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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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모토 바나나의 초기작이다. 바나나의 작품을 손이 짚히는대로 읽다보니 뒤죽박죽이지만 대충 후기작을 먼저 접하고 초기작으로 역주행 중이다. 그러다보니 비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둘다 맘에 들지만, 좀더 어둡고 침울한 후기작보다는 여전히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밝고 산뜻한, 그리고 깔끔한 초기작이 더 맘에 든다. <하치의 마지막 연인>은 어리지만 각자 나름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하치와 마오의 이야기다.

  "너는, 머리가 이상해지든지, 아니면 그림을 그리게 될거다. 아무리 애원해도, 여기의 뒤를 이으면 안돼.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이상해질 거니까. 그림은 괜찮다. 지금 이대로는 안 돼. 굉장히 멀어. 그 열쇠는 인도에서 온,  음 그러니까,  그 훌륭한 개의 이름... 하치공, 그래, 하치라는 아이한테 있어, 너는 하치의 마지막 연인이 될거다

   도통 무슨소리인지 감이 안오는 할머니의 유언. 마오는 정말 할머니의 엉뚱한 말대로 인도에서 온 하치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연인이 되었으며,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고, 결국 할머니의 말대로 하치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마오 자신이 그의 마지막 연인이 되는 운명을 겪게 된다. 할머니의 그 이상한 유언이 주술이 되어 나타난건지, 아니면 어쩌다 우연히 할머니의 유언과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하치의 마지막 연인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상처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은 부모님의 이혼 혹은 나를 아끼던 할머니의 죽음, 아니면 나의 절친한 친구의 죽음 등등 참 여러가지 형태를 가지고 소설에 등장하지만 어쨌든 공통적인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맺음에 있어서의 상처받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직 어리지만, 어림에도 불구하고 온전하지 못한 집안에서 성장한 마오.

  우리집은 <종교 단체 비슷한 곳>이요, 할머니는 여기를 이끌고 있고, 엄마는 여기를 드나드는 남자들과 인연을 만들고, 나는 이런 우리집안과 할머니와 엄마가  싫다. 누구도 나와 대화하지 않으며, 나는 단절되어 있다. 고립되어 있다. 사랑받고 싶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온전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지만 나에겐 어렵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엔 벽이 생겨버렸고, 바깥세상과 단절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한 남자아이가 내 안에 들어왔고, 그는 나를 사랑했으며, 나는 그를 사랑했으며, 그는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나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온전한 관계맺음을 해나갈 수 있는 통로였다. 사랑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떠나갔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는 떠나갔지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란 것을.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 나는 하치를 잊지는 않지만, 잊으리라.
   슬프지만, 멋진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마오는 이제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 사람을 사랑한다. 자신을 사랑한다. 어느 한 순간 그녀를 스쳐간 이 짧은 사랑의 상처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더 많은 상처를 치유해줬으며, 그녀가 자라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사랑은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히 내 안에 들어왔고,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히 내 안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그를. 그리고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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