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잔인함의 극치를 달린다. 왠만한 공포영화에서 벌어지는 손잘리고, 팔잘리고, 이런 장면들 별로 꿈쩍 안하고 보는 나도 와 이 영화 정말 리얼하더라. 이렇게까지 잔인한 영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었나. 우리나라의 까다로운 심의는 어떻게 통과했지 싶을 정도로. '18세 이상 관람가'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임산부, 심약자, 노약자는 절대 봐서는 안되는 영화. 아무리 나 강심장이야 라고 자신해도 이 영화만큼은 봐서는 안된다. 밥먹다가 이 영화를 봤다면 정말 밥 못 먹을뻔 했다. 밥 다 먹고 봤으니 다행이지.

  Wax 는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고등학교 졸업 이후 단 한차례 토익시험을 치루기 위해 한달 공부한 것 빼고는 영어공부라고는 안한 나도 알고 있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왁스칠한다고 할 때 쓰는 재료가 되는 하얀 왁스, 또 하나는 밀랍인형. 이 영화에서의 의미는 밀랍인형이다. 하지만 밀랍인형을 만들기 위해 칠하는 것이 왁스라면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고 봐도 상관없지 싶다. 실제로 이 세트장의 마지막 녹아내리는 장면을 위해서 20여톤의 왁스가 쳐발라졌다고 하니 정말 '왁스로 만든 집'이다.

  풋볼 경기에 참가하려고 함께 떠난 6명의 남녀들은, 가는 길에 근처 숲속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로 한다. 공포영화의 첫째 조건 성립. 뭔가 길을 떠났는데 날이 어둑해져 야외에 머문다. 각자 텐트를 치고, 커플은 커플끼리, 안커플은 안커플끼리 들어가 텐트에서 재미난 시간을 보낸다. 안커플끼리는 뭐하느라 재밌는지 알 바 없고, 커플끼리는 안에서 둘만 하는 짓이야 뻔하지. 나란히 누워서 뽀뽀도 하고 키스도 하고 만지고 물고 빨고. -_- 너무 노골적으로 말했나.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의문의 트럭이 다가왔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떠나려는데 차가 고장났다. 마침 지나가는 마을주민이 있어 그에게 물어 주유소에 가면 있다는 정보를 얻어내고, 그들은 흩어지기로 한다. 둘은 부품을 가지러, 나머지는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에 사거리에서 만나기로. 공포영화의 두번째 조건 성립. 주인공들은 모두 흩어진다.  

  그런데 주유소 직원은 만났는데 뭔가 마을이 이상하다. 자기집에 들어와 부품을 가져가라는데, 집안에 온통 온갖 죽은 동물이 담긴 플라스틱 통과 의료기구, 밀랍인형으로 가득하다. 이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그렇다. 결국 일은 벌어지고, 들어간 놈 하나는 의료기구에 묶여 산채로 밀랍인형이 되었다. 나오기로 한 남자친구가 안나오니 불안해진 여자친구, 그리고 시간은 흘러흘러 약속시간이 되었고, 약속된 장소에 가보니 아무도 없다. 모든 일행들은 서서히 문제의 마을로 모이게 되고, 과연 살아남은 자는 몇이나 될꼬.

  정말 잔인한 것은, 대놓고 손가락을 자르고, 목을 자르는 장면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 뿐 아니라 살인자들에 의해서가 아닌 친구들에 의해서 산채로 밀랍인형이 된 녀석들의 피부가 벗겨지는 것이다. 살려준답시고 피부를 벗겨내려다가 턱이 떨어지고, 볼따구 사라지고, 뇌도  사라지고, 눈은 꿈뻑거리지, 눈물은 흐르지, 아 정말 이렇게 잔인할 수가. 거기에 있는 모든 이들이 산 채로 밀랍인형이 되었다는 것. 몸속엔 여전히 뇌와 심장과 간과 위와 모든 내장들이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1953년의 동일제목의 영화를 원작삼아 만든 <하우스 오브 왁스>는 공포영화의 상징  <13일의 금요일>을 따르고 있다. 야영지에서 젊은 남녀가 함께 노닐고,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퍼지고, 스르르 어둠이 밀려오며, 누군가 기습을 당한다. 연인들은 평소와 다름 없는 애정행각을 펼치고, 사랑을 나누는 동안 친구들은 하나 둘 희생되어간다. 뭐 이런거. 게다가 <13일의 금요일>과 더욱 유사한 것은, 은근 야하다는거. 그러나 <13일의 금요일>의 반도 못따라간 영화란 생각이다. '따라하기'를 해봤지만 재미도, 야함도 이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다만 더 잔인해졌을 뿐.

  어릴적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게다. 학원에서, 아니 유치원 때였나, 어쨌든, 선생님들이 애들을 모아놓고 한여름에 공포영화를 보여준답시고 <13일의 금요일>을 빌려와서 틀어줬다. 근데 18세 이상 관람가를 안보고 가지고 왔는지 그냥 무심코 틀었는데 보다보니깐 야한 장면들이 스르륵 스르륵. 어린 꼬마였지만 난 은근 아래도리가 움찔했다. -_- 아 정말 야했어. 다시 보고 싶네. 그때 보다가 야한 장면이 많이나와 선생님들이 끊었기 때문에 호기심에 보고팠지만 내 나이에 빌릴 수도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나중에 몇년 뒤에 집에서 혼자 봤던 기억이 있다. 

  <하우스 오브 왁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가슴 두근두근 거리게 만들고, 긴장도 최고치를 달리게 한다. 한번 그 잔인함을 맛보기 시작하면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찾는 잔인한 장면 못지 않은 짜릿함을 선사한다. 사람들의 폭력과 섹스에 대한 기대치가 점차 커지면서 영화도 이에 부응해 가는 듯 하다. 공포영화는 더 잔인하게, 액션영화는 더 스펙터클하고 빠르게 현란하게, 멜로영화는 좀 더 농도깊고 아슬하게. <하우스 오브 왁스>는 2005년 최악의 영화 중 한편으로 뽑히긴 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될만큼 재밌다(?). 잔인성과 은근한 유혹만으로도 충분히 영화를 본 관객들을 보상해줄 수 있는 영화. 한편 사람들의 폭력과 섹스에 대한 기대치는 점차 커지고 있으나, 포르노 영화의 경우 다 벗어서 보여줄 것이 없으니 사람들의 기대치를 어떻게 만족시키는가 하면, 일상에서는 금기시된 상황설정을 탄탄한 스토리를 짜 기존의 포르노에서 탈피해 일반 진한 멜로영화에 다가서려는 경향을 보이지 않나 생각한다. (나야 즐겨 보는게 아니니 잘 몰라)  



* 이쯤은 되어야 패리스 힐튼 답다고 하지.


  미국 골든래즈베리재단 주최하는 래지상은 미국에서 한 해 동안 제작된 작품중 최악의 영화와 최악의 배우를 선정하는 상으로 이 영화의 네 명의 남녀 주인공 중 한명이었던 '미국의 공주' 패리스 힐튼이 2005년 최악의 여주조연상을 수상했다. 값싼 과일인 ‘래즈베리’는 야유를 뜻한다지. 돈많은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 매일 파티를 벌이고 즐기며 문란한 생활을 한다는 거야 이제 큰 기사거리도 안되고, 그녀가 최근 가수 준비를 하고있다거나, 국내 무슨 CF에 출연할 예정이라는 거나, 영화배우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쯤이 기사거리가 되겠지. 영화 <하우스 오브 왁스>에 패리스 힐튼은 첫 데뷔를 했고, 최악의 여주조연상을 수상하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뤘다. 디비디로 제작된 <하우스 오브 왁스>에는 출연진들의 코멘터리가 있다고 하는데, 패리스  힐튼이 자신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며 다른 출연진들과 음담패설을 주고 받으며 깔깔거리는 대목이 있다고. 이래저래 참 재밌는 여자야.

  <하우스 오브 왁스>에서는 텐트속에서 섹시도발 모드로 흑인남자친구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오며 영화를 보는 남자들의 아랫도리를 자극하지를 않나. 완전 옷벗는 포즈하며, 안에 입은 속옷하며, 넌 그 자체가 섹시야. 참, 미국의 어느 햄버거 광고에서도 그녀가 정차된 차에 비누칠을 하며 세차를 하고 카메라를 향해 that's hot 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도 그렇게 야할 수가 없다고. 광고가 나가 뒤 4시간 동안 서버가 다운됐다고 한다. 말이 세차지 그녀의 온몸으로 차를 닦아주는거였다고. -_- 아 나도 찾아볼까. 이래저래 욕도 먹고 사건사고도 많이 터뜨리지만 변하지 않는건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이걸 즐기고 있다는 것.

  패리스 힐튼은 이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그야말로 조연급 연기자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에서 그녀가 화려한 조명과 플래쉬 아래에 있다는 것에 비해서는 그녀에게 너무나 소홀한 대접이 아닌가. 영화를 통해 패리스 힐튼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도 있지만, 생각만큼 카메라에 자주 머물지는 않으니 기대는 접고, 그녀를 보고 싶다면 인터넷에서 그녀의 노출에 관한 기사와 사진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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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1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리스힐튼이 아주 상징적으로 죽어주는 영화라고 하더군요...^^
타린티노의 "호스텔"에 비하면......^^

마늘빵 2007-01-1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이 영화에서 패리스힐튼은 안보여요. 저도 나중에 알았어요. 그녀가 패리스 힐튼이라는거. 하하. 그녀가 이렇게 묻힐 수도 있구나 싶더라고요. 남들은 일상에서 묻히는데. 타린티노의 <호스텔>에도 나왔나요? 그건 안봤는데.

Mephistopheles 2007-01-1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가 출연했다는게 아니라...영화의 잔인성에 비하자면 호스텔이 수위가
높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마늘빵 2007-01-1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렇군요. ^^ 보고싶네요.

비로그인 2007-01-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인함보다 무서움을 선호하는 저는, 가장 무서운 영화는 `블레어 위치', 무섭고도 재미있었던 영화는 `디 아더스'였어요. 특히 블레어 위치는 사람이 상상하는 만큼 무서운 영화인지라 개개인 모두가 자신의 상상력만큼 영화를 보게 되는 유동성을 선사한다고나 할까요.

2007-01-11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1-1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저도 잔인함보다는 무서움이 좋아요. 아 근데 저건 좋던데요. 아마도 잔인에 야함이 더해져서 그런건지도. 잔인만 있다면 볼 사람이 별로 없을거에요. 블레어 위치는 전 아직 못봤어요. ^^ 디 아더스는 봤지만. 공포영화는 머니머니해도 님말씀대로 관객 각자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게 최고죠.
속삭이신님 / 그런가요? -_- 영화가 야해서.

mind0735 2007-02-03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재미있었어요. 원작도 보고 싶어서 찾았는데.. 결국 못 봤군요. 저 강심장인데, 요 영화 쬐끔 무서웠어요. ^^;; 그런데 미국 호러는 야한 장면 나온 후에는 꼭 죽더군요.

마늘빵 2007-02-0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영화 저도 좀 무서웠어요. -_- 잔인해. 근데 전기톱살인이나 나는 네가 ... 시리즈식의 잔인함과는 또 다르더군요. 야한장면과 호러가 결합된 최고의 영화는 머니머니해도 <13일의 금요일>이죠. 또 보고 싶네.
 



  2002년 개봉한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후속편이라고 볼 수 있는 <본 슈프리머시>는 전편과 스토리가 연이어 진행된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달라진 점은 없는 듯 하다. 하지만 굳이 전편인 <본 아이덴티티>를 보지 않아도 <본 슈프리머시> 자체만으로 한편의 독립된 영화라고 봐도 좋다.

  <본 아이덴티티>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지중해 한 가운데서 어부들에 의해 구출된 한 남자, 자신이 누구인지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른다. 도대체 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고, 나는 누구란 말인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자, 자신을 찾아가는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는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되물어진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제이슨 본은 의문의 사람들로부터 쫓기게 된다. 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몽으로 시달리고, 낮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로 시달린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기도 전에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으니 일단 튀는 수 밖에 없다. 나를 쫓는 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선 일단 나를 쫓는 이들로부터 단서를 찾아내 그 이유를 밝혀내야 한다. 퍼즐의 조각들이 하나 둘 꿰어맞춰지다보면 결국 내 원래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본 아이덴티티>와 <본 슈프리머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지만, 그것은 그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만큼의 심각한 철학적 물음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저 단지 화려한 액션영화에 적절한 음모설를 배경삼아 스토리를 풀어가기 위한 질문일 뿐이다. 뭔가 있어보이려고 한 거 같은데, 별 거 없다.



  1970년생인 멧 데이먼은 전편인 <본 아이덴티티>에 출연한 뒤 속편에는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채 2년도 못가 속편계획이 잡히자 곧바로 제인슨 본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통해 건질 것이 있다면 영화의 스토리와 액션신이 아닌, 멧 데이먼 연기와 액션신이다. 그는 그다지 잘 생긴 것 같지 않은 얼굴로 - 영화배우는 잘 생겼다는 편견을 버려! - 헐리우드에서 꽤나 성공한 배우 중 하나이다. 전적도 화려한지라 하버드대 영문학과를 중퇴하고 - 미국도 최고학벌이 있으면 어쨌든 주목을 받나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군 하지만 서울대 간판을 가진 김태희와 달리 무명생활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학벌에 대한 의식 차이는 있다고 볼수도 있고 - 연기를 위해 무명생활을 시작했다. 어릴적 부터 어머니 친구의 아들이었던 영화배우 벤 애플렉과 아는 사이였고, 두 사람 모두 연기에 뛰어들면서 무명생활 속에서 함께 영화 <굿 윌 헌팅>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그리고 자신들의 시나리오대로 두 사람이 연기를 했고, 그들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의 인생살이야 말하지 않아도 뻔히 보이지.

  굿 윌 헌팅, 레인메이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리플리, 파인딩 포레스트, 오션스 일레븐,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오션스 트웰브, 그림형제, 시리아나, 디파티드 등의 흥행이든 작품성이든 꽤 성공적인 영화들에 얼굴을 드러냈고, 올해 오션스 썰틴 과 본 얼리메이텀에 출연 예정이다. 오션스 일레븐의 3편과 본 아이덴티티의 3편이라고 보면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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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1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1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1-1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저는 이 영화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나름 보다보면 자아와 기억 관련해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 저는 영화 개봉했을 때 봤어요.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865579

마늘빵 2007-01-11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첫번째님 / 음. 무섭진 않고 그냥 액션영화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듯. 그의 출연작 중, 내가 본 것 중에서, 레인메이커, 파인팅 포레스트, 시리아나 추천.
속삭이신 둘째님 / -_- 잘생겼다면 할 말 없고. 근데 그닥...
기인님 / ^^ 님이 써놓은게 있으시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전 영화가 추격,액션씬에 묻혀서 그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스토리를 풀기 위한 소재 정도로만 보였어요.

Mephistopheles 2007-01-1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리처드 챔버레인 이라는 배우가 출연한 TV판도 재미있었어요..^^

마늘빵 2007-01-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은 아는 것도 많으셔. ^^ 이 영화의 티비판도 있단 말이죠? 근데 전 영화가 썩 끌리진 않았기 때문에.
 



  1989년. 그때 나는 고작 열 살이었다.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촌스러운 포스터는 유치하기보다 되려 정겹다. 영화는 안봤어도 지금 애들도 '백투더퓨쳐2'라는 영화 제목은 다 안다. 나도 이 영화 오늘 처음 봤지만 워낙 유명한 영화였고, 애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던 '제목'이었기에 마치 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다. 나의 기억력이 어디까지를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부실한 기억력에 의존해 검색해본다면 이 영화 안봤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애들은 그렇게 놀았다. 입에 가래를 잔뜩 머금고 친구 얼굴을 향해 빽.투더.퓨쳐.투우우우. 투우 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 머물던 그 가래가 뿜어져나온다. 아 더러워. 나는 이런 놀이 별로 취미없었지만(정말이다) 내 친구들은 서로에게 침을 팍팍 튀기며 이러고 놀았다. 그 어떤 영화제목보다도 백투더퓨쳐투는 다섯 음절안에 가장 가래를 많이 끌어모을 수 있는 단어였다. 퉤퉤.

  더러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백투더퓨쳐투>는 타임머신에 의한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다. 전편에서 마티 맥플라이를 열연한 마이클 폭스는 2편에서는 마티 맥플라이와 그의 아들 마티 주너어 역까지 소화해낸다.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니 따로 분장을 하지 않아도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연기할 수 있다. 미래에 마티 주니어가 사고를 치고 감옥에 들어가고, 또 그의 딸도 사고를 치고 감옥에 가고, 연쇄작용으로 결국 마티 맥플라이의 집안이 아예 쑥대밭이 되어버린다는걸 알아버린 마티는 브라운 박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사고가 일어나는 그날로 뛰어넘어간다. 그러나 미래의 늙은 비프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몰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뒤바꿨으니 이를 어쩌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역사는 둘로 나뉘어졌다. 원래 존재했던 시간의 띠와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뒤바꿔버려 생겨난 같은 시간대의 또다른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마티와 브라운 박사는 물론 고쳐진 그날로 돌아가 다시 역사를 돌려놓는다.

  타임머신이 정말 발명돼 나의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리고 내 미래를 지금의 내가 원하는대로 바꿔놓을 수 있다면 어떨까. 만일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원하는 미래로 바꿔놓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화 속에서 비프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돌려놓았을 때 바뀐 것은 비프의 미래만이 아니요, 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단 한 사람의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의 '사소한 조작'으로 인해 10년, 20년 후의 미래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다. 겨우, 고작, 스포츠연감 하나를 건냈을 뿐인데. 그러니 이것이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조작해 미래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의 사소한 조작은 나의 미래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미래를 변화시킬 것이니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에 아무리 사소한 '조작'을 가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원하는 삶은 이뤄지지 않는다.

  어릴적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나의 부실한 기억력에 의존해볼 때 그런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 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판사가 되고 싶어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어요, 이런 장래희망은 정말 '아무나'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누구나' 한번쯤 꿈꿔본 미래가 아닌가. 타임머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어릴 때 한번쯤 생각 해본 그 공상을 다시 한번 해본다.

  타임머신이 정말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나만이 사용할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 음. 아마도 영화 속의 마티처럼 한 20년 뒤쯤의 나의 미래로 건너가 어떤 모습일지를 보고서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과거로 돌아와 고쳐놓겠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인연이 어긋났다면 이 또한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와 그녀와의 사랑이 지속될 수 있도록 고쳐놓을 것이고, 지금의 내가 과거를 돌아봤을 때 후회되는, 아쉬운, 고치고 싶은, 나의 과거를 돌려볼 수 있겠지. 학창시절 들입다 공부만 해단 사람들은 날라리처럼 놀아보고도 싶을 것이고, 거꾸로 학창시절 맨날 먹고 자고 싸고 자고 사고치고 먹고 자고 싸고 자고 사고치고 했던 사람들은 아 그때 좀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하고 후회하며 모범생인 자신을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 그치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상. '정말 타임머신이 있다면'하고 공상하는 시간에,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 기술을 발명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편이 좀 더 현실적일터다.

   시간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고, 시간의 띠는 여전히 지속되어 나아가고 있다. 타임머신을 통해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사소한 변화를 줌으로써 미래를 바꿀 수가 있다면, 지금 내 모습에 변화를 줌으로써 나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 없다해도 2007년 1월 10일 오후 열시 이십오분의 나는 나에게 사소한 변화를 줄 수 있으니까. 지금 나에게 가하는 변화가 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너무나 도덕교과서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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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1-1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작 3살이였죠...^^; 백투더 퓨처... 어릴때 정말 재미있게 봤었던 것 같은데... 지금 봐도 재미있더군요.

2007-01-11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1-11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 하핫. 뭐 저랑 별로 차이 안나시는군요! (정말?) 지금보면 유치하지만 당시엔 굉장히 뛰어난 영상을 선보인 영화였어요. 아이디어도 그렇고. 전 당시엔 1편만 보고 2,3편은 못본거 같은데.
속삭이신님 / ㅎㅎㅎ 맞아. 겁쟁이라고 하면 일이 꼬여요. 화나서. 3편 예고까지 봤는데 서부로 가서 박사님 만나고 또 거기서 한바탕 총싸움하던데.
 



  엄정화와 다니엘 혜니라는 꽤 어울릴법한 한쌍.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녀와 그의 이미지는 알거 다 아는, 그리고 좀 밝히는 그녀와 자상하고 잘생긴, 하지만 순수하고 순진할 것만 같은 그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들은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출한다. 그러나 어색하지 않다. 알거 다 알기는 개뿔 연애는 고사하고 데이트 신청하면 퇴짜맞는 노쳐녀와 순수한 척 순진한 척 하지만 연애에 있어서 별로 고민하지 않아도 알아서 작업들어오는 돈많고 잘생긴 남자의 대결.

  <미스터 로빈 꼬시기>는 <키아누리브스 꼬시기>를 원작으로 삼고 있으나, 원작의 내용과는 별개로 소재만을 가져온 채 새롭게 각색한 영화라고 한다. (원작을 안봤으니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같은지는 몰라) 로맨틱 코미디에 속하고 대개의 로맨틱 코미디의 유치한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는 뻔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만 재밌고 유쾌하기에 용서가 되는 영화다.

 

* 엄정화는 저렇게 짧은 단발머리했을 때가 이쁘다. 귀엽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해주는 여자.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니라, 그런데 이상하다. 자꾸만 진다. 3전 전패. 직업은 M&A 애널리스트. 목표는 저 남자 내 남자 만들기. 그녀는 외관상 잘 꾸미고 매력적이고 일 잘하는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사랑'을 만나면 풍덩 빠져버리는 연애초보자. <결혼은 미친짓이다> <싱글즈>는 잊어! 기존의 엄정화의 이미지가 너무나 그와 같은 쪽으로 머리 속에 남기있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순진함이 의심스럽다. 그래서 그런가. 연애 초보자로서의 말과 행동들이 내숭같아 보인다.

  외국계 M&A 회사의 젊은 CEO이자 그를 본 모든 여자들이 그를  내 남자 삼고 싶어하는 자타공인 퍼펙트 가이. 얼굴 잘 생겨, 돈 많다, 사회적 지위 높아, 몸도 좋아, 매너도 있고, 뭐 하나 빠지는게 없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는 모든 여자들은 맛만 보고 그를 가질 순 없다. 그에게 사랑은 곧 게임일지니. 사랑은 게임이고 도박이니 지는 게임엔 배팅하지 않으며 무조건 이기는 게임만 한다. 그리고 꼭 내가 이긴다. 어느 여자가 그를 이길 수 있으랴. 그러나 이런 완벽남에게도 구멍은 있다.



* 아 이거 너무 좋잖아. 야심한 시각 적당히 어두우 조명하며, 약간(?) 야한 빠알간 원피스에, 확 껴안것도 아니고 살며시 감싸쥔 남자의 손하며, 당황하지만 분위기상 왠지 뽀뽀해야할 것만 같은 이런 장면. 좋다.




* 좋은 장면 하나 더. 다가설 듯 다가설 듯 하지만 끝까지 다가서지 않지만, 이미 니들은 침대에 있는걸.

  원작 소설로부터 소재만 따왔건 전부 다 따왔건 그걸 떠나서, 이 영화는 마치 만화를 보는 듯 하다. 일단 캐릭터 설정과 영화 줄거리와 아름답지만 유치한 뻔한 결말들 하며 모든 것이 안봐도 뻔히 보이는 로맨틱 코미디 만화다. 원래 허술해보이고 덤벙거리는 여자에게는 잘생기고 능력있는 남자가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다. 그가 그동안 겪어온 이기는 게임의 상대녀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단 말. 게임은 다음 패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덤벙 어리버리녀는 행동패턴이 일정하지 않아 다음 패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게임이 안되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또다른 특징. 완벽남에게도 헛점은 있다. 대개는 현재의 완벽함이 과거의 어떤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나온 자기방어기재라거나 하는 그런 것들. 영화 속 로빈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으니 이런 아픈 과거는 민준의 동정심과 모성본능을 자극하여 더 사랑하게 만들고, 자신의 아픈 과거를 알아버린 그녀에게 로빈은 과거를 털어놓으며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뭐 이런거.

  <러브 액츄얼리>의 새로움과 <노팅힐>의 따뜻함을 조합해 아름다운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다는 김상우 감독의 말대로 이 영화를 대략 두 영화의 어느 중간쯤, 혹은 두 영화의 조합의 공식을 따르는 듯 하다. 만화같은 설정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감성을 자아내고, 또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보여지는 경쾌하고 단순한 사랑방식과는 다른 '진짜 사랑'(?)의 의미를 생각케 만든다. 

  영화가 여자들에게 주는 교훈. 하나. 오직 그를 위한 천사표가 되라. 둘. 남자의 본성, 보호본능을 자극하라. 셋. 다른거 다 필요엄써 섹시한게 최고야. 넷. 일단 마시고 보자. 벌컥벌컥. 아 취한다. 단, 뭐든 쉬운 것이 없다. 그리고 다소간의 위험성 감수.

  *
  이 영화의 관객은 대다수가 여자였다고. 남녀커플보다는 여여커플이 월등히 많았단다. 왜냐면 자기 남자친구나 남편과 왔다가 저 잘생기고 멋있는 다니엘 혜니를 보고 싸우면 어떡해. 아 멋있다. 멋있긴 뭐가 멋있어. 멋있잖아. 흥. 그래서 쟤가 좋다는거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

  다니엘 혜니가 시사회 무대에 나섰던 날. 내가 아는 어떤 여자는 무대앞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뻗고는 한동안 가만있었다고. 좋겠다 다니엘 혜니. 인기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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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7-01-0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의 원작은 <키아누 리브스 꼬시기>라는 로맨스 소설로 알고 있는데요..^^;;;


프레이야 2007-01-0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정말 원작으로 이런 책이? ...

LAYLA 2007-01-06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녀는 괴로워와 헷갈리신거 같네요 ^^

릴케 현상 2007-01-07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세월 다 갔네요^^

마태우스 2007-01-07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봐야지 하다가...흑... 제가 엄정화 연기 좋아하거든요. 요즘은 순간을 놓치면 보기가 힘들다니깐요...

마태우스 2007-01-0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평 해주시니 더더욱 안타깝다는...

마늘빵 2007-01-07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날개님 / 그거였어요? 어 그럼 만화를 소재로 한건 뭐지. 왜 그렇게 들었지. -_- 근거없는 소문에 따르기보다 '만화'를 '소설'로 바꿔야겠군요.
배혜경님 / 그러게 말이에요. ^^ 그런것두 있구나.
라일라님 / 아 미녀는 괴로워인가. -_- 아 정말.
산책님 / ^^ 머 그냥 볼 만 합니다. 좀 유치하지만.
마태우스님 / 엄정화 때문에 봤어요. 저도. 혜니는 얼굴과 몸만 있지 연기력은 아니잖아요. 여자들은 혜니의 몸과 얼굴을 보기 위해 본다지만.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 - 대화의 역사
스티븐 밀러 지음, 진성록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을 통해 주머니에 손넣고 구부정하게 단상에 서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한 억울함과 울분, 그리고 지금껏 하던대로 소신을 지켜나가겠다는 메세지를 전한 바 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이 장면과 기사가 나간 뒤 다음 날부터 국민을 상대로 발언하는 자세하며, 발언 내용의 거침과 발언의 강도 등을 문제삼는 비난의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항간에는 그가 예정되었던 연설 이외의 발언을 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만의 특유의 솔직함과 과단성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그를 두둔(?)하는 소리도 들렸으나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대통령으로서의 태도와 발언내용이 부적합하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의견이라 봐야겠다. 이전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를 시도했으나 '대화'는 '호소' 내지는 '변론'으로 바뀐 적이 있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대화에 미숙하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대화가 뭐길래.   

  대화란 무엇인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대화란 "말을 통한 정보, 아이디어 등의 비공식적인 교환 :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숙달" 이라 정의되어있고, 대화는 또 한 사회적 상호작용으로서, "다른 사람과 사귀거나 다른 사람을 다루는 행위"를 의미한다. 또한 "18세기에는 대화가 예술과 문학, 과학, 인간의 조건 등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半 공식적인 사교모임을 뜻하기도 했다."  대화는 영어로 conversation으로 talk 와는 구별된다. 새뮤얼 존슨이 언젠가 친구네 집에서 '아주 재미있는 일행'과 저녁식사를 했다고 하기에 저자는 훌륭한 'conversation'이 오갔느냐 했더니 그는 "전혀,  talk는 충분히 했지만 conversation 은 전혀 없었다." 고 대답했다. 이는 우리가 평소 누군가와 말을 할 때 말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그것이 대화가 아닌 단순한 토크의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화에는 지적인 아이디어의 교환이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화는 목적을 갖지 않는 반면, 토크는 목적을 갖는다. '지적인 아이디어의 교환'이라는 것은 목적이 아닌 말의 주고 받음에서 형성되는, 혹은 말의 오감에 포함되는 주제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는 목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애초 내가 무엇인가를 상대에게서 얻어내려거나, 발화행위를 통해 다른 실천행위를 이끌어내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은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 이지만 부제는 '대화의 역사'이다. 저자 스티븐 밀러는 대화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대화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 책은 그의 오랜 연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는 사람들의 두뇌작용을 활발하게 해주고, 사고의 범위와 깊이를 확장시켜준다. 사람들은 대화에 목말라있지만 사실상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때의 대화를 앞서 언급한 토크의 수준이 아니라 컨버세이션의 수준으로 봤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대화를 하며 살아갈까. 대개의 직장인들이라면 아침에 눈을 뜨고 화장실을  들렀다 밥을 먹고 부랴부랴 지각하지 않으려 버스나 지하철로 몸을 내던지고, 가까스로 직장에 도착해 맨먼저 컴퓨터를 켜고, 그날의 업무를 확인하고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다시 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고,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다시 또 처음부터. 이러한 생활 패턴 속에서 대화를 찾아 볼 수 있을까.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업무상의 회의를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화에 포함시켜선 안될 것 같다. 그것은 목적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밥먹고 학교가서 수업을 듣고 점심밥을 먹고 수업듣고 집에 돌아와 학원에 가서 또 수업듣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거나 티비를 보다가 잠이든다. 다시 또 맨처음부터 반복. 애들은 참 말을 많이 한다. 수업시간이고 쉬는시간이고 하루 종일 떠들어댄다. 말을 하다 지칠 법도 한데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점심시간 이전에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치는 것은 아침부터 내내 수다를 떨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생들이 말을 많이 하지만 대화는 없다. 동방신기의 믹키유천이 오늘 헤어스타일을 바꿨대, 시아준수랑 미키유천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나 어제 지나가다 연예인 봤다, 너 방학에 학원 어디 다닐거야, 기타 등등 이런 것들을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집에서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말을 주고받음도 마찬가지다. 엄마 나 학교에서 뭐 어쩌고저쩌고, 밥 줘, 아 왜 반찬이 어제랑 똑같아, 뭐 차려주면 고맙게 먹을 것이지,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말의 주고받음은 있을지 몰라도 이런 것을 대화라고 할 수는 없을 터다.

  스티븐 밀러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에서부터 현대의 에미넴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대화와 중세의 대화, 또 18,19세기 근대의 대화, 현대의 대화에 대해서. 대화가 서로에게 권장되었고, 찬양받았던 시대가 있는가 하면, 대화는 그저 시간 있는 돈 많은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것으로 취급받았던 시대도 있다. 또 엄밀히 어떤 시대가 그렇다고 단정짓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마다 각기 대화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관점의 차이도 존재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틀어서 영국 철학자 마이클 오크숏과 데이비드 흄, 그리고 새뮤얼 존슨을 자주 출연시키며 대화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엿보고 있다. 책을 읽을 때 미리 이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이 출연할때마다 주의깊게 봤겠지만,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기 때문에 이들이 이 책에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이미 중반쯤 지났을 때였다. 책을 읽다 좀 더 눈치빠른 독자들은 초반에 알아챌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데 좀더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와 중세, 근대의 이야기는 사실 조금 따분한 면이 없지 않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와는 많이 떨어진 옛날 이야기이고, 그 시대의 생활습관이나 풍토 등 문화전반에 관한 기본적 이해가 없다면 글이 재밌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와 앞장에서 지식이 풍부하고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학자들을 출연시킨 것과는 달리 에미넴이라는 저속하고 사건만 일으키는 문제아 래퍼를 등장시킴으로서 파격적 캐스팅을 감행한다. 지금껏 저자는 소로, 루소, 흄, 오크숏, 존슨, 홉스, 푸코 등의 철학자들을 출연시키며 그들을 대화 찬양자와 반대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오크숏, 존슨, 흄의 경우에는 대화 찬양자에, 루소는 대화반대자에, 소로의 경우는 어느 곳에도 관여하지 않는 자로 나오지만 반대자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양분구도는 위험하지만 대화의 역사에 있어 그들의 찬성과 반대의 시각은 딱딱한 이 책에 한층 재미를 부여한다.

  에미넴의 경우는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반체제인사에 속하게 되고, 대화의 적으로 분류된다. 그는 랩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fuck 을 연발하고, 사람들을 조롱하며 웃음거리로 만들고, 대놓고 욕을 한다. 사람들이 에미넴을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로 보든 아니면 소름끼치게 하는 존재로 여기든, 랩은 대화에 적대적인 표현의 형태이다. "래퍼들은 대화의 유일한 길이 가급적이면 외설적인 언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감정을 발산하는 것이라고 암시한다. 모든 래퍼들이 다 화난 래퍼들은 아니다. 그러나 랩 뮤직은 주로 화를 표현하는 음악이다. 노래 가사에 저소간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래퍼 스누피 독은 "그것은 자기 표현이다. 탈툴에 필요한 모든 감정을 온전히 드러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래퍼들이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랩뮤직의 성장은 대화의 환경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래퍼들은 자신의 명예를 중시하고, 모욕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대체로 타인을 불신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러한 기본적 태도는 사교성을 훼손하게 된다. 대화의 기본은 사교성이다. 두 사람 이상이 마주 앉아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거리낌없이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형성된다. 랩은 그런 면에서 비사교적이며 대화의 적이라 말 할 수 있다. 저자 스티븐 밀러가 에미넴을 여기에 끌어들인 것은 그가 랩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현대에는 대화 대용품과 대화 회피 장비들이 널려있다고 말하며, 이것들이 진정한 대화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현대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로 규정했음을 알 수 있다. 대화 대용품이란 것은 티비 토크쇼를 지칭한다. 우리는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주고 받기 보다는 토크쇼의 출연자들의 시시껄렁한 말의 주고받음을 통해 자신의 대화 욕구를 해소하고, 그것으로 대화의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토크쇼'는 '토크쇼'라는 단어에서도 볼 수 있듯, 단순한 농담따먹기에 지나지 않는 토크에 불과한 한 시간의 수다이다. 대화 회피 장비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핸드폰, 티비, 비디오, 플레이스테이션, PMP, 아이팟 엠피쓰리 등이 이에 포함된다. 많은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며, 사실상 가족들과 떨어져있는 시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잠깐의 집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보다 방구석에 들어가 영화를 보거나, 핸드폰 문자로 친구와 대화(?)를 주고 받거나, 컴퓨터 인터넷의 세계에서 돌아다니다가 잠이 든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각자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PMP를 통해 영화나 티비 프로그램을 본다. 그 어느 곳에서도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화의 이루어짐을 바라는 것은 그저 희망에 불과하며, 우리는 최소한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조차 떠나있다고 봐야한다. 대화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동등한 위치에서 아이디어를 주고 받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그 이전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전제되어있다. 현대 사회는 이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조차도 스티븐 밀러가 말하는 대화 회피 장비에 빠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대화의 적이다.

  그러나 한편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대화 회피 장비를 즐기고 말의 횟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난 여전히 타인에 대해 관심이 있고, 타인과 대화(아이디어의  교환)를 주고받는 것이 즐겁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를 통해 나를 돌아본다. 인터넷 또한 어쩌면 대화의 회피장비라기보다는 대화의 다른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공간에서 글을 쓰고 또 다른 이들의 글을 보고, 댓글의 주고받음을 대화라고 본다면 잘못일까. 이를 대화 대용품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티비 토크쇼나 오락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의 말의 주고받음으로 대리만족하는 그것과는 엄밀히 다르지 않나 생각해본다. 나는 대화 회피 장비를 즐기지만 대화의 적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

 출판사 부글에서 제목 하나는 기가막히게 지었다. 원제는 이것이 아니고, Conversation: A History of A Declining Art  인데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라는 제목은 순전히 출판사 혹은 번역자의 생각이다. 자칫 직역하여 '대화의 역사'라고 찍혔다면, 아마도 이 책은 관심도 받지 못하고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제목이 원제대로 나왔을 때에도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고 구입했을지는 나도 의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라는 제목은 대화의 역사를 암시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소크라테스와 친숙한 에미넴을 등장시킴으로써 다양한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

 책 맨 뒤에 씌여진 이미 저자보다 앞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알랭 드 보통과 알베르토 망구엘의 짧은 서평은 또다른 재미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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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06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블로깅은 일종의 '대화'의 수단입니다.
저는 데이빗 흄의 팬이랍니다.
드문 창조적 철학자입니다.
그가 말하는 '윤리학의 토대'를 저는 존중합니다.

그의 세권의 저작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는 읽기가 아까워
서가 깊은 곳에 쟁여두고 있지요.

멋진 리뷰입니다. 추천!!

마늘빵 2007-01-06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흄을 대단히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흄에 대해서는 개론적인 부분 밖에 모릅니다. 보관함에 그의 저작 세 권이 다 들어있지만, 그 중 두 권은 절판인 것 같더군요. 흄의팬이시라면 이 책 좋아하실 겁니다. 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흄이 대화찬양자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언급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