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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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인생도 에스컬레이터를 탄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엄청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사람은 태어나서 반드시 죽는다. 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에스컬레이터처럼 사람의 인생도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든지 관계없다.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아가든지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한 번 몸을 실은 에스컬레이터가 아래에 도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에스컬레이터가 멈춰 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반적으로 그런 상황에서는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기계의 오작동이든 아니든 관성의 법칙에 따라 사람의 몸은 방금 전 움직이던 힘의 방향으로 쏠릴 테고 그 이후는 결국 뉴스에나 나오는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멈추어 선다면 사람의 인생의 최대의 공포인 죽음을 피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일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멈춰버린 사고와 같은 것이다. 다만 그 피해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이번엔 '죽음의 중지'라는 신작을 가지고 돌아왔다. 일상생활 속에서 단지 눈이 먼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되자 세상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번에도 이야기의 시작은 단순하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다른 이상은 아무 것도 없이 눈이 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냈던 작가가 이번에는 말 그대로 죽음이 멈춰버린 이야기를 낸 것이다. 소재 자체는 단순하지만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라니 많은 사람들이 꿈꿔오던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호한다. 어디까지나 처음에는 그랬다. 여파는 후에 나타났던 것이다. 처음 아무도 죽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흩어질 수가 없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을 만한 사람들이 죽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에는 술렁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점점 물결치듯 번져간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라니 놀랍고도 기뻤던 것이다. 인간 최대 공포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이들이 설렜다.

다만 아무도 죽지 않아 사상 초유의 위기에 빠진 장의사들은 울상이 되었다. 종교계의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고 죽음의 공포가 없다면 절대자에게 기대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었다. 사상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지지자도 사라질 것이 자명했다.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죽음으로 이익을 얻고 있던 종교계의 사람들, 철학자들, 장의사들은 난색을 표한다.

그와 더불어 병원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몸이 산산조각 난 사람들도 죽지 않으니 예전 같으면 손 쓸 수 없다고 애도를 표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처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쯤 되자 문제가 드러난다. 아무도 죽지 않지만 사람들이 바라던 이상향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에스컬레이터는 역방향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멈추어 버린 사람은 삶의 방향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멈춰서 버렸다. 결코 나아지지도 않지만 죽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상태로 계속 진행되다가는 새로 태어난 젊은이들이 계속 쌓여만 가는 노인들을 책임져야 했다. 자신들의 숫자보다 몇십, 몇백배가 많은 노인들을 말이다. 아무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부유한 사람들은 죽지 않는 자신의 가족들을 붙잡고 있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죽지 않는 가족들은 부담일 뿐이었다. 차마 말로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환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가족들에게 그저 짐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상황은 더 비참했다.

이때 한 노인이 결단을 내린다. 노인은 한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았고 죽음의 앞에서 멈춰 있었다. 노인은 자신이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죽음을 결심한다. 아무도 죽지 않는 상황에서 죽을 것을 결심한 것이다. 어찌된 농간인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옆 나라에서는 죽음이 존재하고 있었다. 노인은 두 딸과 사위 그리고 계속 죽어가고만 있는 손자와 함께 국경으로 향한다. 가족들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들이 결코 삶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옆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어느 순간 노인과 아이는 숨을 거둔다. 슬픔에 빠진 가족들은 노인과 아이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한 참견쟁이의 눈에 들키고 만다. 그 일에 대한 것은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비난이 쏟아지지만 동시에 은밀한 행렬이 국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단지 죽음이 멈추어 버린 땅에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봤다. 마치 여신에게 영원한 젊음을 청하지 않아 불사의 생명을 가지고 계속 늙어가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일 듯 했다. 죽음이 멈추어버린 땅에는 환자와 죽지 못한 사람들이 넘치고 보험이나 연금문제부터 풀어야 할 문제가 불어만 간다.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분이 시작이며 이야기는 교묘하게 물살을 돌려 다른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어 왜 죽음이 멈추었는지가 드러나고 그 이후의 전개가 더 매력적이었다. 소문자로 칭하는 죽음의 등장이 놀라웠던 것이다. 제목 그대로 죽음이 멈추어버린, 소재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 '죽음의 중지' 재미있게 읽었다. 혹시라도 실제로 죽음이 멈춘다면 제발 젊음도 같이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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