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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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들뢰즈는 인류가 선택한 두 종류의 길에 대해서 말했다. 첫째는 영토화, 코등화의 길이다. 이 길에서 사람들은 몸과 욕망의 탈주선을 안정된 형식과 규범과 원칙들에 맞춰 적당히 통제하며 살아간다. 이것을 그는 '붙박이 삶'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인류가 지속적으로 선택해 온 가장 보편적인 패턴이다. 문화란 이 붙박이 삶의 세련된 역사 이외의 다른 게 아니다. 문제는 이 문화 코드들이 올가미처럼 그 삶의 주체들을 속수무책으로 묶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권력자들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묶인 상태가 행복한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려고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문명사에서 국가는 이런 방식으로 탄생되었고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노예가 되는 길을 걸어왔다. (계속) -19쪽

(이어서)

둘째는 탈주와 유목의 길이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공간이란 말뚝을 박아 금줄을 치고 기둥을 세워 벽을 만들기 위한 기하학적 조건이 아니다. 몸과 욕망의 탈주선을 자유롭게 터주는 것이다. 역동적으로 솟구치는 야성은 그 공간의 매끄러운 지표면을 가로지르며 탈주한다.

들뢰즈는 이런 패턴의 삶을 사는 주인공들을 유목민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붙박이 문화 안에서 코드화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이란 모험이자 도전이고 새로운 경험이자 끝없는 해방 과정이다. 자신들을 옭아매려는 일체의 코드를 거부하는 유목민들의 이 모험과 도전의 충동은 확정된 코드에 길들여진 정착민들에게는 지극히 불온하고 위험한 힘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19-20쪽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맥락들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매세지는 우선 위반하는 삶의 지혜다. 위반은 바깥에 나서는 것이고, 바깥에서 안의 것들과 맞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바깥에 나서는 순간, 아니 바깥에 나서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은 긴장 상태에 들어선다. 바깥을 이미 보아버린 자는 바깥에 대한 동경을 멈추지 못한다. 바깥은 먼저 안의 윤곽 전부를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바깥에 나선 자는 언제나 안에 있는 것 전부와 상대할 수밖에 없다. 안에 있는 게임의 규칙 한두 개 깨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그는 가둬둘 수 없는 위반의 정열로 안의 것 전부와 맞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34-35쪽

그(베르그송)에 따르면 표층자아는 단순히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 있는 자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시선이나 자신의 욕망에 의해 고정시켜 놓거나 박제시켜 놓은 자아이다. 시선이나 욕망은 변하지만 박제된 자아는 변할 수 없다. 결국 필요에 따라 자아가 그때그때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공부하는 자아, 일하는 자아, 사랑하는 자아, 사업하는 자아, 탐구하는 자아, 게임하는 자아 등등으로. ... 중략 ...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 관찰되고 분석되고 판단되는 표층자아의 존재만은 아니다. 그럴 수 있음을 보여주는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변화되면서 지속되는 진실한 자아이다. 이것은 주문제작 상품처럼 내걸거나 팔기 위해 만들어놓은 자아가 아니라 내 존재의 심층 깊은 곳에서 저절로 솟구쳐오르는 자아이다. ...중략... 표층자아는 단순하다. 그러나 복잡한 욕망의 층위와 다양한 감성의 충동들을 끌어안는 이 심층자아는 결코 단순할 수 없다. 표층자아와 구분되는 심층자아의 결정적 차이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 자유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불온한 힘으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 -59-60쪽

우리가 누군가로, 어떤 것으로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인물로 된다는 것, 그것은 단지 그의 신체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옷처럼 걸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의식의 자기 정체성과 하나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의식은 신체가 아니다.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한다는 말이냐. 결국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로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는 동시에 자기 정체성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반증한다. -69쪽

가령 나는 나를 대상화시켜서 느끼고 회상하고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으로서, 바꿔 말하면 의식의 자기 정체성을 지닌 채로 그런 경험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고 나 자신을 보는 나 자신을 다시 볼 수 있고, 또 이런 상황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바라보는 관점으로 물러서기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대상으로 머물지는 않는 자아가 있으니 곧 의식의 자기 정체성이다.비판철학자 칸트는 이것을 '순수자아'라고 말했고, 현상학자 후설은 '선험적 자아'라고 말했다. 이것은 몸처럼 변화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리고 물체가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69쪽

내가 여기서 '자신이 되라'고 한 것은 자기 존재를 긍정하라는 말이 이외의 다른게 아니다. 잠자(<변신>의 주인공>)는 아직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 변신한 몸과 자기 의식을 미처 화해시키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의 존재, 자기의 현실을 긍정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우리는 충분히 우리 자신으로 되어 있는가. 혹시 될 수 없는 것으로 되고자 하는 크레이그처럼 어리석은 욕망에 부대끼며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존재, 자기의 현실을 외면한 채, 타자와의 불가능한 동화만을 꿈꾸며 시간과 기력을 헛되이 소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존재의 가능성을 충분히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복제라도 하듯이 성형해 내려 일을 꾸미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영웅이 걸어간 길을 나 자신도 한 치의 착오 없이 따라 걸어가기 위해 내가 갖고 있는 다른 소질과 취향들을 깡그리 부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위인의 삶을 나 자신도 구현하기 위해서 내가 공들여 쌓아온 관계들을 팽개쳐버리고 있지는 않은가.-70쪽

동일자는 이쪽, 타자는 저쪽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에게는 당신이 타자고 당신에게는 내가 타자다. 물론 집합적으로도 쓰여서 가령 한국인에게 외국인은 타자이고 외국인에게는 한국인이 타자이며 아시아인에게 유럽인은 타자이고, 유럽인에게 아시아인은 타자다. 이처럼 타자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마치 동쪽과 서쪽, 왼쪽과 오른쪽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듯이.

...중략...

결국 타자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은 상대의 힘, 가령 유령성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타자와의 관계가 우선은 권력 갈등 관계로 맞서게 되는 까닭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동일자들의 폭력도 우선은 타자성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셈이다.-88-89쪽

미셸 푸코에 따르면 타자 앞에 선 동일자의 전략은 결국 두 가지뿐이다. 타자의 차이를 동일화시키거나 아니면 무화시키는 것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지식이, 후자를 위해서는 권력이 동원된다. 동일자의 궁극 목표는 마침내 타자를 남김 없이 자기 영토에 편입시켜 완전한 동일성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가 동일성의 영역에 편입된다고 곧 동일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영토 안의 타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같은 영토 안에 남겨진 타자를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식민'이라 부른다. 타자의 동일화는 어떤 미명 아래 시도되든 결국 이리의 발톱을 감춘 식민화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이 근세 이후 세계의 동일자로 등장한 유럽이 걸어갔던 역사의 행로라는 것을 안다. -89-90쪽

우리는 흔히 시간이 현재, 과거, 미래의 세 가지 지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가 있어서 역사와 반성이 있고, 미래가 있어서 이상과 희망이 있으며, 현재가 있어서 현실과 삶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부철학의 완성자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세 가지 시간지평은 오로지 문법 안에만 존재한다. 과거는 없고 오직 기억만이 있으며, 미래는 없고 다만 기대가 있을 따름이다.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 이 순간뿐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존경하고 질투하고 선택하고 거부하는 모든 것들이 이 현재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즉 삶의 시간은 오직 하나, 현재가 있을 뿐이며, 기억(과거)하고 기대(미래)하는 일들도 모두 이 시간의 지평 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재형 사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131-132쪽

니체는 현재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인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니체는 이 역사적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불행한 삶을 숙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만일 행복해지려 한다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망각해야 하는 것은 이미 없는 과거, 아직 없는 미래요, 사랑해야 하는 것은 현재 그리고 그 지평 위에서의 삶이다.

니체는 바로 이 점에서 '회상하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배우라고 했던 플라톤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플라톤은 완전한 것, 진리, 이데아 등은 과거에 이미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과거, 우리도 무죄하고 순결한 영혼이었을 때는 바로 이러한 진리의 세계 속에 흠과 때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었고,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면서 이 모든 완전한 것들에 대한 경험과 지식, 진리들을 깡그리 잊게 되었다고 한다. -137-138쪽

"가장 작은 행복이나 가장 큰 행복에서나, 행복으로 하여 행복이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그것은 망각이다. 좀더 학문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비역사적으로 감각하는 능력이다. 일체의 과거를 망각하고 현재의 순간에 머물러 설 수 없는 사람, 승리의 여신처럼 어지러움도 두려움도 없이 현재의 삶의 지평 위에 설 능력이 없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그런 인간들이 자신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불행에 빠트린다는 것이다." (니체)-139쪽

기억에 매달려 역사가 과잉되면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춘다고 니체는 경고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뭔가 올바른 것, 건강한 것, 위대한 것, 뭔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는 어느 정도는 망각할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이 능력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능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망각을 부정한다면 삶 또한 소멸되고 만다. 이 망각의 힘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147쪽

'있음'은 모든 '있는 것'들보다 우선하는 토대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음'은 반드시 '있는 것'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간혹 이런 착각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있는 것'이 사라지면 '있음'도 함께 사라져버린다고. 그러나 '있음'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부서지거나 흩어지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게 아니다. -236-237쪽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주관의 감정이다. 아무가 아름다운게 아니라 '아우가 아름답다'고 형이 느낀 것이다. 이 사실을 잊어 버리면 두 가지 잘못된 믿음이 생겨난다. 첫째는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대상이 같다는 것이다. 이 둘을 한데 뒤섞어 생각하는 데서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혼란이 시작된다. 쉽게 말하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보거나 듣게 되는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것' 혹은 '저것'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다르다. 그것은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란 오직 '생각하는 것'뿐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려면 아름다운 것, 가령 소녀, 꽃, 노을, 단풍, 시, 그림 같은 것을 넘어서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넘어서서 나아간다'는 것은 눈으로 보기를 멈추고 사념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 곧 '추상'이다. 결국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려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넘어서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261-262쪽

목적 인간 자신은 대체로 불행하다. 원래 목적을 이루는 일이 힘든 과정과 희박한 가능성을 뚫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설령 어쩌다 성공했다 하더라도 목적 인간은 곧장 다른 목적을 찾아 새로운 모험의 길로 나서려 하기 때문이다. 과정이란 그에게는 오직 건너뛰어야 할 정애에 지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출발점에서 목적지까지 그냥 마술로 훌쩍 뒤어넘거나 비행기 같은 것으로 날아가서 도달하고 싶다. 그래서 그는 평생 시간 없다는 것과 바쁘다는 것을 스스로 혼동한다. 신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공평하게 시간을 주었지만, 그는 자신에게만 유독 시간이 없다고 불평한다. 그에게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 바쁘다고 믿는 것 뿐이다.-283쪽

과정 인간은 삶이 A와 B 사이에 놓이는 과정 가운데 있다고 믿는다. 그는 과정 바깥에 있는 어떤 것들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도중에 멈춰 서서 머뭇거리고 서성거리고 심지어 방황하는 것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삶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이런 과정에서 어쩌다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 누구나 도달하기를 바라는 지점과 일치할 수 있다. 그때 이 우연의 선물에 고마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거북해하고 부담스러워한다. -284쪽

세상에 의해 거부된 존재들은 선택 앞에 서야 한다. 쫓겨날 것인가, 나앉을 것인가. 토니 모리슨은 소설 <가장 푸른 눈>에서 '쫓겨나는 것'과 '나앉는 것'을 구분한다. 떠밀려 쫓겨나는 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다시 세상으로 향하는 닫힌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배회한다. '두드리라, 열리리라.' 그는 설사 또다시 쫓겨난다 하더라도 정녕 이 문이 다시 열리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그러나 제 발로 나앉은 자는 다르다. 그는 세상을 향한 희망을 스스로 접어버린다. 그는 차라리 다른 곳에 가령 언어, 꿈, 환상 같은 것에 머물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의 힘은 나앉은 자들이 이런 마법의 세계에 오래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을 분류하고 해석하고 조정하고 판단한다. -321쪽

젊은 시절의 사르트르는 "사랑한다는 말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혹은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 혹은 어떤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주장할 때의 사르트르의 견해는 확실히 여자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새벽에 우유배달 온 토맥과 여자의 짧은 대화로 돌아가보자. 여자는 토맥에게 묻는다. "키스하고 싶어? 껴안고 싶어? 나랑 자고 싶니?" 이것은 물음의 형태를 차용한 사랑에 관한 그녀의 당대적 정의였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ㅎ는다. 그것은 우리 입의 구강구조를 거쳐서 나오는 바람 소리에 불과하다. 존재하는 것은 키스하고 만지고 껴안고 함께 잠자리에서 성교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그녀는 아이스크림집에서 다시 반복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저렇게 피부와 피부를 대서 접촉하고 느끼고 향유하는 것이라고. 여자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녀가 믿는 유일한 것은 신체와 신체의 접촉이다. 이처럼 그 구체적인 확인방식을 떠나서 떠드는 사랑에 관한 모든 논의는 허망하다는 것이다.
-339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 시절의 사랑이 변덕스레 쉽게 변하는 것은 그 사랑이 쾌락적이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즐거움을 주는 대상도 달라진다. 이것이 젊은이들이 쉽게 연인이 되었다가 또 쉽게 헤어지는 이유다. 그들의 사랑은 즐거움을 주는 대상의 변화와 더불어 변하며, 그러한 그것이 주는 쾌락도 속절없이 변해버린다. 젊은이들은 또한 성적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부분의 사랑은 정념에 의존하고 또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이 금방 사랑에 빠졌다가 하루 만에 헤어지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348쪽

에리히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시하고 이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부연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을 위한 불가결의 요소는 다음 다섯이다. 베풂, 보살핌, 책임, 존경, 인식. 프롬은 특히 마지막 요소, 즉 인식에 특별히 긴 해설을 덧붙인다. "사고에 의한 인식, 즉 심리학적 인식은 사랑이라는 행위를 온전히 인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나는 타인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 혹은 내가 그에 대해 가졌던 환상이나 불합리하게 왜곡된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오직 내가 인간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때만 나는 인간을 궁극적 본질에서, 사랑의 행위에서 인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식은 나를 알고 상대를 아고 나와 상대가 함께 얽힌 종횡의 맥락들을 아는 것이다. 반성은 특히 그것을 흘러간 시간의 지평 위에 되돌려놓고 보는 것이다. 인식과 반성이 결여될 때 우리의 사랑은 도구적 사랑, 쾌락적 사랑으로 굴러떨어질 위기에 시나브로 내몰린다. -351-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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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2-25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마음이 동해서 오래된 정원 다시 보고있었는데.. 이 밑줄긋기가 반갑네요 ㅎㅎ 이 책 보관함에서 몇달째 썩히고 있는데 ㅎㅎ

마늘빵 2008-02-25 08:22   좋아요 0 | URL
소설 <오래된 정원>? :) 나도 그거 오래 전에 읽었는데, 영화는 얼마 전 봤구. 책은 잘 썼어, 재밌고, 내용도 깊고.

Jade 2008-02-25 15:07   좋아요 0 | URL
어제본건 소설말고 영화요 ㅎㅎ 예전엔 안보였던 장면들이 보이더라구요. 영화관에서 두번이나 봤었는데, 역시 난 보고싶은 것만 봤나봐 ㅎㅎ

marr 2008-02-2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멕과 우유배달 여인이 나오는 걸로 보니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군요. 두 사람이 저렇게 멋진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게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그립군요.

마늘빵 2008-02-25 20:38   좋아요 0 | URL
미르님 이 영화를 아시는군요! 저는 아직 못 봤는데. 철학자 김용규씨도 그의 책에서 언급한 바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이 책 역시 사놓고 아직 보지 못했다는. 한번 보고픈 영화입니다.

turnleft 2008-02-26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철학 개념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발탁된 배우라고 할 수 있는데, 종종 저자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정작 설명하고자 한 철학 개념과는 그닥 어울리지 못하는 사례들이 눈에 띈다.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조연으로 출연시켜놓고 너무 많이 카메라에 담아 주연이 누구인지 헷갈리게하는 감독 같은 느낌이랄까"

예전에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더군요 ㅋㅋ

마늘빵 2008-02-26 07:55   좋아요 0 | URL
읽고보니 그 말이 잘 맞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잘 쓴 책이라 생각해요. :) 제가 전에 예스24에 칼럼비스므리하게 시도했던 그런 스타일이라 깜짝 놀랐어요. 제가 썼던 <묵공>과 비슷한 구조였다는.

Kitty 2008-02-26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저같이 무지몽매한;; 중생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줘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ㅋㅋ

마늘빵 2008-02-26 07:55   좋아요 0 | URL
이거 재밌습니다. 잘 모르는 영화, 잘 모르는 철학자의 철학도 쉽게 풀어서 잘 엮었어요.

프레이야 2008-02-2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나게(^^) 읽었어요.

마늘빵 2008-02-27 00:42   좋아요 0 | URL
네 영화와 철학이 잘 버무려진 책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