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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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을 증오했던 것은 아닌데, 늘 꿈속처럼 생의 모든 장면이 멀고 뿌옇기만 했었다. 많은 것들을 아주 가깝게 느끼거나 부자연스럽게 멀리 느꼈다. -7쪽

단 한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26쪽

옷을 벗는 하치를 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는 언제나 보고 있을 뿐, 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을 뿐, 거기에 나 자신은 없다.
방황하는 혼 같은 것이다. 방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봉제 인형이다.
하지만 살아있다, 손길도 닿지 않았는데 젖어드는 부분이 있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는 심장이 피를 순환시킨다.
하치의 벗은 몸이 낯익은 무엇처럼 내 눈에 비쳤다.
인형의 눈이었던 내 눈이 갑자기 뜨이고, 온 몸의 기관과 함께 움직이며 욕망을 반영하였다. 태어나 처음 본 동물을 어미로 여기고 따르는 병아리처럼 첫 욕망을.
그에 화답하듯 하치는 금방 삽입하였다.
하치 자신이 이불 속으로 삽입된 지, 불과 5초 만에.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런 경우, 순서는 차치하고.
빨리, 어서 빨리 고정시킨다. 이 기분을, 그 구멍 속에다. 서둘러, 갈 수 있는 데까지.-39-40 쪽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질 때까지 떨어져 있으면 돼"
"무슨 소리야?"
하치가 말했다.
"이 세상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잖아? 아무리 해도.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안되는 사람"
"그래서"
"하지만 그 사람도 죽잖아. 똑같이,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사람도 좋아했다가, 죽잖아? 그런 생각이 들면, 용서해 주자고 생각하기도 하고, 싫어할 수 없게 되잖아. 그건 멀리서 본다는 거야. 저 파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빛하고 구름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도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이 상쾌하면, 용서하잖아? 그럭저럭 좋아지잖아?"
나는 의기양양한 기분이었다. 이 분야는 내 전문이므로. 무엇을 어떻게 얘기해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손에 자랐으므로.-55쪽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이 세상으로 통하는 무지갯빛 다리를 놓아주고, 생의 한 때를 지탱해 주는 것은 우리네들 삶 속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랑에 생활이 개입되면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변하고 사랑 또한 증오와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가공의 사랑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환상의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리라. (옮긴이의 말 中)-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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