 것이다.

결국 다시 하와이로 돌아온 오바마는 곤경에 빠진다. 피부색 문제는 차치하고도 하와이의 학생들은 배드민턴이나 축구를 하지 않았고, 오바마 역시 럭비공을 어떻게 던져야 할 지 몰랐던 것이다. 살던 곳이 연이어 바뀌어 문화적으로 힘들었던 데다가 학교에 간 첫 날 선생님이 그의 이름을 배리가 아닌 버락으로 소개했던 것이다. 오바마는 그 일로 놀림감이 되었다. 이어 오바마의 학년에는 아프리카계 학생이 단 한 명 있었는데 그 여학생과 오바마가 친해지자 그것이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당황한 오바마가 그 여학생을 밀어내자 더 이상 그를 비웃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신의 가치에 손상을 입힌 일을 한 것 같아 그는 그 일이 내내 불편했다.

이후 오바마는 인종적 차별에 인한 충격과 정체성에 의한 혼란에 시달린다. 그 문제는 그를 타락으로 이끌었지만 오바마는 점차 그 문제에서 벗어난다. 아버지와의 만남과 이해, 자신이 고통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감정을 발산할 대상인 농구를 찾았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부분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안으로만 쏠리던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변화'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오바마는 실패의 경험도 한다. 하지만 그는 변화의 가능성을 믿었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이제 그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도 오바마와 관련된 신문기사를 읽었다. 공화당의 오바마로 불린다는 다른 정치인과 오바마가 연설대결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92%가 오바마의 연설 쪽에 손을 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오바마는 형편없는 연설을 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는 평까지 나왔다고 하니 오바마에 대한 찬탄은 당분간 줄어들 것 같지가 않다. 사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그가 끝까지 잘 해나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그는 이미 놀라운 존재이기는 하다.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넘어 이제 '세계인'이라고 할 정도의 자긍심을 품은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할 수 있다' 인상 깊게 읽었다. 책의 마지막장을 읽고 나니 Yes, We can의 We를 I로 바꿔보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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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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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저마다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아간다. 보통 배고픔 같은 하위의 욕구가 자아실현 같은 상위의 욕구보다 우선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고픔이나 안전에 대한 욕구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재앙일지도 모른다. 그 하나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생명 유지에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 레온 가족은 그런 면에서 각기 다르지만 어떠한 욕구보다 우선되는 열망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 가족에게 시련이 온 것은 오스카의 외할아버지인 아벨라르가 살아 있을 때 부터였다. 영민한 머리를 가지고 있던 아벨라르는 독재 정권이 자리하고 있을 때 상류층에 속해 있었다. 이름 높은 의사이며 지식인이었던 그는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서 귀를 막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재앙이 찾아온다.

그의 장녀이며 그의 두뇌를 그대로 물려받은 재클린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던 것이다. 독재자는 나라 안의 여자는 전부 자기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아벨라르의 딸이 아름답다는 소문이 나면 딸이 끌려가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만약 그가 거부한다면 그의 집안이 몰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어와 함께 헤엄치며 재클린이 강간당하는 꼴을 눈앞에서 보게 될 터였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독재자에게 알아서 딸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아벨라르는 그것을 거부한다. 가족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부터 데 레온 집안의 푸쿠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저주라고 할 수 있는 푸쿠는 독재자 트루히요에게 반항하는 자에게 내려졌었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 아벨라르의 앞날에 어둠이 드리워진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아벨라르의 사촌인 라 잉카의 손에서 크게 된 막내 딸 벨리시아는 또 다른 열망에 시달린다.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등에 양아버지가 기름을 쏟았을 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라 잉카에 의해 구출되었을 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난 이후 그녀의 삶은 안정된다. 그런데도 그녀는 벗어나고 싶은 열망에 시달린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도망치려고 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도망치려 할수록 그녀는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되고 그게 또 재앙을 가져왔다.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카에 와서는 열악한 동네지만 적어도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스카는 가족을 보호하고 싶다는 열망이나 벗어나고 싶은 열망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런 열망은 이미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충족하였기에 그에게 내려오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는 간단한 것인데도 오스카에게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사실 오스카의 열망이 가장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전혀 모르는 타인을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간단한 조건 같지만 미칠 듯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단순히 성욕을 충족시키고 싶다는 것이었다면 쉬웠을지도 모른다. 허나 오스카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어린 시절의 오스카가 그대로 자랐다면 그런 열망을 품지 않은 보통의 도미니카 남자처럼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곱 살의 그의 황금기가 지나고 그는 지나치게 뚱뚱한 몸이 되고 만다. 더구나 여자들이 좋아하는 주제로 말을 걸지도 못하고 롤플레잉 게임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으니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오스카는 점점 주변에서 고립되어 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묵시록적인 것일 정도로 오스카의 정신도 불안정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의 가족들만이 그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주었다. 반면 그는 친구도 거의 없었고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할 생각도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의지도 없었다. 아니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오스카는 자신의 상황을 체념해 버렸다. 그런 오스카에게 기회가 온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오스카를 보면 벌레 보듯 피하는 다른 여자들과도 반응이 달랐으니 희망이 있을 수도 있었다. 점점 자기 자신의 속으로만 침잠하던 오스카는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

단 하나의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를 내던지는 데 레온 가족의 이야기는 인상적인 것 이상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지키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포기한다.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지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열망을 막는 장애물이 저주인지 그 열망 자체가 저주인지 읽어 나갈수록 알 수 없게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 같다는 비아냥거림을 못 알아듣고 '오스카 와오'라고 오스카는 반문한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그를 오스카 와오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을 놀리는 말을 체념하고 이름처럼 받아들였던 오스카가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한 놀라운 선택과 삶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책의 내용 자체도 스티븐 킹부터 온갖 그래픽 노블의 이야기가 재기발랄하고 유쾌하게 섞여 들어가지만 오스카의 마지막 선택만큼 기억에 남을 것 같지는 않다. 푸쿠에 걸리지 않아서 그런지 오스카처럼 단 하나의 열망을 쫓을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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