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품절


'역사에 대한 신뢰'라고 말할 때, 거칠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류의 역사를 초월적인 위치에서 지배하고 있는 '신'이라든가 '절대정신'과 같은 존재를 상정하고 그러한 절대자의 의지에 의해 역사가 진행해간다고 하는 '신뢰'이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겠다. 둘째, 인류의 역사가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해간다는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신뢰',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적인 발전사관이다. 셋째는 어떤 '민족'의 역사에 대한 '신뢰'이다. '무슨 무슨 민족이 이러저러한 고난을 겪어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발전해 갈 것이다'라는 신뢰. 요컨대 어떤 '민족'(이라는 관념) 혹은 그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관념)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내셔널리즘'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어떨지는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넓은 의미의 내셔널리즘이라 부르기로 하자. (서경식)-14-15쪽

제가 지적하려는 문제는 지식인의 언어입니다. 지식인의 언어는 처음부터 토씨 빼고는 한자어로 완전히 도배되다시피 했으니까 이것이 민중들에게는 하나의 장벽이었던 셈이죠. 우리 시대에는 영어가 그런 장벽이 될 수도 있어요. 이른바 '탈북'을 해서 남한으로 온 사람이 언어 생활에서 느끼는 대단히 심각한 장벽 중 하나가 남한 사람들이 영어를 너무 많이 쓰는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지식인들이 이런 현상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학문적 언어를 갈고닦는 과정에서 민중의 일상과 더 가까워져야 하며 스스로를 민중의 삶으로부터 괴리시키는 언어 사용을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루터가 성경을 번역할 때 시장 바닥에 앉아서 번역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민중성을 이야기한 겁니다. (김상봉)-37쪽

사람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타인과 소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배운 사람들은 불편을 느끼지 않겠지만, 또 혹 불편을 느끼더랄도 이성적으로 극복해낼 수 있지만, 한 사회 전체에서 우리가 이런 것을 어디까지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다른 언어 사용자에 대한 편견을 갖느냐 마느냐 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이 갖는 타자성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 '일상의 바벨탑'이라고 할 법한 이 실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바벨탑이 언어윤리적인 문제를 상징하기 이전에 인간의 삶의 조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김상봉)-73쪽

이런 문제를 소수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표현해보면, 동일성 혹은 보편성에는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만남과 소통에서 동일성이 갖는 지위의 문제이겠는데, 저는 만남과 소통을 위해서라도 동일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일성이 사라져버리면 완전히 남남이 되어서 아무런 접점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만나는 곳에는 언제나 그 만남을 매개하는 동일성의 지평이 - 비록 잠정적인 것이라도 - 전제되어 있기 마련이지요. 문제는 그런 동일성, 보편성에 처음부터 똑같이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해야 하는 (서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경우입니다. 수난과 고통의 차원에서는 그 동일성과 보편성에 깊이, 치열하게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성과 향유의 차원에서 보면 거기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책임감을 느낀다고 하면 좀 우습지만, 아무튼 그에 대해서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지요. 만남을 위해 전제되는 보편의 지평이 오히려 만남을 차단하고 배제하는 상황이니까요. (김상봉-74쪽

제가 오늘 발표에서도 국가기구라는 것이 합법적 수탈기구이자 폭력기구라고 했는데 국가라는 집합적 정체성이 그렇게 되는 까닭은 이러한 타자성의 지평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동체에서는 '우리'에 대한 사유도 불필요하고 한번 '우리'가 아니라고 낙인찍은 사람은 배제하고 폐기해버리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당연히 이 만남의 공동체가 논리적, 존재론적으로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앞에 놓지 못한는 사람은 동질적인 내부조차 인간적인 공동체로 만들 수 없어요. 끊임없이 그 속에서 배제할 타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김상봉)-84쪽

학자는 '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씨알들을 우해 대신 울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고 학자라고 함석헌 선생은 말해요. (김상봉)-101쪽

결국 타인의 고통이 지니는 타자성을 보존하면서도 그 단ㄷ절을 어떻게 무관심이 아닌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저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배우려는 자세, 우선 이 두 가지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김상봉)-106쪽

실은 고통이란 같이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어떤 고통이라도 혼자 겪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번째 사실은 '고통을 같이 겪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겁니다. 감각의 차원에서 고통이 있다는 것은 개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히 '내가 다른 인간과 고통을 같이 겪는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이니까요.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고통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거나 교만한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가 동일한 조건에 놓여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도 각자 자기의 고통을 먼저 느끼죠. 이른바 '동병상련'이란 것도 '나뿐 아니라 저 사람도 겪는 고통이라 그나마 다행'이라는 측면이 큽니다. 일상의 삶에서 사람이 고통을 느끼는 그 자체, 관념화된 고통이 아니라 직접 고통을 느끼는 그 순간에 있어서 고통은 기본적으로 혼자 겪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고통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는 말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타자의 고통 속으로 던진다는 것인데, 이건 수동적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어떤 정신적 공감을 통해 일어나는 겁니다. (김상봉)-108-109쪽

(이어서) 그러니까 같은 고통을 받아도 남남일 수 있고, 내가 직접 고통받지 않아도 타인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고통은 우월하고 어떤 고통은 열등하다는 식의 판단이 분명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동시에 고통들의 평등성, 정도 차이를 뛰어넘는 고통의 초월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두 분 형님들과 선생님의 고통을 비교하면서 어느 것이 우월하고 어떤 사람의 고통은 열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을,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열등한 고통을 겪은 자가 그보다 더 우월한 고통을 겪은 자를 이해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그들과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은 미신입니다. 모든 고통이 모노톤으로 똑같아져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고통을 신화하하는 것이죠. 우리는 분명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차등성과 차이 속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성을 만나고 이해하는 것이지 '내가 너와 똑같이 진흙탕 속에 빠져 있구나'라는 식은 아닌 것이죠. (김상봉)-108-109쪽

제게 씨알이 뭔지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거울입니다. 씨알은 거울이지요. 또 다른 자기라는 으미에서, 나의 존재가 씨알을 통해서 의미를 얻게 되며 나와 마주 보고 있고 뗄 수 없이 결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거울입니다. 거울이라고 하면 나르시스적 거울 표상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 비유가 썩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일단 그렇게 풀어보겠습니다. '또 다른 자기'라는 것은 서로주체성의 맞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씨알을 통해서만 내가 되고 씨알 속에서 비로소 내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일정한 부분에서 씨알이 '나'입니다. 내 존재의 절반이 거기에 비쳐 있다는 의미에서요. (김상봉)-134쪽

저는 씨알이 인간의 존재방식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주체로 살 수도 있고 객체로 살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참된 씨알이나 민중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한낱 군중이나 대중으로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만나멩서 생기는 것 같아요. 타인과의 만남, 역사와의 만남의 방식이 우리를 민중으로 만들기도 하고 이기적인 개별자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만남의 한 당사자가 우리들 각자이기 때문에 저는 민중을 절대로 대상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의 치기로 '왜 변하지 않는가' 탓했던 것인데 지금은 달라요. 그러한 만남의 총체성 속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것이고, 우리들 각자는 그러한 만남을 지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교차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김상봉)-136-137쪽

'바깥'이란, 공간적으로 표현하자면 장벽이 극복된 자유의 공간이겠고, 시간적으로는 희망이 살아 있는 미래라고 할 수 있고, 또 신앙을 가진 사람들 말로는 내세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바깥에 대한 상상력이 있으면 이 세상을 규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근야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내부에 갇힌 사고방식인 것이죠. 내부와 외부의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교양이나, 사상, 종교의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서경식) -139쪽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주체를 형성할 때, 그리고 그러한 주체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지속성과 어떤 외적, 내적 형식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사회적 실체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적 실체는 단순한 합성체가 아니라 주체들의 만남 위에서만 존립하는 공동체입니다. 물론 그 공동체는 언제나 공동주체이고요. 국가는 이런 공동주체성의 꽃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회적 실체가 공동의 주체성을 '실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대다수 구성원들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해 있으니까요. (계속)-146-147쪽

(이어서) 참된 공동체는 오직 모든 구성원들이 대등하게 서로주체가 될 때 비로소 실현됩니다. 누구도 일방적으로 사물화 또는 도구화되지 않고 서로주체가 되는 그런 공동체, 만남을 가리켜 저는 서로주체성이라 부릅니다. 나라 역시 공동체로서 오직 서로주체성의 현실태일 때만 참된 나라일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한갓 합법적 수탈기구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한국 역사에서 보자면,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주체성의 현실태로서의 나라를 가져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나라의 표상이 역사 속에서 충돌해왔는데, 그 하나는 현존하는 국가기구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표면상 지속적이지는 못했으나 끈질기게 이어져온 '씨알의 나라'를 향한 열망입니다. (김상봉) -147쪽

저는 기본적으로 권력이 자동적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그 자체로서 자본가를 대리한 착취기구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일견 심오해보이고 국가 폭력에 질린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일보>가 퍼뜨리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듯이 국가권력 역시 서로주체성의 현실태에 가까워질 수도 있고 폭력에 기반한 홀로주체성의 현실태일 수도 있는 것이죠. 우리가 어떤 나라를 만드느냐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김상봉)-169쪽

필연성의 구속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 필연성을 다 떨쳐버리고 모든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겠다는 것은 홀로주체성의 자유라는 관념을 부추기지요. 그것은 타인을 다시 도구화시키고 사물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홀로주체성이 품어온 해방의 전략이란 것이 그렇게 자연적, 인륜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가 어떤 권력의 주체가 되겠다는 전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소수의 사람들이 해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르크스가 꿈꿨던 것과 같은 보편적인 인간의 해방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단순히 필연성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내가 홀로 나의 자유를 실현하고 내 존재를 완성하겠다는 것, 이를테면 니체가 꿈꿨던 초인이 되는 것은 옳은 기획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길을 가는 한 우리는 내부의 상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결국에는 공멸의 길로 접어들고 말 거예요. (김상봉)-177-178쪽

지금 한국 사회의 대학생들은 잘못 교육받고 있어요. '87년 체제'라는 것은 완전히 학벌 체제에요. 군사독재 체제가 끝나고 온 것이, 절대자본주의 체제이고 하겁ㄹ 체제예요. 지금 한국 사회를 굴리는 구조를 보세요. 학생들이 철저히 입시 체제 안에서 노예화되어 있습니다. 취직을 하기 전까지는 입시와 똑같은 심리적 메커니즘 속에 빠져 있는 거예요. 이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정치적으로 각성되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한 거예요. 언제 각성 되나요? 취직해서 소모품으로 학대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어디 가나 짐승의 삶이다'라는 것을 곧 깨닫게 돼요. 이때 역사라는 참조자료를 보게 되지요. 인간은 경험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과거를 참조하게 됩니다. 그런데 프리모레비의 기억은 그런 기억이라기보다 수난 그 자체에 대한 기억입니다. 가해자들의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증언일 뿐이에요. 그런 기억은 역사 속에서 힘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김상봉)-194쪽

정규직의 조직 안에 포섭된 사람들과 거기서 주변화된 사람들 사이의 모순이야말로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저는 정규직화된, 중심에 포섭된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역사를 상기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효과가 있든 없든, 그것만이 사람들의 양심에 대한 거의 유일한 자극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에 대해 그런 의문이 드는군요.
KTX 여승무원 같은 경운은 주변화되어 있으니까 항거해야만 하는 모순이 눈앞에 보이고 피부에 느껴지지요. 물론 이 사람들이 저항할 땐 선배들이 싸웠던 기억들을 호출하고 있지요.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주변화된 위치는 바뀌지 않아요. 그런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저항을 말할지, 그때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문제라고 봅니다. (서경식) -196쪽

정말로 절망하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가 도덕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철저하게 절망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도덕을 말하는거예요. 진정으로 절망한다는 것은 도덕을 넘어서야 하는 겁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도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도덕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레비의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도덕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계몽주의적인 척도를 가지고 나치에 대해서 절망하거든요. 그건 저에게는 절망이라고 보이지 않아요. 처음부터 도덕이라는 것이 없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게 진짜 절망이에요. (김상봉) -224-225쪽

저는 국가란 국민을 보호하는 기구가 아니라, 원래부터 어떤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수단이고 권력의 차별적 분배 장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권력 장치를 하루이틀 사이에 없앨 수 있는 방안, 전망은 우리에게 없지요. 사회주의 혁명도 국가를 폐지하는 전망을 실현시키지 못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룰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아직 그런 한계 안에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요. ... 중략 ...

저는 궁극적으로 국가라는 폭력 장치를 없애기를 전망하지만, 현재 우리가 자신을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서 생존시켜 가기 위해 국가라는 조직을 개선하는 작업이 우선 긴요하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현재의 혈연 공동체적 민족 국가를 모든 성원들이 동등한 권리와 자기의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로 바꾸어야 하며, 또 성원이면 누구든 차별 없이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경식)-255쪽

가해자는 타자를 알지 못합니다. 타자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수난받은 사람 역시 타자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저항해본 사람만이, 저항의 경험 속에서 자기와 타자를 끊임없이 견주어봅니다. 저항하기 위해서는, 나쁘게 말해 적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항해본 사람만이 역지사지 할 수 있습니다. 저항해본 사람만이 이런 역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필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상봉) -266-267쪽

탈식민주의라는 것이 세계가 식민지배를 겪은 이후의 역사라는 뜻이고 또 그것을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탈식민주의를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역사로 이해해야 하고 또 식민주의적 권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경계하며 그것을 비판하는 저항의 담론, 실천으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서경식)-272쪽

재일조선인 내에서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취학연령이 되면 일본 학생들처럼 통지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에 약간 회의적입니다. 물론 여러 부당한 점이 있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 국미교육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디아스포라적인 거리를 취하게 해줄 수 있다는 이점도 있고, 사회의 교육 제도 전반에 대해서도 반성해볼 수 있는 입지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국기를 게양할 때 '저 일장기는 우리나라의 국기가 아니기 때문에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듣는 것이 재일조선인입니다. (계속) -290쪽

여담이지만, 일본 내 진보적인 인사들 중에 '학생들 사이에 재일조선인도 섞여 있는데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하라고 요구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국민, 그러니까 타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국기게양을 하지 말자는 것이죠. 저는 그런 논리에도 문제가 있다고 봐요. 국민이 꼭 국가에 대해 충성의 예를 표해야 하는 것인지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지, 우리 국민이 아닌 사람들도 있으니까 하지 말자는 식으로 대충 사태를 얼버무리면 안 됩니다. 다수가 하고 있는 일이니 소수도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가 옳지 않은 것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더 근본적으로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서경식)-291쪽

일본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하는 일 중에 제가 불만스러워하는 것 하나도 이 국기, 국가 문제와 관련이 있어요. 이 사람들이 재일조선인이니까 여태까지는 '일본 국민 체육대회'에 참여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 조금씩 참여의 기회가 생겼지요. 그런데 국민의례라는 걸 하잖아요. 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려면 참여한 학생들이 곤란하지요. 그럴 때 조총련계 선생님들이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이렇게 말해요. '우리나라에도 국기와 국가가 있으니 너희가 남의 나라 국가나 국기에도 존경하는 태도를 갖추라'고요. 저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본의 군국주의, 국가주의 때문에 식민지배까지 받았는데, 이제 그걸 넘어설 방향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서경식)-309쪽

결국 인간이 교육받는다는 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 주체성의 정립과 형성을 지향하는 것이지요. 그 내용을 보자면, 원칙적으로 자기가 누구인가를 타율적이지 않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규정해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대적인 공교육이 보편적으로 '교육받을 권리, 평등한 교육의 실현'이라는 좋은 뜻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면 안 되죠. 역사의 중요한 진보니까요. 그런데 그런 공교육의 이념을 국가가 나서서 실행할 때, 그 본의와 다른 위험이나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근대적인 인간이 자신을 주체적 시민으로 자리매김하느냐 아니면 국가에 의해 포획된 국민으로 자리매김하느냐의 문제로 정리될 수 있겠는데, 근대 공교육이 그렇게 긴장관계를 갖는 두 측면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해왔음을 우리가 알고 있죠. (김상봉) -319쪽

모든 시민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의 이념을 위해 폴리스(나라)의 일원으로서 결속한 공적인 인간입니다. 시민이 이런 공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공론장에서의 단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넘어서 공적이고 보편적인 만남의 지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평의 성격입니다. 그것이 자유로운 자기실현과 자기규정을 위한 것으로 개방될 때, 이상적인 의미의 나라가 가능하겠지요. (김상봉)-320쪽

교육은 한글을 배우고 곱셈을 배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공적인 인간으로서 주체가 되는 과정이지요. 그러한 교육의 과정에서 자기규정을 할 절대적 중심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그 중심을 두고 사투를 벌인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의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한 싸움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난 것이 5.18일 것입니다. 민중들은 민중들 나름으로 그 중심을 전유하고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 이를테면 우리가 이루어야 할 '나라'와 그 속에서 정립해야 할 '나'라는 과제를 공적, 사적 교육의 장을 통해서 수행해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배계급은 지배계급대로 그것을 전유하려는 투쟁을 계속해왔지만요. 일제 시대 이래 국가기구들이 민중들을 길들이고 세뇌하기 위해 국가주의적인 교육을 실시해왔지만 이 나라의 씨알들, 민중들 사이에는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정서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죠. 사물화된 중심이 없었던 것이 결국 우리에게 전복의 가능성, 부정의 가능성을 늘 열어주었다는 뜻입니다. (김상봉)-321-322쪽

민주화 이후 실제로 여러 분야에서 이전엔 굉장히 무질서하던 것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질서가 잡힌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육은 예외에요. 여전히 30년 전이나, 6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틀에 갇혀 있고, 교육 내용, 교과과정 특히 도덕 교과에서 국가주의적인 내용 등등은 크게 변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어요. 게다가 단순히 국가주의적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한국 사회 특유의 걸림돌, 즉 '학벌 체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학생들이 정상적인 시민적 자각이나 공적인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치명적으로 방해하지요. '학벌 체제'는 인간을 철저히 사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요. (김상봉)-323쪽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나타나는 자발적인 노예화 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고도성장기로 진입하면서 일본에 나타난 상황과 많이 유사하다는 느낌이죠. 일본 지식인들은 '자발적 노예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제가 사사한 후지타 쇼조 선생님은 '안락전체주의'라고 말했습니다. 안락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런 전체주의가 1970년대에 진행되었다고 하셨어요. 한국에서는 일본의 그런 추세가 훨씬 더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20-30년이 걸렸다면 이 나라에서는 5-10년 사이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듯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한국이 일본보다 더 앞질러 그런 추세를 밟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에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데 과도한 열성을 보이고 있죠. 미국과 국제 자본에 대한 자발적인 노예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고, 그 배후에서 자라는 것이 그런 전지구화 속에서 살아남아 조금이라도 자기 지위를 상승시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안락 전체주의적' 태도입니다.(서경식) -327-328쪽

이른바 전문 교육, 실용 교육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교양을 우습게봅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교양 이야기를 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 중략 ... 이런 식으로 일종의 '반 교양주의'라는 것이 반 지성주의 같은 무력감과 냉소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식, 지성 자체에 대한 경멸이 팽배해졌죠. 그중에서도 제일 질이 나쁜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나 무력감을 변명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서 이런 반지성주의, 반교양주의를 악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계신 분들은 실감하실 수 없겠지만 일본에서는 언론인이나 대학교수와 같은 지성인들이 '나는 지식인입니다. 나는 교양인입니다'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미덕처럼 보이지만, 제가 볼때 이것은 겸손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기 위한 자기회피나 자기보신에 불과합니다. (서경식) -331쪽

선비정신, 선비적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사유나 활동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아주 고전적인 의미의 교양, 그리스-로마적인 시민정치적 교양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양에서의 '정치적'이라는 것과 사대부들에게 있어서의 '정치적'이라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요. 그렇지만 어쨌든 유교적 세계관에서 모든 배운 사람의 수양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편안히 하는 것이지요. 모든 권력, 정치가 언제나 위선적인 것으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선비적 교양이라고 하는 것도 많은 부분 썩은 선비들의 권력욕, 탐욕을 포장해주는 위선적 마스크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선비적 문화, 교양을 규정할 때, '예술과 철학이라는 문화적 소양을 정치적인 형성의 능력과 상통하게 하려는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어떤 고전적인 서양의 시민 교양과도 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상봉) -335쪽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인간을 세 유형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강한 신앙을 지는 사람, 둘째는 공산주의자처럼 정치적이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 이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통해, 자기가 갇힌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음을 믿고 있는 것이지요. 신앙인은 내세나 천국을 상정할테고, 공산주의자는 필영ㄴ적으로 올 역사의 미래를 믿지요. 레비는 자신과 같은 셋째 유형은 증언하기 위해, 기억하고 쓰기 위한 역할이 있었기에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사실은 레비도 자신의 갇힌 세계의 외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살아남아서 밖으로 나가면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 그 사람에게 증언할 거야'라는 상상을 했던 거지요. 그런 상상력이 우리가 이런 갇힌 세계 속에서도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나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고, 저는 그런 걸 교양이라고 부릅니다. (서경식) -345쪽

자유로운 앎이 이처럼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얽매이지 않는 앎이라면, 나쁘게 말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앎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모든 앎이 어떤 외부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삶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실용적이고 도구적인 지식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그 쓸모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맹목적 지식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불합리와 맹목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모든 도구적 지식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삶의 총체성으로부터 정립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앎이란 바로 그런 궁극 목적에 대한 지식을 주는 앎으로서 그 자신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다른 모든 앎을 쓸모 있게 만들어주는 앎이라 하겠습니다. (계속)-346쪽

(이어서) 그런데 만약 이런 앎을 우리가 남에게서 타율적으로 주입받을 뿐이라면 이는 제 삶의 목적을 남이 규정한다는 말과 같으니, 곧 노예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오직 자기 삶의 목적을 스스로 정립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이처럼 자기 삶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자유로이 규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신적 소질이 요구되는데, 그 소질이 바로 교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질을 선생님께서는 앎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 앎이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지식은 아니라는 말씀을 보태고 싶습니다. 교양은 지식이 아니라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지식을 암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교양과는 원칙적으로 상관이 없습니다. 교양이란 무엇을 생각하든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건강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죠. (김상봉)-346-347쪽

우리가 교양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예술을 떠올리는 것도 까닭이 없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술이야말로 본질적으로 고통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입니다. 비극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특히 비극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고통, 또는 인간의 보편적 고통에 대해 절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일종의 감정 교육을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실 예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지도 모르겠어요. 굳이 고상한 예술이 아니라도 세상에 즐거운 일은 많으니까요. 우리가 그것을 통해 타인의 고통, 또는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절실하게 따라체험할 수 있는 한에서 예술은 한갓 오락과 구별됩니다. (김상봉)-352쪽

인간이 가장 철저히 홀로주체성에 함몰되는 순간이 바로 고통을 느낄 때라는 겁니다. 나의 이 고통을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명징하게 느끼는 홀로주체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바로 그 고통만이 우리를 서로주체성으로 인도해주는 다리라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해온 것이지요. 하지만 여전히 이것을 어떻게 개념적 사유 속에서 구체적으로 해명하느냐 하는 것이 제게 남겨진 가장 어려운 아포리아입니다. (김상봉)-355쪽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의식, 곧 긍정적으로 규정된 의식에서 출발하지 못했다는 자기상실의 경험이 오히려 타자에 대한 열린 감수성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는 처음부터 '나는 무엇이다'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들어갈 수 있는 자기의 정체성 혹은 주체서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타자성을 향해 편견 없이 나아가고, 타자의 고통을 향해 장벽 없이 이행해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 '없음'에 대한 고통스런 인식이 선생님의 말들을 간으케 한 가능성의 조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죠. (김상봉)-361쪽

예술이 타자성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예술은 현실이 아니고 꿈꾸는 것이니까요. 예술에는 인식이나 다른 활동이 갖지 못하는 창조성이 들어 있지요. 창조는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타자성의 산출에 존립하는 것이고, 그 타자성으로의 초월이 예술의 자유이기도 하지요. (김상봉) -371쪽

우리가 예술을 가리켜 삶의 총체성의 표현이라 부를 수 있는 까닭도, 그것이 논리적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눈물에 참여함으로써 보편적 고통, 보편적 슬픔으로 나아가게 해주고 그것을 통해 참된 의미의 보편성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참된 의미의 정치의 전제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김상봉)-374쪽

'어떤 공동체,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을 실현하고 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대답을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비판과 저항의 과제에서는 영웅적인 용기를 통한 성과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형성의 과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준비 없이 새로운 역사 단계 앞에 마주 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그 결과 이른바 문민화한 한국 사회에서 좌/우,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우리는 '바람직한 사회'라는 것을 상상할 때 기존의 지배적인 담론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자본주의적인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민족주의적인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국가주의적인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계속) -390쪽

(이어서) 이런 것들을 저는 한 마디로 '동일성에 입각한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동일성이란 사실은 언제나 다수, 강자에 의해 전유되는 동일성입니다. 거짓된 것이죠. 표면적으로 민주화되고 시민적 자유나 자율성이 신장된 것처럼 보이는 한국 사회가, 내면적으로 이런 위선적인 동일성의 신화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모든 약자, 소수자, 타자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는 체제로 급속히 이행하고 있고 또 그 과정에서 대다수가 타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요. (김상봉)-390쪽

진정한 공동체는 누구도 '우리'에서 소외되지 않는 우리 모두의 공동체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들을 모두 대등한 주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래서 과연 주체적이고 인간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고 판단합니다. 결국 그것이 앞으로 내부의 사회적인 통합을 생각할 때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할 때도, 또 분단을 극복한 후의 사회를 생각할 때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겁니다. (김상봉)-390-391쪽

외부에서 식민지를 찾을 수 없는 후발자본주의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내부에 식민지를 만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남한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내부의 노예인 것이고 외국인 노동자들도 내부의 노예인 것이고, 남북 경협이란 것도 분단 극복에 긍정적인 기능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주의적인 사유와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결국 내부 식민지를 만들려는 시도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북한 정부가 그것을 어디까지 용인할까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지만, 어쨌든 남한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결국 그 방향을 추구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중략... 포괄적으로 봐서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내부 식민지 타자에 대해서는 식민주의에서와 동일한 방식의 상상력이 투사되고 적용된다는 선생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는 식으로 끊임없이 다름을 차별의 기제로 재생산해내게 되는 거죠. 학벌, 지역, 이주노동자들과 관련해서는 피부색, 언어, 이런 다양한 타자성들이 내부 식민지 또는 내부적 노예를 재생산하는 기제가 되는 거죠. (김상봉)-395-396쪽

우리가 빨리 버려야 할 것이, 국가나 민족이라는 것을 너무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교육의 탓이 큽니다. 국사나 윤리, 도덕, 국어 등의 교과목을 통해서 세뇌된 경향이 있지요. 그런데 서양과 다른 역사를 살아온 분들한테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이야기를 해봤자 별로 설득력이 없을 거에요. '국가나 민족은 전제가 아니라 과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겠지요. 그 구성원은 때마다 변하는 것이고, 그래서 때마다 그 변화된 조건 속에서 우리가 새로이 형성해야 할 과제로서 시민 공동체 또는 나라가 있는 것이라고요. ...중략... 헌법도, 국기도, 국가도 기본적으로 한 나라의 상징적, 형식적인 표현일 수 있는데 그걸 자명한 전제로 생각하지 않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가령 통일이랄도 되면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나라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일종의 집이고, 그 속에 어떤 사람들이 사느냐에 따라서 집을 고치거나 다시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김상봉)-402-403쪽

동일성이 보편성의 척도로 기능할 때 타자성을 배제하게 됩니다. 제가 말해왔던 서로주체성의 이념이라는 것이 타자성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 또는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제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바로바로 동의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 새로운 공동체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더불어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서로주체성'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때 '척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특히 언어를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표준어에 대한 집착을 비판적으로 봅니다. (김상봉) -409쪽

우리가 '자기'라고 하는 것을 다양한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국가나 민족이라는 것도 그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은 과연 '자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자기를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요즘 흔히 말하듯 주체가 허구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치열한 추구는 긍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무엇인가'는 자명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테면 일본에서 조선ㅇ니 민족학교가 자기를 지킨다고 할 때 '자기'가 무엇인가, 거꾸로 그에 대해 비판하며 '이미 다 끝난 이야기를 가지고 왜 그러냐, 그냥 동화되어서 살아라'라고 할 때의 '자기'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되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란 껍데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지하게 물어야 할 삶의 주체요, 지평이니까요. (김상봉) -415쪽

일본에서 1990년대에 종군위안부 할머니들과 그분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요구할 때 이에 대해 일본에서 리버럴리스트와 극우파가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의란 것은 없다, 정의를 내세우고 인류가 많은 나쁜 일을 저질렀다, 나치도 스탈린도 부시도 그리스도교도 정의를 앞세워 나쁜 일을 해왔다, 정의에 대해서 운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라는 거였습니다. 그때 다카하시 데쓰야 같은 분은 정의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정의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일본이 한 일이 정의롭지 않다는 고발이 있고, 그 고발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다카하시 데쓰야나 서경식이 정의를 대변하고 정의를 강요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고 있는 이 세상에 울면서 정의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응니, 거기에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정의에 대한 추구는 인간다운 욕망,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것을 외면하면 인간답게 못 살지요. (서경식)-435쪽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불문율인 이 땅에서 죄는 언제나 가난한 자의 멍에이고 인권은 그들을 위한 복음이다. 부자는 돈이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은 국가도 법도 지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즈음에 와서는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해진 일이지만 이 나라의 민주화는 가진자들에게 착취의 자유를 보장했을 뿐 가난한 사람의 인권을 지키고 확대한 것은 아니다. 아니 도리어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은 점점 더 열악해져왔으니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김영삼 정부 이래 계속해서 증가해온 구속 노동자의 숫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몇 년 전 이른바 삼성 X 파일이라고 알려진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검찰이 삼성의 노동 탄압을 비판한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을 명예훼손이나 업무방해 따위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시키는 것이 이 나라의 국가기구이니, 삼성의 불법이 얼마나 막심하면 한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 감옥이 필요했으며, 검찰과 법원을 비롯한 국가기구 전체가 얼마나 철저히 매수되었으면 한낱 입을 한번 잘(못) 연 죄로 3년 5개월씩이나 옥살이를 해야 하는가 (김상봉)-447쪽

마음으로 자기를 세우는 것, 마음으로 스스로 서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마음으로 '자기를 세운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더 나아가 자기가 누구여야 하는지를 스스로 규정할 때 가능하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남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나가는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은 바로 그렇게 자기가 누구인지 묻고, 또 자기가 누구여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소크라테스 이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야말로 철학의 첫째가는 금언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철학은 물감이 아니라 개념으로 자기의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다. 그 정신의 자화상을 통해 우리는 자기를 인식하고 또 형성해나간다. 그런즉 내가 참된 철학자라면 나 역시 자기의 언어와 개념을 통해 자기의 삶과 현실을 주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김상봉) -449쪽

내가 우리의 주체성을 해명하는 것이 과제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주체를 해체해야 할 시대에 아직도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칸트주의자의 시대착오적 아집이라 치부했다. 반면 내가 서로주체성의 본질적 계기로서 타자 속에서의 자기상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들뢰즈나 데리다 또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성의 철학을 강의하려 들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언어로 해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종종 철학의 보편성에 반하는 종족숭배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서양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기 문제를 자기 언어로 말한다. 그래도 그것은 그대로 보편적 담론이리 대접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문제를 우리 언어로 말하려 들면 그것은 종족주의로 매도된다. 이런 뿌리 깊은 자기망각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결국 나 자신을 나 스스로 비판하고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김상봉)-452쪽

참된 철학은 경탄이 아니라 경악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직면ㅇ한 고통과 슬픔에 대해 경악하고 절망하면서 '왜?'라고 물을 때, 그 물음이야말로 올바르게 놓인 근거물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철학의 시원은 인간의 고통을 듣는 것이다. 우리가 귀 기울이는 슬픔이 아니라면 철학이 마주한 현실은 없다. 철학은 너의 슬픔 속에서 나의 슬픔을 보고, 끊임없이 이 슬픔과 저 슬픔을 만나게 함으로써 더 보편적인 슬픔의 바다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철학의 보편성이란 그것이 매개하는 슬픔의 보편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란 이처럼 인간의 슬픔을 서로 만나게 하는 정신의 활동을 통해 열리는 보편적 슬픔의 전형적 형상화이다. 그런 까닭에 철학적 정신은 철학자들이 남긴 책을 읽고 이해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타인의 슬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슬픔이 보편적인 형식을 얻을 때 그런 정신이야말로 철학적인 것이다. (김상봉) -454-455쪽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고통은 영혼을 부패시킨다. 고생이 인간을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오직 자기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과 매개될 때, 그때 고통은 우리를 넓고 깊게 한다. 한 사람의 정신이 자기의 아픔 속에서 타인의 아픔을 발견하고 타인의 슬픔 속에서 자기의 슬픔을 느낄 수 있을 때에만, 고통은 인간의 정신을 자기의 비좁은 골방에서 해방시켜 보편적 존재의 큰 바다로 나아가게 한다. (김상봉)-455쪽

우리 모두에게 자기의 고통은 현실적이지만 타인의 고통은 관념적이다. 그런 까닭에 고통이 우리를 자기중심적이 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비상한 노력이 없으면 자기의 고통을 타자화시키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김상봉) -456쪽

현대 사회에서 정치적 공동체에의 귀속성이란 한 인간의 존재를 가장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객관적 조건이다. 그런데 서선생님에게서는 조국과 고국 그리고 모국이 다 다를 뿐만 아니라 거의 적대적으로 대립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선생님과 같은 재일조서인 3세의 경우에는 모어와 모국어도 다르다. 이런 이중 삼중의 자기분열 속에서 "당연히 분열과 상극은 자아의 내면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아의 내적 분열이 일상화되면 삶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런 까닭에 디아스포라는 굳이 철학자가 아니랄도 이미 일상의 삶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는 물음인 것이다. (김상봉)-459쪽

언급할 만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선생님(서경식)은 자기를 관찰자로 이해하는데 반해서 나는 자기를 행위자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대담이 진행됨에 따라 내겐 조금씩 분명해진 차이이다. 여기서 관찰한다는 것은 방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증언하고 미래를 경고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반면에 행위한다는 것은 역사에 참여하고 스스로 형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차이는 순전히 주관적 자기인식의 문제로서 객관적으로 누가 관찰자이고 행위자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대화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자기를 관찰하는 사람의 자리에 놓았고 나는 상대적으로 행위하는 자로서 생각하고 발언했다. (김상봉)-4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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