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 - 철학 이야기 지식전람회 10
김주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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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 한 적 없다.  누가 도대체 누가? 누가 소크라테스에게 누명을 씌웠단 말인가.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로,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는다는 죄로,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로,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던 - 어쩌면 그냥 벌금으로 끝날 수 있는 걸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을 농락함으로써 자초한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 그에게 누가 죽어서까지도 억울하게 누명을 씌운단 말인가? 소크라테스는 절대로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닌데?

  권창은, 강정인 교수의 합작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가 철학 논문을 엮어 낸 좀 더 깊이있는 난이도 높은 책이라면,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 는 청소년을 비롯한 대중일반을 염두에 두고 쓴 철학서적이다. 그러니 전자의 책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 책을 대신해도 좋겠다. 하지만 이 책에선  그다지 깊이있는 성찰을 기대하진 말길 바란다. 하지만 매우 재밌게 유쾌하게 유익하게 그 억울함을 풀어준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고발장면부터 시작해 소크라테스의 억울함을 해소해주며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실체를 드러내는 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보다 더 간단히 훑고 있지만 더 많은 재밌는 곁다리 이야기들을 준비해놓고 있다. 물론 주된 주제는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하지 않은 데 대한 누명을 벗기는 작업이고, 소크라테스에게 누명을 씌운 자를 밝혀내는 것이지만, 신탁과 논리학, 아크로폴리스와 제국주의,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관계, 희랍의 남색문화, 악처 크산티페와의 관계, 4대 성인의 유래 등 유익한 이야기가 계속 된다.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화편은 <크리톤>과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디에 악법도 법이다 라는 문구가 나오는가. 직접 이렇게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의 일부분이다.

  클레온이라는 정치선동가에 대한 기록 부분에 이렇게 나와있다.

  "변함없는 악법을 운용하는 나라가 불안정한 좋은 법을 운용하는 나라보다 낫습니다. 절도를 갖춘 무지가 자유분방한 명민함보다 유익하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한층 평범한 사람들이 나랏일을 더 훌륭하게 꾸려 갑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법보다 더 현명해 보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3권 37장)

  이와 같은 클레온의 연설은 당시 정의와 관용을 외쳤던 무명 시민 디오도토스의 연설에 대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이 지지들 하며 공감을 얻지 못했지만, 10년 쯤 뒤에는 아테네인의 상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의 발언이 오늘날에 온 것이 실정법 사상이다. '악법도 법이다'는 실정법 사상의 표어가 되는데 사실 이를 처음 말한 이는 자연법 사상가 였다. 도미누스 울피아누스는 로마법을 집대성한 3세기 경 로마 법학자로서, 자연법 사상가였다. 그의 저술집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Dura lex, sed lex"

 이는 "quod quidem perquam duram est, sed ita lex scripta est"라는 원문에서 발췌한 말로, '그것이 나쁜 것이긴 하지만, 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원래 이 말은 노예를 해방시켜주려는 이들에게 노예 해방을 금지시킨 법조문을 상기시키며 한 말이라 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가 도모오는 1937년 출판한 <법철학>에서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일단 지켜야 하며, 악법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정당한 입법절차에 따라서 그 악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정 책에 서술되어 있기 보다든 1950년대 이후, 특히 1970-80년대에 이런 문구들이 자주 인용되었는데, 주로 신문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인용되었다. 1973년 당시 숭실대 철학과 교수 최명관은 <조선일보>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바가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저자는 추측하기를, 교과서와 신문에 비슷한 문구들이 실리고, 이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의 입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라는 정식화된 문구로 전파가 되었고, 현장에서 교육받은 당시 학생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이어 일본에서도 이런 낭설이 통용되고 있다며,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오해는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유독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일본의 학문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수입을 해왔던 우리 학계를 질타한다.

  "개화 이후 우리는 계속 잘못된 권위가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 국가 권력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성립되지 못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이식된 서구 학문은 건강한 비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서구 학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잘못된 권위주의와 얄팍한 계몽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서구와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은 무조건 맞다고 보고 출처와 원전을 확인하지 않는 비상식적인 학문 태도가 만연했으며, 서구의 것을 권위로 받아들이는 게 근대화고 계몽이라고 생각한 천박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문 언어에서도 우리말은 권위 있는 학문 언어가 되지 못하고 학문에서 일어로, 다시 영어로 흘러왔을 뿐이다. 그러나 거꾸로 그만큼 권위에 대한 갈증은 더해서, 고전에 대한 탐구와 번역도 그런 의식 선상에서 진행된 측면이 강하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된 번역과 연구에 의해 진행되지 못하고, 일본과 독재 정부에 의해 왜곡되어 진행되었다.

  중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서양 고대 철학에 대한 낮은 소양과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연구 풍토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와 같은 해프닝이 오랜 세월 동안 교정받지 못한 채 뿌리 내린 듯 하다. 그나마 70년대 최명관의 외로운 목소리가 있었고, 90년대 와서 교정의 목소리가 높아져 21세기 초에 와서 제 7차 교육 과정의 교과서에서 이 말을 뺄 것을 권유한 국가 인권위의 목소리가 뒤늦은 위안이 될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는 아마도 일본의 법학자로부터 시작되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신문논설가와 학교 교사들이 정식화해 사용하면서 고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크라테스를 이용해 악법도 법이니 지키라고 강요하는 이들이 더이상 나오지 않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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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의론의 대가 존 롤즈와 그의 비판자 매킨타이어
    from 자유를 찾아서 2007-11-27 21:36 
      2002년 평생 정의만을 연구했던 한 철학자가 타계했다. 그는 공리주의가 온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을 내놓아 세상을 놀래켰고, 철학 분야에 있어 죽어버린 정의의 영역을 부활시켰다는 칭송을 받았다. 1957년에 발표한 논문 <공정으로서의 정의>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이 논문을 보완하는데 또 한 세월을 쏟아 필생의 역작 <정의론>을 1971년에 펴냈다. 그는 바로 다음해 하버드 대학을 빛
 
 
드팀전 2006-05-14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소크라테스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악법도 법은 어디서 주워들어서..ㅎㅎ
쪽팔린 짓이어서 마땅히 할 말없을 때 그 말을 인용하는 거죠.
누가..악법도 법이다..그러면 ...전....(속으로 뷩신 먼저하고...) 악법은 버리거나 고쳐 쓰면 된다고 합니다.다 인간이 하는 짓인데 못고칠게 어딨다고...

마늘빵 2006-05-1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여요. 이제는 그런 말 하는 사람들 많이 줄었지만 참 그동안 많이도 우려먹었죠.

책방마니아 2006-05-23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다. 첫번째 문단 마지막 부분 "나는 아닌데?" / 참 너다운 개그다 ^^
글구 질문이 있는데 "이와 같은 클레온의 연설은 당시 정의와 관용을 외쳤던 무명 시민 디오도토스의 연설에 대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이 지지들 하며 공감을 얻지 못했지만" 이라는 부분이 좀 의미 전달이 안된다. 혹시 디오도토스라는 사람이 클레온과 상반되는 주장을 한 사람인가? 음 ... 그런 거 같기도 하군.

클레온에 대한 기록 있는 2개 문단에 오타가 집중되어 있다.
유익하빈다 => 유익합니다 / 지지들 하며 => 지지를 하며 / 자연법 사상가 였다. => 자연법 사상가 도미누스 울피아누스였다.

마늘빵 2006-05-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와 같은 클레온의 연설은 당시 정의와 관용을 외쳤던 무명 시민 디오도토스의 연설에 대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이 지지들 하며 공감을 얻지 못했지만
-> 이건 말 그대로 인데. 악법도 법이다 식으로 주장을 했던 클레온의 연설이 그 반대의 정의와 관용을 외쳤던 디오도토스의 주장과 달랐고, 시민들이 디오도토스의 주장에 지지를 보내며 클레온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는 말.

오타는 쩝 쓰고는 확인을 안하니 엉뚱한 곳에서 꽤 많이 나오더군. 쓰고 다시 읽는 버릇을 들여야하는데 그게 귀찮아서 안하게 되더군.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권창은 외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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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다. 소크라테스 하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첫째,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 라는 것과 둘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고 말했다는 것. 이 두가지는 아무리 철학에  관심이 없고 무지한 자라고 할지라도 대한민국의 기본교육을 받은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나?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나? 우리는 교과서에 대고 한번도 질문해보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교과서는 법이었다. 교과서는 진리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라도 의문을 제기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했는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가?

  첫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오래도록 설명해야 하므로, 먼저 두번째 질문에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는가? 그렇다.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처음 말한 건 아니었다. 아테네 신전에 그런 문구가 적혀있었고,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다른 철학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은 맞지만 '처음' 말한 건 아니다.

 그럼 첫번째 질문에 답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는가? 미리 답을 이야기하자면 안했다. 그는 그렇게 말 한적이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렇게 알고 있는가? 유독 대한민국 사람들만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사실 교과서에서는 직접적으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한 대목은 찾기 힘들다. 다만 비슷한 대목들은 있다.

  1982년판과 89년판 중학교 1학년 도덕교과서에는 몇장에 걸쳐 이렇게 적혀있다. 이는 요약해놓은 것이다.

  아테네 법정에서 국가의 신을 섬기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부당한 재판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후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오랜 친구인 크리톤이 찾아와 이유를 제시하며 도주를 권유하지만, 그  거기에 응답하여 탈옥과 도주를 거절한다. 주장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비록 재판이 부당하다 할지라도 시민으로서 법규 준수 의무가 우선이기 때문에 부당한 판결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중학교 도덕 82년판 : 101-103, 89년판 : 134-138) 

  또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부당하게 신을 모독하고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는, 국외 탈출을 권유받았으나, 비록 악법이라 해도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기꺼이 독약을 마셨다."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 8쪽)

  92년판 법사상사 교과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실정법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며 시민의 의무라고 하였다. 그가 후일 세상의 오해를 받고 부당한 재판을 받아 사형에 처하여졌을 때도 국법의 존중을 끝까지 주장하면서, "선량한 시민이 악법을 따르는 것은, 악한 시민이 양법까지도 침범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한 것은 유명한 말이다." (최종고, 1992:23; 김여수, 1967:20 법사상사 교과서)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 라고 직접 말했다고는 되어있지 않지만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대목들이 우리네 도덕, 철학 교과서와 법사상사 교과서에 수록되어 왔다. 이 책의 저자 故 권창은 교수와 강정인 교수의 논문으로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정하여 아예 이에 대한 부분을 삭제토록 하여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어쩌다 그가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했다고 소문(?)이 나버렸는지 모르지만, 이에 대한 억울함을 해소해주기 위하여 두 교수가 발벗고 나섰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먼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법이란건 악법일 수가 없다. 그는 법은 그 자체로서 신성하고 언제나 옳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악법'이라는게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에게 있어서는 법이 아니다. 일종의 말장난 같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그는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 할 수가 없다. 악법이란 존재할 수가 없으므로. 악법은 법이 아니므로. 그에게 있어서 법이 오용되었다는 것과 그 법이 악법이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악법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잘못 적용된 법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폐지될 수도 있는 법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법은, 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거나 혹은 제정 당시에는 순기능이 컸으나 달라진 상황 속에서 문제가 생겨나 대체입법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는 불완전한 법이지 악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p44)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탈출 권유를 거부했다. 그는 탈출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불의를 행해서는 안된다. - 대전제
  소크라테스의 탈출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 소전제
  소크라테는 탈출해서는 안된다 - 결론


  그가 탈출을 불의로운 행위라고 본 것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위약설로, 정의롭다고 합의한 것들을 우리는 행해야 하며, 반대로 국가를 설득시키지 못하고서 떠나는 식으로 탈출함으로써 이를 짓밟는 것은 위약이다는 입장. 두번째는 파괴설로, 이러한 탈출은 상대방들을 나쁘게 해놓는 것, 달리 말해 상대방들의 해를 가하는 행위이라는 입장. 세번째는 불경설로, 그것도 그렇게 해서는 안될 상대방들에게 행하는 해악이라는 입장이다. 이는 국가를 마치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본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세 설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상반된 두 입장을 소개하며, 저자는 두 가지 모두 극단적인 견해임을 지적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정의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불의를 행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기에서의 불의라는 것은 최초의 가해자의 불의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행하는 불의 모두를 포함한다. 이를 원초불의와 대항불의라고 이야기한다. 대항불의라는 것은 일종의 정당방위권이며, 저자 권창은 교수는 소크라테스가 이를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국가의 잘못된 판결에 대항해 크리톤의 권유를 받아들여 탈출을 해야 할 것인데 그러지 않았다. 왜냐면, 그가 인정한 대항불의라는 것은, 정당방위라는 것은, 대등한 관계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시혜자이고, 나는 수혜자이다. 따라서 시혜자에 대해 대항불의를 행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불경설에 의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탈출하지 않는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정의관은 그가 직접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민의 혁명적 저항 이외에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의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 국민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의식을 노예화시켜 폭정의 지속에 기여함으로써 수난을 연장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살펴볼 수 있는데, 공권력의 불의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정의를 내세운 혁명의 역혁명의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직접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잘못된 판결에 대해 탈출이라는 대항불의를 저지르지 않음으로써 외견상 국가의 법에 복종하는 듯한 모양새를 나타내었고 - 그의 본래 이유야 무조건적인 복종은 아니었지만 - 이후 독재정권 하에서 그를 악용하는  사례를 만들었다고 봐야 할 터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현대 대중들의 그에 대한 오해는 잘못되었다.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오해가 풀린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 이 책에는 故 권창은 교수의 논문과 강정인 교수의 논문이 함께 실려있다. 기존에 강정인 교수의 논문만으로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라는 책이 나왔지만, 절판되었고, 권창은 고려대학교 철학교수와 강정인 서강대학교 정치학 교수의 논문을 함께 묶어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라는 책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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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의론의 대가 존 롤즈와 그의 비판자 매킨타이어
    from 자유를 찾아서 2007-11-27 21:36 
      2002년 평생 정의만을 연구했던 한 철학자가 타계했다. 그는 공리주의가 온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을 내놓아 세상을 놀래켰고, 철학 분야에 있어 죽어버린 정의의 영역을 부활시켰다는 칭송을 받았다. 1957년에 발표한 논문 <공정으로서의 정의>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이 논문을 보완하는데 또 한 세월을 쏟아 필생의 역작 <정의론>을 1971년에 펴냈다. 그는 바로 다음해 하버드 대학을 빛
 
 
비로그인 2006-05-13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하셔요 짝짝짝

마늘빵 2006-05-13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느라 힘들었습니다. 어려워요. 비비꽈놔서. 권창은 교수 논문이 너무나 어렵군요. 만연체이고 이랬다저랬다 엎치락 뒷치락 해서 하고자하는 말이 뭔지 도통 감이 안오고. 지금도 혼란한 상태에서 정리해봤는데 제대로 정리한건지 모르겠군요. 몇번은 읽어봐야겠어요.

비로그인 2006-05-1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학적어투 넘 싫어요.
그거 말하려고 그렇게 비비꼬았어?? 이런 의문이 드는 글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어투에 익숙한 사람들은 외려 쉽게 쓰는게 어려운가봐요.

마늘빵 2006-05-1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서는 왜 이렇게 어렵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그렇게 답하잖아요. 최대한 쉽게 쓰려고 한겁니다. 아마도 이 말은 최대한 정확하게 쓰려고 했다는 말의 다른 말인 듯 합니다. 정확히 왜 아닌지, 왜 맞는지를 따지고들다보니 어려워지는거 같아요. 그런면에서 어려운 철학서에 면죄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논문은 강정인 교수의 것은 그나마 나은데, 故 권창은 교수의 것은 옛날분이시라 그런지 글이 매우 깁니다. 만연체에 무슨 말을 하는건지 감이 잘 안잡혀요.

비로그인 2006-05-14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대한 쉽게 쓰려고 한겁니다. 아마도 이 말은 최대한 정확하게 쓰려고 했다는 말의 다른 말인 듯 합니다. 정확히 왜 아닌지, 왜 맞는지를 따지고들다보니 어려워지는거 같아요. 그런면에서 어려운 철학서에 면죄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친절한데 못알아 먹는다면 읽는 이의 이해력을 탓해야겠죠. 생소하니까 어려워 하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 보통 보면 철학을 어려워하는 이유가 그런 것도 있겠지만
1.그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개념을 충분히,상세히 설명하지 않아 읽는 이를 소외시키는 경우- 어느정도의 깊이까지 설명을 늘어놓아야 하는지 그 기준이 모호하긴하지만, 보통 철학자들이 철학도 내지 지적소양을 갖춘 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을 주로 쓰기 때문에 평범한 독자는 낭패감에 젖기 쉽지요. 철학자들도 솔직히 너무 세세하게 쓰는 것이 시간낭비 일수 있고 지루한 작업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합니다. 그런데 제 불만은 그게 아니고
2. 만연체. 독자의 호흡을 고려하여 보다 파악하기 쉽게 쓸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게 써놓는 것. 물론 길게 쓸수 있고, 그걸 이해 못하는 독자에게 탓할 수 있겠습니다만은 '파악조차 어렵게'(보통 문장의 호응이 잘못 되어있는 경우가 수두룩하죠.) 길게 쓸 필요는 없다는거죠. 귀찮은 것인지. 너무 어렵게(이상하게) 말하면 본인도 잘 이해를 못하고 쓴 것 같다는 느낌을 줘요.

책방마니아 2006-05-2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잘 읽었다. 대항불의를 안한 이유가 불경설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접근이 꽤 그럴싸하게 들린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소크라테스의 정의관의 긍정적인 면으로 언급한 설명이 잘 이해가 안된다. 좀 쉽게 풀어줘봐라! ㅋ

마늘빵 2006-05-2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를 내세운 혁명의 역혁명의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 이부분을 말하는거지? 너도 나도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해 혁명을 이루겠노라 다투며 하나의 정권이 들어서고, 또 다른 혁명세력이 정의를 이루겠노라 말하며 들고 일어선다면 '정의'를 가운데 놓고 혁명과 역혁명, 역혁명에 대한 또다른 역혁명, 끊임없이 정의를 내세운 혁명이 반복되는거지. 이걸 끊을 수 있다는 말이야. 지금 이 사회의 법이 잘못된게 없으니까, 또 악법이어도 지켜야하는게 옳으니깐 법이 잘못이니 어쩌니 하면서 새로운 정의관을 세우겠노라 나서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거지.

책방마니아 2006-05-2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말하니 이해가 되는군 ^^ (이과생의 한계) 근데 왜 그 게 공권력의 불의를 줄일 수 있다는 거지? 혁명이 터지면 여기에 대해 공권력이 동원될 수 있을텐데 이 게 부조리할 수 있다는 건가?
내가 이 글을 읽은 이유는, 70년대 유신 정권 때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남발되었던 다양한 법안들 (이를테면 73년부터 75년까지던가. 9번에 걸쳐 일어났던 긴급조치 1호~9호... 그 중엔 고려대를 일시 폐쇄하는 내용도 있었을 꺼다)에 대한 내용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지. (최근에 70~80년대 현대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집중적으로 봤거든)
소크라테스가 있던 시대엔 법은 '악법'이 될 수 없었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역시 이상적인 생각이 아닐까?) 유신 정권을 볼 때 "폐지될 수도 있는 법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법은, 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거나 혹은 제정 당시에는 순기능이 컸으나 달라진 상황 속에서 문제가 생겨나 대체입법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는 불완전한 법이지 악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는 말은 해당하지 않을 꺼란 생각이 들었거든. ㅋ

쿠자누스 2007-09-23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가 대항 불의를 거부해서 독배를 마셨다는 건 당체 이해가 안되네요. 사실이 그런 건지 원전을 읽어봐야 겠네요.

마늘빵 2007-09-23 10:32   좋아요 0 | URL
권창은 교수의 해석을 인정했을 때, 넓게 해석한다면,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진 않았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100% 자유로울 순 없을거 같습니다. 세부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다른 맥락에서 독배를 마시는 행위가 이루어지지만, 그렇지않고 넓게 보게되면 결국 같은 맥락이라고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이 다분히 있어보여요.

소크라테스는 감히 자신에게 혜택을 베풀어준 국가를 넘어서 혁명을 일으키라, 고 까지는 주장하지 못한 거 같아 보입니다. 잘못된 국가에 대한 전복, 혁명이 가능하다면, 그는 분명 감옥을 탈출했을거에요. 소크라테스는 국가나 법이 문제가 아니라, 법을 적용하는 이들이 잘못되었음을 꼬집은거지요. 게다가 그는 부정의를 당하더라도 그것을 되갚아선 안된다고 생각했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을거 같아요.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매우 잘 쓰고 잘 만들었으나 읽는 이의 부족함으로 인해 이 책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선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첫째,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맥을 잡고 있어야 한다. 난 역사에 무지하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내가 외면하고 있는 분야가 역사서이다. 역사는 알아야 한다. 하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걸 어쩌랴. 둘째, 한문을 좀 알면 좋겠다는 생각. 한자와 한문 둘다를 의미한다. 몰라도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필요하단 생각이다. 한자 2급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으나 안쓰면 또 까먹는 것을. 쉬운 한자들 조차도 접하지 않으면 알쏭달쏭한 것이 지금 나의 상태이다. 셋째, 이 책을 읽기 전에 연암 박지원과 미셸 푸코의 1차 서적들을 접할 필요가 있다. 고미숙씨는 고전 리라이팅 작가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고전을 리라이팅하기 위해서는 고전을 알아야 한다. 고전을 모른 채 리라이팅 된 작품을 읽는다면 그게 무슨 별 의미를 가질까 싶다. 나는 연암 박지원과 미셀 푸코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읽기 위해선 먼저 그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 뒤에 이 책을 접한다면 제대로 읽을 수 있겠다.

  "근대와 탈근대의 만남",  "연암과 푸코의 만남" 이라는 다소 잘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가 서로 만나 의외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근대 안에서 근대를 벗어나는 길은 없다.
  그것은 고향에 터를 잡고 살면서 고향을 버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근대는 결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근대를 아주 낯선 배치 속으로, 곧 '탈근대의 바다' 속으로 밀어넣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탈근대의 시공간은 앞을 향해 있지 않다. 앞이면서 뒤이고,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이다.


  고미숙은 이 글을 쓴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작업의 시작으로 푸코와 연암을 선택했다. 그녀는 국문학자다. 국문학자이지만 스스로 국문학 전공자 답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는 경계를 넘나드는 사유를 하고 싶어 한다. 학문이라는 것은 결국 끝에 가서는 경계를 두지 않는다. 사학과 국문학과 철학이 모두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이 책은 그녀의 경계없는 사유의 창조물이자 결과물이다.

  "푸코를 통해 근대성이 얼마나 견고한 요새로 둘러써야 있는지를 실감했고, 연암을 통해 그 요새를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 질주인지를 배웠다.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진정 그들로 하여 '앎과 혁명'을 다시 구성하는 길 위에 설 수 있었다. 전사가 되거나 나비가 되거나 - 그들이 나에게 열어준 매혹적인 갈림길!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연암과 푸코, 두 사우에 대한 나의 '헌정앨범'이기도 하다."

  이 책은 속도, 인간, 성, 연애, 여성되기, 몸, 앎 등의 큼지막한 주제를 나누고, 각각의 장에서 연암과 푸코를 만나게 하며 근대의 장벽을 깨고, 사뿐히 날아앉는 작업을 시도한다. 참으로 신선하고 새로운 구성방식이다. 내공이 부족한 탓에 이 책을 통해 연암과 푸코가 어떻게 만났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의 새로운 시도와 사고방식에 놀란 것은 사실. 그녀는 매 장마다 연암과 푸코의 1차 서적에서 따온 글귀를 하나씩 실어놓고는, 자신의 주변에서 직,간접 경험했던 물음 몇 가지를 던져놓는다. 그리고는 근대성을 향해, 근대성을 깨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출구에서 앞서 살펴본 텍스트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하며 마무리 짓고 있다.

  이 책은 어렵다. 내용이 어렵다기보다 읽어나가기가 어렵다. 천천히 한줄한줄 정성들여 읽어나가면 푸코와 연암을 만나고, 전사와 나비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전 리라이팅이라고는 하지만 쉽게 부담없이 지하철 간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연암과 푸코의 1차 서적을 읽는 만큼이나 정성을 들여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고미숙씨가 이 작업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짐작이 간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자기노력을 투자해서 얻어낸 사유물이고 결과물일  것이다. 독자가 그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이에 적합치 않는 상태라는 것을 말해둔다. 내가 이 책을 읽기는 읽었으되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한줄한줄 따라가며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는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책 전체가 나타내고 있는 바는 깨닫지 못했다. 너무나 많은 자료를 토대로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읽는 내내 정신이 없었던 책이다. 나중에 다시 접하게 될지 어떨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 이내 서평이 마음에 걸린다.
   제대로 차근차근 읽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시간을 갖고 제대로 다시 읽고 서평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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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1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대로 생각하면 이 책을 통해서 연암,푸코에 입문하고 역사,한문 공부의 계기가 될수도 있죠.

마늘빵 2006-05-1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뽀뽀님 반대의 방식도 좋겠지만, 음. 그게 더 어려울 거 같아요. 이 책은 다 읽고나면 머리에 남는게 없을거란 생각이에요. 소설이라면 그래도 상관이 없겠는데, 뭔가 지적인 습득을 기대하고 봤던 책인데 남는게 없다면 이 두꺼운 책을 다 읽고 허무할 거 같아서요. 그래서 그냥 속독해버렸죠.

하늘바람 2006-05-1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렇군요 전 아직 구경도 못해보아서 궁금할 따름이에요

비로그인 2006-05-13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 어렵다니까 더 읽고 싶어지는군요.

마늘빵 2006-05-13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여유를 갖고 찬찬히 읽으면 읽혀요. 제가 빨리 읽으려고 해서 그런건지도 몰라요. 근데 읽고나면 아무것도 기억나는게 없을거 같은 불안감이 있긴 해요.

비로그인 2006-05-13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는데 도움될만한 서적은 없을까요?

마늘빵 2006-05-1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연암과 푸코의 1차 서적을 먼저 읽으면 좋을지도. 근데 그것도 쉬운 작업은 아니죠. 흠.

비로그인 2006-05-1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암건 그렇다 쳐도 푸코껀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가넷 2006-05-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땅에 해딩하는 거죠.ㅎㅎㅎ;;

마늘빵 2006-05-13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찾아서님 / 음. 일단 푸코를 검색해보세요. 책이 몇 권 나올거에요. 뭘 먼저 읽으라고는 말씀을 못드리겠어요. 저도 푸코에 대해서는 <성의 역사> 1권가지고 수업을 듣긴 했습니다만 잘 모릅니다. <지식의 고고학> <성의 역사> 1,2,3권,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 <담론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이 있죠.
야로님 / 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에요. 고전 리라이팅이라는건 고전에 좀더 친숙하게 다가가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음. 제대로 즐기자면 고전을 두루 거친 독자가 읽는게 더 낫다는 생각입니다.

책방마니아 2006-06-05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이 게 아프락사스 자네가 말한 그 책이군. 서평 쓰기 무지 힘들었겠군 ^^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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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의 공간적 표상이 바로 시계다. 근대적 시간은 시계에 의해 지배된다. 시계는 시간을 잘게 쪼개서 공간적으로 위치시켜놓은 기계다. 처음엔 시간을 표시하기 위한 도구였던 시계가 곧바로 인간의 신체를 지배하는 존재로 전도된다. 시계를 신체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문명적 신체가 되는 첫번째 코스다. -40쪽

결국 문명과 비문명 사이의 경계는 시간을 얼마나 잘개 쪼개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어떤 태도로 전유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즉, 시간-기계 란 하루를 분 단위로 잘게 쪼개서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이 곧 금 이라는 명제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43쪽

사이성이 사라진다는 건 대상과 대상 간에 확연한 위계가 설정됨과 동시에 주인과 노예의 권력관계가 구성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관계 안에선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노예는 물론 주인조차도. 인간과 우주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우주를 소유할 수 있되, 결코 그것과 함께, 혹은 그 속에서 공명의 춤을 출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근대인의 시공간이다. -58쪽

근대 이후의 역사서는 구체적인 궤적에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민족의 기원과 유래를 설정하고 그 웅대한 자취를 기술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때 역사란 신분과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과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프로젝트에 해당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지적인 충돌과 차이들을 지우고 '국민'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역사를 공통의 기억으로 전유하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역사서술에서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사서적 통일성이 요청된 것도 그 때문이다. 연대기적으로 듬성듬성 나열되기보다 사건들 사이가 촘촘하게 이어지면서 주체와 동기들이 명료하게 부여되었다. 말하자면 하나의 완결되고 잘 짜여진 이야기로서의 역사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민족의 '대서사'로서의 역사, 이 대서사야말로 근대 민족담론에 피와 살을 입힌 장본인이었다. -68-69쪽

결국 근대 역사는 현재를 향해 달려오는 과거,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현재라는 단 하나의 평면만 존재하는 셈이다.
이 평면을 이끌어가는 척도가 바로 진보다. 미개와 진화, 야만과 문명의 차이는 결국 시간적 차이를 지칭하게 된다. '아직 이른' 좀더 늦은' 등의 언표들이 자연스럽게 쓰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그런 기준에 따르면, 역사가 진보한다는 건 앞의 시기가 뒤의 시기보다 열등한, 달리 말하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성숙해지는 수직적 위계를 지닌다. -78쪽

노마드의 여정에는 목적지가 없다. 아니,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해야 맞다. 따라서 그는 여정마다에서 마주치는 온갖 대상들과의 능동적 접속을 시도한다. -84쪽

동양적 사유에서 악은 기본적으로 불선(不善), 곧 선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악이란 결코 본래적으로 선에 대항하는 것은 아니며 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에 이름 붙인 것일 따름이다"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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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13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마늘빵 2006-05-1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녀. 속독 했습니다. 음. 이거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읽기엔 제가 부족한듯 합니다. 받은 책이니 서평은 써야겠고 해서 속독했습니다.

가넷 2006-05-13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려는데 제가 볼만한 책인지 모르겠네요..-_-;

마늘빵 2006-05-13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생각보다 쉽지 않군요. 어렵다기보다 정신이 없어요.

비로그인 2006-05-13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랑..전 이 책 리뷰써서 벌써 탱스투 2개 받았어요.

마늘빵 2006-05-1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방금 리뷰 올렸어요. 제겐 별 소득이 없었던 책입니다.

사마천 2006-05-13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집트의 술탄은 근대를 받아들이기 위해 오래된 오벨리스크를 주고 시계를 받았습니다. 지금 보면 우스은 거래지만 당시에는 상징하는 바가 컸습니다. 문장이 꽤 뛰어나군요. 한번 보아야겠네요.

마늘빵 2006-05-13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두번째 장이 전 재밌었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시간에 쫓겨 읽었기 때문인지 그닥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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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먼저 접한 <오만과 편견>은 소설 속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아니 거꾸로 소설 <오만과 편견>이 영화로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터이나, 내겐 영화가 먼저였고, 소설이 나중이었으니, 영화가 소설 속에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터이다. 고전이라는 것은 이미 당대의 베스트셀러에서 오늘날의 스테디셀러로 변신을 거듭한 많은 이들로부터 검증받은 책이다. <오만과 편견> 역시 우리가 흔히 고전의 반열에 쉽게 올려놓을 수 있는 작품이지만, 이 책은 처음엔 출판이 힘들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퇴짜맞고 집구석에 오래묵혀두었다가 나중에 작가 제인 오스틴의 인생말엽에 가서야 대박 터졌다고 하니, 작품을 알아보는 이를 만나는 것도 '고전'의 조건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연애소설이다. 근데 꽤나 긴 연애소설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남자와 여자의 탄생 이후부터 생겨난 케케묵은 진부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새롭다.사랑을 주제로 시를 쓰고, 사랑을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사랑을 주제로 소설을 쓰고, 사랑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고, 사랑을 주제로 영화를 만든다. 사랑은 인류가 망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써먹힐 소재다. 같은 '사랑'을 주제로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항상 새롭고 신선하다.

  <오만과 편견>은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 오만에 빠진 한 남자와 편견에 사로잡힌 한 여자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재력가이고 미남이지만 사람들에겐 오만방자하고 버릇없는 녀석으로 찍힌 다아시와 도무지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까칠한 엘리자베스. 활동적이며 자기주장 강해 할 말 다하는 지적인 여자다. 어려서부터 정식으로 가정교사에게 뭐 배운 것 하나 없어 피아노도 못치고 그림도 못그리고 당대 '우아한 여성'들이 갖춰야 하는 재능은 하나도 갖춘 것 없지만 성격하나는 화끈하고 깔끔한 여자. 딱 오늘날의 여성상이다.  

  오만한 남자와 까칠한 여자가 만났으니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릴리 없지. 다아시는 그녀를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딱 부러지게 말하고 활동적이고 밝고 지적인 그녀가 좋아졌고, 엘리자베스 또한 오만하고 예의 없는 신사답지 못한 다아시가 싫었지만 그의 진면모를 알게 된 후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만나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툴툴 거리고 티격태격 싸우던 그들은 정말 '싸우다 정든다'는 우리의 옛말 처럼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소설은 매우 오랜 호흡에 걸쳐 두 사람의 감정의 변화를 다루고 있어 조금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 티격태격 싸우는 꼴이 나에겐 너무나 재밌었다. 좋아하면 괴롭힌다. 어릴 때건 다 커서건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괜히 심술부리고 딴지걸고 장난치고 그런다. 그러면서 상대를 파악하고 좋아지면 사랑에 빠져버린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싸움은 내겐 그렇게 보였다. 서로 좋아하면서 마음을 숨긴채 정반대로 표현하는. 아유 귀여운 것들.

  반면 제인과 빙리의 사랑은 그저 지고지순한 사랑 그 자체다. <오만과 편견>은 오만한 남자와 편견에 빠진 여자의 사랑뿐 아니라 다양한 사랑의 유형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사랑 말고도 이 책에선 '제인과 빙리의 사랑' '콜린스와 샬럿의 사랑' 그리고 '위컴과 리디아의 사랑' 이렇게 세 쌍의 커플이 더 등장한다.

  제인과 빙리의 사랑 :  한 눈에 반해버린 사랑. 그러나 오래도록 지속되는 사랑. 순수한 두 남녀의 사랑. 제인과 빙리의 사랑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지만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눈으로 말하는 사랑. 두 사람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나 사랑한다 말도 못하고 오랜 세월은 흘려보낸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 덕에 오해를 낳고 결국 오해는 이해로 변해 다시 사랑을 되찾긴 했지만 말이지. 정말 순수한 사랑.

  콜린스와 샬럿의 사랑 : 현실적인 사랑. 못생기고 키 작은, 외모로는 도저히 승부가 안되고, 게다가 성격까지 이상한(?) 그는 오직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교구 목사직이라는 직업을 통해 많진 않지만 평생 수입이 보장되고 명예도 가지고 있다. 나이들고 그다지 이쁘지도 않은 샬럿은 청혼하는 이 없어 노처녀로 늙어 죽을까 걱정하지만 콜린스로부터 청혼을 받고 바로 수락한다. 그의 명예와 돈을 보고서 선택한 결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는 현실을 택했다. 오늘날의 현실에서 많은 커플들이 이렇게 맺어지지 않을까. 서로 말은 안하지만.

"콜린스 씨는 똑똑한 사람도, 함께 있기에 즐거운 사람도 분명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루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도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남편을 갖게 될 것이었다. 남자나 혼인 관계 그 자체를 중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언제나 그녀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p177)

  위컴과 리디아의 사랑 : 한 눈에 반한 사랑은 맞긴 맞는데 한쪽에서만 한눈에 반한 사랑이다. 다른 한쪽은 돈을 노린 사랑. 사기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자가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걸 어쩌랴. 그것이 사랑인지 열정인지 모르겠다만 좋아 죽겠다는데. 남자가 바람둥이인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여자가 그것도 용인할 수 있다면야 썩 나쁜 맺음은 아니다.

  수많은 커플들이 팔짱을 끼고 다니고 키스를 하고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이며 그들 중 일부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공식평생커플로 거듭난다. 넌 내꺼야. 1700-1800년대의 영국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했다고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사랑의 장면들은 지금의 우리네와 다르지 않다. 재고 따지고 오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하는 모든 행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어떤 커플은 순수한 사랑으로 맺어지고 어떤 커플은 평생의 경제적 여유를 택하며, 어떤 커플은 한 사람의 사랑으로 맺어지고, 어떤 커플은 원수에서 연인으로 변신한다. 사랑은 하나지만 사랑은 여러가지다. 이 세상 모든 커플들의 사랑은 모두 각각 다르다. 그들은 그들만의 사랑의 방식으로 사랑을 나눈다. 그 어떤 것이 거짓이고 그 어떤 것이 진실이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소설 속의 커플들에게서 '제인과 빙리의 사랑'과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랑'만을 진실된 사랑으로 뽑기 쉽지만 그건 우리의 사랑에 대한 또다른 편견.  그 어느 것도 거짓되다 진실되다 말할 수 없다.    <오만과 편견>은 사랑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져주고 생각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소설에 드러난 네 가지의 사랑 방식 중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랑'의 유형을 선호한다. 그들이 소설의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난 그런 사랑을 꿈꾼다. 내가 오만방자하고 거만하니 까칠하고 자기주장 분명한 여자 하나 구하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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