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 과학과 사회 3
프란시스 위스타슈 지음, 이효숙 옮김 / 알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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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이 아닌데도 꽤나 답답할 때가 있다.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세부사항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그렇다. 가령 드라마에 나온 조연 배우의 얼굴을 떠오르는데 이름이 기억 나지 않을 때 별 일도 아닌데 궁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반면 짜증스러운 기억은 참 오래도 간다. 창피했던 일이나 불쾌한 일은 굳이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다. 가능하면 잊어버리고 싶은데도 말이다.

더구나 공부를 하려고 들 때 어떤 부분은 그렇게도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틀리고 나면 그 부분을 다시 공부할 때마다 둘 중에 틀린 쪽을 고른 것이 계속 떠오른다. 그 순간의 감정까지 떠오르니 다시 틀릴 걱정은 없겠지만 사실 울컥하기는 하다. 이렇게 불쾌했던 감정과 함께 세밀하게 기억이 날 때마다 전체적인 기억력이 뛰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불쾌한 순간의 기억이 또렷하다면 좋을 때의 기억도, 공부한 내용도 그대로 떠올랐으면 싶은 것이다.

허나 그 바람은 바람으로 그치고 기억은 아직도 불안정하다. 감정에 흔들려서 어떤 것은 좀 더 잘 기억되기도 하고 그 감정에 따라 왜곡되기도 한다. 과학과 사회 시리즈의 세 번째 책 '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는 바로 인간의 기억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먼저 기억에 대한 연구를 하는 역사를 살짝 훑어 내려간 이후에 기억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사람의 기억은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단기 기억은 말 그대로 방금 외운 것에 대한 것이라면 장기 기억은 좀 더 오래 보존하게 되는 기억이다. 한 예로 사람에게 20개의 단어를 기억하게 했을 때 첫 부분에 있는 단어와 끝 부분에 있는 단어를 기억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첫 부분에 있는 단어를 잘 기억하게 되는 것은 장기 기억에 의한 것이고 끝 부분에 있는 단어를 잘 기억하게 되는 것은 단기 기억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휘발성 메모리 같은 단기 기억에 비해서 장기 기억에 대한 것은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일회성이 아니고 끄집어내는 데에 다른 점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 기억의 경우 사건과 결부되어 있는 일화적 기억과 의미적 기억으로 나뉜다고 한다. 보통 여기에 절차적 기억이 추가된다고 볼 수 있었다. 서술적 기억은 의미적 기억이나 일화적 기억을 포함한 개념이니 구분상의 개념이란 느낌이었다.

일화적 기억은 자신이 어떤 일을 했었다는 과거의 경험적 사실과 연관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안에는 자연스럽게 의미적 기억이 녹아들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탈리아의 수도는 로마라는 단편적인 사실 정보들은 사건 속에 묻혀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에 대한 부분과 상식에 해당하는 부분 둘 다 기억의 중요 부분이지만 기억 질환이 일어난 경우 손상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허나 행동과 관련된 절차적 기억은 대부분 유지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에 읽은 기억과 관련된 책에서 어린 아이의 기억을 5분 만에 왜곡 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 실험이 나왔다. 그것을 생각하면 사람의 일화적 기억은 간단히 왜곡될 수 있는 기억이었다. 하기야 그 사람의 감정에 따라 더 잘 기억나기도 하고 잊히기도 하는 기억이니 왜곡되는 것도 놀랍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절차적 기억의 경우에는 뇌에 손상이 가서 자신의 예전 일도 상식적인 부분도 잊어버린 사람이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보면 쉽게 잊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다. 그 환자는 의식하지 않을 때는 자연스럽게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걷기 전에 걷는 일의 순서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하자 표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걷는 동작을 하지도 못했다. 무의식 상태였을 때는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기억의 분류는 물론이고 기억의 질환과 관련된 글도 있었는데 새로운 추억을 생성하지 못하는 전행성 기억상실과 예전의 경험을 잊어버린 후행성 기억상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어서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불안정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추천글에 나온 것처럼 기억이 현재와 미래를 대비한 '경험의 질료'여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기억은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데 선택하지 않은 불행으로 인해서 많은 기억을 잃어야 한다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학이 발달해도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는 부분은 너무도 많다. 사람의 구성성분을 안다고 해도 그 재료만 가지고서는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처럼 인체도 알 수 없는 데가 많은 것 중에 하나다. 그런 사람을 움직이고 그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 특정 짓는 결정적인 기억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고 기억이 취사선택되거나 왜곡되는 것은 한 사람의 하루에서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현재도 특정할 수 없는데 기억만 변하지 않길 바라는 것도 무리하기는 하다. 언젠가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도 잊힐 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대한 생각에 잠긴 것이 유쾌했다는 것만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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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참하라 - 상 -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우리역사 진실 찾기 1
백지원 지음 / 진명출판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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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항상 승자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패자가 기록을 남기려 해봤자 승자가 그 내용을 뒤집는 역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전해 내려오는 역사는 항상 승자가 조작한 것일 수밖에 없다. 덕분에 지배층에 대한 것은 미화된다. 기록을 남기고 보존하는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인생은 한 줄 글로도 전해지지 않는다. 결국 후세에 사람들은 승자의 역사를 읽거나 승자에 무리에 끼지 못한 사람들의 인생을 추측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왕을 참하라'는 기이한 역사서다. 500년간의 조선사를 훑어 내려가고 있지만 저자가 보는 시각은 기존의 역사가 아니라 피지배층에 위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입장을 바꾼 것뿐인데도 많은 내용이 다르다. 기존의 왕조를 합리화했던 안개를 걷어내고 고통 받던 사람의 입장에서 조선사를 들여다본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흥미롭기는 하다. 항상 합리화의 대상이었던 왕을 심하게는 '잘 죽었다'는 말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선의 27대 왕 중에서 명군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 왕은 단 두 명 세종과 정조뿐이다. 그리고 밥값을 한 왕은 광해군, 효종, 태종, 세조, 영조이고 많이 봐줘서 죽값을 한 왕은 성종과 숙종이라고 한다. 거기에 요절 등의 이유로 단기 재위한 왕 정종, 문종, 단종, 예종, 인종, 경종, 순종의 7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밥값은커녕 죽값도 못한 무능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에 대한 독설에 이어 조선에도 독설을 퍼붓는다. 명에 대한 사대주의에 기대고 많은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힌 나라이니 진작 망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쯤 되면 할 말이 없어졌다. 기존의 딱딱한 역사책은 어디로 가고 독설을 넘어 욕설까지 퍼붓는 역사책인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말하고 있는 대상인 조선에 대해서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비난을 퍼붓는다. 그게 다소 부담스러운 면이 없진 않았다. 자식, 며느리, 손자까지 죽였다고 어진 임금이 아니라 잔인한 임금이라며 비난한 인조나 무능한 소인배인 선조에 대해 '잘 죽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살짝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욕설이 너무 난무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문체 자체가 구어체라서 대부분 읽기 편하기도 하지만 그런 점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순왕후나 문정왕후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 맞으니 별로 좋게 보지 않았지만 꼭 나라를 망하게 하는 '암탉' 운운할 때는 거슬렸던 것이다.

또한 양반의 5% 이하였던 조선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너도 나도 양반이라고 나선다는 비난은 수긍이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자신은 흔치 않은 성이므로 양반이라고 말하는 데에 와서는 쓴 웃음이 날 뿐이었다.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좋을 사족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거기에 책의 날개에 저자의 다른 책 소개가 있는데 본문 안에서 굳이 자신이 쓴 다른 책을 소개하는 부분까지 나오자 머리가 다 아파졌다.

이런 거슬리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 책 '왕을 참하라'는 매우 재미있는 역사서 였다. 일단 술술 읽히는 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명군이라고 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세종과 정조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또 일반과 다르게 세종은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날씬한 사람이 아니라 고기만 좋아하고 운동을 하지 않아서 뚱뚱한 사람이라는 설명이 나와서 이색적이었다. 세종은 책을 매우 좋아해서 눈에 문제가 올 정도였다는 말도 추가 되어 있었다. 물론 많이 알려진 업적에 대한 풍부한 설명도 이어져 있었고 정조가 그나마 두 번째로 명군인 까닭을 서얼에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말과 자세한 설명이 붙어져 있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정조가 장비처럼 우락부락한 인상이었고 활을 매우 잘 쏴서 50발을 쐈을 때 49발을 맞힌 적도 있다는 것은 몰랐던 부분이라 더 재미있게 읽었다. 심지어 못 맞힌 한 발은 신하들을 위해서 일부러 그리 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그리고 북벌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왕으로만 생각했던 효종에 대한 후한 평가도 그렇고 광해군과 연산군이 왜 쫓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 점이 좋았다.

조선의 역사를 전부 살펴보는 책이니 27명의 왕을 전부 하나하나 재조명한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먼저 조선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서 27명의 왕의 잘한 점과 못한 점을 지적한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비어나 속어는 자제해주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비판적 시선으로 읽어낸 조선 역사라는 점이 특이하게는 했다. 비판적 시선으로 다시 읽어낸 조선 역사 '왕을 참하라'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조선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도 5%에 들어갔을 확률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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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처럼 화내라 -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분노의 심리학
크리스토프 부르거 지음, 안성철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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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좋은 감정보다는 안 좋은 감정에 더 크게 휘둘리게 된다. 하루 종일 기분 좋게 흘러가다가도 별 것 아닌 일로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한 번 하고 나면 그 날 하루의 나머지 시간은 우울하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자신이 화내는 것인지 화가 자신을 휘두르고 있는 건지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감정적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보다는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다른 감정보다 분노의 경우 반드시 다스려야 하는 감정으로 치부된다. 부정적 감정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분노는 살짝 살짝 풀어서 한 번에 터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거나 분노를 없애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분노가 그렇게 쓸데 없는 감정일 뿐이라면 인간에게 분노란 감정이 왜 남아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 책 '왕처럼 화내라'에서는 분노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뇌는 결국 감정에 휘둘리고 분노는 인간의 몸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분노가 사람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준다면 쓸데 없는 것일리도 단순히 없애야 할 성가신 것일리도 없다는데에서 이야기는 출발하고 있다. 분노에 대한 다양한 조언을 하고 있는데 그 전개 방식은 이렇다. 책에서는 각 장의 앞에 네 나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분노 대왕이 다스리는 분노 나라, 잔인한 폭군이 다스리는 버럭 나라, 분노를 금지하고 사업에만 매진하는 황금 나라, 있는 듯 없는 듯 조심스런 소심 나라다.

책을 진행해나가는 인물은 당연히 분노 나라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 콜롬보 주교다. 묘하게도 콜롬보 주교는 분노 나라에 살고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영민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이 인물은 분노에 대해서 분석한다. 분노가 가진 고귀한 힘을 잘 다룰 줄 아는 분노 대왕을 보필하기 위해서다. 분노가 가진 에너지는 크지만 문제는 그 에너지가 큰 만큼 분노가 잘못 터지면 손해가 크다는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콜롬보 주교는 분노의 에너지를 적절하게 살릴 방법을 고민한다.

콜롬보 주교가 생각하기를 분노는 큰 에너지였다. 분노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할 정도로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은 창의적이지도 못하고 물러난 왕 마냥 상황을 바꾸지 못한채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물론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패배한 개처럼 살아간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콜롬보 주교는 왕의 아들이 분노를 마음껏 발산하도록 장려하는 편이었다. 분노가 가신 자리에는 의욕이나 창의력 같은 큰 에너지가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분노는 열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자주 흥분해서 발작을 일으키면 그 행동이 심장에 무리를 주는 경우가 많고 분노를 한 번 뿜어내고 나면 그 영향이 몇 시간 동안 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무조건 폭군처럼 발산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에 분노하는지 왜 분노하는지 알아내라는 말도 있었다. 분노를 나쁘다고 삼킬 것이 아니라 제대로 분노하고 분노를 통해 상승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 있고 분노로 충전된 에너지를 통해 움직이라는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계기와 행동의 시간차가 매우 짧다고 한다. 무언가를 깨닫게 되면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분노의 감정을 통해 상황을 확인하고 이후의 행동할 힘을 얻는다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또한 실패를 했을 때 실패를 계속 곱씹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분노하라고 한다. 성공은 수많은 도전 속에 얻어지는 것이지 행운을 통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 여기고 그 상황에 분노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분노를 분석하는가 하면 일상 속이나 결혼 생활, 아이를 교육할 때 분노를 어떻게 활용할지가 나와 있는 점도 꽤 마음에 들었다. 앞에 읽은 내용을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정리해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분노가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생각했던 분노에 대한 생각을 바꿔준 '왕처럼 화내라' 인상 깊게 읽었다. 앞으로는 분노를 누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가슴 속의 분노를 훌륭한 에너지로 능숙히 전환할 줄 아는 분노 대왕이 되도록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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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와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 과학과 사회 1
피에르 주아네베로니크 나움 그라프 외 13인 지음, 김성희 옮김 / 알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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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에서 흔히 사용되는 갈등의 요소 중에 하나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너는 네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가 흔한 것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적 기술이 발달하고 그것이 출산에 개입하기 시작한 이후 영원히 묶여서 움직일 줄 알았던 출산과 성, 혈통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다소 극단적인 예긴 하지만 얼마 전 본 미국 드라마 '보스턴 리갈'에도 이런 이야기가 등장했다.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변호사를 찾아와 자신들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동일인물인지 알 수 있도록 요청해달라고 의뢰를 해왔다. 그 이유인즉슨 두 연인은 각각 익명의 정자 기증에 의한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것이다. 어머니 혼자서 아이의 출산을 결정하고 아이를 가졌는데 그 인공수정을 행한 곳이 같은 곳이며 비슷한 시기였다. 아이들은 서로의 비슷한 외모, 비슷한 취향에 호감을 가졌고 결혼을 꿈꾸고 있었는데 어머니들 쪽에서 아이들이 어머니만 다른 남매일까 봐 반대한다는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두 연인은 근친상간적 상황을 미리 막기 위해 법원에 생물학적 친부를 공개하라는 강제명령을 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도 이미 출산과 성은 분리되어 있다. 인공수정에 성은 관련될 여지가 없고 아직은 자연적인 행위를 모방하고 있기에 남성의 유전자를 주입하는 형태로 되어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단성 생식이 대세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이미 가족의 형태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 대가족이 깨어지고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핵가족이 대부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편부나 편모에 의해 이루어진 가정이나 재혼으로 인해 생물학적인 부모와 키워준 부모가 다른 가정도 흔한 것이 되었다.

사실 일부일처제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습에 의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출산, 성, 혈통의 분리가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미묘한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기는 하지만 기존에 이미 출산과 성, 혈통이 분리되거나 그 셋의 균형이 맞지 않은 경우는 많았다는 것이다. 유희적 성행위를 하기도 하는 인간을 가족이라는 틀 속에 가두고 성과 출산을 하나로 묶어낸 것도 교회가 최근에서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대리모라는 말로 남아 있기도 하고 예전에는 자신의 아내를, 정확하게는 자궁을 빌려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일에 금전적인 부분이 엉켜 있기는 했다.

또한 어느 부족의 경우에는 여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에 한 해 있고 불임인 여성은 여성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 여성이 다른 남성 정도의 자금력을 가지고 있다면 임신이 가능한 여성과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여성은 그 부족 내의 일반적 가정을 꾸리고 남성의 역할을 하는 불임 여성 쪽이 남성 하인을 시켜 아이가 생기도록 한다고 한다. 여기서 생겨난 아이는 어디까지나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의 아이로 간주된다. 이 부족에서는 혈통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의 범주에 들어 있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혈통이란 부분에 있어서는 현재의 인공수정이란 부분이 그 점을 강화시켜 줄지도 모른다. 기존의 성, 출산이라는 연결고리의 유지가 힘겨운 사람들이 기술의 힘을 빌려 자신의 유전자를 연결하는데 성공하거나 정 안되면 친족의 유전자를 빌려 흔히 생각하는 혈통을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정자가 단순히 유전자를 넘겨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고 난자 쪽이 아이의 대부분을 구성한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책 '성의 역사와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에서는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많은 것들이 부정된다. 생태계의 생물 95%가 양성에 의한 생식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유리하다는 설명만으로는 양성 생식의 우위를 설명하거나 검증할 수 없다고 해서 단성 생식에 대한 다른 생각을 품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정자를 남성 쪽에서 유전자만 전달할 뿐이라고 딱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피에서 피로 전해 내려오는 유전자의 고리부터 의료적 기술의 개입으로 변화하는 성, 출산, 혈통의 관계까지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이 많았다. 더구나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한 사회적 기준까지 바뀐다고 한다.

또한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에 있어서는 부모가 되고 싶다,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욕망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 자체가 딱히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고 풀어내는 부분은 감탄을 넘어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었다. 언젠가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부모가 누군지 알 수 없거나 부모라는 개념이 희미한 세계가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성, 출산, 혈통에 관해 가지고 있던 많은 생각을 뒤흔든 '성의 역사와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 인상 깊게 읽었다. 하기야 지금의 자신도 자신이라고 특정 짓는 순간에 이미 과거가 되어 만날 수 없는 마당에 변치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설사 생물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왔던 생식에 대한 부분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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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
레오 김 지음, 김광우 옮김 / 지와사랑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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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플레즌트 빌'의 인상 깊은 장면 중에 하나는 흑백이었던 화면이 컬러로 변해가는 순간이었다. 마을 이름 그대로 즐겁고 유쾌하지만 인간의 기타 어두운 부분이 없던 무채색의 마을에 두 남매가 나타나면서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지극히 가상의 공간이고 계산된 마을이었던 드라마 속의 공간 플레즌트 빌이 점차 살아 숨쉬고 인간의 욕망이 움직이는 곳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 변화는 흑백이었던 화면에 색이 나타나는 것으로 표현된다. 단순히 색이 나타난 것 만으로도 그 공간은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그런데 색이라는 것도 실상은 착각이라고 한다. 인간의 뇌에서 인식하면서 그렇게 받아들인 것뿐이라는 것이다. 빛의 반사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허위 정보인 셈이다. 하기야 동물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색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하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름을 꽤 알린 생명 공학자다. 그런데 그가 낸 책의 제목이 '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이라니 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과학자들을 유물론자로 한정지어버린 편견 때문이었다.

저자는 각 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런 그가 책의 첫 머리에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과학자를 꿈꿔왔었는데 친한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친구의 이름은 스탠리로 많은 부분을 공유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 친구의 건강한 모습을 보았던 다음날 친구는 관 속에 누워 있었다. 비행기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스탠리는 저자에게도 비행기를 태워주겠다고 했지만 저자의 부모님이 위험하다고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살았고 친구는 죽었다. 지인의 죽음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지만 어린 나이에 친구가 죽는 것은 한결 충격적이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 그는 과학자가 되는 길에만 몰두했고 친구의 죽음은 의식 깊은 곳에 묻어뒀다. 그런데 그가 이제는 신약을 개발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아픈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활기차게 웃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여성이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을, 그녀가 점차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다. 죽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밝은 미소 속에서 언젠가 드리울 죽음의 그림자나 병색을 찾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아니 실제로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사유가 명료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신학이나 철학의 품으로 이야기가 넘어가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어디까지나 과학자이고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검증이 되었는지와 안 되었는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간다. 신학자나 철학자가 아닌 과학자가 생각하는 생명과 죽음의 이야기는 특별한 데가 있었다. 일단 그는 이 주제를 파고들면서 좀 더 근원으로 들어가서 설명을 시작하고 단위를 쪼개고 또 쪼갠다. 친구의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우주의 아주 작은 단위인 유픽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빅뱅이 일어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형성되고 아무 것도 없던 우주에 온갖 것이 가득 차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 과정에서 생명이 생겨나고 온갖 우연이 가득 차는 우주를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설명으로 이어간다. 그 덕분에 이 책이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책이라는 점을 살짝 잊어버릴 뻔 했다. 그렇게 작게 쪼개서 근원까지 내려갔던 이야기는 점차 확장되고 살이 붙어서 생명이 생겨나고 마음과 몸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데까지 불어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학자가 인정하지 않을 임사체험에 대한 부분까지 나와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저자는 과학자이므로 그런 체험들은 전부 과학으로 입증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 붙어 있다.

그런 과정이 꽤나 흥미로웠다. 인간이 보는 세계는 실재하지 않다는 설명부터 생명체인 인간조차 하나의 에너지라고 보는 시각이 신선했던 것이다. 근원에 대한 철학자의 사유과정이 아니라 반드시 검증을 하는 과학자의 눈을 볼 수 있는 경험이라는 점이 특히 좋았다. 생명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읽을 수 있었던 '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 어둠 속에 덮인 무언가를 가만히 되짚어 가는 시간을 선사받은 기분이었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삶을 사는 방법이 기적이 없는 양 사는 것과 모든 것이 기적인양 사는 것이라면 현재 살아 있고 태어났다는 기적 자체를 기분 좋게 받아들일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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