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스바루 - 뉴욕 촌놈의 좌충우돌 에코 농장 프로젝트
덕 파인 지음, 김선형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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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적 미래를 다룬 소설이 어떤 것은 그렇지 않겠냐만은 스티븐 킹의 소설 <스탠드>에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지고 난 후에 세상은 초토화된다. 정확하게는 세상은 거기 있으나 사람은 대부분 죽고 만다. 이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보여지는데 편리했던 삶의 대표주자인 도시는 거대한 무덤으로 변해 버린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자급자족을 할 수 없는 도시는 죽은 사람들이 썩어가는 장소에 불과했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돈이 있다면 먹고 사는데 필요한 물건을 쉽사리 구할 수 있다.

그래서 환경과 인간의 연결을 잊게 된다. 어디까지나 몸이 아프지 않으면 그렇다. 도시가 더없이 몸에 좋지 않은 환경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편리함에 길들어 떠나질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끔씩 스티븐 킹의 소설처럼 전기도 문명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망상과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매일 음식물을 소비하지만 정작 식용 식물을 키워본 경험이라고 해야 초등학교 때 고추와 토마토 묘목을 키웠던 것과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려고 김포의 어느 농가에 가서 종일 고추에 화학 비료를 준 것이 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물은 동물원에서 본 것이 전부이고 텔레비전에서 볼 때조차 소의 거대함에 기겁을 하는 터라 자급자족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그런 참에 이 책 <굿바이, 스바루>를 읽게 되었다. 자신의 손으로 일군 음식물을 먹고, 그러면서도 문명의 이기를 누리겠다는 발상이 마음에 들었다. 실은 마음에 들기보다 부러움이 앞섰다. 요새 들어 묵시록적 소설을 잔뜩 읽은 터라 자급자족하는 삶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던 것이다. 물론 <스탠드>에서처럼 캡틴 트립스가 휩쓴다면 살아남는 소수보다 죽게 되는 다수에 속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자급자족하는 삶에 대한 호기심, 사회와의 연결에 덜 기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저자 자체가 도시 사람이니 남일 같지 않은 실수담을 읽을 수 있겠다는 두근거림에 책장은 잘도 넘어갔다. 예상대로 저자는 뉴욕에서 피자로 요기를 하고 차 없이는 돌아다닐 엄두도 못 내는 사람이었다. 가장 특이했던 것은 그가 염소를 키우게 된 동기였다. 자신이 부동산 주인이 되면서 진보주의자에서 보수우익에 가까워졌다고 농담을 하는 저자는 단 한 가지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선포한다.

바로 아이스크림이다. 그에게 아이스크림은 하나의 식품군이고 기호식품이 아니라 필수 영양 식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스크림을 위해 어린 염소 두 마리를 산다. 그때부터 그가 사는 농장의 주인은 염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집 주위에는 코요테가 있어 염소를 지키기 위해 염소와 함께 자기도 하고 태양 전지판을 설치하고 내려오다가 매복한 염소에게 밟히기도 한다. 심지어 닭을 키워서 계란 재벌의 꿈을 키웠지만 코요테가 닭을 물고 도주하기 일쑤여서 농장이 초비상에 걸리기도 했다.

홍수가 나면 다리가 없어서 곤란에 빠지기도 하고 친환경적인 삶을 살려고 차를 식용유로 갈 수 있는 몬스터 트럭으로 개조하지만 그로 인해서 여기저기 폐식용유를 구걸하는 지경에 몰리기도 한다. 그의 삶은 쉬운 것이 없고 자급자족은 멀기만 하다. 태양열로 온수를 나오게 하려고 붙이는 접착제라던지 자신도 모르게 월마트에 의존하게 되는 발걸음 등 편리함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을 자급자족하려면 몇 년이 걸린다는 것이 가장 큰 변수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려고 들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친환경적 삶에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의 삶은 기대대로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것의 연속이었다. 도시에서는 적어도 물이 넘쳤다고 그 곳에 3미터가 넘는 방울뱀이 출현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도 불구하고 그의 농장이 부러우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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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날아온 맛있는 편지
정세영 글.그림.사진 / 이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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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 물질로 표현된 것 중에서 가장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요리'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마음이 담긴 요리를 먹으며 즐거워하고 먹은 후에 든든함을 느끼는 것은 다른 것과는 조금 다른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그 나라, 그 지방의 문화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도 요리다. 수탈당했으나 그래도 풍요로운 곡창 지대의 음식은 맛깔나는 것이고 수탈당할 것도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곳의 음식은 소박하다. 다른 지역 사람들 입장에서는 다소 덜 익은 것처럼 보이는 몽골의 요리에는 그 특유의 문화와 이유가 담겨 있으며 그 안에 담긴 마음에 한층 풍성한 것이 된다.

이 책 <스페인에서 날아온 맛있는 편지>는 그런 요리에 숨은 '마음'을 담아내려 노력한 책이다. 한동안 한적한 스페인 마을에 있다가 돌아왔으며 지금도 훌쩍 떠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저자의 에세이에는 요리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이야기를 끌어낸다. 한적하지만 따스한 스페인 마을의 정취에 잠기다보면 일러스트로 표현된 레시피가 점차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나 독특했던 점은 사진작가이자 스페인요리 전문가의 키친 에세이집인데도 정작 요리 사진은 실려 있지 않다.

전부 일러스트다. 그것이 독특해서 레시피인데도 그 순서를 좀 더 열심히 읽어보았다. 사진으로 보았다면 당장의 시각적 즐거움은 더 컸을지도 모르지만 일러스트로 보니 상상할 여지가 남아서 더 색달랐다. 자세히 표현된 과정은 요리 초보인 나조차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할 정도였다. 레시피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정확한 분량을 기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요리책에 나열된 재료의 분량을 볼 때마다 강박적인 느낌에 시달릴 때가 많다. 약간이라도 잘못 넣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분량이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넣는 재료 자체도 먹고 싶은 다른 야채를 추가해도 된다고 하는 등 담대한 면이 많았다. 요리 초보가 음식을 가장 많이 망치는 이유는 보통 맛을 보지 않기 때문인데 대략적인 설명으로 풀어내고 취향에 맞게 맞추라 하니 맛을 보면서 즐겁게 만들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너무 단순해서 죄송하다는 표현이 붙은 레시피도 있어서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읽어 나가다보니 당장 만들 일 없는 것인데도 만들어보고 싶고 일러스트로 표현되어 있는데도 상상을 통해서는 세상에 다시없을 진미가 되었다.

거기에 만드는 레시피마다 익을 동안 맛있는 음식이 나오도록 상상하라거나 더 쉽게 만드는 법이 추가 되어 있어서 음식에 마음을 반강제적으로 담게 하는 점이 좋았다. 레시피 뒤에 붙은 에세이는 디저트처럼 즐기면 되었는데 처음에는 가볍게 읽었지만 점차 반 정도는 저자의 경험을 부러워하면서 음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에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도 바가 가득하고 그 바에서 술 한 잔에 딸려 나오는 안주이야기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주인 마음대로 꺼내주는 인심 좋은 안주, 정처 없이 여행 다니는 다른 사람들과 친해졌던 이야기, 재봉틀을 미래에 받을 티셔츠 12장에 선물한 이야기까지 때로는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게다가 책을 감싸고 있는 케이스가 표지라는 점도 독특했다. 과감하게 접지를 못해서 읽을 때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 발상이 마음에 들었다. 다 읽고 혹은 읽지 않은 책을 사서 엽서처럼 친구한테 발송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정작 사진이 덤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른 것들이 마음에 들어서 사진작가인 저자에게 살짝 실례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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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추억
사이 몽고메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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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어쩐지 개가 정말 무서웠다. 일곱 살때, 그 때는 아직 사진관이 성행하던 시기라 사진을 뽑으러 사진관에 갔다. 정확하게는 엄마를 따라갔던 것인데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자 어린 아이인 나는 지루해졌고 그 자리에 가만히 쪼그려 앉았다. 여름이어서 짧아진 옷과 젖은 머리카락으로 밖을 나온 터라 바람에 옷과 머리카락이 살랑대는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무언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처음에는 엄마인가 했지만 무언가 '북슬북슬' 했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털이 복실거리는 개의 검은 눈동자가 정면에 있었다.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면서 사진관 밖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반쯤 어이 없어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고 개는 보이지 않았다. 타닥거리는 경쾌한 발소리가 있었을 뿐이다. 겁에 질려 옆을 보니 그 개가 내 옆을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다시 비명을 지르면서 엄마에게 돌아가자 엄마가 개를 쫓아냈다.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두어번 반복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개는 어린 아이인 나와 놀고 싶은 마음에 다가왔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하물며 개도 아니고 거대한 돼지를 사랑스럽다며 돌보는 여자의 이야기라니 놀라운 것 이상이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의 소통도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데 말이 잘 통하지도 않고 몇천년에 걸쳐 애완동물로 바꿔온 동물도 아닌 돼지, 그것도 삼백 킬로그램이 넘는 거대한 식용돼지가 사람과 소통한다니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사실 돼지는 영리하고 깨끗한 생물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소설 <동물농장>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지저분하거나 탐욕의 상징으로 나올 때가 많다. 최근 작게 개량한 애완돼지가 나왔어도 돼지가 애완동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해보지 않았다.

이 책 <돼지의 추억>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호그우드는 애완돼지라기보다 반려돈 쯤 될 것 같다. 동물학자 사이 몽고메리에게 우연히 오게 된 크리스는 무녀리였다. 엄마 돼지가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것은 보통 10마리, 그 마릿수를 넘어서 태어난 녀석은 살아남기도 힘들고 형제들의 생존까지 위협한다고 해서 보통 어미가 물어 죽인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한 마리의 돼지라도 더 살리는 것이 이익이 될 테니 농장주인은 어미가 물어 죽이기 전에 무녀리를 직접 키웠다. 그런데 유난히 약한 새끼였던 크리스는 따로 돌봤음에도 점점 약해졌고 동물학자인 사이 몽고메리에게까지 오게 된다.

이 시점에서 크리스는 어미나 농장 주인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후에 식용돼지의 목적에 맞게 도살되는 운명에서 피해간다. 동물학자 사이 몽고메리는 채식주의자였고 그녀의 남편 하워드는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새끼 고양이만한 작은 돼지를 받아들인 것은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지 먹기 위함이 아니었다. 유명 지휘자인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의 이름을 받은 크리스는 몽고메리의 집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그리고 점차 마을의 명물이 되어간다. 영리한 두뇌로 매번 우리를 탈출해 마을을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거대한 돼지이며 사람과의 소통을 즐기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작은 돼지를 기대했다가 삼백 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라는 것을 알고 경악하게 만든 크리스는 덩치보다 애교가 넘치는 편이었다. 사람과의 소통을 즐겼고 그 사람에 맞게 대화를 나눴다. 어린 소녀들과는 다정하게, 사이 몽고메리의 남편 하워드와는 힘차게 말이다. 또한 삶을 즐길 줄 알고 음식의 맛을 음미할 줄 아는 거대한 존재에게 많은 사람들이 기댄다. 거대한 크리스의 앞에서 자신의 슬픔을 토해내고 나면 그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의 출생, 삶, 죽음을 다룬다. 크리스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행복해서 큰 동물이 아직 무서운 나조차도 손을 내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일곱 살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 사진관에 들어온 개와 함께 놀아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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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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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방학과제로 식물을 키우는 것이 있었다. 토마토와 고추 묘목을 사서 키우기 시작했다. 과제로 내려는 것은 고추, 갔다가 충동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것은 토마토였다. 자라나는 모습도 고추 쪽이 더 예뻤다. 그런데 과제로 제출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학교에서 다시 가지고 돌아왔을 때는 다른 고추 묘목에서 옮겨 온 진딧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진딧물이 너무 많아서 이쑤시개로 하나씩 잡아서는 끝도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열린 빨간 고추만 물김치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토마토에는 진딧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고추를 더 좋아했던 이유가 모양도 있었지만 기묘한 냄새가 없다는 점에 있었다. 하지만 그 냄새 탓인지 토마토에는 진딧물이 옮겨가지 않았다. 소설 <비밀의 요리책>에도 토마토에 대한 언급이 있다. 토마토를 러브 애플이라고 불렀으며 악마의 식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건강식품의 상징이 된 토마토에 독이 있다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열매뿐만이 아니라 식물도 그랬다. 스칠까 두려워 접근도 안하는 보조 요리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새로운 것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법이지만 음식에 한해서는 그 보수성이 더하다고 이 책 <미식견문록>에서 말하고 있다. 유명한 통역가, 에세이스트, 다독가, 대식가인 저자 요네하라 마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제목만 보면 저자가 세계 진미 여행을 다녔던 것 같지만 그녀가 말하는 음식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맛이 없는 통조림부터 감자까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정감이 넘쳤다.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 일했던 요네하라 마리는 통역해야 하는 말에 '아브 오보'라는 말이 있자 알아듣지 못했다. 러시아어가 아니라 라틴어였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처음부터라는 뜻이지만 그 시작은 '레다의 알'이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것부터 '알에서 과일까지'라는 로마 연회에서 나온 것이라는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달걀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린 시절 아주 좋아했던 달걀을, 사 온 병아리 12마리가 전멸하면서 한동안 못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카스텔라를 맛있게 먹는 참에 엄마가 카스텔라에도 달걀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면서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지만 요네하라 마리는 카스텔라를 꼭꼭 씹어 삼켰다. 대식가에 음식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려고 노력하는 식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곰의 왼손, 사슴의 코를 먹어봤다고 하고 시베리아에서 메마른 입으로 샌드위치 2인분을 집어 삼키는 식성을 가진 냠냠공주의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웠다. 더구나 가족 역시 대식가 집안이라 음식에 대한 경쟁을 하기도 하고 유언이 음식을 추천하는 것이기도 했다고 하니 놀라운 것 이상이었다. 그 외에도 선악과가 실은 사과가 아니라 감자여서 굶주림에도 먹기를 거부했던 농민들의 이야기, 여행자의 아침식사라는 말에 무조건 웃음을 터뜨리는 러시아인의 이야기, 환상의 과자 할바를 추적하는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게 읽을거리가 많았다. 그나저나 할바가 먹고 싶은데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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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 극적이며 매혹적인 바로크의 선구자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 12
로돌포 파파 지음, 김효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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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뭉크는 오랫동안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화가로써의 명성을 누렸으며 장수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자신이 가진 불안을 모두 화폭에 쏟아 넣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건강하게 살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그림은 그의 심상을 드러낸 것이 되었다. 어지간한 포커페이스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우울한 날에 내내 웃고 있기 힘들다. 하물며 온 정신과 재능을 쏟아 부어야 하는 작품에 그 사람의 정신 상태가 반영되지 않기는 어렵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처음 본 감상도 그랬다.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면 분명 어느 틈에 있어도 두드러진 개성을 드러내며 다소 공격적 성향이 짙은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봤던 그림의 제목은 '성 토마의 불신'이었다. 예수님이 살아 돌아왔음을 믿지 못하고 창자국에 기어이 손가락을 찔러 넣는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의심하는 표정 정도가 아니라 상처를 기어이 헤집으며 확인하는 남자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성자를 거칠은 하층민처럼 그렸다는 설명까지 이어지자 호기심이 일었다.

당시로도 충격적인 그림을 과감하게 표현해낸 화가의 삶이 이색적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림으로 표현해낸 개성의 소유자라면 그 개성은 카라바조에게 걸림돌로 작용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 <카라바조>를 보면 그 예측은 대강 맞아 들어간다. 그는 화가로써의 재능으로 인해 대성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가 품은 폭력성으로 인해 몰락했다. 카라바조의 이름은 미켈란젤로로, 그를 극찬한 자는 같은 이름의 사람에게 비견될 만하다며 극찬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천재란 평가를 받는 걸 감안하면 후한 평가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카라바조의 재능이 거장의 그것임은 분명했다. 색의 사용에 있어서도 빛의 사용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그의 그림이 주는 극적 긴장감과 압도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카라바조의 강렬한 개성이 양날의 검이었던 것 같다. 명성이 드높아져 그의 그림을 사려는 자가 많았으나 동시에 그림이 거절당해 같은 내용을 다시 그려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보수적인 고객의 입장에서 그의 재능은 가치가 있었지만 그의 개성은 너무 강렬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하기야 그의 작품 중 폭력성이 처음으로 표출된 '유딧과 홀로테르네스' 같은 경우 부담스럽기는 하다. 게다가 카라바조는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열을 올릴 만한 사항들을 과감히 무시하고 지나가는 면이 있었다. 그의 일생과 작품을 함께 보면서 가장 당혹했던 것은 몰락이 살인으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부분이었다.

정치 싸움에 휘말려 살인을 하고 도피해 추방령이 내렸고 몰타 기사단에 입단해 사회 지위를 유지하나 했다. 그는 그 곳에서도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도망친다. 거장의 붓을 그가 품은 검이 부러뜨린 것이다. 많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생애 초기에서 극적인 말년에 이르기까지 강렬하게 살아간 카라바조의 삶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의 그림만큼 실제 인생도 강렬했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집에 걸어두고 싶은 종류의 그림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명화의 증거가 그 압도감이라면 카라바조의 그림은 그 가치가 충분하다. 또한 그런 그림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카라바조의 재능이 큰 몫을 차지하지만 그의 강렬한 인생이 반영된 탓도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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