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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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우리에게 올바로 살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삶을 즐기라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실은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진짜 행복을 좇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의 별명은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였다. -11쪽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반대로 1년 내내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도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품위를 잃을 행동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59쪽

운동이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운동이 갖는 숙명적인 모순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사회체제와 그 사고방식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운동의 외형적 성장, 즉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조직이 커지는 것을 운동의 성장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런 외형적 성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운동의 껍데기는 커졌지만 정작 운동의 알맹이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비대한 운동 조직이 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운동 조직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61-62쪽

평화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무작정하게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가 아니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느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66쪽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69쪽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싸우고 헌신하는 사람이 싸우고 헌신하는 그만큼 세상이 변화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시시각각 보람과 기쁨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세상은 늘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며 또 포기하곤 한다. 지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면 이미 그 문턱에 다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걸 염두에 두고 예수는 말한다. 씨를 뿌린 사람도 못 알아차리는 사이에 어느새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낟알이 맺힌다고. -78-79쪽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대다수의 인민들이 자신의 삶이나 계급적 처지에 걸맞은 정당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당장 뒤집히고 말 것이다. 그래서 지배체제는 언제나 제 가치관과 세계관을 인민들에게 주입한다. 그런 주입에도 역사의 어느 한순간에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도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빼면 인민들은 거의 언제나 지배체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편에 서는 사람들에게 종종, 아니 기본적으로 적대적이다. 20세기에 횡행한 ‘레드 콤플렉스’를 가까운 예로 들 수 있다. -97쪽

무소유는 영적 자유를 위한 것이다. 물질의 부와 영혼의 부는 한 사람에게 동거할 수 없다. 물질적으로 가진 게 많을수록 영적 자유는 적어진다. -98쪽

사람들의 의식은 견고한 껍데기를 쓰고 있고 그 껍데기를 벗으려면 금이 가고 깨트려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껍데기를 벗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마음의 귀를 닫아 놓은 사람에게 매달려 내내 시간만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성실한 활동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가깝다. -103쪽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나눔은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이며, 하느님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고루 나누어 쓰라고 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모두 함께 풍요롭고 만족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110쪽

사람은 어떤 불의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체제에서 살아갈 때 그 체제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 한 자기도 모르게 그 체제에 감염된다. 권위주의 체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아이와 여자와 하급자에게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오늘과 같은 극단적인 자본의 체제에 사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돈과 물질적인 가치를 인생의 중심에 놓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 사회체제에 얼마간 불만이 있거나 비판적인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 사회체제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 사랑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 체제의 일부인 것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체제나 자본의 체제와 싸울 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설사 그 싸움이 승리를 거둔다 해도 결국 내 안에 숨어 있는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의 체제가 되살아나기 때문에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대개의 혁명이 그렇다. 세상을 바꾸려면 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 안의 적과도 싸워야 한다. -121-122쪽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유별나고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당연한 공평함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156쪽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181쪽

지나친 이상주의는 현실적 조응력을 잃고 소수 지식인들의 관념놀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꿈꾸길 중단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짐나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186-187쪽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189쪽

나와 내 식구가 충분히 먹고살면서 여력이 되는 대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끝없이 더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에게 비추어 선량한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돈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 역시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203쪽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예수는 결코 안온한 예배당이나 연구실에서 비폭력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20세기 비폭력주의 운동의 대명사’라 일컬어지지만 일각에서는 인도 ‘민족’에 집착하여 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훼방한 사람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간디조차 ‘무기력하고 비굴한 비폭력보다는 차라리 정당한 폭력이 낫다’고 말했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투쟁 방법을 넘어서는 투쟁 방법이지 폭력적인 투쟁 방법에도 못 미치는, 투쟁의 정당성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유약한 인텔리들의 요사스러운 말장난이 아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들이 결국 폭력에 희생당하는 운명을 갖는 건, 지배체제가 그들에게서 무장투쟁을 선택한 운동가들보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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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09-05-26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과 비폭력으로 정하는 것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혹 답변 가능할까요?

마늘빵 2009-05-26 11:55   좋아요 0 | URL
김규항의 책에 관해서라면, 저보다는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질문을 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머리가 하얘졌다. 하루 종일 그냥 멍하니 있었다. 멍하니 티비보고, 멍하니 인터넷 기사들 클릭하고, 멍하니 밥을 먹었다. 딱히 한 게 없이 정신이 멍했다. 어느 순간 피로감이 몰려왔고, 오랫동안 잤다. 대선 때 그를 지지했다. 비판은 하면서도 등돌린 적은 없었다. 더 잘하라는 비판이었다. 이라크 파병과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못마땅했지만, 권위주의가 많이 사라지고, 지금처럼 대통령을 욕해도 문제없는 - 다시 문제가 되고 있지만 - 풍토를 만든 것 등은 그 덕분이라 생각한다. 잘못한 점도 많지만 역대 대통령 중에선 그래도 가장 나았다.  

  그 누구도 죽음을 예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퇴임 후 마을 이웃들과 인사하고, 손녀 자전거 태우며 지내는 시골 할아버지로 돌아간 모습도, 어느 전직 대통령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어느 순간부터 가끔씩 현 정부에 대한 발언을 하면서, 더더욱 미움을 샀던 것 같다. 검찰 조사가 시작되고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 밝혀지면서 굉장한 부담감을 느꼈던 것 같다. 전직 대통령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 금액이지만 도덕성을 높이 내세웠던 그에게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인터넷에 오르는 유서 내용엔 돈 문제에 대해서 빠져있는데, 어느 기사엔 "돈 문제는 깨끗하다"고 나와 있다.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자살은 충격이다.  

  하루 종일 멍하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참 모질게 살아야겠다. 참 이기적이고 못되게 살아야겠다. 그런 놈들은 대놓고 돈 모으고, 비리를 저질러도 괜찮고, 끝까지 살아남는데, 크지 않은 부정에도 괴로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다. 작은 부정이나 비리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에 관해선 깔끔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본인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직 죽음으로서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두환, 노태우 이런 녀석들은 십원 한 장 없다면서 참 잘먹고 잘살더라. 왜 좀더 당당하게 맞서지 못해 죽음까지 이르러야 했나. 아닌 것에 대해선 아니라고, 잘못한 것에 대해선 잘못했다고 말하면 될 것을,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도덕과 정의에 민감한 사람들은 참 마음이 약하다. 작은 잘못에도 스스로 괴로워하고 마음 아파한다. 그런데, 낯짝이 두껍고 이기적인 녀석들, 도덕과 정의는 돈주고 팔아먹은 녀석들은, 어떤 역경에도 당당히 살아남는다. 얼굴 빳빳이 들고. 전두환과 노태우와 이명박을 보면 알 수 있다.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그 화살은 이미 개가 된 검찰에게로. 그리고 이명박에게로 향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는 온전히 남은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할 것 같다. 덕수궁에 분향소가 차려졌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렸다. 그런데 그 주위를 경찰버스가 둘러쌌다. 원천봉쇄. 작년 촛불 집회 이후로 모든 집회에는 이런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분노해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더 분노케 만든다. 집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다. 누가 청와대로 쳐들어간다고 했나. 분향소에 가서 꽃 한 송이 놓고 오겠다고, 절 한 번 하고 오겠다고 나간 시민들을 이렇게 대한다. 국민이 없는 국가를 혼자서 통치하고 있다. 심판의 날이 멀지 않았다.     

  세상이 참 못됐다. 악랄한 녀석들만 살아남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내 뱃속 가득 채우고 등따습고 배부르게 살기 위해선, 마음 모질게 먹고 악랄해져야 하는데,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 도덕이나 정의를 내세워 욕먹으나 온갖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며 잇속 챙겨 욕 먹으나 마찬가지인데, 똑같이 욕을 먹을거라면 차라리 전자로 욕을 먹으며 살고 싶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 사람들을 위해 발언하고,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편으로 그러지 못했으나 한편으론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참 괜찮은 사람을 잃었다. 기대했던 바가 너무 많아 잘한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너무 모질게 몰아세우기만 했다. 참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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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노빠다..
    from 공감지수만땅 2009-05-24 07:50 
    나는 노빠다.  16대 대선, 노사모 가입, 노무현 당선... 펄펄뛰며 세상이 바뀔꺼라고 좋아하다.  나는 노빠가 아니다.  노사모에 가입하고, 선거에 한표를 행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므로...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통령 노무현을 수시로 의심했다. 그의 정치적 능력을, 리더쉽을, 그리고 끝내는 그의 인간성까지도..........  그에게 고통을 주고
 
 
마노아 2009-05-24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픈데, 그래도 아프님 글은 참 따뜻하네요. 아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어요...

마늘빵 2009-05-24 01:38   좋아요 0 | URL
하는 일 없이 계속 인터넷 기사만 클릭하고 있네요. 뭔가 해야할 거 같고 답답하네요. 이 새벽에도 덕수궁엔 사람들이 있겠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죠?

sweetrain 2009-05-24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종일 머리가 멍했습니다.
점점 이 세상에 대해서 환멸을 가지게 되지만...
환멸에 지지 않고, 좋은 세상이 올때까지 악착같이 버티려구요.

마늘빵 2009-05-24 09:40   좋아요 0 | URL
버텨야죠. 끝까지 버텨내야죠.

Kir 2009-05-24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기본적으로 악하고 추한 존재인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 먹먹함과 분노, 죄스러움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마늘빵 2009-05-24 09:42   좋아요 0 | URL
세상이 더 악하고 추하게 되라고 권장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제 자신을 붙들어 매야죠... 참 미안하네요.

비의딸 2009-05-24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노므 냄비근성...... 한때는 그분을 사랑했고, 또 한때는내 믿음에 대한 배신자로 저주했으며, 이제는 그분을 그리워하는 나의 냄비근성을 늘 한결같았던 그분이 용서하시길 바래봅니다.

마늘빵 2009-05-24 09:43   좋아요 0 | URL
아마 대선 때 그에게 표를 던졌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hnine 2009-05-24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랄한 녀석들만 살아남는다'라고 하신 말씀, 저도 어제 그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약한 사람이 먼저 희생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고.
그러면서도, 과연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이 세상 살기가 더 힘들어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쉽게 인정할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마음 독하게 독하게 먹고 살아야겠다고, 또는 그렇게 살으라고 해야하는 것일까...아무튼 생각이 복잡한 하루였습니다.

마늘빵 2009-05-24 09:45   좋아요 0 | URL
네, 뻔뻔하고 이기적인 녀석들은 그들을 향한 비판을 그냥 무시합니다. 누구처럼. 귀닫고 안들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다 마음에 담아둡니다. 마음 독하게 먹어야죠.

비로그인 2009-05-24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프고, 가슴이 먹먹한 것은 처음입니다. 공인의 죽음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처음, 이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글과 음성을 접할 수 없다는 마음에 슬픈 것도 처음. 모든 것이 처음인데 너무 슬퍼 마음이 계속 웁니다.

마늘빵 2009-05-24 09:47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러네요. 조만간 덕수궁에 나가 국화꽃 한 송이 놓고 와야겠습니다.

2009-05-24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4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5-2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늘빵 2009-05-24 22:37   좋아요 0 | URL
하루 종일 일하고 이제 돌아왔네요. 덕수궁에 가보고 싶은데 내일은 시간이 날까 모르겠어요. 마음이 아프네요.

logos678 2009-05-2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삶의 기둥이었던 도덕성이 무너졌다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참기 어려웠겠죠. 사실 그런 건 조금만 뻔뻔하면 쉽게 무시할 수도 있었던 것들인데... 사실 무시하고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은데...조기 게양하고 며칠째 침통해 있어요. 해마다 5월이 되면 우울할 것 같네요.

마늘빵 2009-05-25 16:58   좋아요 0 | URL
집 앞 건물에도 어제 조기가 게양되어 있더라고요. 출근 길에 보니 아파트 군데군데 꽤 보였어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3
최세희.전성원.손동수 지음 / 낮은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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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는 기형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들은 내가 처음으로 사진에 담은 대상 가운데 하나이며, 그들을 찍는 일은 몹시 흥분되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그들을 존중했고, 아직도 그들 가운데 몇몇을 좋아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랄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나에게 부끄러움도 경외심도 함께 준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수수께끼의 답을 요구하는 신화 속의 인물처럼 그들에게는 특징적인 전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적 외상을 입을까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기형인들은 애초부터 이런 외상을 지닌 채 태어났다. 그들은 이미 인생의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삶을 초월한 고귀한 사람들이다."(다이앤 아버스)-113-114쪽

"내 예술이 목적을 가졌다는 데 동의한다. 나는 인간이 이토록 어쩔 줄 모르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케테 콜비츠)-213쪽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제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요즈음은 무척 우울하다. 나는 다시 한 번 똑같은 것을 팔고 있다. 망아지처럼 바깥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베를린의 소년들을 한 여인이 저지한다. 이 늙은 여인은 자신의 외투 속에 소년들을 숨기고서 그 위로 팔을 힘 있게 뻗치고 있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전쟁은 이제 그만!>에서처럼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케테 콜비츠)-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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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이트도 많이 해봐야겠어용ㅋ

마늘빵 2009-05-19 09:41   좋아요 0 | URL
네, '그냥 데이트'도 많이 해보세요. ^^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
기타노 다케시 지음, 김영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4월
절판


생각해보면 행복이란 건 정말 짧고, 나머지는 대부분 불행하다고 해도 좋다. 결국 불행이라는 건 그 순간순간에 느끼는 거다. 그래서 괴로운 법이다. 반면 행복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다. 행복이란 회상하는 것이라서, 그 당시에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은 "저 녀석, 요즘 행복해 보여"와 같이 타인이 말할 뿐, 당사자는 전혀 깨닫지 못한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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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이제이북스 / 2006년 11월
구판절판


모든 기예와 탐구,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 왔다. -13쪽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14쪽

대중들과 교양 있는 사람들 모두 그것(최상의 좋음)을 '행복(eudaimonia)'이라고 말하고, ‘잘 사는 것’과 ‘잘 행위하는 것’을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17쪽

교양 있는 사람이나 실천적인 사람은 명예를 선택한다. 대개 이것이 정치적 삶의 목적이니까. 그렇지만 명예는 우리가 추구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인 것 같다. 명예는 명예를 받는 사람보다 수여하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좋음은 고유한 어떤 것으로 쉽게 우리에게서 떼어 낼 수 없는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이다. 어쨌든 그들은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또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또 그들의 탁월성을 근거로 명예를 얻고자 한다. 따라서 적어도 이들에게는 탁월성이 명예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20쪽

좋음은 신과 지성이 좋다고 이야기될 때처럼 무엇임에서 좋다고 이야기되기도 하고, 탁월성이 좋다고 이야기될 때처럼 성질에 있어서 이야기되기도 하며, 적당량이 좋다고 할 때처럼 양에 있어서, 무엇에 대해 유용하다고 할 때처럼 관계에 있어서, 적시를 이야기할 때처럼 시간에 있어서, 적절한 거처를 이야기할 때처럼 장소에 있어서, 그리고 그 밖에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 때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좋음이 어떤 공통적이며 단일한 보편자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22-23쪽

우리는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 다른 것 때문에 추구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는 않는 것이 그 자체로도 선택되고 그것[다른 것] 때문에도 선택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것을 단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행복이 이렇게 단적으로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27쪽

품성 상태들은 [그 품성상태들과] 유사한 활동들로부터 생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활동들이 어떤 성질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 활동들의 차이에 따라 품성 상태들의 차이가 귀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죽 이렇게 습관을 들였는지, 혹은 저렇게 습관을 들였는지는 결코 사소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큰 차이, 아니 모든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53쪽

그러므로 행해진 것들이 정의롭거나 절제 있다고 이야기되는 것은 그것들이 정의로운 사람이나 절제 있는 사람이 행했을 법한 그런 종류의 행위들일 때이다. 정의로운 사람이나 절제 있는 사람은 이런 일들을 [단순히] 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마치 정의로운 사람들이나 절제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이런 일들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일들을 행하는 것으로부터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하는 것으로부터 절제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며, 될 가망성조차 가지지 못할 것이다. -60쪽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위에 관련해서도 지나침과 모자람, 그리고 중간이 있다. 그런데 탁월성은 감정과 행위에 관련하고, 이것들 안에서 지나침과 모자람이 잘못을 범하는 반면, 중간적인 것은 칭찬을 받고 또한 올곧게 성공한다. 이 양자가 탁월성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탁월성은 중간적인 것을 겨냥하는 한 일종의 중용이다. -65쪽

합리적 선택은 명백히 자발적인 것이지만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고, 자발적인 것이 더 널리 적용된다. 왜냐하면 아이들이나 다른 동물들도 자발적인 것에는 참여하지만 합리적 선택에는 그러지 못하며, 또 갑작스러운 행위를 자발적인 것이라고는 해도 합리적 선택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86쪽

용감한 사람들은 고귀한 것 때문에 행위하며, 분노는 그들을 옆에서 거든다. (중략) 또 분노로 인한 용기가 가장 본성적인 것으로 보이며, 합리적 선택과 [왜 용기를 내는지] 그 목적을 추가적으로 취한다면 참된 용기가 되는 것 같다. 사람들 또한 화가 나면 고통을 느끼고 보복을 하면 즐거워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싸우는 사람들은 싸움을 잘 하는 사람이기는 해도 용감한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귀한 것 때문에 싸우는 것도, 이성이 명한 바에 따라 싸우는 것도 아니며, 감정 때문에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용기를 닮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108-109쪽

마땅히 화를 낼 만한 일에 대해 마땅히 화를 낼 만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더 나아가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때, 마땅한 시간 동안 화를 내는 사람은 칭찬을 받는다. 그렇다면, 온화가 칭찬을 받는 것인 한, 이런 사람이 온화한 사람일 것이다. 온화한 사람은 동요가 없는 사람이며, 또 감정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이성이 명할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대상에 대해 화를 낼 시간 동안 노여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146쪽

이 방면에서의 모자람은, 그것이 일종의 ‘화낼 줄 모름’이든 다른 무엇이든, 비난을 받는다. 마땅히 화를 내야 할 일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되고, 마땅한 방식으로 화를 낼 줄도, 마땅한 때에 마땅한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낼 줄도 모르는 사람 역시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146쪽

정의란 그것에 따라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것을 합리적으로 선택해서 실행하게 된다고 이야기되는 탁월성이며, 그것에 따라 정의로운 사람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혹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분배할 때, 선택할 만한 것을 자신에게는 더 많이 배분하고, 이웃에게는 더 적게 배분하며, 해로운 것은 그 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에 따라 동등한 것을 배분하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분배할 때도 마찬가지로 하게 하는 탁월성이다. -180쪽

부정의를 당하는 것과 부정의를 행하는 것이 모두 나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의를 행하는 것이 더 나쁘다. 왜냐하면 부정의를 행하는 것은 악덕을 동반하는 것이며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되, 그때의 악덕은 완전하고 단적인 악덕이거나 그에 가까운 악덕인 반면,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악덕도, 부정의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201쪽

이해력은 언제나 그런 것들, 또 변하지 않는 것들, 혹은 생겨나는 것들 중 어떤 것이든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문을 가질 수 있고 숙고할 수 있는 대상들에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실천적 지혜의 대상이 되는 것들과 동일한 것에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이해력과 실천적 지혜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실천적 지혜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만 하는지에 대해 명을 내리는 것이며, 이것이 실천적 지혜의 목적인 반면, 이해력은 오로지 판단을 내리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223쪽

소크라테스 또한 어떤 측면에서는 옳게 탐구했지만, 다른 어떤 측면에서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모든 탁월성들이 실천적 지혜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며, 그것들이 실천적 지혜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옳게 이야기한 것이니까. -230-231쪽

이것들 중 최선은 군주정이며 최악은 금권정이다. 참주정은 군주정의 타락한 형태이다. (중략) 민주정은 금권정으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서로 경계를 공유하고 있다. 금권정 여기 다중의 지배를 지향하며, 일정 재산 이상의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은 모두 동등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정치체제 중에서는 민주정이 가장 덜 나쁜 것이다. 제헌정의 기본틀로부터 약간만 타락한 것이기 때문이다. -299-300쪽

우리는 행복이 품성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만약 행복이 품성상태라면 평생 잠만 자면서 식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크나큰 비운을 겪고 있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만족스럽지 못한 생각이며, 앞으로 말했던 것과 같이 행복을 일종의 활동으로 규정해야 한다면, 또 만약 활동들 중 일부가 다른 것을 위해 선택되는 필수적인 것이고, 다른 일부는 그 자체로 선택되는 것이라면, 행복은 분명 그 자체로서 선택되는 활동들 중 하나로 놓여야 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활동들의 하나로 놓여서는 안 된다. 행복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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