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머리가 하얘졌다. 하루 종일 그냥 멍하니 있었다. 멍하니 티비보고, 멍하니 인터넷 기사들 클릭하고, 멍하니 밥을 먹었다. 딱히 한 게 없이 정신이 멍했다. 어느 순간 피로감이 몰려왔고, 오랫동안 잤다. 대선 때 그를 지지했다. 비판은 하면서도 등돌린 적은 없었다. 더 잘하라는 비판이었다. 이라크 파병과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못마땅했지만, 권위주의가 많이 사라지고, 지금처럼 대통령을 욕해도 문제없는 - 다시 문제가 되고 있지만 - 풍토를 만든 것 등은 그 덕분이라 생각한다. 잘못한 점도 많지만 역대 대통령 중에선 그래도 가장 나았다.  

  그 누구도 죽음을 예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퇴임 후 마을 이웃들과 인사하고, 손녀 자전거 태우며 지내는 시골 할아버지로 돌아간 모습도, 어느 전직 대통령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어느 순간부터 가끔씩 현 정부에 대한 발언을 하면서, 더더욱 미움을 샀던 것 같다. 검찰 조사가 시작되고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 밝혀지면서 굉장한 부담감을 느꼈던 것 같다. 전직 대통령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 금액이지만 도덕성을 높이 내세웠던 그에게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인터넷에 오르는 유서 내용엔 돈 문제에 대해서 빠져있는데, 어느 기사엔 "돈 문제는 깨끗하다"고 나와 있다.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자살은 충격이다.  

  하루 종일 멍하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참 모질게 살아야겠다. 참 이기적이고 못되게 살아야겠다. 그런 놈들은 대놓고 돈 모으고, 비리를 저질러도 괜찮고, 끝까지 살아남는데, 크지 않은 부정에도 괴로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다. 작은 부정이나 비리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에 관해선 깔끔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본인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직 죽음으로서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두환, 노태우 이런 녀석들은 십원 한 장 없다면서 참 잘먹고 잘살더라. 왜 좀더 당당하게 맞서지 못해 죽음까지 이르러야 했나. 아닌 것에 대해선 아니라고, 잘못한 것에 대해선 잘못했다고 말하면 될 것을,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도덕과 정의에 민감한 사람들은 참 마음이 약하다. 작은 잘못에도 스스로 괴로워하고 마음 아파한다. 그런데, 낯짝이 두껍고 이기적인 녀석들, 도덕과 정의는 돈주고 팔아먹은 녀석들은, 어떤 역경에도 당당히 살아남는다. 얼굴 빳빳이 들고. 전두환과 노태우와 이명박을 보면 알 수 있다.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그 화살은 이미 개가 된 검찰에게로. 그리고 이명박에게로 향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는 온전히 남은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할 것 같다. 덕수궁에 분향소가 차려졌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렸다. 그런데 그 주위를 경찰버스가 둘러쌌다. 원천봉쇄. 작년 촛불 집회 이후로 모든 집회에는 이런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분노해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더 분노케 만든다. 집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다. 누가 청와대로 쳐들어간다고 했나. 분향소에 가서 꽃 한 송이 놓고 오겠다고, 절 한 번 하고 오겠다고 나간 시민들을 이렇게 대한다. 국민이 없는 국가를 혼자서 통치하고 있다. 심판의 날이 멀지 않았다.     

  세상이 참 못됐다. 악랄한 녀석들만 살아남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내 뱃속 가득 채우고 등따습고 배부르게 살기 위해선, 마음 모질게 먹고 악랄해져야 하는데,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 도덕이나 정의를 내세워 욕먹으나 온갖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며 잇속 챙겨 욕 먹으나 마찬가지인데, 똑같이 욕을 먹을거라면 차라리 전자로 욕을 먹으며 살고 싶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 사람들을 위해 발언하고,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편으로 그러지 못했으나 한편으론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참 괜찮은 사람을 잃었다. 기대했던 바가 너무 많아 잘한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너무 모질게 몰아세우기만 했다. 참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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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노빠다..
    from 공감지수만땅 2009-05-24 07:50 
    나는 노빠다.  16대 대선, 노사모 가입, 노무현 당선... 펄펄뛰며 세상이 바뀔꺼라고 좋아하다.  나는 노빠가 아니다.  노사모에 가입하고, 선거에 한표를 행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므로...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통령 노무현을 수시로 의심했다. 그의 정치적 능력을, 리더쉽을, 그리고 끝내는 그의 인간성까지도..........  그에게 고통을 주고
 
 
마노아 2009-05-24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픈데, 그래도 아프님 글은 참 따뜻하네요. 아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어요...

마늘빵 2009-05-24 01:38   좋아요 0 | URL
하는 일 없이 계속 인터넷 기사만 클릭하고 있네요. 뭔가 해야할 거 같고 답답하네요. 이 새벽에도 덕수궁엔 사람들이 있겠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죠?

sweetrain 2009-05-24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종일 머리가 멍했습니다.
점점 이 세상에 대해서 환멸을 가지게 되지만...
환멸에 지지 않고, 좋은 세상이 올때까지 악착같이 버티려구요.

마늘빵 2009-05-24 09:40   좋아요 0 | URL
버텨야죠. 끝까지 버텨내야죠.

Kir 2009-05-24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기본적으로 악하고 추한 존재인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 먹먹함과 분노, 죄스러움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마늘빵 2009-05-24 09:42   좋아요 0 | URL
세상이 더 악하고 추하게 되라고 권장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제 자신을 붙들어 매야죠... 참 미안하네요.

비의딸 2009-05-24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노므 냄비근성...... 한때는 그분을 사랑했고, 또 한때는내 믿음에 대한 배신자로 저주했으며, 이제는 그분을 그리워하는 나의 냄비근성을 늘 한결같았던 그분이 용서하시길 바래봅니다.

마늘빵 2009-05-24 09:43   좋아요 0 | URL
아마 대선 때 그에게 표를 던졌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hnine 2009-05-24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랄한 녀석들만 살아남는다'라고 하신 말씀, 저도 어제 그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약한 사람이 먼저 희생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고.
그러면서도, 과연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이 세상 살기가 더 힘들어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쉽게 인정할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마음 독하게 독하게 먹고 살아야겠다고, 또는 그렇게 살으라고 해야하는 것일까...아무튼 생각이 복잡한 하루였습니다.

마늘빵 2009-05-24 09:45   좋아요 0 | URL
네, 뻔뻔하고 이기적인 녀석들은 그들을 향한 비판을 그냥 무시합니다. 누구처럼. 귀닫고 안들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다 마음에 담아둡니다. 마음 독하게 먹어야죠.

비로그인 2009-05-24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프고, 가슴이 먹먹한 것은 처음입니다. 공인의 죽음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처음, 이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글과 음성을 접할 수 없다는 마음에 슬픈 것도 처음. 모든 것이 처음인데 너무 슬퍼 마음이 계속 웁니다.

마늘빵 2009-05-24 09:47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러네요. 조만간 덕수궁에 나가 국화꽃 한 송이 놓고 와야겠습니다.

2009-05-24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4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5-2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늘빵 2009-05-24 22:37   좋아요 0 | URL
하루 종일 일하고 이제 돌아왔네요. 덕수궁에 가보고 싶은데 내일은 시간이 날까 모르겠어요. 마음이 아프네요.

logos678 2009-05-2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삶의 기둥이었던 도덕성이 무너졌다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참기 어려웠겠죠. 사실 그런 건 조금만 뻔뻔하면 쉽게 무시할 수도 있었던 것들인데... 사실 무시하고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은데...조기 게양하고 며칠째 침통해 있어요. 해마다 5월이 되면 우울할 것 같네요.

마늘빵 2009-05-25 16:58   좋아요 0 | URL
집 앞 건물에도 어제 조기가 게양되어 있더라고요. 출근 길에 보니 아파트 군데군데 꽤 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