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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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우리에게 올바로 살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삶을 즐기라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실은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진짜 행복을 좇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의 별명은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였다. -11쪽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반대로 1년 내내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도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품위를 잃을 행동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59쪽

운동이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운동이 갖는 숙명적인 모순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사회체제와 그 사고방식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운동의 외형적 성장, 즉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조직이 커지는 것을 운동의 성장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런 외형적 성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운동의 껍데기는 커졌지만 정작 운동의 알맹이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비대한 운동 조직이 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운동 조직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61-62쪽

평화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무작정하게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가 아니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느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66쪽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69쪽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싸우고 헌신하는 사람이 싸우고 헌신하는 그만큼 세상이 변화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시시각각 보람과 기쁨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세상은 늘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며 또 포기하곤 한다. 지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면 이미 그 문턱에 다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걸 염두에 두고 예수는 말한다. 씨를 뿌린 사람도 못 알아차리는 사이에 어느새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낟알이 맺힌다고. -78-79쪽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대다수의 인민들이 자신의 삶이나 계급적 처지에 걸맞은 정당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당장 뒤집히고 말 것이다. 그래서 지배체제는 언제나 제 가치관과 세계관을 인민들에게 주입한다. 그런 주입에도 역사의 어느 한순간에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도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빼면 인민들은 거의 언제나 지배체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편에 서는 사람들에게 종종, 아니 기본적으로 적대적이다. 20세기에 횡행한 ‘레드 콤플렉스’를 가까운 예로 들 수 있다. -97쪽

무소유는 영적 자유를 위한 것이다. 물질의 부와 영혼의 부는 한 사람에게 동거할 수 없다. 물질적으로 가진 게 많을수록 영적 자유는 적어진다. -98쪽

사람들의 의식은 견고한 껍데기를 쓰고 있고 그 껍데기를 벗으려면 금이 가고 깨트려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껍데기를 벗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마음의 귀를 닫아 놓은 사람에게 매달려 내내 시간만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성실한 활동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가깝다. -103쪽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나눔은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이며, 하느님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고루 나누어 쓰라고 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모두 함께 풍요롭고 만족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110쪽

사람은 어떤 불의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체제에서 살아갈 때 그 체제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 한 자기도 모르게 그 체제에 감염된다. 권위주의 체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아이와 여자와 하급자에게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오늘과 같은 극단적인 자본의 체제에 사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돈과 물질적인 가치를 인생의 중심에 놓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 사회체제에 얼마간 불만이 있거나 비판적인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 사회체제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 사랑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 체제의 일부인 것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체제나 자본의 체제와 싸울 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설사 그 싸움이 승리를 거둔다 해도 결국 내 안에 숨어 있는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의 체제가 되살아나기 때문에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대개의 혁명이 그렇다. 세상을 바꾸려면 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 안의 적과도 싸워야 한다. -121-122쪽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유별나고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당연한 공평함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156쪽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181쪽

지나친 이상주의는 현실적 조응력을 잃고 소수 지식인들의 관념놀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꿈꾸길 중단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짐나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186-187쪽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189쪽

나와 내 식구가 충분히 먹고살면서 여력이 되는 대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끝없이 더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에게 비추어 선량한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돈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 역시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203쪽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예수는 결코 안온한 예배당이나 연구실에서 비폭력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20세기 비폭력주의 운동의 대명사’라 일컬어지지만 일각에서는 인도 ‘민족’에 집착하여 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훼방한 사람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간디조차 ‘무기력하고 비굴한 비폭력보다는 차라리 정당한 폭력이 낫다’고 말했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투쟁 방법을 넘어서는 투쟁 방법이지 폭력적인 투쟁 방법에도 못 미치는, 투쟁의 정당성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유약한 인텔리들의 요사스러운 말장난이 아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들이 결국 폭력에 희생당하는 운명을 갖는 건, 지배체제가 그들에게서 무장투쟁을 선택한 운동가들보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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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09-05-26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과 비폭력으로 정하는 것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혹 답변 가능할까요?

마늘빵 2009-05-26 11:55   좋아요 0 | URL
김규항의 책에 관해서라면, 저보다는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질문을 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