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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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난 일을 날마다 기록하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일이 없지 않아 내 한 몸에 모여든 일이 언제고 그치지 않는다. 따라서 날이 다르고 달이 다르다. 무릇 사람의 일이란 가까우면 자세하게 기억하고 조금 멀어지면 헷갈리며, 아주 멀어지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일기를 쓴다면 가까운 일은 더욱 자세하게 기억하고, 조금 먼 일은 헷갈리지 않으며, 아주 먼 일도 잊지 않는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은 일기로 인해 행하기에 좋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은 일기로 인해 조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기란 것은 이 한 몸의 역사다.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나는 글을 배운 이후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3,700날 남짓을 살아왔다. 3,700날 동안 있었던 일을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면 꿈을 꾸고 깨어나서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번개가 번쩍번쩍하여 돌아보면 빛이 사라진 것과 같다. 날마다 기록하지 않아서 생긴 잘못이다. (유만주 <흠영>) -27쪽

가난한 집에 가진 거라곤 책 다섯 수레뿐
그것을 제외하면 남길 물건이 전혀 없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서책을 못 떠나니
전생에는 틀림없이 좀벌레였나 보다

(하곤 <책을 뒤적이다>(檢書)) -84쪽

동씨가 세 가지 여가에 독서하다
1,2가 나오면 사언의 글을 짓고, 3,4,5,6이 나오면 오언시를 지으랴. 동우는 자신을 찾아와 배우겠다는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먼저 백 번을 읽어라. 그러면 뜻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하기만 했다. 여유가 없어 글 읽기가 힘들다고 말한 제자가 있었다. 동우는 세 가지 여가 시간에 공부하라고 했다. "세 가자ㅣ 여가란 무엇입니까?"라고 누군가 물었다. 동우의 답은 이랬다. "겨울은 한 해의 여가요, 밤은 낮의 여가요, 비바람 치는 때는 시간의 여가다."

(배송지의 삼국지주)-238쪽

전답을 사면 뱃속을 배부르게 하는 데 그치지만, 책을 사면 마음과 몸이 살찐다. 전답을 사면 배부름이 제 몸에 그치지만 책을 사면 나의 자손과 후학, 일가붙이와 마을 사람, 난아가 독서를 좋아하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배를 불리게 된다.

(박규수가 유숙도의 삶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인생의 의의를 찾아내 제시하고 그 의미를 밝힌 글) -243쪽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세상의 현인과 벗 삼는 것이 정녕 옳다. 그러나 천고적 사람을 사귀라고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 이 책에서 다룬 천고의 현인은 모두 내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친구 삼고 싶은 분들이다. 하지만 이 <상고전도> 전체를 샅샅이 뒤적일 필요가 굳이 있겠는가? 가을비 내리고 낙엽 지는 아침이든 대숲으로 난 창가에 큰 눈 내리는 밤이든 한 부를 뽑아 읽는다면 거기에는 속세를 벗어나 숨은 고매한 현자도 있고, 문장에 능한 재사도 있다. 국정을 도와 국사를 꾀하는 선비도 있고, 위대한 업적을 세운 공신도 있으며, 굳세고 방정한 신하도 있고, 찬란하게 의열을 보인 사적도 있다. 이 한 부를 벗어나지 않아도 나의 벗은 충분하다. 내가 날마다 저 여러 현인들과 더불어 노닌다면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박규수 <상고전도> 中) -244-245쪽

본래 기억하고 암송하는 기송을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초학자로서는 기송을 버리면 더욱이 기댈 데가 없다. 그러므로 매일 배운 것을 먼저 정확하게 암송하되 음독에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뒤에 비로소 서산을 세우고, 한 번 읽고 나서는 한 번 암송한다. 그 다음에 한 번 보고, 보고 난 다음에는 다시 읽어 모두 3,40번 되풀이하고나서 그만둔다. 한 권이나 반 권을 다 배웠을 때에는 전에 배운 것까지 포함해 먼저 읽고, 그 다음에는 암송하고 보되, 각각 서너너덧번 되풀이하고 그친다.

글을 읽을 때에는 소리 높여 읽어서는 안 된다. 소리가 높으면 기운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눈을 건성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눈을 돌리면 마음이 달아나기 때문이다. 몸을 흔들어서도 안 된다. 정신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글을 암송할 때 틀려서는 안 되고, 중복해서도 안 된다. 너무 빨라서도 안 되는데 너무 빠르면 조급하고 사나워서 맛이 짧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느려도 안 되는데 너무 느리면 늘어지고 방탕해져서 생각이 들뜨기 때문이다. (계속)-266-267쪽

(이어서)

책을 볼 때에는 문장을 마음속으로 암송하면서 뜻을 곰곰히 생각하여 찾되, 주석을 참조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궁구한다. 한갓 책에 눈을 붙이기만 하고 마음을 두지 않으면 아무 이득이 없다.

위에 말한 세 조목은 나누어 말하면 다르게 보이나, 마음을 한 곳에 집주아여 체득하기를 요구한 점에서는 같다. 모름지기 몸을 거두어 단정히 앉고, 눈은 책을 똑바로 보며, 귀는 거두어들이고, 수족은 함부로 늘리지 말며, 정신을 모아 책에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을 따라 쉼없이 해나가면 뜻과 맛이 날로 새로워져 저절로 무궁한 묘미가 생기게 된다.

(홍대용, <매헌에게 주는 편지>)-267쪽

"글을 송독하고 사유해야 한다. 글을 송독하면 나의 지식을 풍부히 쌓게 만들고, 그 의미를 사유하면 내가 습득한 지식을 견고하게 만든다. 송독하되 사유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고, 사유하되 송독하지 않으면 지식이 고갈된다."(홍길주, <사부송유> 中)-271쪽

기사. 자기에게 필요한 중요한 사건의 대강을 기록해 둔다.
찬언. 내 마음에 드는 글이 있으면 한 구절이든 두 구절이든 따로 기록해 둔다.
음의. 알기 어려운 어휘를 분류해 써놓는다.
문필. 외워두면 좋을 문장을 따로 기록해 둔다.
범례. 옛 작가가 쓴 독특한 문투를 사례별로 기록해 둔다.
제서관섭인용. 많은 작품들의 상관관계를 따져보고 그 본문을 적어둔다.
취칙. 인생과 사회생활에 쓸모 있을 옛사람의 행위 가운데 본받고 싶은 것을 따로 기록해 둔다.
시재. 시를 쓸 때 이용할 일화나 말을 분류하여 기록해 둔다.
지론. 선배의 주장과 논리에 불만스러운 것이 있으면 자신의 견해를 첨가해 둔다.
궐문. 내가 모르는 어휘나 옛 일 등을 모두 따로 기록해 둔다.

(금나라의 문인 원호문, <시문자경> 中 <독서십법>) -275-276쪽

내가 스승님께 배운 지 이레 되던 날, 스승님은 문사를 공부하라는 글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산석(황상의 아명)아, 문사를 공부하도록 해라!"
나는 머뭇머뭇 부끄러워하며 말씀을 올렸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하고, 둘째는 꽉 막혔고, 셋째는 미욱합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을 너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구나! 첫째는 기억력이 뛰어난 병통으로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고, 둘째는 글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으로 허황한 데 흐르는 폐단을 낳으며, 셋째는 이해력이 빠른 병통으로 거친 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사람은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사람은 빛이 난다.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뚫는 방법은 무엇잉냐. 근면함이다. 닦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그렇다면 근면함은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데 있다."

(황상이 정약용을 뵌 날로부터 60주년 되는 날, 75세 노인이 되어 첫 만남을 회상하며 쓴 글, <임술기>) -287-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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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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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들뢰즈는 인류가 선택한 두 종류의 길에 대해서 말했다. 첫째는 영토화, 코등화의 길이다. 이 길에서 사람들은 몸과 욕망의 탈주선을 안정된 형식과 규범과 원칙들에 맞춰 적당히 통제하며 살아간다. 이것을 그는 '붙박이 삶'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인류가 지속적으로 선택해 온 가장 보편적인 패턴이다. 문화란 이 붙박이 삶의 세련된 역사 이외의 다른 게 아니다. 문제는 이 문화 코드들이 올가미처럼 그 삶의 주체들을 속수무책으로 묶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권력자들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묶인 상태가 행복한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려고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문명사에서 국가는 이런 방식으로 탄생되었고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노예가 되는 길을 걸어왔다. (계속) -19쪽

(이어서)

둘째는 탈주와 유목의 길이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공간이란 말뚝을 박아 금줄을 치고 기둥을 세워 벽을 만들기 위한 기하학적 조건이 아니다. 몸과 욕망의 탈주선을 자유롭게 터주는 것이다. 역동적으로 솟구치는 야성은 그 공간의 매끄러운 지표면을 가로지르며 탈주한다.

들뢰즈는 이런 패턴의 삶을 사는 주인공들을 유목민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붙박이 문화 안에서 코드화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이란 모험이자 도전이고 새로운 경험이자 끝없는 해방 과정이다. 자신들을 옭아매려는 일체의 코드를 거부하는 유목민들의 이 모험과 도전의 충동은 확정된 코드에 길들여진 정착민들에게는 지극히 불온하고 위험한 힘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19-20쪽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맥락들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매세지는 우선 위반하는 삶의 지혜다. 위반은 바깥에 나서는 것이고, 바깥에서 안의 것들과 맞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바깥에 나서는 순간, 아니 바깥에 나서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은 긴장 상태에 들어선다. 바깥을 이미 보아버린 자는 바깥에 대한 동경을 멈추지 못한다. 바깥은 먼저 안의 윤곽 전부를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바깥에 나선 자는 언제나 안에 있는 것 전부와 상대할 수밖에 없다. 안에 있는 게임의 규칙 한두 개 깨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그는 가둬둘 수 없는 위반의 정열로 안의 것 전부와 맞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34-35쪽

그(베르그송)에 따르면 표층자아는 단순히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 있는 자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시선이나 자신의 욕망에 의해 고정시켜 놓거나 박제시켜 놓은 자아이다. 시선이나 욕망은 변하지만 박제된 자아는 변할 수 없다. 결국 필요에 따라 자아가 그때그때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공부하는 자아, 일하는 자아, 사랑하는 자아, 사업하는 자아, 탐구하는 자아, 게임하는 자아 등등으로. ... 중략 ...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 관찰되고 분석되고 판단되는 표층자아의 존재만은 아니다. 그럴 수 있음을 보여주는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변화되면서 지속되는 진실한 자아이다. 이것은 주문제작 상품처럼 내걸거나 팔기 위해 만들어놓은 자아가 아니라 내 존재의 심층 깊은 곳에서 저절로 솟구쳐오르는 자아이다. ...중략... 표층자아는 단순하다. 그러나 복잡한 욕망의 층위와 다양한 감성의 충동들을 끌어안는 이 심층자아는 결코 단순할 수 없다. 표층자아와 구분되는 심층자아의 결정적 차이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 자유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불온한 힘으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 -59-60쪽

우리가 누군가로, 어떤 것으로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인물로 된다는 것, 그것은 단지 그의 신체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옷처럼 걸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의식의 자기 정체성과 하나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의식은 신체가 아니다.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한다는 말이냐. 결국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로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는 동시에 자기 정체성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반증한다. -69쪽

가령 나는 나를 대상화시켜서 느끼고 회상하고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으로서, 바꿔 말하면 의식의 자기 정체성을 지닌 채로 그런 경험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고 나 자신을 보는 나 자신을 다시 볼 수 있고, 또 이런 상황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바라보는 관점으로 물러서기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대상으로 머물지는 않는 자아가 있으니 곧 의식의 자기 정체성이다.비판철학자 칸트는 이것을 '순수자아'라고 말했고, 현상학자 후설은 '선험적 자아'라고 말했다. 이것은 몸처럼 변화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리고 물체가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69쪽

내가 여기서 '자신이 되라'고 한 것은 자기 존재를 긍정하라는 말이 이외의 다른게 아니다. 잠자(<변신>의 주인공>)는 아직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 변신한 몸과 자기 의식을 미처 화해시키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의 존재, 자기의 현실을 긍정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우리는 충분히 우리 자신으로 되어 있는가. 혹시 될 수 없는 것으로 되고자 하는 크레이그처럼 어리석은 욕망에 부대끼며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존재, 자기의 현실을 외면한 채, 타자와의 불가능한 동화만을 꿈꾸며 시간과 기력을 헛되이 소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존재의 가능성을 충분히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복제라도 하듯이 성형해 내려 일을 꾸미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영웅이 걸어간 길을 나 자신도 한 치의 착오 없이 따라 걸어가기 위해 내가 갖고 있는 다른 소질과 취향들을 깡그리 부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위인의 삶을 나 자신도 구현하기 위해서 내가 공들여 쌓아온 관계들을 팽개쳐버리고 있지는 않은가.-70쪽

동일자는 이쪽, 타자는 저쪽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에게는 당신이 타자고 당신에게는 내가 타자다. 물론 집합적으로도 쓰여서 가령 한국인에게 외국인은 타자이고 외국인에게는 한국인이 타자이며 아시아인에게 유럽인은 타자이고, 유럽인에게 아시아인은 타자다. 이처럼 타자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마치 동쪽과 서쪽, 왼쪽과 오른쪽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듯이.

...중략...

결국 타자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은 상대의 힘, 가령 유령성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타자와의 관계가 우선은 권력 갈등 관계로 맞서게 되는 까닭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동일자들의 폭력도 우선은 타자성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셈이다.-88-89쪽

미셸 푸코에 따르면 타자 앞에 선 동일자의 전략은 결국 두 가지뿐이다. 타자의 차이를 동일화시키거나 아니면 무화시키는 것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지식이, 후자를 위해서는 권력이 동원된다. 동일자의 궁극 목표는 마침내 타자를 남김 없이 자기 영토에 편입시켜 완전한 동일성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가 동일성의 영역에 편입된다고 곧 동일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영토 안의 타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같은 영토 안에 남겨진 타자를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식민'이라 부른다. 타자의 동일화는 어떤 미명 아래 시도되든 결국 이리의 발톱을 감춘 식민화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이 근세 이후 세계의 동일자로 등장한 유럽이 걸어갔던 역사의 행로라는 것을 안다. -89-90쪽

우리는 흔히 시간이 현재, 과거, 미래의 세 가지 지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가 있어서 역사와 반성이 있고, 미래가 있어서 이상과 희망이 있으며, 현재가 있어서 현실과 삶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부철학의 완성자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세 가지 시간지평은 오로지 문법 안에만 존재한다. 과거는 없고 오직 기억만이 있으며, 미래는 없고 다만 기대가 있을 따름이다.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 이 순간뿐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존경하고 질투하고 선택하고 거부하는 모든 것들이 이 현재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즉 삶의 시간은 오직 하나, 현재가 있을 뿐이며, 기억(과거)하고 기대(미래)하는 일들도 모두 이 시간의 지평 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재형 사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131-132쪽

니체는 현재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인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니체는 이 역사적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불행한 삶을 숙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만일 행복해지려 한다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망각해야 하는 것은 이미 없는 과거, 아직 없는 미래요, 사랑해야 하는 것은 현재 그리고 그 지평 위에서의 삶이다.

니체는 바로 이 점에서 '회상하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배우라고 했던 플라톤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플라톤은 완전한 것, 진리, 이데아 등은 과거에 이미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과거, 우리도 무죄하고 순결한 영혼이었을 때는 바로 이러한 진리의 세계 속에 흠과 때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었고,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면서 이 모든 완전한 것들에 대한 경험과 지식, 진리들을 깡그리 잊게 되었다고 한다. -137-138쪽

"가장 작은 행복이나 가장 큰 행복에서나, 행복으로 하여 행복이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그것은 망각이다. 좀더 학문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비역사적으로 감각하는 능력이다. 일체의 과거를 망각하고 현재의 순간에 머물러 설 수 없는 사람, 승리의 여신처럼 어지러움도 두려움도 없이 현재의 삶의 지평 위에 설 능력이 없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그런 인간들이 자신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불행에 빠트린다는 것이다." (니체)-139쪽

기억에 매달려 역사가 과잉되면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춘다고 니체는 경고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뭔가 올바른 것, 건강한 것, 위대한 것, 뭔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는 어느 정도는 망각할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이 능력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능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망각을 부정한다면 삶 또한 소멸되고 만다. 이 망각의 힘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147쪽

'있음'은 모든 '있는 것'들보다 우선하는 토대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음'은 반드시 '있는 것'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간혹 이런 착각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있는 것'이 사라지면 '있음'도 함께 사라져버린다고. 그러나 '있음'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부서지거나 흩어지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게 아니다. -236-237쪽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주관의 감정이다. 아무가 아름다운게 아니라 '아우가 아름답다'고 형이 느낀 것이다. 이 사실을 잊어 버리면 두 가지 잘못된 믿음이 생겨난다. 첫째는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대상이 같다는 것이다. 이 둘을 한데 뒤섞어 생각하는 데서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혼란이 시작된다. 쉽게 말하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보거나 듣게 되는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것' 혹은 '저것'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다르다. 그것은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란 오직 '생각하는 것'뿐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려면 아름다운 것, 가령 소녀, 꽃, 노을, 단풍, 시, 그림 같은 것을 넘어서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넘어서서 나아간다'는 것은 눈으로 보기를 멈추고 사념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 곧 '추상'이다. 결국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려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넘어서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261-262쪽

목적 인간 자신은 대체로 불행하다. 원래 목적을 이루는 일이 힘든 과정과 희박한 가능성을 뚫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설령 어쩌다 성공했다 하더라도 목적 인간은 곧장 다른 목적을 찾아 새로운 모험의 길로 나서려 하기 때문이다. 과정이란 그에게는 오직 건너뛰어야 할 정애에 지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출발점에서 목적지까지 그냥 마술로 훌쩍 뒤어넘거나 비행기 같은 것으로 날아가서 도달하고 싶다. 그래서 그는 평생 시간 없다는 것과 바쁘다는 것을 스스로 혼동한다. 신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공평하게 시간을 주었지만, 그는 자신에게만 유독 시간이 없다고 불평한다. 그에게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 바쁘다고 믿는 것 뿐이다.-283쪽

과정 인간은 삶이 A와 B 사이에 놓이는 과정 가운데 있다고 믿는다. 그는 과정 바깥에 있는 어떤 것들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도중에 멈춰 서서 머뭇거리고 서성거리고 심지어 방황하는 것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삶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이런 과정에서 어쩌다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 누구나 도달하기를 바라는 지점과 일치할 수 있다. 그때 이 우연의 선물에 고마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거북해하고 부담스러워한다. -284쪽

세상에 의해 거부된 존재들은 선택 앞에 서야 한다. 쫓겨날 것인가, 나앉을 것인가. 토니 모리슨은 소설 <가장 푸른 눈>에서 '쫓겨나는 것'과 '나앉는 것'을 구분한다. 떠밀려 쫓겨나는 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다시 세상으로 향하는 닫힌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배회한다. '두드리라, 열리리라.' 그는 설사 또다시 쫓겨난다 하더라도 정녕 이 문이 다시 열리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그러나 제 발로 나앉은 자는 다르다. 그는 세상을 향한 희망을 스스로 접어버린다. 그는 차라리 다른 곳에 가령 언어, 꿈, 환상 같은 것에 머물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의 힘은 나앉은 자들이 이런 마법의 세계에 오래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을 분류하고 해석하고 조정하고 판단한다. -321쪽

젊은 시절의 사르트르는 "사랑한다는 말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혹은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 혹은 어떤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주장할 때의 사르트르의 견해는 확실히 여자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새벽에 우유배달 온 토맥과 여자의 짧은 대화로 돌아가보자. 여자는 토맥에게 묻는다. "키스하고 싶어? 껴안고 싶어? 나랑 자고 싶니?" 이것은 물음의 형태를 차용한 사랑에 관한 그녀의 당대적 정의였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ㅎ는다. 그것은 우리 입의 구강구조를 거쳐서 나오는 바람 소리에 불과하다. 존재하는 것은 키스하고 만지고 껴안고 함께 잠자리에서 성교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그녀는 아이스크림집에서 다시 반복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저렇게 피부와 피부를 대서 접촉하고 느끼고 향유하는 것이라고. 여자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녀가 믿는 유일한 것은 신체와 신체의 접촉이다. 이처럼 그 구체적인 확인방식을 떠나서 떠드는 사랑에 관한 모든 논의는 허망하다는 것이다.
-339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 시절의 사랑이 변덕스레 쉽게 변하는 것은 그 사랑이 쾌락적이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즐거움을 주는 대상도 달라진다. 이것이 젊은이들이 쉽게 연인이 되었다가 또 쉽게 헤어지는 이유다. 그들의 사랑은 즐거움을 주는 대상의 변화와 더불어 변하며, 그러한 그것이 주는 쾌락도 속절없이 변해버린다. 젊은이들은 또한 성적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부분의 사랑은 정념에 의존하고 또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이 금방 사랑에 빠졌다가 하루 만에 헤어지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348쪽

에리히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시하고 이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부연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을 위한 불가결의 요소는 다음 다섯이다. 베풂, 보살핌, 책임, 존경, 인식. 프롬은 특히 마지막 요소, 즉 인식에 특별히 긴 해설을 덧붙인다. "사고에 의한 인식, 즉 심리학적 인식은 사랑이라는 행위를 온전히 인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나는 타인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 혹은 내가 그에 대해 가졌던 환상이나 불합리하게 왜곡된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오직 내가 인간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때만 나는 인간을 궁극적 본질에서, 사랑의 행위에서 인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식은 나를 알고 상대를 아고 나와 상대가 함께 얽힌 종횡의 맥락들을 아는 것이다. 반성은 특히 그것을 흘러간 시간의 지평 위에 되돌려놓고 보는 것이다. 인식과 반성이 결여될 때 우리의 사랑은 도구적 사랑, 쾌락적 사랑으로 굴러떨어질 위기에 시나브로 내몰린다. -351-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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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2-25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마음이 동해서 오래된 정원 다시 보고있었는데.. 이 밑줄긋기가 반갑네요 ㅎㅎ 이 책 보관함에서 몇달째 썩히고 있는데 ㅎㅎ

마늘빵 2008-02-25 08:22   좋아요 0 | URL
소설 <오래된 정원>? :) 나도 그거 오래 전에 읽었는데, 영화는 얼마 전 봤구. 책은 잘 썼어, 재밌고, 내용도 깊고.

Jade 2008-02-25 15:07   좋아요 0 | URL
어제본건 소설말고 영화요 ㅎㅎ 예전엔 안보였던 장면들이 보이더라구요. 영화관에서 두번이나 봤었는데, 역시 난 보고싶은 것만 봤나봐 ㅎㅎ

marr 2008-02-2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멕과 우유배달 여인이 나오는 걸로 보니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군요. 두 사람이 저렇게 멋진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게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그립군요.

마늘빵 2008-02-25 20:38   좋아요 0 | URL
미르님 이 영화를 아시는군요! 저는 아직 못 봤는데. 철학자 김용규씨도 그의 책에서 언급한 바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이 책 역시 사놓고 아직 보지 못했다는. 한번 보고픈 영화입니다.

turnleft 2008-02-26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철학 개념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발탁된 배우라고 할 수 있는데, 종종 저자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정작 설명하고자 한 철학 개념과는 그닥 어울리지 못하는 사례들이 눈에 띈다.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조연으로 출연시켜놓고 너무 많이 카메라에 담아 주연이 누구인지 헷갈리게하는 감독 같은 느낌이랄까"

예전에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더군요 ㅋㅋ

마늘빵 2008-02-26 07:55   좋아요 0 | URL
읽고보니 그 말이 잘 맞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잘 쓴 책이라 생각해요. :) 제가 전에 예스24에 칼럼비스므리하게 시도했던 그런 스타일이라 깜짝 놀랐어요. 제가 썼던 <묵공>과 비슷한 구조였다는.

Kitty 2008-02-26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저같이 무지몽매한;; 중생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줘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ㅋㅋ

마늘빵 2008-02-26 07:55   좋아요 0 | URL
이거 재밌습니다. 잘 모르는 영화, 잘 모르는 철학자의 철학도 쉽게 풀어서 잘 엮었어요.

프레이야 2008-02-2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나게(^^) 읽었어요.

마늘빵 2008-02-27 00:42   좋아요 0 | URL
네 영화와 철학이 잘 버무려진 책이었어요.
 
나는 고발한다 - 해제ㅣ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구판절판


사법적 오판은 슬픈 일이지만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법부가 틀릴 수도 있고, 군부가 틀릴 수도 있다. 여기서 군부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말이 왜 나오는가? 오판이 내려졌을 때 시급한 단 하나의 의무, 그것은 조속히 오판을 시정하는 것이다. 결정적 증거 앞에서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날, 바로 그날 진정한 과오가 시작되리라.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오판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오판을 인정하는 데 괴로움과 망설임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할 결심을 하는 날, 바로 그 날 만사가 형통하리라. 그 점을 인식하는 이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쉐레르 케스트네르 씨' 中)-28쪽

청년, 청년들이여! 언제나 정의와 함께 있으라. 그대들의 내면에서 정의의 관념이 희미해지는 날, 그대들은 파멸하리라. 지금 나는 사회적 관계의 보장에 지나지 않는 '법전'의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존중해야 하리라. 그러나 좀더 숭고한 관념, 모름지기 인간의 판결이 잘못될 수도 있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정의, 심판자들을 모욕하지 않으면서 기결수의 무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정의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법을 향한 그대들의 불타는 열정을 자극하는 모험이 아닌가? 아직 이해관계나 인간관계가 뒤얽힌 이전투구에 휩싸이지 않은 그대들, 아직 어떤 비열한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은 그대들, 순수와 선의로 목청껏 외칠 수 있는 그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정의의 완성을 위해 일어날 것인가? (계속)-67쪽

(이어서) 청년, 청년들이여! 인간성을 지켜라. 관용을 잃지 마라. 설령 우리가 틀렸을지라도, 우리와 함께 있으라. 무고한 자가 끔찍한 형벌을 당하고 있고, 분노에 찬 우리의 가슴이 고통으로 찢어졌다고 우리가 그대들에게 말하지 않는가. 비록 한순간일망정 이 한없는 형벌 앞에서 사람들이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슴이 고통으로 찢어졌다고 우리가 그대들에게 말하지 않는가. 비록 한순간일망정 이 한없는 형벌 앞에서 사람들이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슴이 미어지고, 두 뺨에 눈물이 흐른다. 물론 간수들은 여전히 무정하고 무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대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고, 온갖 비참과 온갖 연민에 민감한 그대들은 어찌된 일인가! 이 세상 어디엔가 부당한 증오를 받으며 죽어가는 순교자가 있을 때, 그대들이 어떻게 그의 대의를 지키고 그를 해방하기 위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숭고한 무험을 감행할 것이며, 도대체 누가 위험하지만 훌륭한 대의 속에 몸을 던질 것이며, 도대체 누가 이상적 정의의 이름으로 군중에 대항할 것인가? (계속)-67-68쪽

(이어서) 만일 늙은 기성세대가 그대들의 고귀한 혈기, 고귀한 열정을 대신 불태운다면, 그대들은 얼마나 부끄러울 것인가? 청년들이여, 어디로 가는가, 학생들이여, 어디로 가는가? 거리로 내달리는 그대들, 시위의 물결을 이룬 그대들, 시대의 혼란 속으로 스무 살의 용기와 희망을 던지는 그대들이여...... "이제 우리 함께 가오, 인간과 진실과 정의의 세상을 향하여!"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中)-68쪽

애초에 내가 말한 대로, 진실은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으리라. 사악한 무리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전진이 한 걸음 한 걸음 적시에 이루어지리라. 진실은 그 자체로 온갖 장애물을 분쇄할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진실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또 얼마간 진실을 땅속에 묻어두는 데 성공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때에도 진실은 땅속에서 자라며, 땅속에서 엄청난 힘을 얻고, 어느 날 폭발의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을 날려버리리라. 앞으로 몇 달 더 거짓과 밀실 속에 진실을 가두어보리라, 그러면 그대들은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재앙을 준비했음을 곧 알게 되리라. ('프랑스에게 보내는 편지' 中)-73쪽

대통령 각하, 진실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진실은 당신의 통치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단지 헌법과 측근의 수인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대로 역시 완수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에서야 '사건'이 진정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오늘에서야 각자의 입장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빈다. 한쪽에는 햇빛이 비치기를 원치 않는 범죄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햇빛이 비칠 때까지 목숨마저도 바칠 정의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진실이 땅 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막 가장 멀리까지 울려 퍼질 재앙 중의 재앙을 준비했다는 것을. ('나는 고발한다' 中)-105-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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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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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다는 것, 실체를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가시성'의 문제를 근대적 권력 개념과 민주주의 문제로 확장해 강조한 것은 이탈리아 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다. 그는 현대 대의제에서 권력에 대한 민주주의의 이상은 공중에게 그 실체가 가시적으로 노출되는데 있다고 보았다. 현대에 들어와 공공성 내지 공론장이라는 말이 공개의 의미로부터 파생되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험을 '보이지 않는 권력'이 커지는 문제로 본다. 그리고 민주적이고 사법적인 통제를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유형이,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를 관리하는 영역에서 주로 확대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19쪽

현행 제도에 따르면 정부는 1인당 연간 1,160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사법시험 합격자들에게 연수를 시킨다. 연수생 신분이지만 별정직 공무원 5급 1호봉에 해당하는 급여도 지급한다. 회계사, 변리사, 감평사, 노무사 등 다른 어떤 국가시험에서도 없는 연수 제도다. 그 자체로 형평에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지만, 연수원을 마친 변호사들이 김앤장이나 사설 로펌에 취직하는 현실은 더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변호사 연수를 시켜 법률 사기업에 공급해 주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40쪽

변호사법 제44조[명칭]에서는 "법인이 아닌 자는 법무법인 또는 이와는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제하나고 있다. 일반인들은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법무법인(로펌)인 줄로 알고 있다. 일반적인 법률사무소라며 변호사와 사무장, 그리고 여직원으로 구성된 작은 사무실 형태를 상상한다. 반면 법무법인은 조직적이고 전문적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회사 형태로 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앤장은 법무법인이 아니다. 형식적으로는 개인사무소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단일한 조직체처럼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김앤장 스스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56쪽

김앤장은 기존의 우리나라 법무법인 제도가 합명회사 형태만을 인정하고 있는데 "합명회사 형태의 로펌은 의사 결정 시 전원찬성이 요구되어 효율성이 떨어지며, 업무에 관여하지도 않은 구성원이 모든 수임 사건에 대해 무한연대책임을 부담하도록 하여 대형화할수록 잠재적 책임 부담 위험이 증가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앤장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나라에 로펌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기존 로펌들도 김앤장처럼 이상한 조직 형태를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앤장을 제외하고 그런 일은 없다.-56쪽

<변호사법> 제31조[수임제한]은 "변호사는 당사자 일방으로부터 상의를 받아 그 수임을 승낙한 사건의 상대방이 위임하는 사건에 관하여는 그 직무를 행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쌍방대리 금지의 원칙'이다. 이 경우 상대방의 동의를 받아도 같은 사건의 당사자를 동시에 대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대법원은 그 이유로 "변호사와 그와 같은 사건에 관하여 직무를 행하는 것은, 먼저 그 변호사를 신뢰하여 상의를 하고 사건을 위임한 당사자 일방의 신뢰를 배반하게 되고, 변호사의 품위를 실추시키게 되는 것이므로 그와 같은 사건에 있어서는 변호사가 직무를 집행할 수 없도록 금지한 것"이라고 판시(대법원 2003.11.28. 선고 2003다41791 판결)하면서, "여기서 사건이 동일한지의 여부는 그 기초가 된 분쟁의 실체가 동일한지의 여부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분쟁의 실체가 동일하면 쌍방대리 금지의 원칙에 따라 사건을 맡을 수 없으며, 이를 어기면 불법이 된다.-60-61쪽

실제 개인에게 지급한 소득보다 높게 소득을 신고하는 것은 기업이 비자금을 조성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즉, 소득을 신고해서 탈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소득을 많이 신고 한다. 그러면 세무 관련해서 위험 부담은 없어진다. 그런 다음 당사자에게 세무 신고 금액보다 대폭 낮춘 급여를 지급하면, 세금을 완납한 안전한 비자금이 조성되는 것이다.

물론 늘 세금을 더 많이 내는 것은 아니다. 탈세에 대한 의혹도 있다. 대표적으로 재벌 총수를 변호하면서 약정된 수임료 이외에 별도의 성공보수를 받는 경우다. 성공보수는 드러나지 않는다. 삼성그룹의 사례에서 보듯이 재벌의 비자금에서 받기도 한다. 이 경우에 소득 신고가 필요 없다. 아니, 소득 신고가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김앤장에 대규모 비자금 조성 의혹과 탈세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87쪽

소송은 김앤장의 전공 분야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수석 합격과 수석 졸업의 경력이 있는 변호사들이 즐비하며, 이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재요 수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과도한 수임료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국회의 감시를 회피하기 위해 정보 공개를 차단하려 하고 있다. 소송으로 먹고사는 전문가 집단이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수단을 활용해 재무 상황 및 소득 상황과 관련된 정보 파악 노력을 억압하려는 것은 공공성을 지는 법률 전문직이 취할 태도는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를 자처하는 수재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이렇게 사용하는 모습을 '길을 잃은 수재들'이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89쪽

헌법재판소 재판관 출신들의 개업 현황을 살펴보면 이들은 대부분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냈거나 중소규모 로펌에 근무한다. 헌재 재판관은 정치적인 사건을 많이 처리하기 때문에 로펌에서 특별히 그들의 경험이나 영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헌법소원이나 헌재 관련 사건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대형 로펌을 찾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마디로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고위 법관들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기피하고 있으며, 대법관이 되기를 선호한다. 퇴임 후 진로를 미리 계산하는 것이다. 고위 법관들이 퇴임 후 대형 로펌 행을 꿈꾸고 고액 수임료를 염두에 둔다면 이것은 불행이다. -100-101쪽

공정위는 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규제하는 제도를 만들고 불법, 부당 행위를 조사해 제재하는 경제 검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더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들의 형태는 검사가 어느 날 갑자기 옷을 벗고 로펌에 들어가 자신이 기소한 사건의 변호를 맡는 꼴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도덕성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공정위 조직은 물론 정부의 공적 업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당연히 공익과 사익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한다.-106-107쪽

공무원들은 평가에 민감하다. 승진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이들 민간근무휴직 공무원에 대한 근무 실태 평가를 매년 1회 실시한다. 그런데 실태 조사 보고서는 민간근무지에서의 평가가 그대로 인용된다. 즉, 김앤장의 평가를 그대로 인용하기 때문에 김앤장의 평가가 곧 공정위의 평가가 된다. 이들은 업무 추진 실적, 업무 수행 능력, 복무규율, 법령상 복무규정 등 4개 항목 모두 최고 등급인 '탁월'을 받았다. 공정위는 이들의 급여명세서를 받기 때문에 이들이 부당한 금전을 수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부당한 사실이 있으면 복무규율이나 법령상 복무규정에 따라 제재하거나 징계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지적하지도 않고 징계하지도 않는다. 알면서도 방치하고 눈감아 버린다.-110쪽

최장집 교수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민주주의를 제양ㄱ하는 네 가지 담론을 이야기한다. 차이와 갈등의 표출을 억압하는 통합이데올로기, 정치 혐오를 조장하는 도덕주의, 시장의 효율성과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전문가주의가 그것이다. 전문가주의의 기술 합리성이 민주적 가치에 우선해 강조되거나 민주적 결정을 대체하려 한다면 그 사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전문가들의 기술 합리성과 관료들의 사적 이익 추구가 결합될 때 만들어지는 문제의 전형적인 양상 한가운데에 김앤장이 있다. 국가 경영에는 경제와 법률 지식이 필수적이 되었다. 이를 갖춘 전문가들은 권력자의 '귀'와 '책상'을 잡아서 국가정책을 좌우하고 있다.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이들 관료와 법률 전문가는 가난한 다수의 이익보다 사회의 지배적 이익에 경도될 수밖에 없다. 민간부문에서 거대 법률 기업이 성장하고, 이들과 국가 기구의 밀착이 사회 상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면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145쪽

회전문 현상(밑줄그은이 주 : 공무원이 로펌에 갔다 복직하는 등 왔다리갔다리하는 작태)을 이용하는 인사들의 기본 동기는 공적 경험을 기업에 활용하거나 공공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다. 회전문을 이용하는 인사는 기업에 관해 우호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른바 개혁과 규제 완화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정책과 법률제도가 그것이다. 금융경제연구소의 홍기빈 박사는 "경제 관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각종 경제학 개념과 수치와 통계로 무장하고 중요한 사회적 사안들을 모두 경제적 합리성의 문제로 바꿔 버린다. 이들은 국가 개조에 맞먹는 결과를 가져올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금융허브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민적 동의나 추인을 받은 적이 없다"고 일갈했다. -165쪽

정부의 관료 특히 경제 관료들은 전문성을 내세우면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거대 권력이 되었다. 이들은 앞장서서 신자유주의를 옹호한다. "신자유주의는 우리 시대에 일종의 종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들과 거대 자본과의 우호적 관계 또는 결탁은 사적 이익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한 확신에서 나온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김앤장과 투기자본은 거의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김앤장은 법률 서비스를 앞세워 투기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관료들은 퇴직 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취업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의뢰인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판검사와 고위공직자 출신의 이들이 공직 생활에서 배운 자신의 전문성을 투기자본으로부터의 고액의 수수료와 맞바꾸는 것이다. 투기자본은 공공성에 대한 공격과 노동자에 대한 해고와 구조조정, 비정규직 확산과 저임금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니 만큼, 이들이 받는 엄청난 보수는 결국 비정규직과 해고자, 공공성 파괴로 인한 대가인 셈이다.-177-178쪽

변호사윤리장전 제14호[위법 행위 협조금지 등]에서는 "변호사는 의뢰인의 범죄 행위 기타 위법 행위에 협조하여서는 아니 되며, 직무 수행 중 의뢰인의 행위가 범죄 행위 기타 위법 행위에 해당된다고 판단된 때에는 즉시 그 협조를 중단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229-230쪽

돈 되는 사건을 주로 하는 김앤장이 자신들의 이야기처럼 개인 간 소송을 담당하지 않는지, 또 개업 변호사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김앤장이 힘없는 노동자들의 밥그릇은 철저하게 걷어찬다는 사실이다.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핸드폰 문자 해고'로 유명한 2004년 외환카드 노동자 정리해고 당시에 외환은행과 외환카드의 합병을 총괄하면서 노사 대책도 책임졌다.이때 김앤장은 정리해고 통보를 문자로 보내더라도 법률적인 효력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핸드폰 문자 해고와 사내 컴퓨터 이메일을 활용한 해고 통보는 기업이나 금융권의 구조조정 매뉴얼이 되었다. 정리해고자들이 해고 무효 소송을 제기하자 변호사 5명, 노무사 1명을 동원해 론스타가 대주주로 있는 외환은행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이들 해고자는 대법원까지 소송을 계속했지만 패소했다. 대법원에서는 '심리불속행'으로 재판마저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밑줄그은이 주 : 옮기면 끝도 없어서 이하 생략) -230-231쪽

노사 분규도 김앤장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경영진은 쉽게 타결할 수 있는 내용도 일일히 법률자문을 받는다. 모든 것을 법률적인 견지에서만 판단해서 보내온 답변에 경영진이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면 노사 분규가 장기화된다. 협상이나 양보로 쉽게 풀릴 수 있는 것도 노동쟁의가 발생한다. 노동쟁의가 발생하면 매우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교묘하고 집요하게 노동조합을 탄압하도록 조언한다. 고소, 고발은 기본이다. 직장폐쇄, 사내 통신망 차단과 암호 변경 등 정보통신 차단도 동원된다. 서약서 제출 요구, 출입 통제, 노조 게시물 철거 심지어는 자본 철수 협박까지 다양한 방식을 동원한다. 노사관계가 악순환이 될수록 법률 사업은 커진다.-231-232쪽

김앤장이 노동자를 탄압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고객을 위해서다. 피해자가 있다면 수혜자 그룹도 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김앤장은 가진 자들의 이익을 철저하게 옹호한다. 수임료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노동조합에 자문을 하거나 해고자의 소송을 맡아서 진행한 적이 없다. 강자의 이익을 위해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한다. 노동자들이 눈앞에 보이는 사용자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교섭잉나 협상을 진행한다면 그 뒤에 숨어 있는 김앤장을 놓치기 쉽다. 노동조합은 김앤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자기 회사의 노사문제가 해결되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일회성에 그치면 피해는 계속되게 마련이다. 김앤장은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는데 노동자들은 일회성에 그친다면 그 싸움의 승패는 뻔하다.-233쪽

공정위는 불공정거래를 감시하고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핵심적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불공정 행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큰 중소기업에 가서 직접 체험을 하면서 직무를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정위 직원들이 가는 곳은 대기업과 대형 로펌들뿐이다. 불공정행위를 할 가능성이 가장 큰 기업에 취업해서 무엇을 배워 온다는 것인가? 결국, 퇴직 후 갈 수 있는 잠재적 기업이나 로펌에 가서 미리 연수를 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정위뿐만 아니라 정부의 민간근무휴직 제도의 대상에서 대기업 집단은 제외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정 정도 변호사 숫자를 가진 대형 로펌도 제외되어야 한다. 제도의 취지에 맞게, 피해를 당할 우려가 있는 기업이나 업체에 가서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그 입장에서 개선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법의 취지에 부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계속)-246-247쪽

(이어서) 휴직 후 문제가 생기면 공직에서 퇴직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무마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사고를 치고 나서도 로펌이나 대기업의 품에 안길 수있다면 그 만큼 공직자로서의 윤리 의식과 준법 정신은 약해진다. 이들에 대해서는 퇴직 후 공직자 윤리위원회의 심사는 물론이고 사법처리를 받도록 해야 한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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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2-09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번째 태그에 초공감!
나는 아직 기억나는 게 변호사 몇명 중에 연봉 6억 이상인 사람이 2/3 정도 되고, 거기서 10억 이상인 사람이 또 절반쯤 되고 -_- 김앤장 대표의 하루 수입이 1억 6천이라는 거요- 그리고 저 40쪽 내용도 진짜 열받았었어요 ㅜ_ㅜ 4번째 태그 ㅜ_ㅜ

마늘빵 2008-02-09 00:29   좋아요 0 | URL
반은 사기꾼 양성소죠. -_- 사법연수원이. 얘네들 수입도 다 공개하고 상한선 두어야 해요. 세상에나 무슨 어휴 평생 벌 돈을 일년에 다 벌어버리네. 그동안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온갖 사건들의 주역이 김앤장이더만요. -_- 왜 언론에서 한번도 못봤을까. 답은 이 책에.

Jade 2008-02-09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을 읽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본주의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면 이 사람들의 행동 역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것이 아닌가. 사실 똑똑한 사람들이 머리 잘 쓰고 있는 거잖아요. 법이란것도 늘 상황에 맞게 기득권들이 정하는 것이니까. 단순히 이 사람들이 특별히 도덕성이 나빠서, 혹은 양심이 없어서의 문제는 아닌것 같아요. 김앤장이 아니라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일들을 했겠죠. 아 정말 모르겠어요. '정의'라는게 있는건지. 물론 이 책처럼 부조리를 고발하는 책들은 계속 나와야 하고, 또 우리는 계속 읽어야 하겠죠. 하지만 이런행동들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일지. 어쩌면 '해결'이라는 단어조차 지극히 이데올로기 적인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마늘빵 2008-02-09 09:49   좋아요 0 | URL
음, 그쵸. -_-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짓이 왜 문제가 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할 수도. 근데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합법적으로 사기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변호사'들은 어찌 생각해야 하지. -_- 요렇게 서서히 까발겨주면서 수면 위로 드러내서 자기가 저지르는 짓을 알게 해줘야지. 대중들도 알게 해줘야지요. 부시고 깨고 엎어치고 메치고 해야죠. 알때까지.

turnleft 2008-02-09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밑줄긋기를 보니 확 불을 지르는군요. 이번에 한국 가면 사야지 -_-

마늘빵 2008-02-09 09:49   좋아요 0 | URL
네. 확 열불나죠. 요런 녀석들은 아주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돼요.

다락방 2008-02-10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만 넣어뒀었는데 저도 확 사버려야겠군요!!

마늘빵 2008-02-11 20:22   좋아요 0 | URL
요고 읽을만 합니다. 근데 문장은 영 아니더라구요. 글재주는 없으신 분이에요. -_-
 
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품절


'역사에 대한 신뢰'라고 말할 때, 거칠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류의 역사를 초월적인 위치에서 지배하고 있는 '신'이라든가 '절대정신'과 같은 존재를 상정하고 그러한 절대자의 의지에 의해 역사가 진행해간다고 하는 '신뢰'이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겠다. 둘째, 인류의 역사가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해간다는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신뢰',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적인 발전사관이다. 셋째는 어떤 '민족'의 역사에 대한 '신뢰'이다. '무슨 무슨 민족이 이러저러한 고난을 겪어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발전해 갈 것이다'라는 신뢰. 요컨대 어떤 '민족'(이라는 관념) 혹은 그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관념)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내셔널리즘'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어떨지는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넓은 의미의 내셔널리즘이라 부르기로 하자. (서경식)-14-15쪽

제가 지적하려는 문제는 지식인의 언어입니다. 지식인의 언어는 처음부터 토씨 빼고는 한자어로 완전히 도배되다시피 했으니까 이것이 민중들에게는 하나의 장벽이었던 셈이죠. 우리 시대에는 영어가 그런 장벽이 될 수도 있어요. 이른바 '탈북'을 해서 남한으로 온 사람이 언어 생활에서 느끼는 대단히 심각한 장벽 중 하나가 남한 사람들이 영어를 너무 많이 쓰는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지식인들이 이런 현상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학문적 언어를 갈고닦는 과정에서 민중의 일상과 더 가까워져야 하며 스스로를 민중의 삶으로부터 괴리시키는 언어 사용을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루터가 성경을 번역할 때 시장 바닥에 앉아서 번역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민중성을 이야기한 겁니다. (김상봉)-37쪽

사람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타인과 소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배운 사람들은 불편을 느끼지 않겠지만, 또 혹 불편을 느끼더랄도 이성적으로 극복해낼 수 있지만, 한 사회 전체에서 우리가 이런 것을 어디까지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다른 언어 사용자에 대한 편견을 갖느냐 마느냐 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이 갖는 타자성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 '일상의 바벨탑'이라고 할 법한 이 실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바벨탑이 언어윤리적인 문제를 상징하기 이전에 인간의 삶의 조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김상봉)-73쪽

이런 문제를 소수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표현해보면, 동일성 혹은 보편성에는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만남과 소통에서 동일성이 갖는 지위의 문제이겠는데, 저는 만남과 소통을 위해서라도 동일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일성이 사라져버리면 완전히 남남이 되어서 아무런 접점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만나는 곳에는 언제나 그 만남을 매개하는 동일성의 지평이 - 비록 잠정적인 것이라도 - 전제되어 있기 마련이지요. 문제는 그런 동일성, 보편성에 처음부터 똑같이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해야 하는 (서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경우입니다. 수난과 고통의 차원에서는 그 동일성과 보편성에 깊이, 치열하게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성과 향유의 차원에서 보면 거기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책임감을 느낀다고 하면 좀 우습지만, 아무튼 그에 대해서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지요. 만남을 위해 전제되는 보편의 지평이 오히려 만남을 차단하고 배제하는 상황이니까요. (김상봉-74쪽

제가 오늘 발표에서도 국가기구라는 것이 합법적 수탈기구이자 폭력기구라고 했는데 국가라는 집합적 정체성이 그렇게 되는 까닭은 이러한 타자성의 지평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동체에서는 '우리'에 대한 사유도 불필요하고 한번 '우리'가 아니라고 낙인찍은 사람은 배제하고 폐기해버리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당연히 이 만남의 공동체가 논리적, 존재론적으로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앞에 놓지 못한는 사람은 동질적인 내부조차 인간적인 공동체로 만들 수 없어요. 끊임없이 그 속에서 배제할 타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김상봉)-84쪽

학자는 '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씨알들을 우해 대신 울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고 학자라고 함석헌 선생은 말해요. (김상봉)-101쪽

결국 타인의 고통이 지니는 타자성을 보존하면서도 그 단ㄷ절을 어떻게 무관심이 아닌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저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배우려는 자세, 우선 이 두 가지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김상봉)-106쪽

실은 고통이란 같이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어떤 고통이라도 혼자 겪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번째 사실은 '고통을 같이 겪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겁니다. 감각의 차원에서 고통이 있다는 것은 개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히 '내가 다른 인간과 고통을 같이 겪는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이니까요.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고통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거나 교만한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가 동일한 조건에 놓여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도 각자 자기의 고통을 먼저 느끼죠. 이른바 '동병상련'이란 것도 '나뿐 아니라 저 사람도 겪는 고통이라 그나마 다행'이라는 측면이 큽니다. 일상의 삶에서 사람이 고통을 느끼는 그 자체, 관념화된 고통이 아니라 직접 고통을 느끼는 그 순간에 있어서 고통은 기본적으로 혼자 겪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고통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는 말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타자의 고통 속으로 던진다는 것인데, 이건 수동적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어떤 정신적 공감을 통해 일어나는 겁니다. (김상봉)-108-109쪽

(이어서) 그러니까 같은 고통을 받아도 남남일 수 있고, 내가 직접 고통받지 않아도 타인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고통은 우월하고 어떤 고통은 열등하다는 식의 판단이 분명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동시에 고통들의 평등성, 정도 차이를 뛰어넘는 고통의 초월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두 분 형님들과 선생님의 고통을 비교하면서 어느 것이 우월하고 어떤 사람의 고통은 열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을,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열등한 고통을 겪은 자가 그보다 더 우월한 고통을 겪은 자를 이해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그들과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은 미신입니다. 모든 고통이 모노톤으로 똑같아져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고통을 신화하하는 것이죠. 우리는 분명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차등성과 차이 속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성을 만나고 이해하는 것이지 '내가 너와 똑같이 진흙탕 속에 빠져 있구나'라는 식은 아닌 것이죠. (김상봉)-108-109쪽

제게 씨알이 뭔지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거울입니다. 씨알은 거울이지요. 또 다른 자기라는 으미에서, 나의 존재가 씨알을 통해서 의미를 얻게 되며 나와 마주 보고 있고 뗄 수 없이 결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거울입니다. 거울이라고 하면 나르시스적 거울 표상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 비유가 썩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일단 그렇게 풀어보겠습니다. '또 다른 자기'라는 것은 서로주체성의 맞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씨알을 통해서만 내가 되고 씨알 속에서 비로소 내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일정한 부분에서 씨알이 '나'입니다. 내 존재의 절반이 거기에 비쳐 있다는 의미에서요. (김상봉)-134쪽

저는 씨알이 인간의 존재방식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주체로 살 수도 있고 객체로 살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참된 씨알이나 민중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한낱 군중이나 대중으로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만나멩서 생기는 것 같아요. 타인과의 만남, 역사와의 만남의 방식이 우리를 민중으로 만들기도 하고 이기적인 개별자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만남의 한 당사자가 우리들 각자이기 때문에 저는 민중을 절대로 대상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의 치기로 '왜 변하지 않는가' 탓했던 것인데 지금은 달라요. 그러한 만남의 총체성 속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것이고, 우리들 각자는 그러한 만남을 지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교차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김상봉)-136-137쪽

'바깥'이란, 공간적으로 표현하자면 장벽이 극복된 자유의 공간이겠고, 시간적으로는 희망이 살아 있는 미래라고 할 수 있고, 또 신앙을 가진 사람들 말로는 내세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바깥에 대한 상상력이 있으면 이 세상을 규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근야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내부에 갇힌 사고방식인 것이죠. 내부와 외부의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교양이나, 사상, 종교의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서경식) -139쪽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주체를 형성할 때, 그리고 그러한 주체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지속성과 어떤 외적, 내적 형식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사회적 실체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적 실체는 단순한 합성체가 아니라 주체들의 만남 위에서만 존립하는 공동체입니다. 물론 그 공동체는 언제나 공동주체이고요. 국가는 이런 공동주체성의 꽃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회적 실체가 공동의 주체성을 '실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대다수 구성원들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해 있으니까요. (계속)-146-147쪽

(이어서) 참된 공동체는 오직 모든 구성원들이 대등하게 서로주체가 될 때 비로소 실현됩니다. 누구도 일방적으로 사물화 또는 도구화되지 않고 서로주체가 되는 그런 공동체, 만남을 가리켜 저는 서로주체성이라 부릅니다. 나라 역시 공동체로서 오직 서로주체성의 현실태일 때만 참된 나라일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한갓 합법적 수탈기구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한국 역사에서 보자면,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주체성의 현실태로서의 나라를 가져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나라의 표상이 역사 속에서 충돌해왔는데, 그 하나는 현존하는 국가기구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표면상 지속적이지는 못했으나 끈질기게 이어져온 '씨알의 나라'를 향한 열망입니다. (김상봉) -147쪽

저는 기본적으로 권력이 자동적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그 자체로서 자본가를 대리한 착취기구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일견 심오해보이고 국가 폭력에 질린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일보>가 퍼뜨리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듯이 국가권력 역시 서로주체성의 현실태에 가까워질 수도 있고 폭력에 기반한 홀로주체성의 현실태일 수도 있는 것이죠. 우리가 어떤 나라를 만드느냐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김상봉)-169쪽

필연성의 구속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 필연성을 다 떨쳐버리고 모든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겠다는 것은 홀로주체성의 자유라는 관념을 부추기지요. 그것은 타인을 다시 도구화시키고 사물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홀로주체성이 품어온 해방의 전략이란 것이 그렇게 자연적, 인륜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가 어떤 권력의 주체가 되겠다는 전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소수의 사람들이 해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르크스가 꿈꿨던 것과 같은 보편적인 인간의 해방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단순히 필연성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내가 홀로 나의 자유를 실현하고 내 존재를 완성하겠다는 것, 이를테면 니체가 꿈꿨던 초인이 되는 것은 옳은 기획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길을 가는 한 우리는 내부의 상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결국에는 공멸의 길로 접어들고 말 거예요. (김상봉)-177-178쪽

지금 한국 사회의 대학생들은 잘못 교육받고 있어요. '87년 체제'라는 것은 완전히 학벌 체제에요. 군사독재 체제가 끝나고 온 것이, 절대자본주의 체제이고 하겁ㄹ 체제예요. 지금 한국 사회를 굴리는 구조를 보세요. 학생들이 철저히 입시 체제 안에서 노예화되어 있습니다. 취직을 하기 전까지는 입시와 똑같은 심리적 메커니즘 속에 빠져 있는 거예요. 이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정치적으로 각성되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한 거예요. 언제 각성 되나요? 취직해서 소모품으로 학대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어디 가나 짐승의 삶이다'라는 것을 곧 깨닫게 돼요. 이때 역사라는 참조자료를 보게 되지요. 인간은 경험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과거를 참조하게 됩니다. 그런데 프리모레비의 기억은 그런 기억이라기보다 수난 그 자체에 대한 기억입니다. 가해자들의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증언일 뿐이에요. 그런 기억은 역사 속에서 힘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김상봉)-194쪽

정규직의 조직 안에 포섭된 사람들과 거기서 주변화된 사람들 사이의 모순이야말로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저는 정규직화된, 중심에 포섭된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역사를 상기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효과가 있든 없든, 그것만이 사람들의 양심에 대한 거의 유일한 자극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에 대해 그런 의문이 드는군요.
KTX 여승무원 같은 경운은 주변화되어 있으니까 항거해야만 하는 모순이 눈앞에 보이고 피부에 느껴지지요. 물론 이 사람들이 저항할 땐 선배들이 싸웠던 기억들을 호출하고 있지요.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주변화된 위치는 바뀌지 않아요. 그런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저항을 말할지, 그때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문제라고 봅니다. (서경식) -196쪽

정말로 절망하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가 도덕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철저하게 절망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도덕을 말하는거예요. 진정으로 절망한다는 것은 도덕을 넘어서야 하는 겁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도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도덕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레비의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도덕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계몽주의적인 척도를 가지고 나치에 대해서 절망하거든요. 그건 저에게는 절망이라고 보이지 않아요. 처음부터 도덕이라는 것이 없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게 진짜 절망이에요. (김상봉) -224-225쪽

저는 국가란 국민을 보호하는 기구가 아니라, 원래부터 어떤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수단이고 권력의 차별적 분배 장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권력 장치를 하루이틀 사이에 없앨 수 있는 방안, 전망은 우리에게 없지요. 사회주의 혁명도 국가를 폐지하는 전망을 실현시키지 못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룰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아직 그런 한계 안에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요. ... 중략 ...

저는 궁극적으로 국가라는 폭력 장치를 없애기를 전망하지만, 현재 우리가 자신을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서 생존시켜 가기 위해 국가라는 조직을 개선하는 작업이 우선 긴요하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현재의 혈연 공동체적 민족 국가를 모든 성원들이 동등한 권리와 자기의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로 바꾸어야 하며, 또 성원이면 누구든 차별 없이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경식)-255쪽

가해자는 타자를 알지 못합니다. 타자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수난받은 사람 역시 타자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저항해본 사람만이, 저항의 경험 속에서 자기와 타자를 끊임없이 견주어봅니다. 저항하기 위해서는, 나쁘게 말해 적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항해본 사람만이 역지사지 할 수 있습니다. 저항해본 사람만이 이런 역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필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상봉) -266-267쪽

탈식민주의라는 것이 세계가 식민지배를 겪은 이후의 역사라는 뜻이고 또 그것을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탈식민주의를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역사로 이해해야 하고 또 식민주의적 권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경계하며 그것을 비판하는 저항의 담론, 실천으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서경식)-272쪽

재일조선인 내에서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취학연령이 되면 일본 학생들처럼 통지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에 약간 회의적입니다. 물론 여러 부당한 점이 있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 국미교육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디아스포라적인 거리를 취하게 해줄 수 있다는 이점도 있고, 사회의 교육 제도 전반에 대해서도 반성해볼 수 있는 입지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국기를 게양할 때 '저 일장기는 우리나라의 국기가 아니기 때문에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듣는 것이 재일조선인입니다. (계속) -290쪽

여담이지만, 일본 내 진보적인 인사들 중에 '학생들 사이에 재일조선인도 섞여 있는데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하라고 요구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국민, 그러니까 타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국기게양을 하지 말자는 것이죠. 저는 그런 논리에도 문제가 있다고 봐요. 국민이 꼭 국가에 대해 충성의 예를 표해야 하는 것인지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지, 우리 국민이 아닌 사람들도 있으니까 하지 말자는 식으로 대충 사태를 얼버무리면 안 됩니다. 다수가 하고 있는 일이니 소수도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가 옳지 않은 것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더 근본적으로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서경식)-291쪽

일본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하는 일 중에 제가 불만스러워하는 것 하나도 이 국기, 국가 문제와 관련이 있어요. 이 사람들이 재일조선인이니까 여태까지는 '일본 국민 체육대회'에 참여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 조금씩 참여의 기회가 생겼지요. 그런데 국민의례라는 걸 하잖아요. 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려면 참여한 학생들이 곤란하지요. 그럴 때 조총련계 선생님들이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이렇게 말해요. '우리나라에도 국기와 국가가 있으니 너희가 남의 나라 국가나 국기에도 존경하는 태도를 갖추라'고요. 저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본의 군국주의, 국가주의 때문에 식민지배까지 받았는데, 이제 그걸 넘어설 방향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서경식)-309쪽

결국 인간이 교육받는다는 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 주체성의 정립과 형성을 지향하는 것이지요. 그 내용을 보자면, 원칙적으로 자기가 누구인가를 타율적이지 않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규정해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대적인 공교육이 보편적으로 '교육받을 권리, 평등한 교육의 실현'이라는 좋은 뜻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면 안 되죠. 역사의 중요한 진보니까요. 그런데 그런 공교육의 이념을 국가가 나서서 실행할 때, 그 본의와 다른 위험이나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근대적인 인간이 자신을 주체적 시민으로 자리매김하느냐 아니면 국가에 의해 포획된 국민으로 자리매김하느냐의 문제로 정리될 수 있겠는데, 근대 공교육이 그렇게 긴장관계를 갖는 두 측면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해왔음을 우리가 알고 있죠. (김상봉) -319쪽

모든 시민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의 이념을 위해 폴리스(나라)의 일원으로서 결속한 공적인 인간입니다. 시민이 이런 공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공론장에서의 단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넘어서 공적이고 보편적인 만남의 지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평의 성격입니다. 그것이 자유로운 자기실현과 자기규정을 위한 것으로 개방될 때, 이상적인 의미의 나라가 가능하겠지요. (김상봉)-320쪽

교육은 한글을 배우고 곱셈을 배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공적인 인간으로서 주체가 되는 과정이지요. 그러한 교육의 과정에서 자기규정을 할 절대적 중심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그 중심을 두고 사투를 벌인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의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한 싸움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난 것이 5.18일 것입니다. 민중들은 민중들 나름으로 그 중심을 전유하고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 이를테면 우리가 이루어야 할 '나라'와 그 속에서 정립해야 할 '나'라는 과제를 공적, 사적 교육의 장을 통해서 수행해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배계급은 지배계급대로 그것을 전유하려는 투쟁을 계속해왔지만요. 일제 시대 이래 국가기구들이 민중들을 길들이고 세뇌하기 위해 국가주의적인 교육을 실시해왔지만 이 나라의 씨알들, 민중들 사이에는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정서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죠. 사물화된 중심이 없었던 것이 결국 우리에게 전복의 가능성, 부정의 가능성을 늘 열어주었다는 뜻입니다. (김상봉)-321-322쪽

민주화 이후 실제로 여러 분야에서 이전엔 굉장히 무질서하던 것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질서가 잡힌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육은 예외에요. 여전히 30년 전이나, 6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틀에 갇혀 있고, 교육 내용, 교과과정 특히 도덕 교과에서 국가주의적인 내용 등등은 크게 변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어요. 게다가 단순히 국가주의적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한국 사회 특유의 걸림돌, 즉 '학벌 체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학생들이 정상적인 시민적 자각이나 공적인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치명적으로 방해하지요. '학벌 체제'는 인간을 철저히 사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요. (김상봉)-323쪽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나타나는 자발적인 노예화 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고도성장기로 진입하면서 일본에 나타난 상황과 많이 유사하다는 느낌이죠. 일본 지식인들은 '자발적 노예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제가 사사한 후지타 쇼조 선생님은 '안락전체주의'라고 말했습니다. 안락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런 전체주의가 1970년대에 진행되었다고 하셨어요. 한국에서는 일본의 그런 추세가 훨씬 더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20-30년이 걸렸다면 이 나라에서는 5-10년 사이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듯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한국이 일본보다 더 앞질러 그런 추세를 밟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에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데 과도한 열성을 보이고 있죠. 미국과 국제 자본에 대한 자발적인 노예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고, 그 배후에서 자라는 것이 그런 전지구화 속에서 살아남아 조금이라도 자기 지위를 상승시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안락 전체주의적' 태도입니다.(서경식) -327-328쪽

이른바 전문 교육, 실용 교육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교양을 우습게봅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교양 이야기를 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 중략 ... 이런 식으로 일종의 '반 교양주의'라는 것이 반 지성주의 같은 무력감과 냉소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식, 지성 자체에 대한 경멸이 팽배해졌죠. 그중에서도 제일 질이 나쁜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나 무력감을 변명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서 이런 반지성주의, 반교양주의를 악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계신 분들은 실감하실 수 없겠지만 일본에서는 언론인이나 대학교수와 같은 지성인들이 '나는 지식인입니다. 나는 교양인입니다'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미덕처럼 보이지만, 제가 볼때 이것은 겸손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기 위한 자기회피나 자기보신에 불과합니다. (서경식) -331쪽

선비정신, 선비적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사유나 활동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아주 고전적인 의미의 교양, 그리스-로마적인 시민정치적 교양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양에서의 '정치적'이라는 것과 사대부들에게 있어서의 '정치적'이라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요. 그렇지만 어쨌든 유교적 세계관에서 모든 배운 사람의 수양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편안히 하는 것이지요. 모든 권력, 정치가 언제나 위선적인 것으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선비적 교양이라고 하는 것도 많은 부분 썩은 선비들의 권력욕, 탐욕을 포장해주는 위선적 마스크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선비적 문화, 교양을 규정할 때, '예술과 철학이라는 문화적 소양을 정치적인 형성의 능력과 상통하게 하려는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어떤 고전적인 서양의 시민 교양과도 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상봉) -335쪽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인간을 세 유형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강한 신앙을 지는 사람, 둘째는 공산주의자처럼 정치적이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 이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통해, 자기가 갇힌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음을 믿고 있는 것이지요. 신앙인은 내세나 천국을 상정할테고, 공산주의자는 필영ㄴ적으로 올 역사의 미래를 믿지요. 레비는 자신과 같은 셋째 유형은 증언하기 위해, 기억하고 쓰기 위한 역할이 있었기에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사실은 레비도 자신의 갇힌 세계의 외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살아남아서 밖으로 나가면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 그 사람에게 증언할 거야'라는 상상을 했던 거지요. 그런 상상력이 우리가 이런 갇힌 세계 속에서도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나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고, 저는 그런 걸 교양이라고 부릅니다. (서경식) -345쪽

자유로운 앎이 이처럼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얽매이지 않는 앎이라면, 나쁘게 말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앎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모든 앎이 어떤 외부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삶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실용적이고 도구적인 지식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그 쓸모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맹목적 지식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불합리와 맹목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모든 도구적 지식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삶의 총체성으로부터 정립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앎이란 바로 그런 궁극 목적에 대한 지식을 주는 앎으로서 그 자신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다른 모든 앎을 쓸모 있게 만들어주는 앎이라 하겠습니다. (계속)-346쪽

(이어서) 그런데 만약 이런 앎을 우리가 남에게서 타율적으로 주입받을 뿐이라면 이는 제 삶의 목적을 남이 규정한다는 말과 같으니, 곧 노예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오직 자기 삶의 목적을 스스로 정립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이처럼 자기 삶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자유로이 규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신적 소질이 요구되는데, 그 소질이 바로 교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질을 선생님께서는 앎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 앎이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지식은 아니라는 말씀을 보태고 싶습니다. 교양은 지식이 아니라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지식을 암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교양과는 원칙적으로 상관이 없습니다. 교양이란 무엇을 생각하든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건강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죠. (김상봉)-346-347쪽

우리가 교양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예술을 떠올리는 것도 까닭이 없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술이야말로 본질적으로 고통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입니다. 비극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특히 비극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고통, 또는 인간의 보편적 고통에 대해 절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일종의 감정 교육을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실 예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지도 모르겠어요. 굳이 고상한 예술이 아니라도 세상에 즐거운 일은 많으니까요. 우리가 그것을 통해 타인의 고통, 또는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절실하게 따라체험할 수 있는 한에서 예술은 한갓 오락과 구별됩니다. (김상봉)-352쪽

인간이 가장 철저히 홀로주체성에 함몰되는 순간이 바로 고통을 느낄 때라는 겁니다. 나의 이 고통을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명징하게 느끼는 홀로주체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바로 그 고통만이 우리를 서로주체성으로 인도해주는 다리라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해온 것이지요. 하지만 여전히 이것을 어떻게 개념적 사유 속에서 구체적으로 해명하느냐 하는 것이 제게 남겨진 가장 어려운 아포리아입니다. (김상봉)-355쪽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의식, 곧 긍정적으로 규정된 의식에서 출발하지 못했다는 자기상실의 경험이 오히려 타자에 대한 열린 감수성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는 처음부터 '나는 무엇이다'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들어갈 수 있는 자기의 정체성 혹은 주체서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타자성을 향해 편견 없이 나아가고, 타자의 고통을 향해 장벽 없이 이행해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 '없음'에 대한 고통스런 인식이 선생님의 말들을 간으케 한 가능성의 조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죠. (김상봉)-361쪽

예술이 타자성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예술은 현실이 아니고 꿈꾸는 것이니까요. 예술에는 인식이나 다른 활동이 갖지 못하는 창조성이 들어 있지요. 창조는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타자성의 산출에 존립하는 것이고, 그 타자성으로의 초월이 예술의 자유이기도 하지요. (김상봉) -371쪽

우리가 예술을 가리켜 삶의 총체성의 표현이라 부를 수 있는 까닭도, 그것이 논리적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눈물에 참여함으로써 보편적 고통, 보편적 슬픔으로 나아가게 해주고 그것을 통해 참된 의미의 보편성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참된 의미의 정치의 전제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김상봉)-374쪽

'어떤 공동체,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을 실현하고 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대답을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비판과 저항의 과제에서는 영웅적인 용기를 통한 성과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형성의 과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준비 없이 새로운 역사 단계 앞에 마주 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그 결과 이른바 문민화한 한국 사회에서 좌/우,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우리는 '바람직한 사회'라는 것을 상상할 때 기존의 지배적인 담론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자본주의적인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민족주의적인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국가주의적인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계속) -390쪽

(이어서) 이런 것들을 저는 한 마디로 '동일성에 입각한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동일성이란 사실은 언제나 다수, 강자에 의해 전유되는 동일성입니다. 거짓된 것이죠. 표면적으로 민주화되고 시민적 자유나 자율성이 신장된 것처럼 보이는 한국 사회가, 내면적으로 이런 위선적인 동일성의 신화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모든 약자, 소수자, 타자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는 체제로 급속히 이행하고 있고 또 그 과정에서 대다수가 타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요. (김상봉)-390쪽

진정한 공동체는 누구도 '우리'에서 소외되지 않는 우리 모두의 공동체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들을 모두 대등한 주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래서 과연 주체적이고 인간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고 판단합니다. 결국 그것이 앞으로 내부의 사회적인 통합을 생각할 때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할 때도, 또 분단을 극복한 후의 사회를 생각할 때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겁니다. (김상봉)-390-391쪽

외부에서 식민지를 찾을 수 없는 후발자본주의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내부에 식민지를 만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남한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내부의 노예인 것이고 외국인 노동자들도 내부의 노예인 것이고, 남북 경협이란 것도 분단 극복에 긍정적인 기능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주의적인 사유와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결국 내부 식민지를 만들려는 시도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북한 정부가 그것을 어디까지 용인할까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지만, 어쨌든 남한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결국 그 방향을 추구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중략... 포괄적으로 봐서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내부 식민지 타자에 대해서는 식민주의에서와 동일한 방식의 상상력이 투사되고 적용된다는 선생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는 식으로 끊임없이 다름을 차별의 기제로 재생산해내게 되는 거죠. 학벌, 지역, 이주노동자들과 관련해서는 피부색, 언어, 이런 다양한 타자성들이 내부 식민지 또는 내부적 노예를 재생산하는 기제가 되는 거죠. (김상봉)-395-396쪽

우리가 빨리 버려야 할 것이, 국가나 민족이라는 것을 너무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교육의 탓이 큽니다. 국사나 윤리, 도덕, 국어 등의 교과목을 통해서 세뇌된 경향이 있지요. 그런데 서양과 다른 역사를 살아온 분들한테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이야기를 해봤자 별로 설득력이 없을 거에요. '국가나 민족은 전제가 아니라 과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겠지요. 그 구성원은 때마다 변하는 것이고, 그래서 때마다 그 변화된 조건 속에서 우리가 새로이 형성해야 할 과제로서 시민 공동체 또는 나라가 있는 것이라고요. ...중략... 헌법도, 국기도, 국가도 기본적으로 한 나라의 상징적, 형식적인 표현일 수 있는데 그걸 자명한 전제로 생각하지 않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가령 통일이랄도 되면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나라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일종의 집이고, 그 속에 어떤 사람들이 사느냐에 따라서 집을 고치거나 다시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김상봉)-402-403쪽

동일성이 보편성의 척도로 기능할 때 타자성을 배제하게 됩니다. 제가 말해왔던 서로주체성의 이념이라는 것이 타자성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 또는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제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바로바로 동의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 새로운 공동체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더불어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서로주체성'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때 '척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특히 언어를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표준어에 대한 집착을 비판적으로 봅니다. (김상봉) -409쪽

우리가 '자기'라고 하는 것을 다양한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국가나 민족이라는 것도 그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은 과연 '자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자기를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요즘 흔히 말하듯 주체가 허구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치열한 추구는 긍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무엇인가'는 자명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테면 일본에서 조선ㅇ니 민족학교가 자기를 지킨다고 할 때 '자기'가 무엇인가, 거꾸로 그에 대해 비판하며 '이미 다 끝난 이야기를 가지고 왜 그러냐, 그냥 동화되어서 살아라'라고 할 때의 '자기'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되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란 껍데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지하게 물어야 할 삶의 주체요, 지평이니까요. (김상봉) -415쪽

일본에서 1990년대에 종군위안부 할머니들과 그분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요구할 때 이에 대해 일본에서 리버럴리스트와 극우파가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의란 것은 없다, 정의를 내세우고 인류가 많은 나쁜 일을 저질렀다, 나치도 스탈린도 부시도 그리스도교도 정의를 앞세워 나쁜 일을 해왔다, 정의에 대해서 운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라는 거였습니다. 그때 다카하시 데쓰야 같은 분은 정의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정의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일본이 한 일이 정의롭지 않다는 고발이 있고, 그 고발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다카하시 데쓰야나 서경식이 정의를 대변하고 정의를 강요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고 있는 이 세상에 울면서 정의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응니, 거기에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정의에 대한 추구는 인간다운 욕망,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것을 외면하면 인간답게 못 살지요. (서경식)-435쪽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불문율인 이 땅에서 죄는 언제나 가난한 자의 멍에이고 인권은 그들을 위한 복음이다. 부자는 돈이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은 국가도 법도 지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즈음에 와서는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해진 일이지만 이 나라의 민주화는 가진자들에게 착취의 자유를 보장했을 뿐 가난한 사람의 인권을 지키고 확대한 것은 아니다. 아니 도리어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은 점점 더 열악해져왔으니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김영삼 정부 이래 계속해서 증가해온 구속 노동자의 숫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몇 년 전 이른바 삼성 X 파일이라고 알려진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검찰이 삼성의 노동 탄압을 비판한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을 명예훼손이나 업무방해 따위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시키는 것이 이 나라의 국가기구이니, 삼성의 불법이 얼마나 막심하면 한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 감옥이 필요했으며, 검찰과 법원을 비롯한 국가기구 전체가 얼마나 철저히 매수되었으면 한낱 입을 한번 잘(못) 연 죄로 3년 5개월씩이나 옥살이를 해야 하는가 (김상봉)-447쪽

마음으로 자기를 세우는 것, 마음으로 스스로 서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마음으로 '자기를 세운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더 나아가 자기가 누구여야 하는지를 스스로 규정할 때 가능하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남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나가는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은 바로 그렇게 자기가 누구인지 묻고, 또 자기가 누구여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소크라테스 이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야말로 철학의 첫째가는 금언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철학은 물감이 아니라 개념으로 자기의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다. 그 정신의 자화상을 통해 우리는 자기를 인식하고 또 형성해나간다. 그런즉 내가 참된 철학자라면 나 역시 자기의 언어와 개념을 통해 자기의 삶과 현실을 주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김상봉) -449쪽

내가 우리의 주체성을 해명하는 것이 과제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주체를 해체해야 할 시대에 아직도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칸트주의자의 시대착오적 아집이라 치부했다. 반면 내가 서로주체성의 본질적 계기로서 타자 속에서의 자기상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들뢰즈나 데리다 또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성의 철학을 강의하려 들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언어로 해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종종 철학의 보편성에 반하는 종족숭배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서양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기 문제를 자기 언어로 말한다. 그래도 그것은 그대로 보편적 담론이리 대접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문제를 우리 언어로 말하려 들면 그것은 종족주의로 매도된다. 이런 뿌리 깊은 자기망각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결국 나 자신을 나 스스로 비판하고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김상봉)-452쪽

참된 철학은 경탄이 아니라 경악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직면ㅇ한 고통과 슬픔에 대해 경악하고 절망하면서 '왜?'라고 물을 때, 그 물음이야말로 올바르게 놓인 근거물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철학의 시원은 인간의 고통을 듣는 것이다. 우리가 귀 기울이는 슬픔이 아니라면 철학이 마주한 현실은 없다. 철학은 너의 슬픔 속에서 나의 슬픔을 보고, 끊임없이 이 슬픔과 저 슬픔을 만나게 함으로써 더 보편적인 슬픔의 바다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철학의 보편성이란 그것이 매개하는 슬픔의 보편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란 이처럼 인간의 슬픔을 서로 만나게 하는 정신의 활동을 통해 열리는 보편적 슬픔의 전형적 형상화이다. 그런 까닭에 철학적 정신은 철학자들이 남긴 책을 읽고 이해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타인의 슬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슬픔이 보편적인 형식을 얻을 때 그런 정신이야말로 철학적인 것이다. (김상봉) -454-455쪽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고통은 영혼을 부패시킨다. 고생이 인간을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오직 자기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과 매개될 때, 그때 고통은 우리를 넓고 깊게 한다. 한 사람의 정신이 자기의 아픔 속에서 타인의 아픔을 발견하고 타인의 슬픔 속에서 자기의 슬픔을 느낄 수 있을 때에만, 고통은 인간의 정신을 자기의 비좁은 골방에서 해방시켜 보편적 존재의 큰 바다로 나아가게 한다. (김상봉)-455쪽

우리 모두에게 자기의 고통은 현실적이지만 타인의 고통은 관념적이다. 그런 까닭에 고통이 우리를 자기중심적이 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비상한 노력이 없으면 자기의 고통을 타자화시키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김상봉) -456쪽

현대 사회에서 정치적 공동체에의 귀속성이란 한 인간의 존재를 가장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객관적 조건이다. 그런데 서선생님에게서는 조국과 고국 그리고 모국이 다 다를 뿐만 아니라 거의 적대적으로 대립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선생님과 같은 재일조서인 3세의 경우에는 모어와 모국어도 다르다. 이런 이중 삼중의 자기분열 속에서 "당연히 분열과 상극은 자아의 내면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아의 내적 분열이 일상화되면 삶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런 까닭에 디아스포라는 굳이 철학자가 아니랄도 이미 일상의 삶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는 물음인 것이다. (김상봉)-459쪽

언급할 만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선생님(서경식)은 자기를 관찰자로 이해하는데 반해서 나는 자기를 행위자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대담이 진행됨에 따라 내겐 조금씩 분명해진 차이이다. 여기서 관찰한다는 것은 방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증언하고 미래를 경고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반면에 행위한다는 것은 역사에 참여하고 스스로 형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차이는 순전히 주관적 자기인식의 문제로서 객관적으로 누가 관찰자이고 행위자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대화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자기를 관찰하는 사람의 자리에 놓았고 나는 상대적으로 행위하는 자로서 생각하고 발언했다. (김상봉)-4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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