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뭉크는 오랫동안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화가로써의 명성을 누렸으며 장수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자신이 가진 불안을 모두 화폭에 쏟아 넣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건강하게 살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그림은 그의 심상을 드러낸 것이 되었다. 어지간한 포커페이스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우울한 날에 내내 웃고 있기 힘들다. 하물며 온 정신과 재능을 쏟아 부어야 하는 작품에 그 사람의 정신 상태가 반영되지 않기는 어렵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처음 본 감상도 그랬다.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면 분명 어느 틈에 있어도 두드러진 개성을 드러내며 다소 공격적 성향이 짙은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봤던 그림의 제목은 '성 토마의 불신'이었다. 예수님이 살아 돌아왔음을 믿지 못하고 창자국에 기어이 손가락을 찔러 넣는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의심하는 표정 정도가 아니라 상처를 기어이 헤집으며 확인하는 남자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성자를 거칠은 하층민처럼 그렸다는 설명까지 이어지자 호기심이 일었다. 당시로도 충격적인 그림을 과감하게 표현해낸 화가의 삶이 이색적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림으로 표현해낸 개성의 소유자라면 그 개성은 카라바조에게 걸림돌로 작용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 <카라바조>를 보면 그 예측은 대강 맞아 들어간다. 그는 화가로써의 재능으로 인해 대성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가 품은 폭력성으로 인해 몰락했다. 카라바조의 이름은 미켈란젤로로, 그를 극찬한 자는 같은 이름의 사람에게 비견될 만하다며 극찬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천재란 평가를 받는 걸 감안하면 후한 평가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카라바조의 재능이 거장의 그것임은 분명했다. 색의 사용에 있어서도 빛의 사용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그의 그림이 주는 극적 긴장감과 압도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카라바조의 강렬한 개성이 양날의 검이었던 것 같다. 명성이 드높아져 그의 그림을 사려는 자가 많았으나 동시에 그림이 거절당해 같은 내용을 다시 그려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보수적인 고객의 입장에서 그의 재능은 가치가 있었지만 그의 개성은 너무 강렬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하기야 그의 작품 중 폭력성이 처음으로 표출된 '유딧과 홀로테르네스' 같은 경우 부담스럽기는 하다. 게다가 카라바조는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열을 올릴 만한 사항들을 과감히 무시하고 지나가는 면이 있었다. 그의 일생과 작품을 함께 보면서 가장 당혹했던 것은 몰락이 살인으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부분이었다. 정치 싸움에 휘말려 살인을 하고 도피해 추방령이 내렸고 몰타 기사단에 입단해 사회 지위를 유지하나 했다. 그는 그 곳에서도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도망친다. 거장의 붓을 그가 품은 검이 부러뜨린 것이다. 많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생애 초기에서 극적인 말년에 이르기까지 강렬하게 살아간 카라바조의 삶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의 그림만큼 실제 인생도 강렬했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집에 걸어두고 싶은 종류의 그림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명화의 증거가 그 압도감이라면 카라바조의 그림은 그 가치가 충분하다. 또한 그런 그림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카라바조의 재능이 큰 몫을 차지하지만 그의 강렬한 인생이 반영된 탓도 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