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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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모토 바나나의 초기작이다. 바나나의 작품을 손이 짚히는대로 읽다보니 뒤죽박죽이지만 대충 후기작을 먼저 접하고 초기작으로 역주행 중이다. 그러다보니 비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둘다 맘에 들지만, 좀더 어둡고 침울한 후기작보다는 여전히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밝고 산뜻한, 그리고 깔끔한 초기작이 더 맘에 든다. <하치의 마지막 연인>은 어리지만 각자 나름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하치와 마오의 이야기다.

  "너는, 머리가 이상해지든지, 아니면 그림을 그리게 될거다. 아무리 애원해도, 여기의 뒤를 이으면 안돼.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이상해질 거니까. 그림은 괜찮다. 지금 이대로는 안 돼. 굉장히 멀어. 그 열쇠는 인도에서 온,  음 그러니까,  그 훌륭한 개의 이름... 하치공, 그래, 하치라는 아이한테 있어, 너는 하치의 마지막 연인이 될거다

   도통 무슨소리인지 감이 안오는 할머니의 유언. 마오는 정말 할머니의 엉뚱한 말대로 인도에서 온 하치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연인이 되었으며,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고, 결국 할머니의 말대로 하치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마오 자신이 그의 마지막 연인이 되는 운명을 겪게 된다. 할머니의 그 이상한 유언이 주술이 되어 나타난건지, 아니면 어쩌다 우연히 할머니의 유언과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하치의 마지막 연인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상처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은 부모님의 이혼 혹은 나를 아끼던 할머니의 죽음, 아니면 나의 절친한 친구의 죽음 등등 참 여러가지 형태를 가지고 소설에 등장하지만 어쨌든 공통적인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맺음에 있어서의 상처받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직 어리지만, 어림에도 불구하고 온전하지 못한 집안에서 성장한 마오.

  우리집은 <종교 단체 비슷한 곳>이요, 할머니는 여기를 이끌고 있고, 엄마는 여기를 드나드는 남자들과 인연을 만들고, 나는 이런 우리집안과 할머니와 엄마가  싫다. 누구도 나와 대화하지 않으며, 나는 단절되어 있다. 고립되어 있다. 사랑받고 싶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온전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지만 나에겐 어렵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엔 벽이 생겨버렸고, 바깥세상과 단절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한 남자아이가 내 안에 들어왔고, 그는 나를 사랑했으며, 나는 그를 사랑했으며, 그는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나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온전한 관계맺음을 해나갈 수 있는 통로였다. 사랑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떠나갔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는 떠나갔지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란 것을.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 나는 하치를 잊지는 않지만, 잊으리라.
   슬프지만, 멋진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마오는 이제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 사람을 사랑한다. 자신을 사랑한다. 어느 한 순간 그녀를 스쳐간 이 짧은 사랑의 상처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더 많은 상처를 치유해줬으며, 그녀가 자라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사랑은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히 내 안에 들어왔고,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히 내 안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그를. 그리고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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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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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을 증오했던 것은 아닌데, 늘 꿈속처럼 생의 모든 장면이 멀고 뿌옇기만 했었다. 많은 것들을 아주 가깝게 느끼거나 부자연스럽게 멀리 느꼈다. -7쪽

단 한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26쪽

옷을 벗는 하치를 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는 언제나 보고 있을 뿐, 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을 뿐, 거기에 나 자신은 없다.
방황하는 혼 같은 것이다. 방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봉제 인형이다.
하지만 살아있다, 손길도 닿지 않았는데 젖어드는 부분이 있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는 심장이 피를 순환시킨다.
하치의 벗은 몸이 낯익은 무엇처럼 내 눈에 비쳤다.
인형의 눈이었던 내 눈이 갑자기 뜨이고, 온 몸의 기관과 함께 움직이며 욕망을 반영하였다. 태어나 처음 본 동물을 어미로 여기고 따르는 병아리처럼 첫 욕망을.
그에 화답하듯 하치는 금방 삽입하였다.
하치 자신이 이불 속으로 삽입된 지, 불과 5초 만에.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런 경우, 순서는 차치하고.
빨리, 어서 빨리 고정시킨다. 이 기분을, 그 구멍 속에다. 서둘러, 갈 수 있는 데까지.-39-40 쪽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질 때까지 떨어져 있으면 돼"
"무슨 소리야?"
하치가 말했다.
"이 세상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잖아? 아무리 해도.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안되는 사람"
"그래서"
"하지만 그 사람도 죽잖아. 똑같이,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사람도 좋아했다가, 죽잖아? 그런 생각이 들면, 용서해 주자고 생각하기도 하고, 싫어할 수 없게 되잖아. 그건 멀리서 본다는 거야. 저 파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빛하고 구름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도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이 상쾌하면, 용서하잖아? 그럭저럭 좋아지잖아?"
나는 의기양양한 기분이었다. 이 분야는 내 전문이므로. 무엇을 어떻게 얘기해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손에 자랐으므로.-55쪽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이 세상으로 통하는 무지갯빛 다리를 놓아주고, 생의 한 때를 지탱해 주는 것은 우리네들 삶 속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랑에 생활이 개입되면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변하고 사랑 또한 증오와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가공의 사랑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환상의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리라. (옮긴이의 말 中)-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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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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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사랑의 아픔을 겪은 남자 혹은 여자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일단 제목에서부터 철저하게 배신을 때린 - 뭐 그게 나쁘다는건 아니고 - 이 소설은 책 내용에 있어서도 또 한번의 배신을 때린다. 야구방망이로 세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이 느낌(니가 야구방망이로 맞아봤어?). 작가 우타노 쇼고는 아주 계획적으로 독자를 속이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여자의 살갗은 촉촉히 젖어있다. 절정에 다다르면서 그녀의 몸은 열기를 띠며 끈끈한 땀을 내보냈다. 지금은 그 몸이 식으면서 내 몸의 열기를 빼앗아 간다. 고동 소리가 들린다. 귀로 듣는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살갗에서 살갗으로 전해지는 그 소리에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울림에 마음이 편해진다. 어머니의 태내에 있었을 때는 하루하루가 매일 이런 느낌이었으리라."

  제 1장 만남의 한 대목이지만 이 소설은 매우 진하게 시작한다. 한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하고 남자는 여자의 살갗을 어루만지며 생각한다. 느낀다. 아주 제대로 침대위의 두 남녀를 묘사하고 남자의 머리 속에서 펼쳐지는 생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은 5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소설의 이후 내용에 기대를 품게 만든다. 잔뜩 들뜨게 해놓고 실망시키기만 해봐라.

 1장을 읽고 당연히 연애소설이라 여겼던 나의 생각은 이내 곧 여지없이 무너진다. 남녀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 아니 물론 남녀간의 이야기도 있지만 - 사립탐정 수사물이다 완전. 그렇다고 나쁘다는건 아니고. 잠깐 탐정사무소에 나갔었다고 친구(?)의 사건에 깊숙히 참여해 아예 조사를 하고 다니다 목숨까지 위태로워지는 상황까지 맞이하고. 대단한 열정을 가진 친구다. 결국 그는 당연하게도 사건을 마무리짓지만 사건이 마무리되는 것이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다. 사건을 뒤집어 헤치고 해결하는 그 스릴넘치는 과정은 맛배기였다. 진짜배기는 절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이미 읽은 독자가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 안돼 너는 절대 속지마, 명심해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라고 미리 경고해준다고 해도 절대로 작가의 트릭을 빠져나갈 수 없다. 정말 의외의 곳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나니. 고정관념을 팍 깨버리는 소설이었다.

  적어도 추리소설이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괴도 루팡, 셜록 홈즈, 아가스 크리스티와 같은 유명 추리소설에서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예상할 수 없는 함정.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기에, 또 그가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치밀한 구성을 만들어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책 마지막 장을 덮고서, 어이 없이 속아버린 나 자신에 대해 허탈한 웃음을 한방. 허허.

  <트릭에 속지 않는 법>
  1.모든 등장인물들은 괜히 설정된 것이 아니고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2.사건해결의 스릴을 즐겨라. 하지만 거기에만 빠져서는 안된다. 그럼 속는다.  
  3. 고정관념을 깨라. 당신이 가진 모든 고정관념을 없애라. 
  4. 하지만 당신은 100% 속을 것이다. 내 장담한다. 위의 세 가지 경고를 미리 줬음에도 당신은 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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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06-0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등장인물에 속고. 고정관념에 속고..스릴 그 속에만 빠졌다가 또 속고..

마늘빵 2006-06-0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계속 다 속았어요. 저도. -_-;;
참 치밀한 녀석이에요. 이 작가.

물만두 2006-06-0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그래서 재미있잖아요^^

마늘빵 2006-06-0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 많이 속아서 재밌어요. 추리소설은 그 재미죠. 트릭에 속아넘어가는 재미. 아 너무 철저했어요. 의심조차할 수 없는.

moonnight 2006-06-08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저도 이 책 재밌게 읽었어요. ^^

전호인 2006-06-0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넘 서정적이라서 찾아왔는 데.......님의 실망하시는 글을 보니.......저는 제목에 속은 건가여. ㅎㅎㅎ
"벚꽃지는 계절에........"

마늘빵 2006-06-0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나잇님/ 재밌죠?! ^^ 저도요.
전호인님/ 엇 실망이 아니고, 속아넘어간 것에 대한 넋놓음인데요. ^^
 
자살 살림지식총서 222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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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하나. 스칸디나비아에 거주하는 햄스터같이 생긴 쥐 레밍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을 한다.
하나. 세계적으로(국내포함) 유명한 사람들 중 자살한 이들이 많다.
-배우 이은주, 음악인 커트코베인, 배우 장국영, 철학자 들뢰즈, 가수 김광석, 서지원 등등 
하나.  누구나 한번쯤 자살 충동을 느낀 적 있다. 정말?
하나. 2002년도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죽은 사람들은 총 8,631명으로 사망자 100명당 4명이라고 한다.


  많은 목숨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지만, 또 심리학, 철학, 사회학 등등의 분야에서 자살에 대해 여러각도에서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내고 미리 방지하고자 하지만 여전히 자살자는 존재한다. 왜, 어떤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일까. 수 억개의 정자가 하나의 난자를 만나 어렵게 수정되고, 열 달을 기다려 어렵게 세상의 빛을 보지만 그 소중한 목숨을 포기하는건 한 순간이다. 쉽다고는 말 못한다. 어렵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무섭다.

  자살은 죽음의 한 종류이다. 죽음을 말함에 있어 자살을 말하지 않는 것은, 일부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살은 쉽게 말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남에 대해서 말할 수 없듯 죽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태어남과 죽음은 모든 인간이 한번씩만 경험하는 것이고, 태어나기 전 그리고 죽은 후 우리는 그 경험을 풀어놓을 수 없다. 쉴러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한번, 죽음도 한번, 태어남도 한번, 소멸도 한번뿐이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에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고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색과 고찰은 인간의 '이성'의 영역으로 죽음을 들여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망설인다. 죽음을 고찰하는 것에 대해서.

  이 책은 죽음, 그 중에서도 자살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어떤 결론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의식하지 않고 지내던 죽음에 대해, 자살에 대해 의식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다. 가까이에서 벌어지지만 무심코 지나가는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 자살에 대한 해석

  예로부터 자살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후기까지 자살은 신성에 대한 모독이며, 인간에 대한 범죄이며 자기자신에 대한 살인이므로 죄악으로 여겨졌으며, 18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자살'이라는 단어가 생겨났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자살을 희생으로 간주하여 하나의 병리적 현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살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도, 자살을 선택의 문제로 보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자살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철학자와 정치가에 한해서였다. 황제에게서 총애를 잃어버린, 신임을 받지 못하는 정치가의 경우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도리를 다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이마신 것은 방법적 차원에서 스스로 마신 것이니 자살이지만, 국가에 의해 강제로 명령된 경우이니 순수한 자살로 보기 어렵다.

  19세기의 자살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된다. 하나는 프로이드가 대표적인 경우로, 자살을 광기나 우울증, 신경쇠약, 자아분열과 같은 의학적, 심리학적 병리현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뒤르켐의 경우로,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며,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발생하는 집합적 증후로 간주하는 경우이다. 순수하게 개인에게 국한된 현상이냐 아니면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냐, 이렇게 두 가지 해석이 존재했다. 나는 그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라고 말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시대에 따라, 개인의 환경에 따라, 자살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쳐서 자살한 경우야 프로이드식의 해설에 더 적합하겠지만, 청백리로 알려졌던 인물이 한 순간의 작은 죄악으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 이는 프로이드보다는 뒤르켐의 해석을 따라야하지 않을까.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사망자 100명당 4명의 자살자는 대개 사회적 차원에서의 자살이 아닐까. 돈이 없고, 백도 없고, 살기 막막하고, 에라 모르겠다 세상아 같이 죽자, 자식 내던지고, 아내 살해하고, 나는 불태우고. 뒤르켐은 자살의 진짜 원인은 개인이 사회에 통합되는 정도와 그가 정신적으로 수행하는 적응하려는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보다 시골에서, 카톨릭보다 신교사회에서, 전통적 가족구조에서보다 이혼율이 높은 가족구조에서 자살율은 높게 나타난다.

  - 자살은 권리인가, 불가피한 선택인가

   자살에 관해서 많은 문제들이 얽혀있다. 위암 말기환자이고 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죽음에 점점 다가가고 있고, 죽음이 결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러나 너무나 고통스럽다. 고통을 견디며 죽어가는 것 보다 좀더 인간적으로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 허락해달라. 안락사의 문제이다.

  안락사에 관한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인간의 목숨은 하느님이 주신거다. 어떻게 감히 인간인 너 따위가 죽음을 선택하려 드느냐는 기독교식의 논리에서 내가 나의 생사를 선택하겠다는데 남이 왜 참견이냐고 말하는 죽음의 권리를 내세우는 사람까지. 그 중간에는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의견들이 놓여있다. 안락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순수하게 개인의 영역에 던져주지 못하는 것은, 안락사와 관련되어 사회적 범죄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며, 허가했을 때 사람들이 더 쉽게 어려운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허가하지 않자니 고통받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조차 주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보아도 자살에 대해서 모두 의견이 가지각색이었다.

  "자살이란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빚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자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그리고 만일 이것이 의도적이고 자유롭게 영속적으로 행해진다면 오직 신에게만 속하는 권한을 사취하는 신에 대한 범죄이므로 자살은 치명적인 죄악으로 간주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방법이 죽음 말고는 다른 것이 없을 때 이 세계를 떠날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오직 철학자에게만 속하는 지고의 존엄이다" (세네카)

  "만일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만일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자살 또한 허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의 본질에 관한 문제다. 자살은 말하자면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알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수증기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수은 증기를 만져보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런데 자살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트겐슈타인)

  형제가 셋이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을 보았던 비트겐슈타인조차도 자살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게 답변하고 있다. 자살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는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는 끝없는 논쟁의 영역에 놓여있다. 어릴적 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실행에 옮겨본 적은 없다.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내가 자살을 하려고 한 이유는 내가 너무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나를 억압하는 부모님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슬퍼하겠지, 하는 생각에 자살을 생각해봤으나 단지 '생각'의 차원이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쉽게 비난한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으면서. 그 사람이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 이해해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 혹은 그녀를 비난한다. 아직까지 자살은 죄악이라는 의식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살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적어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존중해줄 필요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키에르케고어의 말은 되새겨 볼만하지 않을까.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곳에서 (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를 위해 걱정해 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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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6-0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책도 있었네요. 재미있겠네 ...
살림 지식 총서 중에는 꽤 알찬 책들이 제법 있더라구요. :-)

마늘빵 2006-06-0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살림지식총서 제가 책 주문할 때 가격 맞춰 주문하려고 종종 집어넣어요. 괜찮은 책 많아요. <르 몽드> 좋았고, <자살>도 좋고요.

가넷 2006-06-0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에서 몇권은 30% 할인 하더군요..-_-;;;(이 책말구요. 흠.)30%할인 하는 책 몇권은 교보에서... 지를려고 하는 중이여요..ㅎㅎ 르 몽드랑, 뉴에이지, 커피이야기 2004년도에 나온 몇권은 30%하던...^^ 흠.;

마늘빵 2006-06-0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이 싼 값에 더 할인해요? ^^ ㅎㅎ
전 그냥 다른 책 주문할 때 끼워서 하나씩 천천히 볼래요.

비로그인 2006-06-0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미셸 푸코가 자살했어요? 들뢰즈가 자살하고 푸코는 에이즈로 죽지 않았나요?

마늘빵 2006-06-0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자꾸때리다님/ 들뢰즈랑 푸코 착각한거 맞습니다. 얼른 고쳐야겠다.
 
영화음악 : 불멸의 사운드트랙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64
박신영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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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가 3,300원, 분량 1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책에 애초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살림지식총서를 관심주제에 따라 골라가며 접해본 나로서는 이 책은 약간 실망이다. 책으로 내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기보다는 개인 블로그나 영화 사이트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물론 그 역시 모아지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책을 낼 수 있으나, 이 책을 구입할 때 애초 기대한 바는 '영화음악'에 대한 좀더 넓고 깊이있는 '무엇'이었다. 영화와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개인이 오랜 세월 영화를 접하고 또 영화 속 음악을 접하고 느껴온 바를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서술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음악은 글쓴이의 말마따나 이제 더 이상 영화 못지 않게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하나의 영역이다. 하지만 영화 음악이란 것은 영화가 없이는, 영화의 존재를 아래에 깔지 않고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영역이다. 영화를, 영화 속의 장면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영화음악의 존재의미이기 때문이다. 나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영화를 빛내주는 영화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했고, 고등학교 시절 OST가 original sound track 의 약자인 것도 모르고, 음반점에서 OST 주세요, 했던 나의 무지함은 이제 없다. 그때 그 얼굴 빨개지고 땀 뻘뻘 흘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의 영화음악은 아마도 영화 <접속>부터 붐이 일지 않았나 싶다. 저자도 책 어딘가에서 그런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접속OST는 당시 엄청나게 팔렸으며, 이후 <쉬리>에서의 'when I dream' 역시 영화만큼이나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근 10년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영화음악은 참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고, 영화음악의 한 가운데서 주목받고 있는 자는 '이병우'와 '조성우'를 들 수 있을 터. 나 역시 이 두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너무 많은 영화음악 제작에 참여해 그간 형식의 다양성은 많이 늘어났지만, 작곡가의 다양성은 오히려 퇴보하지 않았나 싶다. 원래 기타리스트 였던 이병우씨는 순수하게 기타리스트로서보다는 영화음악가로, 조성우씨 역시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봄날은 간다>의 영화감독 허진호와는 친구사이이다 - 홀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어쩌면 취미로 시작해 성공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자금이 뒤따라준다면 영화를 보고 마음에 드는 영화음악음반을 죄다 구입해 감상하고 싶지만 현실로 눈을 돌렸을 때 누추한 나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저 후일의 꿈으로 미뤄둔다. 글쓴이의 영화와 영화음악에 대한 개인적 감상과 해설로 인해, 이미 봤던 영화이지만 다시 보고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시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땐 영화음악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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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08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멜리에의 영화음악이 생각나요. 그녀가 물수제비를 뜨던 순간에 들리던 음악은 정말 슬프면서도 경쾌한, 봄같았어요. 러브 액츄얼리도 좋았지요. 가끔은, 내가 서있는 이곳에 BGM이 흐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어요.

마늘빵 2006-06-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쥬드님 감성적이세요. 아멜리에는 전 아직 못봤어요. 러브 액츄얼리는 정말 좋았죠. 음악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하지만 제가 영화를 좋게 본 것은 배경에 흐르는 음악이 영화를 돋보이게 했다는 증거겠죠. 다시 보고 싶군요. 전에 디비디 사놓은것두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